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28화
51장 제국의 창(1)
테일러 부대가 상대한 기병대로 황금 군단의 전력을 확실하게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가능했다.
사우스 왕국군이 구축하는 통상적인 방진보다 튼튼한 방진을 구축할 수 있는 테일러 부대의 방진이 소수의 살아남은 황금 군단 기병대의 돌파로 쉽게 분단되어 버릴 정도라면 사우스 왕국군의 방진 대부분이 황금 군단 기병대의 공격으로 돌파당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렇습니까?”
알폰스의 말에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전쟁, 지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테일러의 입 밖으로 절망적인 말이 나오고 알폰스는 입을 닫았다.
* * *
테일러 부대가 야영지 근처에 도달했을 때, 야영지의 통신실을 지키고 있는 고위 마법사는 수도로부터 긴급한 내용의 통신을 전달받게 되었다.
내용을 전달받은 고위 마법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즉시 상관을 찾았다.
상관은 막사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고위 마법사의 나이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통신실의 관리를 맡은 상급 장교는 자신이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우선 말을 높이고 있었다.
“수도가 위험합니다!”
그렇게 소리친 고위 마법사는 다시 입을 열고 자세한 내용을 상급 장교에게 전달했다.
내용을 모두 전달받은 상급 장교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즉시 막사를 벗어났다.
그리고 아이반 왕자의 막사를 찾았다.
그는 중요한 정보가 오가는 통신실의 관리를 맡은 상급 장교였기 때문에 아이반 왕자에게 즉시 보고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아이반 왕자가 있는 막사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고위 기사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고위 기사는 조심스럽게 막사의 문을 열고 아이반 왕자에게 상급 장교가 찾아온 사실을 알렸다.
고위 기사는 문틈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제자리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좋습니다.”
상급 장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다급히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막사 안에는 아이반 왕자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군사 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수도가 위험합니다. 해상 군단이 사피드 자작령에 상륙, 중심도시를 침묵시키고 수도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상급 장교의 보고에 아이반 왕자는 찻잔을 떨어뜨렸다.
* * *
아이반 왕자는 즉시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지휘관들은 신속하게 지휘부 막사로 모였다.
테일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시드와 함께 적의 전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는 갑작스러운 호출에 지휘부 막사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테일러는 물론이고 루시드조차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소집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비열해 보이는 인상의 나일 쉬바스 백작이 상급 장교 펜드로건과 함께 의자에 앉자 아이반 왕자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수도가 위험하다.”
단 한 마디.
단 한 마디였지만, 파급은 엄청났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의자에서 일어난 귀족도 있었다.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미리 아이반 왕자에게 이야기를 들은 탓에, 큰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후작의 두 아들은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다.
“왕자 전하, 국경을 넘은 것은 그림자 대공의 군대 단독이 아니었습니까?”
모두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테일러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아이반 왕자는 요대에서 단검을 뽑아 군사 지도의 어느 한 부분에 꽂았다.
그곳에는 사피드 자작령이 있었다.
아이반 왕자는 사피드 자작령을 복잡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본 후, 몸을 돌려 지휘관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린데일 후작이 지휘하는 해상 군단이 사피드 자작령에 상륙, 중심도시를 침묵시키고 이동 중이라네.”
상급 장교 펜드로건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반 왕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펜드로건은 발언을 위해 입을 열었다.
“서해 함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강대한 해상 군단을 견제해 올 정도로 정예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우스 왕국은 반도였고, 해군이 강력한 국가였다.
특히 프랑츠 제국 해군과 마주하고 있는 서해 함대는 최정예로, 많은 수의 전함이 함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유감스럽게도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과 아이반 왕자는 그림자 대공이 권력을 잡은 것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몬스터 군단의 해군이 남하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서해 함대의 전력 대부분을 동해로 이동시켰고, 그 틈을 노리고 해상 군단이 움직인 것이었다.
“서해 함대의 전력 대부분은 몬스터 군단 견제를 위해 동해로 이동한 상황이었다네.”
아이반 왕자의 말에 나일 쉬바스 백작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엘런데일스 후작과 왕자 전하의 잘못된 판단 덕분에, 수도가 위험에 처한 겁니까? 이거 원 왕국군 사령관 자리에서 내려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례합니다! 백작! 왕자 전하 앞에서 무슨 망언입니까?”
나일 쉬바스 백작의 날카로운 말에 루시드가 발끈해서 소리쳤지만 아이반 왕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반 왕자와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판단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 맞았다.
왕국 정보부가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그림자 대공이 권력을 잡았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반 왕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자신의 잘못을 말없이 질책했다.
“이제 어떻게 책임을 지실 겁니까?”
나일 쉬바스 백작이 아이반 왕자를 공격했다.
그의 질문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아이반 왕자를 관통했다.
잠시 침묵, 이윽고 아이반 왕자가 입을 열었다.
“하이드 베이커 백작을 사령관으로한 5만 군대를 수도로 보내 지원한다.”
하이드 베이커 백작.
그는 나일 쉬바스 백작과는 다르게, 왕국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귀족이었다.
“왕자 전하! 그렇게 되면 그림자 대공의 군대를 저지하기 힘들어집니다! 10만 명으로는 5만이 넘는 그림자 대공의 군대를 막을 수 없습니다.”
테일러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염을 길게 기른 고위 기사였다.
그는 나일 쉬바스 백작을 따르는 자들 중 한 명이었다.
“중심도시로 들어가서 수비 태세를 갖추면 된다네. 녀석들도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중심도시를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네.”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아이반 왕자의 의견을 지지했다.
“제 의견도 같아요. 베이커 백작과 5만 명을 보내 수도를 지원하고, 본군은 중심도시에서 적을 맞이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부 군단 사령관 엘라스티에 윈터레일 백작이 백금처럼 빛나는 짧은 머리칼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남부 군단과 북부 군단 사령관이 아이반 왕자의 의견을 지지하자 나일 쉬바스 백작과 그를 지지하는 귀족과 장교들도 더 이상 주장을 내세울 수 없었다.
“하이드 베이커 백작.”
“예! 왕자 전하!”
하이드 베이커 백작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반 왕자는 입을 열었다.
“5만 명을 주겠네. 수도를 지원하게나.”
하이드 베이커 백작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강하게 쳤다.
“반드시, 승전보를 울리겠습니다!”
5만 명은 즉시 편성되었고, 하이드 베이커 백작은 수도를 지원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는 승전보를 울리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반 왕자에게 들려온 소식은 패전 소식이었다.
해상 군단 소속 해병대와 전투를 벌인 베이커 백작의 군대는 크게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간신히 1만 명 정도가 수도에 재집결했다는 소식이었다.
* * *
12월의 바람을 차가웠다.
차가운 바람이 북부를 찾았다.
북부의 겨울은 중앙과 남부의 겨울보다 춥고 차가웠다.
이 끔찍하도록 차가운 바람이 부는, 실버레인 평원을 지나 중심도시로 향하는 군대가 있었으니, 바로 그림자 대공의 군대였다.
칠흑처럼 검은, 마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말에 올라탄 그림자 대공은 선두 조금 뒤에서 그림자 기사들의 철저한 경호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주군! 보이십니까! 저기 실버레인 중심도시가 있습니다!”
죽은 조던 베르헨 경을 대신해 황금 군단의 군단장을 맡게 된 그림자 기사 산 크루소 백작은 주군인 그림자 대공에게 다가가 손가락 끝으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도시를 가리켰다.
그림자 대공의 창백한 얼굴에 미소가 그려지고 뱀파이어의 것처럼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중심도시에 적군 전원이 틀어박혀 있다고 했나?”
그림자 대공의 말에 산 크루소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의 시야 구멍으로 보이는 푸른 눈에 살기가 서렸다.
“그렇습니다. 쥐새끼처럼 틀어박혀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겠군. 나이트쉐도우 후작에게 통신을 보내서 지방 군단을 통해 ‘그것’을 운반하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산 크루소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림자 대공이 만든 비밀 무기.
산 크루소 백작은 ‘그것’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라면 중심 도시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재밌는 파티를 열 시간이다.”
“물론입니다.”
두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폭풍이 실버레인 중심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 * *
하이드 베이커 백작의 군대가 라이필트 린데일 후작이 이끄는 해상 군단 해병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흩어졌다는 소식이 실버레인 중심도시로 전해진 이후,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이드 베이커 백작은 왕립 사관학교 졸업생으로 상급 장교로 왕국군에 복무했던 귀족이었다.
나일 쉬바스 백작처럼 전술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무식한 귀족이 아니었다.
그런 하이드 베이커 백작이 허무하게 패배했다는 것은 라이필트 린데일 후작이 생각보다 뛰어나거나, 해상 군단 해병대의 전력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애초에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왕국 정보부에선 라이필트 린데일 후작의 해상 군단이 움직일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경을 넘은 그림자 대공의 황금 군단과 그림자 기사단을 합한 5만의 군대가 사우스 왕국을 침공한 프랑츠 제국의 전력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림자 대공이 프랑츠 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해상 군단의 공격을 알아챈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서해 함대가 해상 군단의 대함대를 포착하고 전투에 돌입하기 위해 상부에 긴급 보고를 통신으로 전달했을 때였다.
유리 사우스 국왕은 뒤늦게, 근처 영지군을 집결시키고 징집령을 내려 징집병을 소집했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남부 군단 또한 뒤늦게 유리 사우스 국왕의 명령을 받고 징집병을 소집해 움직이고 있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 수도가 공격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수도는 사우스 왕국에서 가장 튼튼하기로 유명하지만, 해상 군단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었기에 아이반 왕자의 걱정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
날이 갈수록 수도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는 아이반 왕자의 막사를 늦은 밤에 찾아온 그림자가 있었으니, 바로 테일러였다.
“누구십니까.”
테일러를 발견한 고위 기사가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의 몸을 살피며 물었다.
테일러는 횃불의 불빛이 비치는 범위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고위 기사, 테일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