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3 여행길에서(3) =========================================================================
헤나로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우와아아아~~! 굉장해! 저렇게 큰 건 처음 봐요! 저 건물은 우리 뒷산보다도 높아 보이는 걸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제페토 노인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을 만큼 몸을 흔들어 댄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프레사는 이 근방에선 꽤 큰 도시지. 치안도 좋은 편이고, 상인들도 많이 모인단다.”
“그럼 수도는 저것보다 더 커요?”
“그렇지.”
“저것보다 더 큰걸 사람들이 지었단 말이에요? 두 배? 아니면 세 배?”
“글쎄다.”
“그럼 백 배?!”
헤나로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치켜들어 노인을 올려다본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백배는 아니지. 그래도 사람들은 여럿이 모이면 굉장한 걸 해내곤 하지. 한 눈에 봐도 프레사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단 걸 알 수 있을 거란다.”
“빨리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일단은 저기에 들려 봐요. 예? 그래 주실 거죠? 그렇죠?”
“뭐, 돈이 없으니 저기에서 재주라도 부려서 좀 벌어봐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수도는 무리니까 말이야.”
“신기한 거 많이 해주실 거예요?”
헤나로의 눈이 반짝인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제는 그리 대단한 건 하지 못해.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이런 도시에서는 시시한 걸로는 돈 벌기 힘들 텐데...이것 참 난처하구나.”
노인은 벌써부터 걱정인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헤나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요!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거예요! 저는 알아요!”
세상모르는 소녀의 치기어린 말에 불과했지만 노인은 조금 자신감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운이 나는구나. 그래, 열심히 해서 뭔가 맛있는 거라도 사주마. 이 할애비만 믿어라!”
“헤헤!”
그러나 둘의 이런 각오는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어찌된 일인지 성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람들이 잔뜩 진을 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제페토 노인은 말에서 내려 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젊은이, 왜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겐가?”
사내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려대며 말했다.
“노인장,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병사들이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걸...그저 영주님의 명령이란 말만 되풀이 할 뿐이오. 정말 답답하군. 답답해. 하아...”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헤나로는 울상을 지으며 제페토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럼 우리 못 들어가는 거예요?”
“좀 기다리다보면 성문이 열리겠지.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그렇게 헤나로와 제페토도 진을 치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염없이 목을 길게 빼고 성문을 바라보던 것도 지쳐가던 참이었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성문이 열렸다.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떠오른다.
하지만 짐마차 한 대가 성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문은 곧바로 닫히고 말았다.
몇 몇 사람이 성문 가까이 다가가 항의를 했지만 병사들이 창대를 휘두르며 으름장을 놓자 금세 어깨를 늘어뜨린 채, 자리로 돌아간다.
헤나로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울상을 짓고 제페토 노인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배고파요...”
노인은 난처했다.
그래도 도시 근처에 오기 전에는 숲에서 이것저것 먹을 만한 것을 구해 시장기를 면했지만 여기에선 그럴 만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골마을이었지만 그래도 귀하게 자란 아이인데 괜히 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는 구나.
이걸 어쩐단 말인가?
수중에 돈은 하나도 없고...
제페토는 헤나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심정을 달래 보았다.
그때, 헤나로가 물었다.
“여기에서 재주 부리면 안돼요? 사람들 많잖아요? 예?”
“여기서 말이냐?”
노인은 한차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무료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시선에 들어온다.
왜 그 생각을 못했단 말인가?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들보다 더 쉬운 관객이 어디 있을까?
제페토는 바닥에서 적당한 크기의 돌을 몇 개 주워들었다.
그러자 헤나로는 신이 나서 배가 고프던 것도 잊고, 딱히 노인이 시키지 않았음에도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여기 보세요! 세계 최고의 곡예사! 우리 할아버지가 재주를 부릴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노인이 그날 밤, 마을 광장에서 늘어놓았던 입담을 기억했는지 헤나로는 맹랑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헤나로와 노인에게 충분히 모였을 때, 노인은 저글링을 시작했다.
처음엔 3개였다.
일부러 위태로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며 사람들의 흥을 돋우었다.
도시 안에서 보았다면 별로 관심도 없었을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노인은 발밑에 있는 돌 하나를 차서 하늘 높이 올렸다.
그렇게 저글링은 4개가 되었다.
간간히 휘파람 소리도 들려오며 사람들이 호응한다.
노인은 다시 돌 하나를 차 올렸다.
이제는 다섯 개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 커진다.
노인은 순간 자신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런 환호를 받은 것이 얼마만이란 말인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노인은 다시 돌 하나를 차 올렸다.
여섯 개. 몇 년 전부터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손은 조금도 분주해지지 않는다.
노인은 공중에 떠있는 저글링에 집중했다.
그의 귓가를 스쳐오던 환호 소리가 어느덧 멀어져 갔다.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돌 하나를 차 올렸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제는 일곱 개.
실력에 한창 물이 올랐을 때 말고는 성공해 본적이 없는 경지다.
하늘 높이 돌이 치솟았다가 노인의 손을 타고 방향을 바꾼다.
그렇게 일곱 개의 돌은 바쁘게 그러나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노인이 공연을 마쳤을 때, 사람들은 열심히 박수를 쳐주었다.
헤나로는 자기 치마를 벌려 사람들에게 동전을 받으며 돌아 다녔다.
치마에 수북하게 동전이 쌓여갔다.
노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날은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노인과 헤나로는 간단한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상인에게 동전을 한 닢 주고 배를 채웠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성문이 열렸다.
노인은 도시 안에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다시 재주를 부려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동화 세 개를 벌었을 뿐이다.
게다가 5개 이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기운이 빠져 주저앉은 노인의 어깨를 헤나로가 두드려 주었다.
노인은 헤나로를 한차례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적당히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다음날 수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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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져 가는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작은 한 송이 꽃과 서서히 몸집을 불려 나가는 나무, 잡초와 흙먼지...
마을에서 보던 것들과 다르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낯선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과는 신분도, 살아온 환경도 다릅니다.
이분들이 제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나 불편합니다.
나는 왜 익숙하던 마을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딱히 반복되던 일상을 불평한 기억은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음식을 만드는 걸 돕는 일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시간이 남으면 아가씨와 소꿉놀이를 하는 것도 좋았고, 간혹 주인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것도 좋았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충분히 행복했고, 그러한 일상이 계속해서 이어질 거라고 믿었는데...
시선이 자연스레 다리에 가서 머물고 맙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의 또 다른 다리가 되어버린 목발에도 시선이 머뭅니다.
저는 다시 행복을 손에 쥘 수 있을까요?
제가 바라는 그 일상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수많은 의문들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도련님이 원망스럽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을지, 제대로 식사는 챙겨 먹는지, 돈은 충분히 있는지...
나쁜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겠죠?
이렇듯 걱정을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미 사위는 어두워졌고, 저녁도 먹은 후입니다.
에린 공자님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비욘느 아가씨가 제 어깨를 툭 칩니다.
“왜 그래? 지루해서 그래? 뭔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할까?”
“예?”
“나는 무서운 이야기가 좋던데...혹시 아는 거 있어?”
“무...무서운 이야기요?”
“응! 듀라한 이라던가 리치 같은 그런 거 말이야. 등골이 오싹해 지는 그런 이야기가 아주 좋아.”
저도 순간 등골이 오싹해 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몰라요! 그..그런 이야기 전혀 몰라요!”
“그래? 그럼 내가 해줄게! 이건 진짜 있었던 일인데 우리 오빠가 봤다고 그랬어!”
“진짜 있었던 일이요?!”
듣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너무 신이나 있었습니다.
“성에서 한밤중에 봤다는 거야! 맞다! 낸시 네가 머물렀던 방 앞에 갑옷 하나 서있었잖아? 그거에 대한 이야기야!”
더욱 듣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저도 오고가며 그 갑옷을 봤고 조금 음침한 분위기가 흐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딘지 다른 갑옷보다 더 칙칙해 보였고...
“어느 날 밤이었어.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이었대. 번개도 많이 치고 세상은 완전히 비에 잠겨 버릴 것만 같았지. 그래서...”
저는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열심히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가씨의 말은 제 귓속에 어김없이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삐걱!’하고 소리가 울린 거지!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오빠는 그때 뒤를 돌아보려고 했대! 하지만 그게 안 되는 거야. 손가락 하나 조차 꼼짝할 수 없었대. 다시 ‘삐걱!’하고 소리가 울렸어.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말이야. 뭔가가 다가오고 있었던 거야.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걸 느꼈습니다.
어떻게 해야 아가씨의 이야기를 멈출 수 있는 걸까요?
자꾸만 오가며 보았던 그 갑옷이 머릿속에 떠올라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심지어 붉은 안광을 뿜으며 철컹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