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어린 시절과의 조우 =========================================================================
“왜 들어오는데?!”
내가 짜증스럽게 묻자 헤로나는 어깨를 으쓱 거리며 말했다.
“그야 오빠가 고민 있는 것 같으니까. 동생인 내가 걱정 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냥 좀 쉬면 괜찮아져. 가서 인형놀이나 해.”
“흐음...그럼 여기서 해야지.”
그렇게 말하고 헤로나는 내 침대 곁에 주저앉았다.
“안 돼! 내 방에서 나가. 어서!”
“왜?”
헤로나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묻는다.
“나 기분 좋지 않다고 말했잖아! 쪼끄만 게 자꾸 짜증나게 할래?! 응?!”
“우웅...우리 오빠 기분을 누가 이렇게나 상하게 만들었을까나?”
헤로나는 자기 이마에 검지 손가락 하나를 대면서 고민하는 척 한다.
더 이상 왈가왈부 하는 것도 지쳐 나는 헤로나가 앉은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나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함을 느꼈다.
자꾸만 토미와 같이 걸어가던 낸시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젠장...
젠장할...
“젠장!!! 망할 계집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치고 말았다.
그러자 헤로나가 움찔하고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침대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누구 말하는 거야? 혹시 나?”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엔 검지 손톱을 물어뜯을 뿐이었다.
결코 낸시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낸시는 뭐라 해도 내 마누라였다.
적어도 다른 남자와 둘이서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 안 되는 거다.
물론 알고 있다.
더 이상 그런 과거의 관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말이다.
그런건 더 이상 과거라고 말하기도 뭣하다.
이미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래...그래...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도무지 감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
그래...이렇게 혼자 초조해 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나도 남의 아내였던 비욘느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요 며칠간 막대기를 쥐고 죽어라 수련하지 않았던가?
회귀 전에 사랑하지도 않았던 낸시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 버리자.
나는 비욘느를 얻으면 되잖아?!
뭔가 좋은 것을 얻으려면 별것도 아닌 것은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을 놓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 쓸모없는 것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그저 오랫동안 함께 해온 것 때문에 생긴 하찮은 ‘정’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별개로 어느덧 나는 중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대로 자자.
자고 일어나면 분명 과거의 잔재로 발생한 하찮은 감정 따위 모두 정리되어 있을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규칙적인 호흡과 함께 잠을 청했다.
그러나 머릿속엔 낸시와 토미의 모습이 가득차서 뭔가 이후의 일이 진행이 되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방앗간 그늘에 둘이 앉아 있다.
토미가 뭔가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낸시가 피식 거리며 웃는다.
결코 나한테는 보여준 적이 없는 그런 미소다.
나는 어느덧 누운 채로 다리를 떨고 있는 걸 깨달았다.
무르익은 분위기 가운데 토미가 낸시의 손을 슬며시 잡는다.
낸시는 얼굴을 붉히고 그 손을 그대로 둔다.
나는 이쯤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토미가 조금 주저하다가 낸시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낸시는 토미의 품에 안기고 그를 올려다보는 품새가 된다.
눈을 내리까는 모습이 꽤나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다.
내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린다.
둘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있고 점점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진다.
완전히 하나로 포개지기 전에 낸시는 눈을 감는다.
나는 그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절대로 안 돼!!!!”
아직도 곁에서 내 눈치를 살피던 헤로나는 깜짝 놀라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더 이상 방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 없었다.
속에서는 활활 타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주먹을 꼭 쥔 채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헤로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내 뒤를 졸졸 따른다.
“오빠, 어디가? 응? 갑자기 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거의 뛰다시피 방앗간으로 향했다.
헤로나가 나와 거리가 벌어지자 날 소리쳐 불렀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느덧 호흡이 거칠게 변했다.
그래도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설마...아니겠지?
내 상상에 불과하다.
절대로 말이야.
낸시는 일곱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런 부정한 일 따위 할리 없지.
암, 그렇고말고.
걔가 그런 암코양이 같은 짓을 할리 없잖아?
완전 곰 같은 여자였는데...
뭐라 해도 무표정.
웃는 모습은 거의 본적도 없고.
재미없는 여자랑 일평생 살아줬더니 설마 이렇게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
토미 새끼...믿고 농장 관리도 하게하고, 삯도 많이 쳐주고 그랬는데 설마 이렇게 뒤통수를 치지는 않겠지?
그 선량한 얼굴 뒤에 뭔가 음흉한 모습이 숨겨진 건 아니겠지?
아...젠장!
나는 방앗간 근처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거의 도착했을 때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몸은 더욱 많은 산소를 요구했다.
내 폐는 터질 것처럼 팽창했다 다시 줄어들고 다시 팽창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나 서둘러 왔음에도 방앗간에 섣불리 들어서질 못하고 문 밖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문 밖에 서서 몇 번이고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입안이 바짝 말라 무척이나 깔깔했다.
결국 문을 열지 못하고 문에 귀를 바짝 붙이고 소리에 집중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안에는 분명 둘이 있다.
인기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봐라!
바로 뛰어 들어 둘 모두 혼쭐을 내줄테니까!
내 기다림에 보답이라도 하듯 곧 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은 힘들지 않아?”
남자인 내가 들어도 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다.
명백히 낸시를 꼬시려는 것 같았다.
“별로요.”
낸시가 답한다.
역시나 재미없고 멋없는 대답이다.
게다가 짧다.
어찌 보면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일평생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낸시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그..그렇구나.”
조금 당황한 토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통쾌했다.
“......”
“뭔가 여자아이 혼자서 하기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 도와줄 테니까 나한테 말해.”
뭐냐?!
보통 여자가 그렇게나 퉁명스럽게 말하면 관심 없다는 건데, 저 자식은 배알도 없나?!
네놈은 무시당하고 있는 거라고!
별 볼일 없는 소작농 주제에!
토미, 자꾸 낸시 같은 석녀한테 찝쩍대도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다.
큭큭큭.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속으로 회귀 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걸 했다.
바로 낸시를 응원한 것이다.
‘낸시 파이팅!’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다른 결과가 나와 버렸다.
“고...고마워요...토미 오빠.”
나는 이미 다 닿아 있지도 않은 엄지손톱을 뜯으며 다시 초조함을 느꼈다.
빌어먹을!
낸시가 어떻게 된 걸까?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완전 석녀잖아?!
오빠라니?!
퉁명스러움의 대명사, 낸시가 왜 그런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냔 말이다!
“아니야. 당연히 도와야지.”
나는 당장이라도 방앗간에 뛰어 들어가 토미와 낸시의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마음 한 구석이 찡하고 아파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앞으로 이어질 낸시의 대꾸를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탁할 일은 없을 거예요. 좋으신 분들이라 저 혼자 하기 어려운 일은 시키지 않으시는 걸요. 다른 어른들도 많이 계시고요. 뭣보다 주인어른은 고아인 저를 거둬주신 분이니까...어떻게든 은혜를 갚아야 해요.”
“낸시는 정말 장하네. 그래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내가 있으니까 주저하지 마.”
저 자식은 낸시가 싫다는 데 왜 자꾸 찝쩍대는 거야?!
나는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그때였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인다.
“오빠, 여기서 뭐하는 거야?”
돌아보자 헤로나다.
나를 보며 싱긋 웃는다.
하지만 헤로나도 나름 여기까지 뛰어왔는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다.
나는 어찌되었든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쉿! 조용히 좀 해. 계집애야...”
“뭐하는 데? 안에 누가 있어?”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곤 자기도 문에 귀를 대고 엿들으려 한다.
나는 그 모양새가 무척이나 언짢았지만 말리다보면 괜히 소란스럽게 돼서 들킬 것 같아 헤로나의 행동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 남매는 나란히 방앗간 문에 귀를 대고 낸시와 토미의 대화를 엿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