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24화
49장 휘날려라, 왕국의 깃발이여(1)
“위대하신 대족장께서 함께 하신다! 전군 돌격!”
찬란하게 빛나는 갑옷을 입은 하이 오크의 외침이 새벽이 끝나고 아침과 함께 찾아온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공성추와 사다리가 전진하고 투석기가 돌을 던졌다.
강력한 마법들이 서로를 향해 오가기도 하고 허공에서 맞부딪치기도 했다.
“오늘은 나의 명성을 널리 알릴 기회다, 나를 위해 죽어라! 오크들이여!”
하이 오크 대전사 루벨리르크가 지휘하는 선봉대가 먼저 성벽에 도착했다.
테일러는 전쟁의 나팔을 뽑아들었다.
루벨리르크 휘하의 선봉대를 태운 공성탑은 테일러가 지키는 성벽과 가까운 곳에 안착했다.
“검을 뽑아라!”
공성탑이 성벽에 접촉하자 궁병대를 지휘하는 하급 장교가 검을 뽑을 것을 지시했다.
궁병대가 일제히 검을 뽑아듦과 함께 뒤로 물러나고 고위 기사 준남작이 지휘하는 기사단이 앞으로 나섰다.
궁병대는 기본적인 검술 훈련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근접전에 숙련된 몬스터들과의 백병전은 매우 위험했다.
가능하면 백병전은 피하는 게 좋았다.
“돌격!”
공성탑의 문이 열리고 오크 상급 전사가 우렁찬 함성과 함께 달려나오며 앞을 막아선 고위 기사의 목을 무려 일격에 날려 버렸다.
하지만 그는 곧 준남작의 작위를 가진 고위 기사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트롤 광전사들이다!”
“목을 쳐라! 놈들의 재생력은 뛰어나다! 목을 쳐서 일격에 즉사시켜라!”
트롤 광전사.
늑대 기수보다 상대하기 곤란한 고급 병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테일러는 공성탑의 문에서 트롤 광전사 수십 마리가 달려나오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주군, 합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알버트 후안이 다가와 말했다.
주변은 전투의 소음으로 시끄러웠지만, 아직 테일러와 그가 지휘하는 부대가 지키는 성벽엔 적이 도착하지 않았다.
탑에서 마법사들이 쏘는 마법과 화살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화살 세례는 공성탑의 전진을 최대한 저지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성벽에 닿은 공성탑이나 사다리의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곧 적들이 올 겁니다.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알버트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 걸음 물러났다.
테일러의 말대로, 적들은 금방 찾아왔다.
연이은 화살과 불화살 공격, 그리고 마법 공격을 뚫고 불에 반쯤 삼켜진 공성탑 하나가 성벽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중무장한 뱀파이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1열은 검은 갑옷을 입은 뱀파이어 기사들이었다.
테일러와 성벽의 수비를 맡은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기사들을 즉각 소집하여 적들의 앞을 막아섰다.
테일러 또한 부대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앞을 막아서 궁병대를 보호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갑옷을 입은 뱀파이어 귀족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으며 기사단장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그랑키아 숲 뱀파이어 귀족의 움직임은 보통의 남자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뱀파이어 귀족이 움직이고 기사단장의 목이 날아가기까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사단장은 고위 기사에 서임된지 한 달도 안 되었고, 그것마저 부모님의 재력의 도움을 받은 병아리였지만 엄연히 고위 기사 시험에 통과한 숙련된 기사였다.
그런 고위 기사를 기습이라곤 하지만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제압하는 모습에 주변의 기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뱀파이어 귀족의 공격 행동을 시작으로,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인간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레드가 혼란을 틈타 뱀파이어 귀족을 저격했지만 레드가 발사한 날카로운 화살을 뱀파이어 귀족은 너무나 쉽게 피했다.
“알버트! 뱀파이어 귀족의 상대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테일러는 알버트에게 뱀파이어 귀족의 상대를 부탁했다.
그의 움직임으로 볼 때, 뱀파이어 귀족은 기껏해야 준남작 정도로 보였다.
그랑키아 숲의 뱀파이어 귀족이라곤 하지만 준남작 정도라면 알버트가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알버트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알폰스는 방패에 가득 모은 신성력을 해방시켰다.
“빛이여!”
방패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에 노출된 뱀파이어들은 하나같이 두 눈을 감고 고통에 찬 신음성을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그것은 뱀파이어 준남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비틀대는 사이, 기사와 병사들은 창과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아악!”
“으아악!”
사방에서 찌른 창과 검에 끔찍하게 찔린 뱀파이어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성벽로는 시체로 가득 차고 붉은 피가 성벽로 아래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피는 성벽로 아래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내가, 고작 인간에게 죽을 줄이야.”
뱀파이어 준남작은 화려한 등장에 비해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알버트는 뽑아내며 시체를 발로 차서 성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테일러 경! 성벽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 시가전을 준비하라는 북부 군단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고 시체를 정리한 뒤 2차 공격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친 테일러에게 전령이 다가와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명령을 전달했다.
전령의 말을 들은 테일러는 즉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문 근처의 성벽로가 적에게 완전히 장악당하고 있었다.
피로 얼룩지고 꺾은 북부 늑대 기사단의 깃발을 든 하이 오크 대전사 루벨리르크가 그 중앙에서 포효하듯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전장의 소음에 묻혀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순 없었다.
“상황을 대충 보고하도록.”
뱀파이어들과 전투를 치르느라 주변 상황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테일러의 말에 전령은 주변을 한 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하이 오크 대전사 루벨리르크가 직접 나섰습니다. 케일럽 윈티스 남작께서 북부 늑대 기사단을 이끌고 출격했지만, 남작께선 전사하시고 북부 늑대 기사단은 사실상 전멸했습니다.”
“즉각 후퇴한다! 뒤로 물러난다!”
상황을 파악한 테일러는 즉시 명령을 내리고 병사들과 함께 성벽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북부 늑대 기사단은 북부 군단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성문 인근 성벽이 장악되었다.
성문이 장악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대로 성벽에 남아 있으면 포위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신속하게 이탈해야만 했다.
시내에 도착한 테일러는 기병 장애물을 설치하고 가이우스를 시켜 마법 함정을 설치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루시드의 영지군 또한 합류하였다.
“테일러!”
“루시드!”
루시드는 말에서 내려 테일러에게 달려왔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그의 갑옷에 나타나 있었다.
“곧 적들이 몰려올 것 같네.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루시드는 영지군에 소속된 고위 마법사 2명과 마법사들을 시켜 마법 함정을 설치하게 했다.
마법 함정이 설치되고 지붕에 궁병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곧 대로에 오우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이 동요했다.
“하필이면, 오우거들이군. 저놈들 가죽이 두꺼워서 화살이 잘 박히지도 않는데.”
지붕 위에서 레드는 오우거의 등장에 불평을 하며 마법 화살을 화살통에서 꺼내 시위에 걸었다.
다른 레인저들도 같은 행동을 취했다.
마법 화살이 없는 궁병들은 평범한 화살을 시위에 걸고 오우거 부대에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오크 전사들을 조준했다.
“모두 침착하라! 최소 8명이 조를 짜서 합격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테일러는 동요하는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알버트와 함께 진형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필리스터 영지군 소속의 고위 기사 일부와 기사 일부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오우거들을 노려보았다.
테일러는 오우거들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25마리인가?”
오우거의 수는 25마리.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수도 아니었다.
“어쩌면, 병사들에게 차례는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필리스터 영지군의 고위 기사 한 명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테일러는 오우거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경.”
그렇게 말하며 테일러는 검을 고쳐 쥐었다.
오우거들이 근접했다.
슬슬 싸울 시간이었다.
다른 이들도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저마다 익숙한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들이 암묵적으로 정한 경계선을 오우거 한 마리가 넘은 순간, 먼저 고위 기사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저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방금 전, 병사들에게 차례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던 고위 기사가 날렵한 움직임으로 오우가 다리 사이를 통과하여 뒤를 잡았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은 높이를 도약하여 검을 휘둘렀다.
오우거의 뒷목이 깊숙이 베이고 붉은 피가 솟구쳤다.
오우거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압도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우거는 분명 위협적인 적이었지만 마력검만 사용할 수 있는 고위 기사들에게 오우거는 그저 큰 표적에 불과했다.
마력검을 사용할 수 없는 기사들 같은 경우엔 조금 힘든 상대였지만 그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다른 오우거를 처리한 고위 기사가 합류하여 오우거의 목을 날렸다.
오우거들을 정리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늑대 기수들이 옵니다!”
젊은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오우거들을 모두 처리했지만, 늑대 기수 부대가 그들을 노리고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
테일러의 외침에 기사들은 빠른 속도로 아군 진형을 향해 달렸다.
어느새 합류한 엘프 레인저들이 화살을 쏘는 것으로 기사들의 후퇴를 엄호했다.
엘프 레인저들의 화살은 늑대 기수가 입은 두꺼운 갑옷 틈을 정확히 노리고 파고들었다.
화살비가 쏟아지자 늑대 기수 수십이 늑대와 함께 쓰러져 나뒹굴었다.
고위 마법사를 포함한 마법사들의 공격 또한 시작되었다.
마법의 빛이 번쩍이고 늑대 기수들의 몸이 터져나갔다.
“방패 앞으로!”
마지막으로 테일러가 진형에 합하자 알폰스가 지시를 내렸다.
방패병들이 일제히 방패와 검을 들어 올렸다.
“충돌에 대비하라!”
알폰스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늑대 기수들이 아군 진형을 덮쳤다.
제일 앞에 있던 테일러는 전쟁의 나팔을 휘둘러 돌격해오는 늑대의 머리를 잘라냈다.
잘린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늑대는 쓰러졌지만, 기수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쓰러지는 늑대에서 뛰어내려 땅에 착지하며 날카로운 단검을 하나 던졌다.
테일러는 전쟁의 나팔로 단검을 쳐낸 뒤 기수의 목을 찔렀다.
“케엑!”
기수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었다.
테일러는 전쟁의 나팔을 휘둘러 적들을 죽이면서 주변을 살폈다.
알폰스가 설계한 방진은 튼튼했고 훌륭했다.
늑대 기수 부대와의 1차 충돌에선 간신히 진형을 유지했지만 2차 충돌에선 버티지 못하고 진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1열과 2열의 진형이 무너지고 당황한 병사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분열을 막기 위해 장교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공포에 잠식된 병사들은 장교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병사들은 훌륭한 먹잇감이 되어 늑대 기수에게 살해당했다.
“3인 방진! 3인 삼각 방진이다!”
[통솔 스킬의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아군의 혼란이 진정됩니다.]
테일러는 분열되어 혼란에 빠진 아군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3인 삼각 방진을 구축할 것을 명령했다.
3인 삼각 방진은 방패를 든 병사 3명이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방진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모여 바깥쪽을 주시한 채로 방패를 들어 올려 몸을 가리고 자세를 낮추는 방진이었다.
보병끼리 벌어지는 백병전에서는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지만, 기병 등을 상대로 할 때는 생존율을 꽤 높일 수 있는 효율적인 방진이었다.
통솔 스킬 효과의 극대화로 혼란이 진정되자, 테일러에게 지독한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즉시 가장 가까운 동료와 합류하여 3인 삼각 방진을 구축했다.
늑대 기수들이 그들을 노리는 사이, 방패가 없는 병사들은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방진,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