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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02화 (102/200)

00102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그날 밤, 브라우닝 자작은 남작을 자신의 서재로 불렀다.

“오늘 일은 미안하군. 내 사과하지. 딸아이가 버릇없게 굴었어.”

“아닙니다. 자작님. 이 보드엥 크레이머, 그런 걸로 옹졸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작님께서 제 제안을 충분히 고려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여자라면 강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영애를 탓해서야 안 되지요.”

“하하! 모든 여자들이 강한 남자만 좋아하면 나 같은 약골은 어쩌라는 겐가?”

자작의 농에 남작은 고개를 저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남자의 강함이 검을 들고 호령하는데서만 나오겠습니까? 저는 요즘 들어 그걸 더욱 실감합니다. 내실없는 기반은 결국 아무리 그럴듯해도 흔들릴 뿐이니까요.”

“무슨 일이 있나? 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네. 어디 말해보게.”

남작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사실대로 영지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일이 조금 더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지금 사실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만 이렇게 뭔가를 속이는 것은 남작의 성미에는 도무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일이 생각대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브라우닝 자작의 영애는 아직 어린아일 뿐이다.

성년식을 치르자마자 혼인을 한다고 하더라도 7년이나 남아있어.

결국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두 아이가 밤일을 치르기까지 기다린 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간 힘들게 키운 기사단뿐 아니라 영지까지 산산조각 나고 만다.

빚쟁이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전부 뜯어가겠지.

생각해보면 그렇게 되기 전에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

늦든 빠르든 결국은 말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남작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자작이다.

아직 그가 모르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지금이 그 기회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자작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야 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결국 남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작에게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자신의 가슴을 억누르던 답답함이 한결 가벼워졌다.

자작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남작의 말이 전부 끝날 때까지 화를 내지도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마침내 남작이 말을 마치자 자작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기분이 그다지 좋지는 않군. 자네는 이런 문제가 있었더라면 내 딸아이와의 혼사를 논하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줬어야 했네.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지.”

“맞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남작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점에서 더 이상 자네를 추궁하지 않겠네. 아직 내가 손해 본 일은 없으니 말이야.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처음에 털어 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지. 이 말은 내가 자네를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해도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는군.”

남작의 눈에 희망이 반짝였다.

자작은 그걸 눈치 채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나는 딱히 자네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어. 설령 자네가 많은 부채를 떠안고 있더라도 말이야. 오히려 내가 그 부채를 일부 떠안음으로써 내게는 든든한 기사단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나? 우리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얼마 후에 우리는 결코 남이 아닐 테니까 말일세. 그렇지 않나? 성은 다르지만 한 집안이나 다름없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곤란한 일이 생기시면 저와 제 기사단이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좋군. 자네도 알겠지만 듣자하니 수도가 꽤 시끄러워. 국왕파와 귀족파의 대립이 갈수록 심해지네. 지금이야 어떻게든 폐하께서 중심을 잡고 계시지만 기력이 쇠하고 나시면 그것도 힘들겠지. 국왕파든 귀족파든 모든 사활을 후계구도에 걸겠지. 우리 같은 지방 귀족들이야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시류에 편승해 한몫 잡아야 하지 않겠나? 내게 고마워할 것은 없네. 돈만 있어서도, 군사력만 있어서도 안 돼. 하지만 자네와 내가 함께 한다면 달라지네.”

“감사합니다! 자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작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지만 자작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되었네. 그만하지. 나도 자네에게 전부 털어놓은 것은 아니야. 이렇게 자네의 감사를 받을 입장이 아니지.”

“?”

남작이 의문어린 시선으로 자작을 바라본다.

자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미 보아서 알겠지만 내 딸아이가 좀 왈가닥이네. 성격도 괄괄하고, 지는 것도 싫어하고, 심지어 검술도 배우고 싶어하지. 물론 허락한 적은 없네. 아무튼 그 아이는 일반적인 영애들과는 좀 다르지.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며느리가 아닐지도 몰라. 한 번 결정하게 되면 무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고 말이야. 자네가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아 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네. 이것이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말해주게나.”

“제겐 이미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너무 커보여서 자작님이 말씀하신 문제는 솔직히 작게만 보이는 군요.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리죠. 자작님과 저의 사이를 갈라놓을 것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 그럼 마침 질 좋은 포도주가 한 병 있으니 오늘은 축하하는 의미에서 나누어 마셔야겠어. 일찍 잘 생각은 말게.”

“오늘밤은 기대되는 군요. 제 주량을 보여드리죠.”

“주량을 보여줄 정도로 포도주가 많은 것은 아니야. 자고로 포도주는 제대로 음미해야 하는 법이네.”

“그럼, 자작님의 주도를 배워볼 기회를 주십시오. 하하하!”

그렇게 자작과 남작은 마음을 굳혔다.

다음날 오전 훈련장에는 두 가문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아직 남작과 자작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비욘느와 에린, 그리고 제이미경은 이미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에린 공자는 검을 수련한지 얼마나 되었나?”

제이미경이 묻자 에린은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5살 때부터 아버지의 지도 아래 수련해 왔습니다.”

“허...벌써 10년이군. 크레이머 남작님께서 많이 칭찬하시더군.”

“그렇게 칭찬받을 만한 실력은 아닙니다.”

에린은 아직도 아버지께서 자신을 칭찬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겸양을 떠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겸손한 대답을 했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비욘느의 말이었다.

“맞아. 제이미경. 우리는 진짜 칭찬받을만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잖아? 그렇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린은 비욘느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사내들이 대화 중인데 이렇게 버릇없이 중간에 끼어드는 행위가 실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욘느도 에린의 시선 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것이 대충 짐작 가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제이미경의 목소리가 둘 사이의 긴장감을 끊어놓는다.

“아가씨, 그런 이야기는 지금 굳이 꺼낼 필요 없습니다.”

“흥! 하지만 사실인걸. 있지, 있지! 내일 그 아이와 에린경이 실력을 겨루게 될 거야.”

순간 제이미경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제이미경은 말을 꺼낸 비욘느가 아니라 에린을 향해 묻는다.

“상대방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 레이디께서 소개하는 누군가와 겨루기로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람을 이겨야만 제 실력을 수긍한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실력이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나이또래라면 질 생각은 없습니다.”

호기롭게 대답한 에린이지만 제이미경의 눈빛에선 연민의 감정이 내비칠 뿐이다.

“아가씨, 그 소년은 혼자가 아닐 겁니다.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스승이 분명 있을 텐데, 그렇게 멋대로 정해버리시면...”

“멋대로 정한 건 아니야. 아버지도 허락하셨단 말이야.”

“하지만 그 소년은...”

“내일은 공방에 올 테니까 그때 이야기하면 되지.”

“제 말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됐어. 됐어. 에린 공자는 자신 있다고 하잖아?”

에린 공자는 이죽거리는 비욘느의 말에 욱해서 말했다.

“저는 절대로지지 않습니다.”

“그래. 잘됐네. 그렇지 제이미경?”

“하아...”

제이미경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자작과 남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국 제이미경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린과 검을 섞었다.

크레이머 남작이 자랑한 것처럼 또래 중에서는 상당한 실력이었다.

재능도 있지만 피나는 노력도 해왔으리라.

승리한 것은 볼 것도 없이 제이미경이었지만 에린이 가진 실력을 전부 보여주게끔 이끌어주어 꽤 시간이 걸렸다.

승부 후에 제이미경은 에린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제이미경의 평가에 에린은 조금 얼굴을 붉혔고, 크레이머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비욘느도 빙긋 웃으며 에린을 칭찬했다.

하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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