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얽히고 설키는 실타레 =========================================================================
“그럼 여기로 데려오면 되는 거지?”
헤나로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는 투로 물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그 목소리에는 짜증이 한껏 묻어난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잠깐...잠깐만 있어봐.”
“또 왜 그러는데?”
“너 뭐가 그리 급해?! 잠깐 있어보란 말이야. 생각 좀 정리하고.”
“그치만 아까부터 자꾸 같은 말만 하잖아? 더 이상은 나도 몰라! 이제 가서 낸시 언니 불러 올래! 여기 있기 싫단 말이야!”
헤나로는 잽싸게 다리를 놀려 그 자리를 빠져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생결단이라도 내려는 것처럼 달려드는 로드리고를 뿌리치지 못했다.
“가긴 어딜 가!? 너 정말 이렇게 할래?!”
“오빠야 말로 대체 뭐야?! 그냥 사과하고 싶다고 그랬잖아? 그럼 불러와서 미안하다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이건 마치 뭔가 고백하는 사람 같잖아? 오빠는 낸시 언니 안 좋아 한다며? 오히려 아비슈 좋아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그랬지.”
로드리고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이미 자신이 낸시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인정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싫다.
더구나 자신의 그런 감정을 헤나로에게 들킨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막고 싶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도와준다는 명목하에 얼마나 자신을 놀려댈 것이란 말인가?
그것만은 안 돼!
“흐음...? 훗! 후훗! 오빠 낸시 언니 좋아해? 그런 거야? 응? 어떨까나?”
“...아니. 그럴 리 없잖아? 이...이상한 소리를 다하는 구나. 하..하하..우리...귀...귀여운 헤나로...하...하하...”
하지만 이런 방면으로는 개코나 다름없는 헤나로는 로드리고에게서 흘러나오는 달달한 향기를 놓치지 않았다.
“오빠 날 봐봐. 응? 똑바로 날 보라고!”
“보고 있잖아?!”
“보긴 뭘 봐?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가 있는데?! 나 여기 있다고! 여기!”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 거지. 난 확실히 네 눈이 보이는데? 네 눈 두 개 맞지?”
헤나로의 눈썹이 묘하게 꿈틀거린다.
“으...! 정말!”
헤나로는 억지로 로드리고의 두 뺨을 잡고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오빠의 두 눈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항은 생각보다 심했다.
“하지 마! 이 계집애야! 뭐하는 거야?! 보지 마! 보지 말란 말이야!!!”
로드리고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어대는 통에 결국 헤나로는 그의 두 눈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정도면 심증은 확실하지 않은가?
“보지 말긴 뭘 보지 마! 이미 오빠 행동으로 전부 눈치 챘거든?! 오빠는 낸시 언니를 좋아해! 그렇지? 지금은 고백하려는 거지? 나도 다 알아! 후..후훗!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그..그럴 리 없잖아? 나는 정말 사과하려는 것뿐이야.”
“흥! 그런 말 믿을 줄 알고?!”
“이 계집애가 정말!”
로드리고는 도무지 말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사용해야만 했다.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러 헤나로의 머리에 ‘딱’ 소리가 나게 한방 먹였다.
“으아아아~~! 아파~!”
헤나로는 열심히 머리를 비며대며 통증을 호소했고, 로드리고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왜 때려!?”
곧바로 이어지는 앙칼진 소녀의 음성에도 로드리고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맞대응했다.
여기서는 오빠의 위엄을 확실히 보여야 한다.
혹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어디로 파고들지 모른다.
“네가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니까 그런 거잖아?!”
“이제 나도 몰라! 오빠 마음대로 해!”
헤나로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획 몸을 돌려버린다.
그러나 이번에도 헤나로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로드리고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가지 마! 약속이랑 다르잖아?!”
“됐어! 약속 같은 거 이젠 몰라! 나 때린 거 아빠한테 전부 일러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이 나쁜 계집애!
나는 가기 싫은데도 곡예사 마중 가서 한참 기다려주고, 그 형편없는 자식한테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지금 이렇게 나오겠다는 거야?!
이야~! 이거 정말 콧구멍이 두 개라 숨 쉰다!!!
아우~~~~!
“야! 너 정말 이러기야?! 내가 너한테 오늘 어떻게 해줬는데?!”
“뭐가?!”
얄팍한 계집애!
지금 전부 잊었다는 거냐?!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부들부들 떨며 로드리고 외쳤다.
“나는 너 따라서 동구 밖까지 마중도 가고, 한참 기다리고, 거기다가 얻어맞기까지 했는데, 너는 여기서 조금 기다리는 것도 못해?!”
“하지만 기다려도 너무 기다리잖아?!”
“원래 남자는 준비하려면 좀 시간이 걸려!”
“그건 여자가 그렇지!”
“남자도 마찬가지야!”
“흥! 그리고 얻어맞은 거 가지고 얼마나 들먹이는 거야?! 이제 다 나았잖아?! 그 할아버지가 포션인가 뭔가 발라줘서! 나는 만져보지도 못하게 하고!”
“오호라~! 이 계집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엉?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고불고 하면서 ‘우리 오빠 어떻게~해...흑흑흑’하던 년이?! 나 지금 완전히 배신감 느끼거든?! 결국 내가 내 뺨 못 만져보게 해서 삐진 거지?! 그런 거지?! 내가 네 속은 다 알아!”
“아..아니거든! 그런 생각 조금도 안했는데 그냥 오빠가 그렇게 우기는 거잖아?! 이거 왜이래?! 뺨 만져보고 싶지도 않았어!”
“그런 년이 왜 못 만져본 건 자꾸 들먹이는데?! 너는 그걸로 나한테 앙심을 품은 거야! 다 네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지! 그렇지?! 야! 아버지께서 너 좀 예뻐하신다고 이 세상이 네 중심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거든?!”
“내가 언제 이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그랬어?! 나도 그런 생각은 안 해!!! 그리고 뺨 좀 만져보면 어때서?! 응?! 그게 그렇게 안 될 일이야?!”
“결국 그랬군! 내가 다 알지! 너 내가 딱 맞췄지!?”
“맞추긴 뭘 맞춰?!”
“네가 지금 또 뺨 이야기하잖아~?!”
“그건 오빠가 자꾸 그 이야기 꺼내니까 한거고!”
“그래? 그럼 지금 만져보게 해줘도 안 만지겠네~?!”
“그...그렇지. 조금도 만지고 싶지 않아.”
헤나로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로드리고가 서있는 반대쪽으로 돌려버린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찬바람이 쌩쌩 부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시선만은 곁눈질을 하며 로드리고를 훔쳐본다.
로드리고는 어디까지나 헤나로의 오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을 텐데...그것 참 안됐구나. 나도 내 뺨이 나은 거 정말 신기해서 이렇게 자꾸 만지게 되는데...우리 헤나로도 만지면 정말 좋아할 텐데...”
“돼...됐어...”
헤나로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말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아? 마음껏 만져 봐도 되는데?”
“그..그렇게 오빠가 만져주길 원한다면 조금쯤은 해볼까?”
“그럼 그렇지! 이 계집애!”
“이! 또 나를 놀렸던 거지!?”
“이건 놀린 게 아니라 네 알량한 속을 확실히 밝혀냈다고 하는 거야! 어서 인정해!”
“크윽...아...알았어! 만져보고 싶어! 만지게 해주면 시키는 대로 다 해줄게!”
“좋아. 하지만 열 셀 때까지 만이야.”
“그건 너무 짧잖아?!”
“그럼 볼일 전부 끝나고 다시 열 셀 때까지 만지게 해줄게.”
“그..그럼 좋아. 하지만 일부터 세지 말고 영부터 세는 걸로.”
“아~! 정말! 이 오빠가 특별히 마음 썼다. 그래! 영부터 세는 걸로.”
그렇게 둘은 협상을 봤다.
헤나로는 로드리고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좀 아파?”
“뭐, 조금.”
“어디쯤?”
“그게...마음이...굳이 밝히자면 자존심이랄까?”
“그건 어딨는 건데?”
“마음속 어딘가에 있겠지. 정확한 위치는 나도 몰라.”
“그럼 마음은 어딨는데?”
“그게 아마 가슴팍 어딘가에 있을 거야. 속상하면 거기가 막 아프잖아?”
“그러고 보니 그런 거 같아.”
“야, 그런데 이미 열까지 세는 거 한참 지났는데?”
“쳇...역시 오빠 좀 치사한 거 같아.”
하지만 로드리고는 헤나로가 뭐라 말하든 헤나로의 고사리 손을 자기 뺨에서 억지로 떼어내더니 말했다.
“원래 세상이 좀 치사해. 오빠도 세상에서 살아남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너도 언젠가는 이 오빠에게 조언을 구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그때는 저렴하게 해줄게.”
“난 그냥 아빠한테 부탁할래.”
“흥! 예기치 못한 일은 항상 있게 마련이야.”
“아무튼 지금은 아빠한테 부탁할 거야.”
“뭐, 마음대로 해.”
“그래도 오빠는 낸시 언니 좋아하는 거지?”
갑자기 뜬금없이 다시 주제를 이쪽으로 돌려버리는 헤나로 때문에 로드리고는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니라니까...”
“이제 인정해! 안 놀릴게. 나는 그냥 도와줄 뿐이야. 응?”
로드리고는 이쯤에서 조금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그래서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그..그래. 아마도. 뭐, 낸시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고...그냥 아주 조금...좋아하는 건데...뭐라고 할까...조금 신경 쓰인 달까? 왜, 아침 거르면 점심때까지 소리 나고 그래서 좀 신경 쓰이잖아? 그냥 그 정도! 딱! 그 정도!”
“오빠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 아무튼 그럼 뭐 때문에 사과하는데?”
반짝이는 눈으로 생글거리며 묻는 헤나로의 시선을 피하며 로드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마. 부탁이야.”
로드리고의 몹시도 후회스런 목소리에 헤나로는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뭐, 낸시언니한테 물어봐야지. 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