“카일.”
“….”
“카일?”
“아, 네. 황녀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거야?”
제가 이 타이밍에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아주 즐거운 고민이죠.
황궁을 벗어나면서, 카일은 미소를 지었다.
동쪽 문제라고 해봤자 서쪽 왕국 연합, 그도 아니면 남쪽 섬.
거기서 겪었던 일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만 여겼었다.
한데 이렇게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원래 깡패 중의 깡패는 유목 부족이라고 했던가.
제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잘못 건드렸다가 제대로 얻어터진 모양.
‘제국 10강이 중상이다… 중상이라, 그 정도면 진짜 엄청난 놈이 있다는 건데.’
10강의 수준을 생각해보면 제국 입장에선 충격과 공포다.
물론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상대방은 만전의 준비를 기한 데에 반해, 10강 쪽은 밤에 기습을 당했던 터라 제대로 힘을 내지 못 했다고 한다.
그래도 10강이다. 일반적인 승패 요인은 힘으로 박살내는 존재다.
그 10강이 중상을 당했다면 상대방의 실력이 못 해도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뜻이 된다.
“이번에 다친 10강이 누군지, 황녀님은 알고 계시죠?”
“응. 로저스 클레멘타인이라고. 동쪽이 고향이라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람이야.”
“다른 건요.”
“나이가 서른… 아니지. 작년에 마흔 되었다고 했구나. 응. 로건이랑 비슷하겠다.”
10강들의 나이가 대부분 30대에서 40대임을 생각하면 늙었다곤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정도라면 실력이 최고로 완숙하고 경험까지 많으니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실력은 어떤가요?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라서.”
“으음… 주로 창을 다뤘는데, 거리만 좁히면 된다고 생각한 놈들은 다 박살냈어. 확실히 그 아저씨, 무섭기는 했지. 거리를 좁히려 치면 모든 각을 차단해버렸어.”
“마나 다루는 능력은요?”
“그것도 수준급.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10강 중에서도 못 해도 평균 이상이야.”
참고로 10강에 대한 황녀의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다.
본인이 최고라는 마인드가 있기에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황녀는 부상을 당한 10강, 로저스를 꽤나 고평가하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중상을 당했다.’
이거 더더욱 흥미진진해지는데. 카일은 저도 모르게 또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얌전하던 존 나센 의지였는데, 트리거 한 번 당겨주니 참을 수가 없다.
“부상을 입힌 자에 대한 정보는요.”
“이름밖에 몰라. 소치르 텡겐 카마라그.”
“이름부터 뭔가 있어 보이네요.”
적에 대해 알려진 건 없다. 그리 생각하니 더더욱 흥미가 동한다.
여태까지 10강에 비견된다는 인물들을 만났고 목숨이 오고갈 결투를 벌였다.
그 결과는 서쪽에선 인정 한 번, 그리고 남쪽에서는 실망 한 번.
뭔가 아쉬웠다. 이대로 끝을 내자니 루틴 반 정도 돌리다가 만 느낌이다.
당장 곁에 황녀나 프리실라 단장이 있으나 실전은 불가하다.
혹시라도 싸우다가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퍽 난감하니까.
결국 상대는 제국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정말 괜찮겠는가?”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는 표정의 황태자였다.
제국이 한 방 먹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동쪽의 적대 세력들을 토벌하기 위한 준비를 한단다.
10강도 프리실라 단장을 제외하고서 전부 불러들일 생각이라나.
서쪽도, 남쪽도, 일단 안정화도 되었고 싸울 수 있는 강자도 없다.
그나마 남아있는 마티유 필리베르는 완벽한 친 제국파로 돌아섰다.
그렇기에 이전과는 다르게 전력을 온전히 쏟아 붓는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황제 폐하께 내가 고하기는 했어. 카일, 자네를 궁으로 불러서 한 번 이야기나 해보자고. 하지만 폐하께서 말리셨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이미 자네가 한 일이 많은데 왜 또 굳이 일을 넘겨주느냐는 것이었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카일은 아이고, 하고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보아하니 황제가 미안해서, 혹은 눈치가 보여서 배려를 해준 것 같은데.
존 나센 입장에서 그런 일은 배려를 해주는 게 오히려 상처 받는 일이었다.
강자가 나타났는데 넌 안 와도 괜찮다? 거의 너 약함 수준의 도발이다.
피곤할까, 귀찮아할까 배려했다. 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서운할 정도다.
“황태자 전하. 혹시 필요하다면 저 부르셔도 됩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나?”
“예. 어차피 안 부르시면 저 혼자 갈 생각이거든요.”
“….”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니까 넌 불러주기만 하면 돼.
나는 싸워서 이득이고 너는 황실 체면 세워서 이득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가 아닌가.
카일의 그런 뜻을 알아차린 황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황녀님도 동쪽으로 간다고 했죠?”
“응. 나야 언제가든 상관은 없는데 제국 군단은 준비가 필요해서. 아무리 빨리 준비해도 2주 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왜?”
2주는 너무 늦다. 지금 심정 같아선 그 이동 마법진조차 웃으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바로 동쪽으로 가서, 10강마저 꺾었다는 그 인간 얼굴 좀 보는 거지.
‘아, 이 정도면 형님이랑 누님께도 말을 해야 하나…?’
그저 그런 수준이면 조용히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다.
괜히 불렀다가 3초 컷 내버리고 또 근손실이 오네 마네, 하면 귀찮으니까.
하지만 상대의 수준이 생각 그 이상임이 밝혀졌다.
이런데도 둘을 부르지 않으면 아마 두고두고 서운하다고 칭얼거릴 확률이 높다.
‘특히 레아 누님. 벌로 껴안기 100회 추가할 수도 있어.’
독식하기엔 살짝 많을 것 같다. 빼앗길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빚 한 번 쌓아두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선택일 터.
마침 황태자에게서 확답도 받아두었다. 무슨 결정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은 자신이 허락한 것이니 제국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10강 꺾은 인물이 동쪽에 있다고 하면 날아오겠지, 아마.’
출발 준비가 끝나면 그 때 해서 부르던가 해야겠다.
벌써 부르면 ‘가즈아!’ 하고 동생은 무시한 채 동쪽으로 튀어갈 인물들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된다. 먼저 한 입 먹어보는 건 무조건 자신이어야 한다.
먼저 한 번 싸워보아야 그 다음 사람에게 양보할 수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이건 존 나센 규칙이다. 먼저 찾은 놈이 임자다.
“황녀님. 어차피 황녀님은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누구 말 들을 필요도 없잖아요? 그럴 생각도 없고요. 그렇죠?”
“응. 황태자 전하도 있긴 하지만….”
“그러면 그냥, 다음 주에 바로 가죠. 아직 아카데미 강의들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시간 끌면 저만 손해란 말입니다.”
대놓고 공식 일정을 개무시하자는 카일의 발언.
그에 황녀는 잠깐 두 눈을 깜빡이다가 입술을 뗀다.
“왜 당장이 아니고 다음 주야?”
일정을 당긴 게 문제가 아니라, 왜 당장이 아니냐는 의문.
그에 카일은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답했다.
“황궁에만 가면 서운해 해요. 리토리오 대공가도 한 번 들르고, 교단도 가봐야 해요.”
“아하.”
와중에 황녀는 생각했다.
‘인사를 드리러 가는 거였다면… 내가 첫 번째였네?’
정확히는 당연히 황실이 1등이어야 하니 카일이 그리 선택한 것이지만.
황녀 입장에선 그냥 본인이 가장 먼저 생각나서 그리 했다고 여길 뿐이었다.
*
“…됐다.”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겨우 각인을 완성했다.
카일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유일한 바람을 응축하여 만든 유일한 주술.
처음에는 저번처럼 목걸이에 담아서 선물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뜸을 들이다간 따라잡을 수도 없이 뒤로 쳐지게 생겼다.
그래서, 황녀 저하나 성녀님, 그리고 공녀님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스스스!-
반지가 보랏빛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 카일에게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만 하면 되는데….
‘마, 막상 하자니 너무 부끄럽잖아.’
반지 선물. 원래 이런 건 남자 쪽에서 한다고 했어.
그러면 내가 하는 게 자칫 카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까?
하지만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 것도 안 될 거야.
마차가 오지 않는다면 마차가 다니는 곳까지 달려가서 잡아 타야 해.
주구장창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 마차가 오는 건 아니잖아.
부끄럽고, 또 걱정도 되지만 결국 마음을 먹었다.
다른 분들을 생각하면 망설이는 게 사치였다.
아직 아무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선수를 치는 게 맞아.
처음은 나였잖아? 카일과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그리고… 키, 키스를 처음 한 사람도 나라고 했어!
두근거리는 심장을 껴안은 채로 카일을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내밀기만 하고 도망치고 싶다.
그러나, 참았다. 이왕 줄 거 조금 더 욕심을 내자.
“티샤?”
앞쪽에서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를 다녀온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일찍 왔네요?”
“네. 이야기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저녁 늦게나 올 줄 알았는데.”
어디를 다녀왔다곤 말하지 않지만 충분히 예상이 간다.
황녀 저하와 갔다고 했으니 열에 아홉은 황궁일 터.
묻지 않는 게 예의다. 황실에 대한 모든 건 조심해야 한다.
“저, 카일.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좀 될까요?”
카일이라면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거다.
썸이라는 건 진작 관뒀고, 이제 정식으로 연인이 된 건데.
주말에 다시 한 번 데이트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 때를 이용해서 카일에게 줄 선물도 주려고 했다.
과연 그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카일이라면 기쁘게 받아줄 거야.
“아, 이거 어쩌죠? 토요일에 리토리오 대공가를 방문할 생각이라서요.”
“네? 아… 그, 그러면 어쩔 수 없죠. 그러면 혹시 일요일은….”
“일요일은 교단에 가봐야 하는데.”
황궁, 대공가, 그리고 교단까지.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 한 켠이 아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당연한 일이야. 아무리 세상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마음대로 무시하다 보면 결국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나고, 적들만 만들 뿐이다.
카일은 현명한 남자야.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나도 이해해. 이해하는데… 왠지 모르게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겨우 고생해서 이렇게 주려고 하는 반지도… 다른 분들은….
“그러니까, 내일 어때요.”
“…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높은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던 걸까. 카일이 미소를 짓곤 말을 잇는다.
“내일요. 그러니까… 내일, 데이트 신청하는 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