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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29화 (129/200)

00129  속임수, 오해와 욕망과 질투  =========================================================================

아웅다웅하는 둘에게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이가 좋구나.”

“아버지...”

에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로드리고는 이참에 에린과 헤어져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크레이머 남작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서 그와 딱히 말을 나누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로드리고가 걸음을 옮기기 전에 크레이머 남작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의 결투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네.”

크레이머 남작이 직접 머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로드리고는 무시할 수도 없어 떨떠름하게 서서 대꾸했다.

“아니요. 저야말로 남작님의 실력에 탄복했습니다. 그럼 이만...저기 바빠서...”

하지만 이번에도 크레이머 남작은 로드리고를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잠시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

“그러니까...바빠서...”

크레이머 남작은 로드리고의 핑계는 듣지 못했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 스승은 누군가?”

“그러니까 잘 모른다고...”

쾅!

크레이머 남작은 크게 발을 굴렀다.

순간 로드리고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장난 하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가문이 살아남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갈림길에 있는 것일세.”

젠장...그게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란 거야?

하여간 이 사람 정말 마음에 안든 다니까.

로드리고는 불쾌감을 느꼈다.

눈에 힘을 주고 크레이머 남작을 노려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릅니다!”

그리고 나서 로드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른 장소로 가버렸다.

크레이머 남작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에린은 안타까운 듯 허공중에 손을 내밀고 로드리고의 자취를 잡으려는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에린, 저 녀석에게서 뭔가 알아낸 것이 있느냐?”

크레이머 남작이 묻자 에린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로드리고는 제 친구입니다. 그의 개인적인 일을 마음대로 말씀 드릴 수는 없어요. 아무리 그것이 아버지라 하더라도...죄송합니다.”

크레이머 남작은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에린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레이머 남작은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사람이 아무도 없는 비어 있는 방이란 걸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에린은 멀뚱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평소 알던 아버지의 행동과 많이 다르다.

하긴 오늘 로드리고에게 당했던 참패는 아버지를 혼란스럽게 할만하다.

“에린! 잘 듣거라.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우리 영지가 힘들다는 건 알고 있느냐?”

에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재정적으로 위기에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욘느 영애와 맺어져야 한다는 것도요.”

“후우...이 아비의 욕심이 과했던 모양이다. 근방 최고의 기사단을 육성해 앞으로 벌어질 왕권 다툼에서 제대로 수도로 진출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무슨?”

“너는 이런 건 몰라도 된다. 아무튼 네 말대로 영지는 망하게 생겼다. 이대로라면 말이야.”

“그..그런...하지만 브라우닝 자작님이!”

“자작은 말을 바꿨어!”

“...죄...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크레이머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런 규격 외의 실력을 가진 녀석을 이길 수는 없어. 나조차도 진심으로 부딪혀서 져버렸다. 자작이 놈에게 욕심을 내는 것도 당연해. 잘만 하면 대륙 10강에 줄을 댈 수 있으니까. 일인 군단으로 불리는 그들만큼 든든한 아군이 또 어디 있겠느냐? 하지만 머리로는 자작을 이해할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 이번 일에 사활을 전부 걸었다. 그를 속이는 것이 싫어 사실대로 털어놓기까지 했는데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돌아서다니...”

“아버지...”

“뭔가 해야 한다. 영지를 이대로 잃을 수는 없어.”

“어디서 돈을 빌릴 곳이 있나요?”

에린의 물음에 크레이머 남작은 쓰게 웃었다.

“대륙 10강의 연줄은 자작만 사용할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니다.”

“그게 무슨?”

“놈과 친구가 되었다고 했느냐? 그렇다면 그 녀석을 우리 영지로 데려가는 거다. 빚쟁이에게 놈을 보여주고 적당히 놈의 스승에 대해 언급하게 되면 빚쟁이 놈이 채무 기간을 늘려줄 거야. 혹은 더 많은 돈을 빌리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는 스승에 대해 모른다고...”

“그래서? 지금 이대로 영지를 눈뜬 채로 잃겠다는 말이냐?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이 시기만 지나면 충분히 모든 걸 만회할 수 있다. 놈과 친구가 되었다면 네가 놈의 스승을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이건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에린, 영지 없는 이름뿐인 귀족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알고 있느냐? 나는 다 너를 위해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그래도 친구를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로드리고에게 접근하고 싶지는 않아요.”

“바보같은! 이건 로드리고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걸 모르겠느냐?”

“로드리고를 위한 일이요?”

에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브라우닝 자작이 얼마나 여우같은 놈인지 너도 들었지 않느냐? 그렇다면 비욘느라는 그놈의 딸년은 어떻더냐? 응? 네가 직접 며칠 동안 함께 했으니 알 테지.”

“하지만 그게 대체 로드리고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작이 내게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카드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함이다. 한 가족을 만드는 것보다 더 제대로 된 연결 고리는 없지. 내 말의 뜻을 알겠느냐?”

“그러니까 로드리고와 비욘느 영애를 결혼시키려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자작의 피를 이었다면 비욘느라는 계집도 결국 여우일 뿐이다. 그런 년이 네 친구의 아내가 되어도 좋으냐?”

“그..그건...”

에린은 자신의 검을 함부로 다루고도 조금도 사과하려 들지 않았던 비욘느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행해 질 것이 분명하다. 에린! 이건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네가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단 말이다! 알겠느냐?!”

그래도 일말의 거리낌이 에린을 망설이게 했다.

“하지만 저는...”

짜악~!

크레이머 남작이 에린의 뺨을 때렸다.

“정신을 차려라! 더 이상의 어리광은 받아 줄 수 없어! 놈의 스승을 알아 내거라. 그리고 우리 영지로 초청하고. 알겠느냐? 만약...놈이 거절하면...이걸 놈이 마시게 해라. 어딘가 놈이 마시는 음료에 타서 마시게 하면 된다.”

크레이머 남작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에린의 손에 억지로 쥐어 주었다.

에린이 받지 않으려고 하자 크레이머 남작이 말했다.

“단순한 수면제다. 이건 너와 네 친구를 위한 일이야. 알겠느냐? 결코 놈에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다. 명심하거라. 그리고 잘만 하면 사용하지 않고 끝날 수도 있는 거고. 이걸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도 꺼려진다면 네가 네 친구놈을 잘 설득하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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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맘때, 세뇨르 선생은 제이미경에게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제이미경의 멱살을 잡아 봐야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은 확실히 무시무시했다.

“아가씨는 내가 성심성의껏 가르쳐왔단 말이오! 하지만 영 성과가 좋지 않았지. 항상 반항적이고, 레이디의 기품은 기대하기 힘들고...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소! 언젠가는 반드시 모두가 경애하는 훌륭한 레이디의 표상이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그런데...!!!!”

세뇨르 선생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제이미경은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게 아니오. 세뇨르 선생,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듣긴 뭘 들어!!!? 이게 다 당신 때문이란 걸 이제야 알았소! 아가씨께서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는 것도 다 당신 때문이겠지. 그동안 당신도 나처럼 아가씨를 걱정하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변태 늙은이였을 뿐이야!”

“잠깐! 그게 아니라...”

제이미경은 아무래도 억울한지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를 변호하려 했지만 헛수고에 불과했다.

“내가 가르친 것을 뒤에서 비웃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순진한 아가씨를 말괄량이로 만들고 있었어!!!! 내가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단단히 오해한 거요! 이건 자작님에게 보고해서 무거운 벌로 다스리게 할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아니라고!!! 이 노인네야! 이건 아가씨께서 내게 부탁해서 좀 도와드린 것뿐이란 말이야!!!”

“뭐?! 노인네?! 야! 말이 되는 헛소리를 해라! 이 무식한 늙은이가! 검만 휘두르고 있을 것이지 가르치긴 누굴 가르쳐! 내가 있는데 아가씨가 뭐가 아쉬워서 글이나 아는지 의심스러운 네놈에게 가르침을 청한단 말이냐?! 응?!”

“뭐...뭐라고?! 나 글 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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