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화 > 서쪽나들이
“•••그러니까, 바로 어제 카일의 형과누나되는분들이 아카데미에 왔었 다고요.”
“네, 엘가님.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자리 에 또 티샤와 성녀 가 같이 있었고 말이죠.”
레 토가 고개 를 끄덕 이 며 그 또한 사실 이 라고 전한다.
그에 엘가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살짝 깨물고서는 생각에 빠졌다.
‘그런 중요한 순간에 하필 자리를 비워서 ….’
사람의 마음을 얻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가족과의 접점을 두는 것.
이미 예전부터 많은 이들이 써먹던 방법으로 효과도 확실하다.
가족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그로서 확실한 점수를 쌓는 거다.
카일은 자신에 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꼭 옆에 있었으면 하는 이다.
리토리오의 영애로서,그리고한명의 여자로서,욕심이 날수밖에 없다.
지 니고 있는 능력도 능력이지 만 사람 자체 가 굉 장한 매력을 지 녔다.
정작 본인은 그걸 잘 모르는 모양인데 주변 사람들은 다 느끼고 있다.
주술 외에는 관심도 없어 보이던 티샤가 왜 그리 신경을 쓰고.
신을 모시는 여인이라는 성녀는 왜 자꾸만 곁눈질을 하겠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그저 단순한 말 한 마디, 아무것도 아닌 행동임 에도.
그것들이 상대방에게는 정말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엘가 본인도 거 기 에 부딪쳐 정신을 차리 지 못 하는 피해자 중 하나였고 말 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카일이 티타임을 거부하지 않고 계속와준다는 거.’
부정하지 않겠다.처음에는,굉장히 속보이는만남이었다.
대공가의 정식 후계자가 되 기 위해서 카일이라는 사람을 이용하고자 했 다.
득이 될 게 분명히 보였기에, 그리고 카일과도 이미 이야기가 끝났기에.
서로가 이용하고 또 이용 당해주자고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이지만 카일에게 관심이 갔다.
존 나센의 사람임에도 약간은 다른 모습, 그게 무척 신기했다.
하지 만 무엇보다 엘가의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끌어 당기는 것은.
‘어떻게 나에 대해서 이리 잘 알고 있는 거지?’
그녀가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그걸 정확히 가려서 말하고 또 행동한다 .
배려하고 있음을, 실수를 할까 굉장히 조심하고 있음을 확연하게 느낄수 있었다.
그모습에 저도모르게 미소가 입가에 그려질 정도였다.
카일이 빙의 자라는 점은 꿈에도 모를 테 니 결국 그녀 가 떠 올린 이유는 단 하나.
‘나를 굉장히 신경 써주고 있는 거구나.’
그래. 그래서 대공가의 후계 자가 될 수 있다고, 꼭 해내 라고 응원을 해주 고.
실제로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찾아와서 좋은 말들도 해주는 거 였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데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 리하자면 착각계 이 긴 한데, 이유가 있는 착각이 었다.
“본인은 차갑고 나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허점투성이 인 영애”
엘가의 모습들에 대해 남겨져있는 댓글중 하나.
안타까운 점은 ‘베스트’ 댓글이 아니라 카일은 그걸 못 봤다는 것이다.
그부분까지 알았다면 엘가를 대하는 데에 있어 더 조심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엘가가 알아서 본인과의 거리를 두며 이용만 할 거라고 여기 는 모양이었다.
사실 엘 가도 그러 려고 했는데 , 그게 마음대 로 안 되 는 것이 지 만.
“레토.”
“네,엘가님.
“미안한데,지금카일이 어디 있는지 좀 알아올수있을까요?”
조금 무리 한 요청 이 라는 생 각은 든다.
그럼에도, 그 미 안함을 무릅쓰고 부탁을 한 것인데 .
“카일이라면 지금실외 연무장에서 한창 달리기 중일 겁니다.”
“네? 어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알아요?”
“•••아.”
실수했다는 듯 레토가 말끝을 흐린다.
엘가 옆에 있기 전까지, 또 한바탕 신나게 단련을 당하고 왔다.
정정하겠다. 그냥 카일에게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 왔다.
처음에는 한 대로 끝내더니 점점 맞는 횟수가 늘어났다.
한 대, 한 대 가 얼마나 아픈지 비명조차 낼 수 없을 지 경이 었다.
다행 인 점은, 오늘 그래도 긍정 적 인 평 가가 나왔다는 점 이 다.
“이제야 좀 단련이 란 걸 할 준비 가 된 것 같네요.”
이후 카일이 상쾌한 얼굴로 실외 연무장에서 몸을 푸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있는 장소를 아주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 오는 길에 봤습니다. 카일이 한 번 운동을 하면 꽤 길게 하지 않 습니까? 그래서….”
“그렇긴 하죠. 거르지 않고 매일 운동을 하는 건 알고 있어요.”
이 부분, 엘가가 카일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부분 하나 더.
바로 철저한 자기 관리. 그보다 여심을 자극하는 남자의 행동 양식이 또 있 겠는가.
탄탄한 몸을 볼 때마다 흠칫하는 건 엘가만이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도 마 찬가지일 거다.
‘그렇다면.’
카일과의 티타임이 오늘도 있기는하다.그게 두 시간후여서 그렇지.
해서 원래는 방으로 돌아가서 책을 읽고 각종 업무 등을 보는 연습을 하곤 한다.
!
그러나 오늘 엘가는, 그 일정이란 것을 조금 비틀어보기로 했다.
사실 카일이 매번 찾아오는 게 조금은 미안해지고도 있었고 말이다.
“좀 다녀올게요.”
“에? 어디를….”
“카일이 있다는곳이요.”
“실외 연무장이라면 저도 같이 ….”
“아뇨. 레토, 당신은 쉬 어요. 요즘 뭔가 하는 것 같은데.”
완전히는 아니 어도 레토가 뭔가 하고 있음을 얼추 눈치 챈 엘가였다.
덕분에 움찔한 레토가 침묵하는 사이, 엘가는 카일을 만나러 실외 연무장 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서 뭐라고말하지?대뜸찾아가는건좀이상하지 않을까?’
자신과 카일은 티 샤나 성녀처 럼 순수한 목적으로 만난 게 아니 다.
서로가 서로에게 분명한 ‘목적’ 을 지니고서 만난, 일종의 거래 관계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엘가본인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고 해도.
카일 쪽에서 생 각도 하고 있지 않다면 꽤나 난처한 그림 이 나올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냥 좋은 정치적 파트너 관계로만 여 겼건만.
이후로는 계속해서 내 편이 었으면 하는 그런 사람이 되 었다.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러는 지도,무슨 마음인지도.
널
레토의 말대로, 카일은 실외 연무장을 내 달리고 있는 중이 었다.
“몇 바퀴째야…?”
“내가센 것만못해도 열 바퀴는 될 거 같은데?”
“열 바퀴는무슨.스무 바퀴는훨씬 넘었어. 아까부터 보고 있었거든.”
멀리서 카일을 바라보며 학생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소곤거린다.
실외 연무장 하면 그냥 적당히 넓은 연무장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그런 연무장이 10개 이상은 이곳에 배치되어 있으니 그 면적도 10 배로 늘어난다.
거기에 이런저런 여유 부분까지 생각하면 엄청나게 긴 코스가완성된다.
어지간한 학생들은 두 바퀴 만 뛰 어도 거친 숨을 몰아붙인다.
기사를 꿈꾸는 이들, 체력이 강하다는 이들도 세 바퀴에서 네 바퀴가 한계 다.
천천히 뛴다면 그 이상도 가능하겠지만그래서 비교가 되겠는가.
당장 저기 뛰고 있는 카일은 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달리고 있는데 말 이다.
그렇게 몇 바퀴를 더 뛰었을까.
카일이 마침내 속도를 줄이더니 거친 숨을 몰아쉰다.
“후우….”
평 소라면 적 당하게 스무 바퀴 만 뛰 고 들어 갔을 것이 다.
하지만 바로 어제, 리어와 레아가 한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이 퍼졌다니. 아무리 군것질을 했다고 해도 운동을 쉰 적이 없는데!’
충격적인 말이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운동에 집중이 되 지 않았다. 해서 그 냥 계속달렸다.
내 가 몸이 퍼질 정도로 정말 먹고 놀기 만 했는가!
물론 그러려고 아카데미에 온 것이긴 한데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 했 다!
딱 존 나센에 있을 때의 몸을 유지하면서 즐거운 생활을 보낼 줄 알았는데 !
두 달도 채 되지 않아서 티가 다 날 정도로 몸이 퍼졌다니 !!
“충격인데….”
운동은 싫다. 그 점은 확실하다. 아직도 존 나센에서 하던 일만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또 싫은 것이 있다면, 그건 그 인고의 시간이 헛것이 되 는 것.
그 고생을 다하며 만들어둔 몸이 얼마 가지도 못 해서 사라지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고생을 근육을 숨긴 돼지로 변신하는 데에 쓸 수는 없잖은가.
‘한 게 아까워서라도 해야 해. 어차피 형님이랑누님도 비행 좀 저질렀다니 괜찮아. 먹는 자유를 빼앗긴 건 아니야. 그냥 먹으면 먹은 만큼 더 열심히, 더 많이 하면 되는 거지.’
일단 아이스크림을 굉장히 많이 먹었으니 오늘은좀세게 해야할듯하다
•
먹어서 몸이 퍼졌다면 먹은 만큼 쓰면 된다. 지극히 간단한 논리다.
하여 숨을 몰아쉬 며 바로 다음 루틴을 돌리 려고 하는 순간이 었다.
“마셔요.”
앞으로 쑥 들이밀어지는, 컵에 가득 담긴 냉수 한 잔.
그 와중에 또 어디서 구했는지 얼음까지 둥둥 떠 있다.
“•••엘가님?”
“목 많이 마르지 않아요? 얼른요.”
왜 이 여자가나타난 거지.혹시 또뭐 부탁할 거라도생겼나.
그리 생 각하면서 카일은 일단 그녀가 내 어준 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 다, 엘가님. 잘 마시 겠습니 다.”
제 호의를 거절하는 것에 대해서 서운함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라고 했던 가.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레토가 엘가에 게 초장에 참 많은 상처를 줬다고 들 었다.
‘그냥 고맙다, 한 마디 하고 웃으면서 받아주면 될 것을. 아무튼 레토 녀석 도참.’
본편을 읽지 않고 그냥 무료분만 찍먹한 게 다행일 지도 모르겠다.
괜히 더 읽 었다면 고구마가 쌓여 아예 레토를 잘근잘근 밟아버 렸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갑자기 어쩐 일입니까?오늘티타임 있는날 아니었나요?”
떠올려보면 엘가가 먼저 만나러 온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티타임을 가지는 날이 있는 경우에는 그러했다.
솔직히 대공가의 영애가먼저 찾아오는 게 자존심 문제도 있을 테니.
“음. 그게요. 그러니까, 운동하고 있다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할 이야기 도 있고.”
역시 첫 번째 이유보다는 두 번째 이유가 진짜인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누가 봐도 티가 팍팍 나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세상에 모를 놈이 있다면 그건 이 안 하나 밖에 없을 것이다.
아, 거기에 레토도 추가할수 있을 지도모르겠고 말이다.
“하실 이야기가 있다니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카일이 일부러 먼저 대화의 문을 열어주니 엘가가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다.
그리고 막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카일존 나센 님.
“네, 네. 또오셨습니까.”
처음에는 학장실로 데려가던, 아카데미의 그 시커먼 남자들인 줄 알았다.
몇 번을 조우하니 당연히 그들이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
하지 만 고개 를돌린 카일은곧 자신을부른이 가그들이 아님 을알아차렸 다.
아카데 미 사람이 라고 보기 엔 입고 있는 복장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누구세요?”
라고 말하며 두눈을 껌뻑거리는데, 옆에 서있던 엘가가 “아?” 하고 탄성 을 흘린다.
“그 문장… 슈렐리츠대공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