熲 46화 >신께서 속삭이시길,운동 좀 해라
교단으로 가는 길. 카일은 멍하니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성녀는 아까 전부터 두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카일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저걸 다외우고 있다니.저게 진정 사람이냐.’
거의 10분 전부터 기도문을 외운 것 같은데, 아직도 그러고 있다.
혹시 똑같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외우는 건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 다.
성녀의 입에서 나오는 기도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어도 내용도 전부 달 랐다.
혹시 성녀의 기본 조건이 미친 수준의 암기력은 아닐까 싶다.
저기에서 운동만 조금 더 잘했어도 참 좋을 텐데.
그런 생 각이 드는 건 어쩌 면 당연한 일이 었다.
“카일 형제님.”
덤벨이 라도 들고 와서 운동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다행히도 기도가 끝난 것인지 성녀가 눈을 뜨고서 카일을 부른다.
“아까그분, 리토리오 대공가의 영애 분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아까그분이 엘가님 맞습니다.헌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 까?”
“생 각보다 사이 가 좋아보여서 요. 리토리 오 대 공가랑은 껄끄러운 사이 인 줄알았거든요.”
존 나센의 레아를 자극한 이들 중 하나가 리토리오의 차남이다.
그 과정에서 차남이 부상을 입고 아카데미 까지 휴학하게 되 었다.
일의 전후가 어찌 되 었든 존 나센과 리토리오의 사이는 굉장히 껄끄러운 상태.
라고, 성녀는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 었다.
“사이가 막 좋은 건 아니지 만, 껄끄러운 것도 아닙 니다. 얼마 전에는 제가 존 나센을 대 표해서 리토리오 대공가에 직접 사과문까지 쓰기도 했고요.”
“존 나센 남작가는 잘못이 없다는 결과까지 나왔는데 도 사과를 하셨다고 요?”
“그러는 편이 두 가문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카일의 말에 성녀는 감탄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왜 그러나싶었는데, 성녀의 다음 말이 그 이유였다.
“누군가에 게 사과를 하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죠. 더군다나 사과 를 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먼저 굽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 을 거예요.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 사과 한 마디를 못 해요. 자존심이 막아서, 아니면 굽히는 게 싫어서.”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것도 아닌데요,뭐.극히 사소한 일입니다.”
“네. 사소한 일이죠. 하지만 세상은, 그 사소한 일 하나로 바뀌는 곳이랍니 다.”
그러니까 카일 형제님은, 참으로 좋은 분이세요.
라고 속삭이며 카일의 손을 붙잡고 기도까지 올려주는 성녀였다.
‘•••음.솔직히 사과문 작성하면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싶기도했는데.’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래, 가장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옛 말은 틀리 지 않았다.
널
“카일 형제님?”
“•••아.”
성녀의 손길에 카일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멍하니 창 바깥을 바라보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 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공간에 서는 잠이라도 자며 체력을 아낀다.
그리고 그 아낀 체 력을, 필요한 순간 폭발하듯 끌어 낸다.
라는 게 존 나센의 가르침이었고, 카일도 어느 순간그걸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도, 제 시간에 자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
전투력에 조금이 라도 손실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지 양한다!
바로 그것이 존 나센의 또 다른 의 지 이 자 행동 강령 이 기도 했다.
‘설마 졸았다고 뭐 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혹여나 정말로 그런다면 무릎 꿇고 석고대 죄 라도 해 야 하나 생 각이 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녀에 게만큼은 좋은 모습,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다.
최애캐의 입에서 나오는 칭찬이야말로 근육이 증가하는 것만큼 벅찬 일 이니까.
“많이 피곤하세요? 죄송해요.제가너무 일찍 가자고 해서….”
그러나성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타박이 아닌 사과였다.
카일은그냥 지루해서, 체력을 아끼기 위해 자동으로 절전 모드에 들어간 건데.
그마저도 본인 탓이라고 여기며 미안해하는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냥 잠깐졸은 거에 불과해요. 그러니까 사과하실 필요 는 없습니다.”
“그러면 다행이지 만… 혹시라도 피곤하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아시 겠죠 ?”
“무조건 그러겠습니 다. 그러니 까 더 사과하지 마세요.”
그제 야 입 가에 미 소를 되 찾는 성 녀 였다.
그 미소가 어찌나 예쁜지 , 이 정도면 신께서 ‘내 귀한 성녀가 사과를 하게 만드냐!’ 하고 벼락을 꽂는다고 해도 카일은 인정합니다. 라고 달게 받을 것
이다.
“저,그런데 저는 갑자기 왜 부르신 건지…?”
“아아! 방금 전에도착했어요.”
“도착 교단본부에 말입니까?”
“네! 창바깥을보시면 아까와는 전혀 다른풍경이 보이실 거예요!” 성녀의 말대로, 마차 너머에 들어오는 풍경은 이전과 완전히 달랐다.
새하얀 건물들과 교단의 표식 이 가득한 이 신성한 땅은.
제국에서 신께 바친다는 도시, 교단 자치령으로 인정받은 곳.
도시 하나가 통째 교단으로 형성되 어 있는, 신을 따르는 자들의 거처였다.
마차의 속도가 점차줄어드는가싶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 선다.
바깥에서 부산스러움이 느껴지는가싶더니 이내 문이 열린다.
밝은 빛무리와 함께, 문 너머로 보이는 건 다수의 사제들과 성기사들.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던 성녀가 입을 연다.
“교단본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카일 형제님.”
성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카일은, 탄식을 흘려야만했다.
교단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 단하고, 더 아름다운 곳이 었다.
“•••엄청난곳이네요.”
“그렇죠?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감탄들을 하시더라고요.”
성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카일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제들을 슬 쩍 살폈다.
그나마 그 뒤 에 서 있는 성 기 사들은 노력 이 란 걸 한 흔적 이 엿보이 는데.
저 사제들은 아무리 봐도 몸을 가꾸는 숭고한 일을 잘 하지 않는 듯 했다.
‘이상하네. 고행길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게 교단 사제들 아니었나?’
저 몸으로는 고행 길은 고사하고 계 단도 제 대로 못 오를 것 같다.
차라리 살이 쪄서,몸무게가많이 나가서 그런다면 이해라도하겠다.
하지만 사제들의 몸은 그냥 너무 여리여리했다. 바람불면 날아갈 정도로.
“이쪽이에요, 카일 형제님! 여기요!”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성녀를 따라 걷는다.
처음에는 교황에게 인사라도 하는 줄 알고 긴장했던 카일이다.
하지만 교황이 무슨 동네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무 때나 막 만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교황이 성녀보다 더 위에 있으니 한번에 만나는 게 더 이상했 다.
지금 카일이 향하고 있는 곳은, 추기경이 거처하는 곳.
일개 귀족 가문의 자제가 교단의 주교급 추기경을 만나는 일도 대단한 일 이다.
아마 이 소식을 들었다면 많은 귀족들이 카일을 부러워했을 지도 모른다.
“신께서 그대와 함께 하시 길. 이렇게 만나서 참으로 반갑습니다, 카일 형 제.”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바오로추기경님.”
하지만 정작 카일은 그 주교급 추기 경을 만나고도 담백한 반응이 었다.
어 지 간한 귀 족들조차 연 신 굽신 거 리 며 비 위 를 맞춰 보려 고 노력 하는데.
일개 젊은 귀족 자제가 이런 반응이니 , 추기경도 성녀도 굉장히 놀란 모습 이었다.
허면 카일은 그런 담백한 반응을 어떻게 보일 수 있었을까.
성녀와 추기경, 그리고 교단에게 존 나센의 초연한 모습을 보이려고 한 것 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역시나 가장 큰 이유는, 교단 내부를 잘 몰라서.
지금 만나고 있는 바오로 추기경이 차기 교황으로 유력하다는 사실을 모 르고 있어서 그랬다.
‘역시 존나센의 직계는다르구나.어떤 이 앞에서도당당할수있다니.’
그것도 모르고 바오로 추기경은 내심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성 녀, 힐데 가르트 도미 니 카 데 아가사 세 라핌.
그녀가 갑작스레 손님을 모시고 온다고 할 때 많이 당황했다.
그리고 그 손님이 다름 아닌 존 나센 남작가의 자제라는 걸 알고 대경실색 했다.
교단도 함부로 못 하는 황실, 그곳의 직할령인 아카데미를 때려 부순 자들 이다.
더해서 신보다는 나 자신과 단련한 몸뚱이만 믿는다며 교단의 입성을 거 부한 전적도 있다.
하여 교단의 입 장에서, 존 나센은 지극히 오만하고 또 폭력적 인 존재들이 라 생각할만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보니, 그것들이 오해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는 길에 성녀님께서 좋은 말씀과, 빛나는 기도문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데 이런 영광스러운곳에까지 오게 되나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허허허. 그리 말을 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바오로 추기 경을 보며 .
카일은 사극과 역사물을 틈틈이 챙겨본 자기 자신을 매우 칭찬했다.
그렇지 않고서 야 방금 전의 그런 말은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분위 기도 나쁘지 않겠다, 카일은 슬슬 이곳에 온 목적을 실행키로 했다.
“말씀하시지요, 카일 형제.”
“성녀님께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감명 깊은, 가슴의 울림 이 있었던 말씀이었습니다.하여 이곳 교단본부에 계시는 다른 사제 분들의 말씀도 한 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카일의 말에 바오로 추기경이 ‘호오?’하고탄성을흘린다.
여태까지 존 나센의 어느 누구도 이렇게 교단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
헌데 그 가문의 직계가찾아와서 이리 말해주니 굉장히 기쁜 일이다.
“그러시지요. 카일 형제.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실상은 좋은 말씀 듣기 위한 게 아니라, 사제들의 보다 정확한 몸 상태 파 악을 위해서다.
아까 슬쩍 봤을 때도 충격적이 었다. 운동을 안 해도 너무 안 한 티 가 난다.
보다 더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고 성녀에게 슬쩍 건의를 해보려는 게 카일 의속내였다.
“아아, 그리고 카일 형제.”
네, 추기경 예하. 말씀하시죠:
“혹 시간이 된다면 우리 교단의 한 분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 겠습니까?”
“한분이라니. 정확히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건지….”
라고 카일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잔잔하면서도분명한 힘이 느껴지는 한여인의 목소리 가 그 뒤를 잇는다.
“추기경 예하. 성聖 엘플레다기사단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