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났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한동안 고요하던 아카데미는 다시금 생기가 돋아나 시끌벅적해진다.
2학기의 시작에서 처음 1학기 때와 달라진 부분이 몇 개 있었다.
일단, 원래라면 거들떠도 안 보던 단련실에 학생들의 발걸음이 많아졌다는 것.
사실 1학기 중간부터 증가하기는 했으니 2학기의 변화라고만은 할 수 없다.
진짜 변화라 하면, 그 단련장을 찾은 이후라 볼 수 있다.
“불합격.”
“어, 어째서!”
“밸런스가 전혀 안 맞아요. 그게 뭡니까. 상체만 키우고 하체 부실이라니.”
“그래서 하체 운동을 하고자 온 건데?!”
“하체의 소중함조차 모르고 상체부터 키운 우매한 선배님. 그렇다면 가서 하체도 같이 하고, 다음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찾은 다음에 오세요. 자, 다음!”
매몰차게 선배 하나를 쳐내는 카일이었다.
나름 끗발 좀 있는 가문의 자제다. 인정하지 못 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 끗발 따위, 눈앞의 남자는 한 손으로 깨부술 수 있었다.
“불만 있으시면 기다리세요. 대화 한 번 나누시죠.”
슬그머니 주먹을 내밀며 ‘대화입니다.’ 라고 말해주는 카일.
그에 남학생은 바로 꼬리를 내리곤 얌전히 돌아갔다.
“안녕? 나는….”
“불합격.”
“으에? 왜?!”
“몸 상태가 그게 뭡니까. 젓가락이에요?”
“초, 초보반도 있다고 들었어! 그래서 온 거야!”
초보반이 있다고 진짜 초보를 받아준다고 여긴 건가.
혀를 찬 카일은 여학생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초보반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단련을 하려던 의지, 최소한의 시도는 있었던 분들을 위한 겁니다. 선배처럼 생각도, 의지도, 노력도 없었으면서 유행 따라서. 사람 따라서 오는 분들은 줘도 안 받으니 포기하시죠.”
“너무해!”
“선배 몸뚱이가 더 너무합니다. 그게 뭡니까? 계단 열 개 오르고 지쳐 쓰러지겠네.”
보면 다 안다. 이 사람이 정말 단련을 하기 위해서 온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를 안고서, 혹은 유행을 따라서 온 것인지.
1학기 말부터 그런 흐름이 보였는데 2학기가 들어서니 확실해졌다.
단련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카데미 사교계의 새 유행이 되었다.
후계자로 지목되어 미래의 리토리오 대공이 확실시 된 엘가부터 시작해서.
비록 평민이긴 하나 벌써부터 전 과목에 두각을 보이는 티샤.
여전히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검술 하나는 최강이라 된 이안.
‘그리고 결정적으로, 폭풍의 눈이 되어버린 내가 있다는 거지.’
쯧, 혀를 찬 카일은 다음 신청자를 앞으로 불렀다.
남학생이 막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카일이 바로 손을 내젓는다.
“합격.”
“어? 저, 정말? 난 아직….”
“자기소개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겁니다.”
대충 훑어보니 일단 노력한 흔적은 확실히 보인다.
다만, 체계적으로 한 건 아니고 중구난방 식으로 한 것 같다.
밸런스가 아슬아슬하다. 더 방치하면 저러다가 큰일 난다.
“내일부터 단련장으로 나오세요. 이미 들어서 알겠지만, 한 번 관두면 영구 제명입니다. 저 졸업하기 전까지는 단련장 근처도 못 오는 거예요.”
그 말에 남학생이 숙지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후로도 단련장에 가입하고 싶다는 이들은 계속 찾아왔다.
모두가 단련에 대한 열망을 품고서 왔다면 참 좋은 일이겠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카일도 알고 그들도 알고 있다.
요즘 들어 세간의 최고 관심인 이들이 전부 단련장에 있다.
그리고 아카데미는 온갖 귀족 가문의 자제 및 영애들이 모이는 공간.
당연히 그 안에서 본인들의 영향력과 인맥을 지니고 싶어 한다.
‘정신없어 죽겠네. 이 짓 계속 하다간 내 루틴도 못 돌리겠어.’
대신 봐주는 사람을 뽑을까 고민도 해봤다. 하지만 믿을 만한 인재가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쪽이 이안인데, 하필 말재주가 없어서 탈락.
“크악!!”
콰앙!!-
…거 좀, 살살 하라니까 말도 진짜 안 들어먹네.
실외 단련장을 지나가던 카일이 혀를 차더니 발걸음을 그곳으로 돌린다.
먼지가 걷힌 곳에는, 나름 뛰어난 검술을 지녔다는 고학년 학생이 엎어져있었다.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기까지 했다.
“이안.”
카일의 부름에 목검을 회수하던 이안이 고개를 돌린다.
흠칫, 하고 몸을 떠는 것이 본인도 잘못한 걸 알긴 하는 모양이다.
“조절 좀 하라고요. 자꾸 그런 식으로 할 거예요?”
“미안하다. 그런데, 이게 적응이 잘 안 돼.”
그럴 만도 하다. 방학 내내 한 번도 적당히 한 적이 없을 테니.
남작 앞에서 적당히? 그러다가 적당히 아작나는 수가 있다.
초장부터 죽을 힘을 다해, 아니 그 이상을 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두 달 보냈으니 아카데미 와서도 순간적으로 그러고 있는 거다.
생존을 위한 행동들이 저도 모르게 각인이 된 상황.
“이안.”
하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조절을 못 하는 인간은 단련할 자격이 없다, 라고.
존 나센 남작이 그리 가르쳤다는 걸 카일이 모를 수가 없다.
“적응하게 해줘요? 말로만 하니까 내 말이 아주 만만하죠?”
나 이제 좀 강해졌을지도? 라고 말하던 이안.
그 꼴을 본 카일은 참지 못 하고 개학 하루 전날에 말 그대로 밟아버렸다.
강해지기는 개뿔. 아직 한참 멀었으니 그런 소리할 시간에 더 단련하라고.
때문에 카일이 이렇게 진지하게 나서면 당연히 움츠러들게 된다.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남작령에 다녀온 후로 더 정확하게 알았다.’
카일이 정말 착한 사람이란 것. 그런데 그 착한 사람이 한 번 화나면 감당이 안 된다는 것.
그러니까 그 전에 최대한 잘 하자고. 이안은 스스로에게 굳은 약속을 했다.
“조심해요. 알겠죠?”
힘 조절 못 하고 사고를 치는 건 레아 누님 하나만으로 족해.
이안이 사고를 치면 이안만 난처할까? 당연히 내 입장도 곤란해져.
덤으로 저 인간을 가르친 우리 가문에도 영향이 가는 거고.
‘바쁘다, 바빠.’
학기 초가 원래 바쁘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훨씬 심하다.
몰려드는 단련장 신청자들은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이안 외에도 더욱 신경을 써야 할 인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커윽! 카, 카일님! 더, 더는 못 하겠습니다!”
그 중 하나는, 본인의 업무를 핑계로 북쪽행에 빠진 레토.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핑계가 아니라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사정이다.
그러나 카일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그를 계속 몰아붙였다.
“레토. 당신과 함께 하던 이안은 벌써 어지간한 기사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이 되었어요. 그리고 엘가님은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미래의 대공 자리에 올랐고요.”
한데 그런 상황에서, 이안의 친구이자 엘가의 충실한 사람인 당신이.
노력을 게을리 하며 계속 뒤로 쳐질 것이냐고 엄하게 말해준다.
“크윽!! 진짜! 그런 건 반칙이란 말입니다!!”
거기서 뒤로 쳐지겠다고 하면 미친 거다.
레토의 성격 상 절대 그러지 못 할 것이다.
아마도 이 악물고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겠지.
‘레토가 단련에 완전히 미쳐야 대공가에도 단련의 소중함을 알릴 수가 있어!’
엘가가 있지만 그녀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녀는 대공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해서 퍼트리기에 살짝 모호하다.
차라리 레토가 그 주체가 되는 게 훨씬 더 접하기 용이하다.
상급자, 주군에 대한 부담감도 없고 강제성도 약해진다.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택하고 노력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나와 관련된 어느 누구도 건강함을 잃지 않게 해주겠다.
카일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부터 천천히, 그러나 공고하게 나아가는 중이었다.
*
“…지금 뭐라고 했어?”
오늘도 아카데미 출근 도장을 찍은 율리카 황녀.
그녀는 카일의 말에 본인이 잘못 들은 거냐는 듯 반문했다.
“황실 방문?”
“네. 황녀님.”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황실 방문은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귀찮은 일이 되기도 한다.
지켜야 할, 숙지해야 할 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카일이 귀찮은 일을 싫어한다는 걸 황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내가 가자고 해도 귀찮다고. 운동해야 한다고 안 간다더니.”
“솔직히 지금도 귀찮아요. 귀찮은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두 달이나 황녀를 보내준 일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비록 실상은 황녀가 고집을 부려 거의 제멋대로 온 것이라고 하지만.
어찌 되었든 명목 상 황제의 허락이 있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카일은 그 부분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했다.
‘내가 여러분들을 신경 쓰고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흡족한 선물은 없어.’
황실뿐만이 아니다. 여유가 되는 대로 리토리오 대공가, 그리고 교단까지.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자신의 속내를 전달할 생각이었다.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지만, 난처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들어놓는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일들.
‘그리고. 엘가에게서 들은 동쪽의 일에 대해 넌지시 떠보기도 해야 하고.’
정말 일이 터졌다면, 그래서 본인을 부를 생각이라면.
아직 시험은 고사하고 일정조차 잡히지 않은 학기 초에 끝냈으면 한다.
그래야 진짜 중요한 시점에 아카데미에 있을 것이 아닌가!
저번 시험도 망했는데 이번 시험까지 망하면 큰일이다.
점수 망신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집에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카일 본인은 신경이 쓰인다.
“어려울 거 없는 부탁이네. 바로 알아볼게. 아니지. 아예 당장 갈래?”
“…황궁 가는 게 황녀님이 아카데미 오는 것마냥 쉬운 게 아니잖아요.”
최소한의 형식이라는 게 있다.
지켜준다면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훌륭한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걸 알기에 존 나센 남작도 황실에 일단 협조하는 게 아닌가.
“알겠어. 그러면 오늘 하루만 기다려. 당장 내일 입궁하게 해줄게.”
“….”
진짜 가끔 가다 드는 생각인데, 황녀가 직진 외에 다른 것 좀 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