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6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흐음...”
제페토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왜요, 할아버지?”
헤나로가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에 귀여움을 떨며 묻는다.
로드리고가 들었으면 ‘지금 너 귀여운 척 하는 거냐? 너는 네가 귀여운 줄 아냐?’하고 핀잔을 주었겠지만 제페토 노인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허허 웃을 뿐이다.
“아니다. 뭔가 희끗 보이는 것이 있어서...뭐 가까이 가보면 알겠지.”
헤나로도 제페토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한다.
정말로 큼지막한 나무에 뭔가가 딱 붙어있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 헤나로는 노인을 재촉해 속도를 올렸다.
말은 고분고분 노인의 바람을 이뤄준다.
나무에 붙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람이었다.
큼지막한 글씨로 뭔가가 쓰여 있다.
하지만 헤나로는 까막눈이라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제페토 노인이 중얼거렸다.
“저런...강도라고 쓰여 있구나.”
헤나로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정말요?! 그럼 저 사람이 강도예요?”
“글쎄다. 그렇게 쓰여 있을 뿐이지 실제로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
둘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사내는 마구 고개를 저으며 자기는 결백하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나 그런 사내의 행동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헤나로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 버린다.
“그보다 할아버지는 글을 알아요? 저는 할아버지도 저랑 같을 줄 알았는데...”
헤나로가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자 제페토 노인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도 글은 모른단다. 다만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알고 있을 뿐이야. 강도라든가 살인마 같은 것들 말이다.”
“아! 확실히 그런 건 읽을 줄 알아야겠어요.”
“그렇지. 여행을 하다보면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나중에 저도 할아버지가 아는 것만 가르쳐 주세요.”
“그래봤자 몇 개 없는 걸...”
“헤헤. 그러니까 배울 의욕이 생기는 거죠. 너무 많으면 힘들고 귀찮으니까. 솔직히 글은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하던가 써달라고 하면 되는데 왜 힘들게 배우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할아버지처럼 필요한 거 몇 개만 아는 게 훨씬 똑똑한 건데...”
차마 헤나로의 의견에 긍정하지 못한 제페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둘은 잠시 말에서 내렸다.
헤나로는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더니 사내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강도? 아저씨, 강도 맞죠?”
사내는 기분이 상했는지 고개를 흔들며 헤나로를 노려봤다.
뭐라고 말했지만 입에 물려있는 손수건으로 제대로 된 소리가 되어 나오진 못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는지 헤나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나! 강도 맞네. 딱 강도네! 눈빛 하며, 웅얼거리는 소리까지 완벽히 강도야. 좋아요! 강도 합격!”
“으음! 으으음!”
사내가 몸을 뒤틀어 대지만 헤나로는 씽긋 웃으며 혀를 쏙 내밀며 놀려줄 뿐이다.
제페토는 그런 헤나로를 말리며 말했다.
“얘야, 그러지 말거라.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그치만 아무리 봐도 강도인걸요? 라몬 그 아저씨랑 눈빛이 똑같아요.”
“허...허허...”
“확인해 볼 거예요?”
“일단은 말부터 할 수 있게 해주자꾸나.”
제페토가 사내의 입을 막고 있는 수건을 풀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사내가 말했다.
“오해입니다. 오해! 제가 강도를 당했어요. 가지고 있던 것을 전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절 이렇게 묶어두고 가버린 겁니다. 어서 절 풀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헤나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페토 노인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노인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젊은이, 사정은 알겠지만 나도 지금 혼자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에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네. 자네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 우리 같은 힘없는 여행객 말고, 보다 힘센 여행객이 오면 다시 부탁해 보게나. 이젠 입도 자유로워졌으니 지금보다 훨씬 수월할 게야.”
사내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표정을 풀고는 다시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저도 충분히 어르신의 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무에 쓰여 있는 강도라는 말은 제가 사람들에게 부탁하는데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것이 걱정입니다. 이번에 어르신도 그것 때문에 절 풀어주는 걸 거부 하신 거나 다름없으니...”
“꼭 그렇지는 않지만...전적으로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
“그럼 부탁드립니다. 나무 위에 쓰인 저 글자를 지워주십시오. 예? 그 정도로 어르신과 손녀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제페토 노인은 고민했다.
그때, 헤나로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지우면 안 돼요! 우리도 저 글 덕분에 이 아저씨를 의심하게 된 거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안전하지 않겠어요?”
“호오! 우리 헤나로는 정말 똑똑하구나!”
“헤헤...제가 좀 똑똑한 편이죠!”
둘이 알콩달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미소 짓고 있을 때,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꼬마 계집애가 정말!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정말로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재수 없으면 나 같은 놈이 지나가면서 노예로 삼아 끌고 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무에 강도라는 글이 쓰여 있으면 사람들은 경계한다.
풀어줄 사람들도 그냥 지나가 버리기 일쑤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만만해 보이는 이것들에게 저걸 지우게 해야겠어!
하지만 어떻게?
그가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가 접근해 왔다.
모두 말을 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용병단이나 어느 영지의 기병대로 짐작되었다.
사내는 마음이 급해져 노인에게 호소했다.
“제발 글을 지워주십시오! 풀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이 누구든 강도라는 글을 보면 절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제발!”
노인은 조금 고민하더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글을 지워주었다.
그제야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지금 다가오는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내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마침내 그들은 육안으로 얼굴도 확인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해 왔다.
기사가 이끄는 기병대였다.
그들은 속도를 늦추고는 나무에 묶여있는 사내와 제페토 노인, 그리고 헤나로를 차례대로 쳐다보았다.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 사내는 왜 묶여 있지?”
그러자 다른 누가 입을 열기 전에 사내가 재빨리 소리쳤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들이 제 돈과 물건을 빼앗고, 이렇게 묶어 두고 떠났습니다. 지금 이 노인장과 손녀가 저를 풀어주려는 참이었습니다.”
기사는 그 말이 사실이냐는 듯 제페토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입니다.”
노인이 생각하기에 이렇게나 병사들이 있으면 자신과 헤나로의 안전이 위험해 질리는 없다고 보았다.
기사는 곁에 있는 병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는 말에서 내려 사내를 풀어주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러나 기사는 사내를 보내주지 않았다.
“가도에 강도가 출현하는 것은 치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네가 만난 강도들에 대해 소상히 보고하라! 우리가 여행하는 중에 혹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은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내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래. 그거 잘 되었군.
그 꼬마 놈들...그리고 날 배신한 피터 새끼! 어디 한 번 혼 좀 나봐라! 크크큭!
“자는 중에 당했던 거라 경황이 없었지만 큰 덩치의 사내 하나에, 애들이 셋이었습니다. 덩치 큰 놈은 좀 모자라 보였는데 피터라고 했습니다. 애들 중에는 다리를 저는 계집애가 하나있었죠. 그년이 다른 꼬마 연놈들에게 비욘느랑 에린이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톡톡히 들었죠. 틀림없습니다. 꼭 좀 그것들을 잡아다가 목을 잘라 주십시오! 나라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놈들이라니...”
그러나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
병사들이 눈에 띄게 동요한다.
그리고 기사도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기사가 손을 들어 올리자마자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사내와 제페토 노인, 그리고 헤나로를 포위해 버렸다.
“지금 네놈이 말한 걸 좀 더 자세히 해 보거라. 혹 거짓을 고했다가는 가만 두지 않겠다!”
“저..저는...”
콜린은 도무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말실수라도 했단 말인가?
뭘 말하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