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어린 시절과의 조우 =========================================================================
며칠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일상에 큰 변화 없이 묵묵히 막대기를 휘두르고, 가끔 헤로나와 소꿉놀이를 했다.
소꿉놀이는 동생과 놀아주기 위해서였지 재미있어서 한 것은 절대 아니다.
낸시와는 좀 어색해져서 멀리서 보면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지칠 때까지 막대기를 휘두르다 보면 하루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갔다.
꽤나 진지한 수련이었지만 남들은 내가 하루 종일 이리 저리 싸돌아다니며 논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던 내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변화가 찾아왔다.
그건 저녁 식사 자리에서였다.
아버지는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이틀 뒤에 에르줌으로 출발할 것이니 준비할 것이 있으면 내일 하루 동안 짐을 챙기라고 하셨다.
왕복하는데 일주일 정도면 되는 노정이다.
체류하는 시간까지 친다면 며칠 더 늘어나겠지만 그렇다고 그리 대단한 여행길은 아니다.
뭣보다 회귀 전엔 내가 주도해서 자주 다녔던 여행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버지께서 하던 일을 내가 일평생 이어서 했으니까.
물론, 에르줌만 다녔던 것은 아니다.
곡물 가격에 따라 좀 더 먼 도시를 찾아가면 그만큼 많이 벌 수 있었다.
그 금액이 그리 크지 않으면 그냥 에르줌이지만 꽤 짭짤하게 건질 수 있으면 한 달 이상의 노정도 감수하며 길을 오갔다.
항상 다니던 에르줌에서 용병왕 카메론이 기연을 얻었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50대쯤이었나?
그가 기연을 얻기 전에도 카메론은 이미 유명인사였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용병이 그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다면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가능하겠지만 용병 일이란 게 그렇게 자기 좋을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전쟁, 분쟁, 몬스터 토벌 등 모든 일에는 시작과 함께 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일거리도 끝이 나 버리면 결국 다른 일거리를 찾아 소문을 쫓아 나라와 나라 사이를 오가야만 하는 직업이 용병이지 않던가?
하지만 카메론은 정처 없이 떠돌면서도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대륙 10강과 비교하면 그 명성은 보잘 것 없었다.
감히 비교한다는 것 자체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으리라.
그런 카메론을 10년 만에 당당히 대륙 10강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기연.
나는 이틀 후면 그것을 찾으러 간다.
어쩌면 그 소문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혹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내 재능으로는 기연의 한 자락도 움켜쥘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처럼 가진 것에 안주하고, 눈앞의 기회를 날려버릴 수는 없다.
나는 한걸음, 그리고 다시 한걸음 있는 힘껏 손을 뻗어 비욘느를 차지하고 말테니까!
내가 아니면 안된다.
조셉은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으니까.
다른 여자에 빠져 평생을 비욘느 혼자 외로움 속에 늙어가게 하지 않았던가?
이번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헌신할 것이다.
혹 카메론이 얻은 기연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해도 그 다음 기연을 찾으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일평생 세 번의 기회가 있다면 나에게는 수십, 수백 번의 기회가 있는 셈이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대충 짐을 쌌다.
부족한 것은 내일 다시 보충하기로 했다.
옷과 속옷, 모아두었던 돈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침대에 앉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헤로나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오빠, 뭐해?”
“대충 짐 싸놓고 쉬고 있지 뭐.”
“하지만 내일 출발하는 것도 아닌데 벌써?”
“아무려면 어때?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미리 미리 해두는 거지.”
“흐음...언니한테 작별인사는 할거야?”
“무슨 인사?”
“작별 인사말이야.”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슨 작별인사야? 며칠 갔다가 다시 오는 건데.”
“그래도 그런 거 해주면 여자는 좋아한다고.”
“됐거든. 전에 짐 한 번 들어줬으면 됐지.”
“하지만 언니 좋아하잖아?”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헤로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낮춰 헤로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헤로나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헤로나, 이참에 제대로 말해둘게. 내가 좋아하는 건 낸시가 아니야.”
꽤나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스스로도 어린애답지 않은 무게가 느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럼? 누가 있는데?”
헤로나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
나는 잠시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헤로나의 오해로 휘둘리기도 싫어 말하기로 결심했다.
“잘 들어. 내가 좋아하는 건....비욘느...비욘느야.”
“그게 누군데?”
“비욘느 브라우닝.”
나는 그녀의 풀네임을 말했다.
“브라우닝? 그건 브라우닝 영지의 사람을 말하는 거야?”
헤로나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다시 되묻는다.
브라우닝가.
우리가 사는 영지와는 이웃하고 있다.
작위는 자작.
나름 이 낙후 지역에서는 이름을 날리고 있는 가문이다.
그래봤자 내전이 일어나면서 그 전화에 휩쓸려 완전히 개털이 되어 버리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내가 쳐다보기에는 까마득히 높은 나무임에는 틀림없다.
“그래. 비욘느는 브라우닝 자작가의 영애야.”
“세상에!? 말도 안 돼! 오빠, 실물을 보긴 했어?”
“......”
실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첫눈에 반하고 말았는데...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우수에 젓은 눈동자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녀를 본 이후로 내 심장은 한시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회귀 후에는 본적이 없다.
혹 가출이라도 했더라면 어떻게 기회가 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근 한 달간 집에서 막대기만 휘둘러 댔으니 그런 기회는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린 셈이다.
그러니 여기선 봤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적 없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헤로나는 내 주저함을 이미 대답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본적도 없으면서 좋아하긴 뭘 좋아해?! 오빠가 기사를 동경하는 건 알겠지만 본적도 없는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착각하면서 일일이 옛날이야기를 따라할 필요는 없어.”
“봤어! 봤다고! 그 누구보다도 더 예쁘다고. 아주 우아하고 우수에 젖은 눈빛하며...절대 잊지 못해.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그건 그녀라고!”
“...정말로 봤어? 대체 언제?”
여기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70년을 살고 다시 회귀했다는 말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분명 부모님을 소리쳐 부르고 나는 다시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고 말하기까지 볼기짝을 얻어맞아야만 할 것이다.
“전에...전에 아버지를 따라 도시에 갔을 때, 멀리서 봤어.”
“...몇 살인데?”
“나보다 3살 어리니까 지금은 9살.”
“9살이 우아하고 우수에 젖은 눈빛이라고?”
헤로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건...그런 건 됐잖아! 이젠 나가. 아무튼 나는 낸시 따위 좋아하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헤로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그럼 좋아. 하지만 오빠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는 더 이상 낸시 언니한테 오빠 편드는 일 따위 하지 않을 거야. 오빠 없는 동안에도 토미가 낸시 언니한테 치근덕거려도 모른 척 할 거라고. 그래도 좋아?”
“...나는 신경 안 써.”
“흥! 이제 나도 모르겠어. 알았어. 잘 자!”
홀가분하면서도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뭐냐?! 이 기분은...
젠장할!
그래.
지금은 오직 비욘느만 생각하자.
그 입술.
그 웃음소리.
그 머릿결.
아름다운 목소리.
나는 아직도 기억하는 비욘느의 얼굴을 다시 상기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꽤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고 자꾸만 낸시의 얼굴이 예기치 못하게 떠올랐지만 나는 비욘느를 지켜줘야만 한다.
조셉 녀석 따위에게 맡겨 놓을 수는 없으니까.
낸시가 누구와 붙어 먹든 그런 것은 더 이상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일단은...일단은 기연부터 얻자.
얼마 남지 않았어.
다음 날 나는 일찍 일어나 필요한 것들을 마저 준비했다.
직접 상행을 이끌었던 경험도 있는 나에게 나 혼자의 여행 준비를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꼼꼼히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로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도 굳이 소꿉놀이를 해주러 찾아 가진 않았다.
어제 일이 자꾸만 생각나 불편했다.
며칠 간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조금 흥분도 되고, 조금은 우울해 지기도 해서 한 바퀴 집 주변을 빙 도는데 모퉁이에서 낸시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려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낸시를 보면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그러나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낸시가 내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내일은 도시로 떠나시네요.”
역시나 조금 퉁명스런 목소리다.
무시하기도 뭣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며칠뿐이니까.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지.”
“...잘 다녀오세요. 어디 다치지 말고.”
“내가 알아서 해!”
나는 그렇게 빽 소리를 치고는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뭐지?
대체 뭘까?!
왜 이리 기분이 싱숭생숭할까?
아!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