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어두워지는 밤, 밝아오는 새벽 =========================================================================
에린 크레이머는 꼬마계집애를 보았다.
옷차림으로 보아 잡일을 하는 아이는 아니다.
일단은 예의를 차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다.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살짝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에린 크레이머입니다. 한적한 곳을 물어보니 하인이 가르쳐 주더군요.”
순간 비욘느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너 누구냐?’고 묻는 건 아니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면 괜찮았겠지만 이번에 손님으로 온 크레이머 가문 사람이면 아버지에게 혼일 날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에린은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들어오면 안 되었던 장소인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그럼...”
그가 이대로 자리를 떠나려 하자 비욘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딱히 상관없어요. 정원이야 뭐, 누구나 산책하라고 있는 거니까. 검을 휘두르는 장소는 아니지만...”
비욘느의 말에 에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지요.”
“수련할 장소를 찾으면 훈련장에 가보세요. 기사들은 전부 거기서 하니까.”
“하지만 다른 가문 사람이 마음대로 훈련장에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그런 건 몰라요. 제이미 경에게 말하면 허락해 줄 거예요. 아니면 아버지한테 부탁해도 될 거고요.”
“레이디의 아버지라면?”
“브라우닝 자작님이죠.”
에린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하지만 비욘느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실례는 제가했죠. 공자가 아니라. 아무튼 여기 일은 아버지에겐 따로 언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레이디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비욘느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놈의 레이디란 말 좀 그만해요. 저는 레이디도 아니고, 될 생각도 없으니까. 그보다...그 검...좀 만져 봐도 될까요?”
에린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금 비욘느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비욘느는 손을 내밀었다.
“줘봐요. 닳는 것도 아니고.”
에린은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건넸다.
“날카로우니 조심해야합니다.”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어린애 아니니까.”
“......”
비욘느는 검을 꺼냈다.
‘스르릉’하고 매끄럽게 딸려 올라온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비욘느의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녀는 검을 전부 뽑아냈다.
검집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비욘느는 엉거주춤 자세를 잡아본다.
그리고 허공에 휘둘렀다.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 휘청거리고 말았다.
에린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하지만 비욘느는 이내 중심을 잡았다.
다만 검은 땅바닥에 푹 하고 박혀 들어갔다.
“그..그러면 검날이 상하는데...”
에린은 말을 더듬었다.
그의 반응이 어떻든 비욘느는 분한 듯 말했다.
“좀 더 잘 할 수 있어. 이번에는 말이야.”
그리고 다시 검을 들어 올린다.
하지만 이번엔 에린이 서둘러 검을 빼앗았다.
“레이디에겐 목검이 더 어울리겠습니다. 이건 장난감이 아니에요.”
에린 입장에서는 생각해서 한 말이지만 듣는 비욘느 입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한 번만 더 해본다니까.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야.”
“여자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될 물건이 아닙니다.”
그 말에 비욘느는 무척이나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아버지와 제이미 경에게 듣는 말이다.
세뇨르 선생도 마찬가지다.
그런 걸 잘 알지도 못하는 소년에게 듣자니 분노가 치밀었다.
“뭐야? 나도 됐어! 흥! 자기가 잘하는 줄 아나보지?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아니거든!”
비욘느의 반응에 에린도 분이 올랐다.
예의를 지키지 않는 계집애 앞에서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이 그다지 평온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아버지 앞에서 못난 꼴을 보였다. 다른 실수까지 추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이성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가슴속에선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내 실력이 굉장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검조차 쥐고 휘두를 줄 모르는 이런 계집애한테까지 그런 소리를 듣는다는 건 수긍할 수 없었다.
자연히 그의 응대도 날카롭게 변하고 만다.
“검을 쥘 줄도 모르는 어린애가 할 법한 평가는 아니군요.”
“어린애?!”
비욘느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아니요. 저는 레이디라고 말했습니다만...제대로 들리지 않았던가요?”
에린의 입에 발린 거짓말에 비욘느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똑똑히 들었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내가 제이미 경에게 다 말할 거야! 너 따위는 가만 두지 않을 걸!”
“제이미 경처럼 명성 높은 분과 검을 섞을 수 있다면 제겐 영광입니다.”
“으으!!! 열 받아!!!”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린이 돌아서자 비욘느는 순간적으로 외쳤다.
아직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거기 서!”
하지만 에린은 뒤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정원을 떠났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갔지만 에린의 내심은 무척이나 불편한 상태였다.
이런...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이냐!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저런 꼬마를 상대로 자존심이나 내세워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브라우닝 자작의 영애라면 아마도 나와 정략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대이지 않은가?
그런 아이 기분을 망쳐 놓아서 좋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아버지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
아무리 정략결혼은 두 집안의 수장끼리 결정한다고 하지만 저 꼬마계집애가 허튼 소리라도 하면 분명 큰 영향을 끼칠텐데...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사과해야 할까?
아니...아니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다.
내 실력이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검술 훈련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는 계집애가 비웃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
날 비난할 수 있는 건 아버지밖에 없어.
그분은 나보다 훨씬 더 노력하셨고, 나보다 훨씬 많은 어려움을 딛고 그 자리에 서 계신거야.
그분의 비난은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꼬마 계집은 아니야!
에린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에 비해 비욘느의 기분도 그다지 상큼하진 않았다.
으아아아!!!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지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뭐,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들어줄만 했지만 그래도 제이미 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자기가 엄청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아직 어리니까 그 정도면 굉장하다고 혼자 착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어제 천재 검사를 만났다고!
별것도 아닌 녀석이!!!
그렇게 두 당사자의 기분이 엉망인 상태에서 저녁 만찬이 시작되었다.
비욘느는 괄괄해 보이던 모습은 어디가고 귀여운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인형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브라우닝 자작은 머리를 긁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비욘느가 왜 저러지?
어디 아픈 건가?
분명 오늘은 좀 조신하게 있으라고 미리 말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저건 좀 익숙하지 않군.
식사 예절도 전부 지키고 있고 말이야.
그리고 크레이머 남작의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군.
역시 여자애는 여자애였단 말인가?
저 아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허..허허..허허허!
브라우닝 자작은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두르고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머 남작도 브라우닝 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 의기소침한 성격이 있고, 눈도 자주 내리까는 아들이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비욘느를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드디어 자기 아들다운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하며 역시나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게다가 자작의 영애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에린을 마주보지 않느냔 말이다.
이건 분명 한눈에 반한 그런 상황이겠지.
이거라면 아무리 자작이 탐탁지 않아 해도 어떻게든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
크레이머 남작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브라우닝 자작님, 자작님께서 비욘느 양을 그렇게도 아끼셨던 이유가 있었군요. 오전에 저의 요청에 망설이셨던 걸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하하.”
“아..아니..뭐...하..하하..하하하! 그보단 정말 둘이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군. 이거 참...이래서는 우리가 뭐라 말할 입장이 아니지 않소? 정말 어쩔 수 없네. 혹 나중에 뭔가 문제가 생겨도 서로가 좋아하니까 말이야. 그렇지 않소?”
“하하하! 그렇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서로가 이렇게나 마음에 들어 하니...”
둘다 조금은 핀트가 어긋난 다른 생각중이지만 이 말을 듣고 있는 비욘느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누가 누구를 좋아해?!
하지만 이런 비욘느와는 다르게 에린은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며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결혼은 결혼일 뿐이다.
얻을 수 있는 걸 얻으면 되는 거야.
평생 혼자 내버려 둬도 내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비록 저런 버릇없는 계집애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지만 덕분에 우리 가문의 기사단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