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이름을 거머쥔 이래, 황실의 역사에서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일 거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이는, 황제가 아닌 황태자였다.
황제는 가벼운 고뿔이 들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뭐가 처음이라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몰라서 묻는 것이냐. 아니면 이 오라비가 속 터져 죽나 안 죽나 시험하는 것이냐.”
“몰라서 묻는 겁니다.”
황녀님. 그거 진짜 대답 들으려고 하는 질문이 아닐 텐데요.
카일이 애써 미소를 지은 채 황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가 비록 가벼운 감기라고는 해도.
어찌 되었든 병상에 누워있는 건데 딸이라는 게 반 억지로 남자를 데리고 왔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 그 남자를 어떤 눈길로 보겠는가.
덕분에 황궁에 찾아온 카일만 난처하게 된 건 덤이고 말이다.
‘이런 사정이 있었으면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렇게 직진만 고수하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혹시 황태자가 이번 일로 자신을 아니꼽게 보면 상당히 피곤할 텐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황태자를 살핀 카일은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자신보다는 제 여동생이 더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 듯 했다.
“궁내성에는 또 무슨 압박을 준 것이냐. 어제 밤에 장관이 울상이 되어선 찾아왔다.”
“압박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내일 손님 하나 데리고 올 테니 들여보내주라고 한 게 전부입니다. 주먹도 안 들었고 몰아붙이지도 않았습니다.”
어휴-.
황태자가 다시 한 번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는다.
카일 또한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황녀가, 제국 10강이 대뜸 그런 말 한 게 압박인데.
황녀는 힘을 안 썼으니 아무 문제도 없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실제로는 그런 말을 넌지시 던지는 것도 압박이다.
아니, 압박 수준을 넘어 그냥 순순히 따르라는 말이 될 것이다.
거기서 어떤 놈이 미쳤다고 ‘아, 좀 기다리시라고요.’ 라고 당당히 말할까.
“….”
갑자기 황태자가 고개를 돌려 카일을 바라본다.
눈빛에서 안쓰럽다는 기색이 절실히 느껴진다.
“자네가 앞으로 고생이 많겠어.”
아마 황태자가 말을 했다면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카일은 그런 황태자에게 똑같이 눈빛으로 이리 답했다.
“이미 그 고생이란 거, 하고 있는 중입니다.”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본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한동안의 일을 일임하셨으니 대신 받으시면 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황태자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에 카일은 그 앞으로 다가가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감사 인사? 갑자기 왜. 무슨 이유로?”
의심이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그렇다는 어조다.
카일에게도, 존 나센에게도 딱히 무언가 해준 게 없는 제국이다.
그런 상황에 그 존 나센의 직계가 고개까지 숙이고 있다니.
‘혹시 다시 한 번 제국과 싸울 마음이 들었다! 뭐 이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
불길하다.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불길하다.
아주 어릴 적이지만 황태자는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제국과 북쪽이 싸우던 시절 제 아비, 제 황제가 얼마나 갈등했는지.
승산이 없다. 없는데, 물러서면 기껏 점령한 지역들 전부가 들고 일어날 거다.
그렇다고 계속 싸우자니 감당이 안 된다. 저들이 전력을 다하면 녹아 없어질 것이다.
딜레마 속에서 젊은 황제는 밤낮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북쪽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쯤 하고 서로 물러서자. 할 만큼 했다.
다행히도 그들은 황제의 말에 따랐고 지금의 존 나센이 되었다.
“제가 북쪽으로 가도록 허락해주신 것에 감사한다는 거랍니다.”
“…너를 보낸 것에… 감사?”
황당하다는 목소리다. 그도 그럴 게, 황녀의 북쪽 행에 허락을 한 건 형식이었을 뿐이니까.
절반. 아니, 거의 전부 황녀의 독단적인 결정 및 실행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궁내성과 특무성의 업무를 위해 이틀 붙잡고 있었던 게 한계였다.
황제가 겨우 허락을 해서 북쪽으로 간 게 아니다, 이 말이다.
“음….”
잠깐 카일을 바라보던 황태자는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을 모를 정도로 저 청년이 순박하다거나 어리석지는 않다.
그런 인물이었다면 서쪽 왕국 연합을 박살내고, 남쪽 독립 영주들을 협박하고.
그 와중에 아카데미에 신체 단련이라는 새로운 유행을 만들지도 않았을 터.
‘일종의 관례. 내지는 황실 면을 세워주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다. 좋은 일이다. 오히려 이쪽이 고맙다고 해야 할 정도다.
‘율리카 녀석이 가서 민폐만 안 끼쳤어도 다행인 판국인데 말이야.’
어쩌면 괜찮은 매제가 될 지도 모르겠다고, 황태자는 생각했다.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몸이 불편하시다 하니 굉장히 염려스럽습니다.”
“가벼운 고뿔이라고 하셨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저게. 아무리 가벼운 병이라도 걱정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이성에 눈이 돌아간 이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보이는 게 없다고 하더니.
황태자가 그러면 안 된다고 타박을 하려는 찰나였다.
“황녀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정말 진지한 어조, 진지한 표정으로 황녀를 나무라는 카일.
그 앞에서 황녀는 두 눈알 깜빡거리더니 얌전히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원래라면 딱히 관심이 없다는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낼 여자가 말이다.
이후로 카일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계속되었다.
버릇이 없다느니, 황제 폐하시자 아버지이기도 한데 그럴 수가 있냐느니.
“솔직히 이런 상황이었으면 알려줬어야죠. 하마터면 황제 폐하께서 편찮으신데 손님 맞이하겠다고 나오실 뻔 했잖습니까! 저를 천하의 개자식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그,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도 그렇게 행동한 게 문제란 겁니다!”
황제가 없다곤 해도 일임을 받은 황태자 앞에서 큰소리 쩌렁쩌렁이다.
원래라면 무례하다고 하여 황태자가 제지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는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뭐지. 묘하게 통쾌한데?’
어떤 잔소리에도 면역이 된 것 마냥 반응이 없던 막내 동생, 율리카.
하필 또 제국 10강인지라 다른 누구도 큰 목소리를 내지 못 했다.
힘의 논리는 생각보다 더 거대하다. 황실에서조차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카일은 그 힘의 논리에서 자유로운 청년이었다.
율리카보다 강하면 강하지 절대 약한 인물이 아니니까.
‘…부황께서 왜 탐을 내시는지 알 것 같군.’
처음에는 단순히 제국과 황실을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존 나센의 직계 한 명에 불과하다고 하나 그 한 명이 벌인 일이 있기에.
잘만 하면 제국이 다시금 거대한 도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막내 딸아이에게 휘둘리지 않는. 그걸 넘어서서 역으로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사윗감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은근히 노력하고 있던 것이었다.
부황께서, 막내 스트레스가 심하셨구나.
*
황태자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황녀의 손님이고, 또 황제가 허락한 손님이니 허투루 맞이할 수는 없는 일.
무엇보다 카일의 가문을 생각하면 명예를 지켜주는 게 이로웠다.
“소식을 듣자하니 아카데미에 새로운 유행을 불러왔다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들으셨군요.”
“들었지. 얼마나 궁금한지 순간적으로 아카데미에 재입학하고 싶더군.”
교육성 장관과 아카데미 학장이 들었다면 경기를 일으킬 말이다.
황녀가 매일 같이 출근 도장 찍는 것도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할 텐데 거기에 황태자가 재입학을 논한다?
‘사표를 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네.’
다행히도 저 말은 농담에 불과하다. 사람 간 떨어지게 만드는 농담.
“좋은 일이지. 모여서 차니 술이니 마시는 것보다 훨씬 좋아.”
“그런 사교 모임을 대신하지는 못 할 겁니다. 황태자 전하. 저는 최소한의 예의가 갖춰진 분들만 뽑거든요.”
“최소한의 예의? 그대에게 무례를 범하는 이들이 있단 말인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손날 한 방에 머리통이 터질 텐데?
“그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 드린 예의는, 그러니까… 본인의 몸에 대한 예의라고 할까요.”
“아아.”
대충 이해를 했는지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리어도 만나봤고 레아도 만나본 그다. 존 나센에 대해선 대강 알고 있다.
변변찮은 노력도, 굳은 의지도 없이 그저 유행을 따라 온 이들을 반길 리가 없다.
“저, 황태자 전하. 외람된 말이나,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카일의 말에 황태자의 눈빛이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는 말썽쟁이 여동생을 둔 오빠였다면, 지금은 제국의 후계자였다.
“본론이라. 그대가 말하는 본론이 과연 무엇일까.”
“대강의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 생각해보니 카일, 자네의 곁에는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도 있었지.”
사이가 제법 가깝다고 들었다. 어쩌면 황녀와 똑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선 딱히 말을 남기거나 끼어들 생각 따위 없었다.
서로가 합의만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관여해봤자 본인만 피곤하니.
“동쪽의 상황. 어떻습니까?”
“하하하. 카일, 자네. 누가 보면 전쟁성의 고위 공무원인 줄 알겠어.”
나름 공무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솔직히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 못 하죠, 황태자 전하.
그렇게나 일했는데 이제 와서 일반인이라고 하면 화납니다.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결정을 할 것 같아서요.”
별일 아니면 그냥 단련장 가서 루틴이나 돌리는 거고.
재미있겠다 싶으면 잠깐 봉 내려놓고 달려가 보는 거다.
이것이 존 나센 식 양자택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