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손수건 =========================================================================
“쿨럭!”
로드리고는 엘가의 대답을 듣고는 기침을 해댔다.
“괜찮아?”
“아...예. 콜록! 콜록! 괜찮아요. 괜찮아.”
“......”
로드리고는 간간히 기침을 해대며 엘가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쳐다보고 있다.
정말 이상한 여자였다.
창녀로 입에 풀칠이나 하는 주제에 뭐가 ‘도울 수 있으니까’냐?
막상 도움을 받는 로드리고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 자체가 상당히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저절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엘가는 생긋 웃었다.
그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여기서 자라고 했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얼굴이 화끈거렸다.
로드리고의 미묘한 변화에 엘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예?”
“왜 그렇게 쳐다봐?”
엘가의 물음에 로드리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뭐가?”
눈을 깜박이며 엘가가 물었다.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다는 말이요.”
“그게 이상해?”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엘가가 갸웃거린다.
“당연히 이상하죠. 절 도와서 누나가 얻는 게 뭔데요? 자기한테 아무 유익이 없는데 누군가를 도울 필요가 없잖아요? 게다가 누나는...”
로드리고가 마지막 막을 흐리자 엘가가 뒷말을 이었다.
“창녀라고?”
“그건 아니고...”
로드리고는 뭔가 적당한 말을 찾으려 했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이런 이야기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내 이야기 듣고 나면 조금은 이해가 갈지도 몰라.”
“......”
“아버지께서 아프셨을 때 말이야. 나는 누군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보면 알겠지만 여긴 빈민가야. 사정이야 다 거기서 거기지. 남을 도울 만큼 그다지 형편이 좋지 못하거든. 그래도 사람이란 정말 묘해서 그런 희망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더라고. 하지만 뭐, 어떻게 해? 마음속에는 그런 소망을 품고 있더라도 현실에선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삯바느질로는 턱도 없었지. 어떻게든 의사라도 불러와서 진료를 보게 하고 싶었어. 좀 더 든든한 것도 드시게 하고 싶었고. 결국 그 다음 수순은 정해져 있는 거야. 남자면 범죄지만 여자라면 몸 파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내가 처음 몸을 팔고 아버지는 약을 드실 수 있게 됐어. 그래도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지만...물론, 내가 몸 파는 건 비밀이었지. 그렇잖아? 아마 그 사실을 아셨으면 아버지는 일주일이 아니라 그날 곧바로 돌아가셨을 걸. 계속 물어보셨지. ‘돈이 어디서 났니?’ 그때, 뭐라고 말해야 좋았을까? 결국 나는 내 소망에 기댈 수밖에 없었어. 어떤 신사분이 도와주셨다고 말이야. 아버지께서 믿었을지는 모르겠어. 그때는 제대로 의식을 차리고 있는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엘가는 피식 웃으며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미소 안에 담긴 씁쓸함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무튼 나는 그때 이후로 몸을 팔았어. 다시 삯바느질을 해보려고 했지만 더 이상 누구도 내게 일을 맡겨주지 않았거든. 그때, 몸을 팔지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잘 모르겠어.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니까. 그치만 후회하지는 않아. 아마...다시 비슷한 상황이 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야.”
“저는...여전히 모르겠어요.”
로드리고는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말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들어 봐. 몸을 팔면서 나는 내 삶에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더 이상 뭔가를 선택할 수 없는 삶이란 너무 비참하잖아? 이대로 창녀로 살다가 그대로 죽는 다는 거 말이야. 항상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면 잘 알지 못하는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거.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쁨도 의미도 없는 거야. 그런 삶을 계속 살 수는 없었어.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이야. 그랬더니...”
“누군가를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거였단 말이에요?”
로드리고의 말에 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거짓말을 했지만 앞으로 누군가는 거짓말 하지 않게 하고 싶었으니까. 물론, 나도 당장 내 목숨이 위태로운 그런 일은 돕지 못해. 아무리 곤란한 사람이 있더라도 말이야. 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지. 나는 그걸로 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거야. 좀 비겁할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내가 선택한 거야.”
로드리고는 여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은 엘가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막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짜증스럽고 거친 두드림이다.
로드리고와 엘가의 시선이 문가로 향한다.
엘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씨발, 누구긴 누구야? 손님이지. 오늘 밤 질펀하게 보내보자구. 네년 밑구녕에 쑤셔 박을 돈 잔뜩 가져 왔으니까 어서 열어.”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가는 한차례 로드리고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저기, 한스지? 오늘은 쉬는 날이라 안 돼.”
로드리고는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가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 되긴 뭘 안 돼!? 씨발년아? 빨리 이 문 안 열어?! 가랑이 벌려서 먹고 사는 년이 별 헛소리를 다 하네.”
“정말 안 돼. 사정이 있으니까.”
“야! 나 빡치게 할래?! 가뜩이나 마누라가 짜증나게 해서 흠씬 두드려주고 온 참이니까 괜히 내 성질 자극하지 마라. 응?! 이거 빨리 안 열면 문짝 도끼로 찍어버린다!? 그때는 돈 한 푼 없이 그냥 박아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하나! 둘!...”
위협적인 목소리에 엘가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을 열었다.
그러자 사내는 엘가를 억지로 밀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너무 세게 밀어붙였는지 엘가는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로드리고는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들어선 사내를 살폈다.
꽤 큰 키에 적당히 근육도 붙어있다.
눈빛은 사나웠다.
조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어 한 성깔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내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로드리고를 보고는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꼬마 새끼는 뭐야?!”
“친척 아이야.”
엘가는 서둘러 로드리고를 가리고 서서 말했다.
“뭐, 상관없나? 암튼 하자. 씨발년, 별것도 아닌 년이 비싸게 굴고 지랄이야?”
한스는 거릴 것 없이 움직여 엘가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엘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렇다고 한스가 그녀의 머리칼을 놔주지는 않았다.
“잠깐! 잠깐만! 오늘은 애가 있으니까 그만 둬.”
“씨발! 너 진짜 기분 잡치게 할래? 야, 내가 시간 내서 와줬더니 앙탈도 한두 번이지! 오늘 좀 맞고 시작할까? 응?!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응?!”
한스는 한손으로 엘가의 머리칼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그녀의 뺨을 한 대 때렸다.
꽤 호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드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스가 엘가의 뺨을 때리려는 그때, 재빨리 로드리고가 말했다.
“그만둬!”
한스는 때리려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로드리고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한쪽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싫은데?”
다시 ‘짜악!’ 하고 소리가 울렸다.
로드리고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엘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한스는 그 모습 그대로 서서 기다리더니 가까이 다가온 로드리고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로드리고는 한걸음 옆으로 움직여 가볍게 그 발길질을 피했다.
허공에 헛발질을 해버린 한스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로드리고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얼른 엘가를 한스의 품에서 빼내었다.
가지런하던 머리는 완전히 산발이 되어 있었다.
한 움큼은 뽑혀 한스의 손아귀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이번엔 로드리고가 엘가와 한스 사이에 섰다.
한스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이 꼬마 새끼?! 감히 피해?! 그럼 이것도 피하나 보자?!”
한스는 품에서 대거를 꺼내 들었다.
엘가가 그걸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만둬! 오늘은 돈 같은 거 받지 않을 테니까..그러니까...”
“닥쳐! 이 씨발년! 네년 따먹는 건 당연한 거야! 이렇게까지 내 기분을 잡쳐놨는데 누가 돈 같은 거 낼까보냐?!”
로드리고는 입맛이 썼다.
라몬이 생각났고, 낸시가 생각났다.
한스의 번들거리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놈의 입가에 자리 잡은 묘한 뒤틀림이 신경 쓰인다.
“어서 도망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엘가가 로드리고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결해요.”
“무슨?”
엘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드리고를 바라보았다.
로드리고는 그녀를 향해 씽긋 웃었다.
“보고만 있어요.”
그리고 그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한스가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대거를 찔렀다.
정확히 로드리고의 목을 노리고 있다.
개자식. 날 죽일 셈이군.
로드리고는 살짝 무릎을 굽히며 그대로 한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찰나의 순간 한스는 목표를 잃고, 로드리고는 정확히 그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한스와 로드리고의 움직임은 멈추었다.
하지만 곧 한스가 자신의 대거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엘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드리고와 한스를 바라보았다.
“제가 말했죠? 저 강하다고. 저도 도울 수 있으니까 나선 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