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118화
47장 실버레인 평원 전투(1)
군인이 아닌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이동한다고 했을 때, 처음 테일러는 이동 속도가 저하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했었지만, 막상 함께 이동해보니 그런 걱정은 괜한 걱정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인간이었으면 이동 속도가 크게 줄었겠지만, 엘프 마을 주민들은 인간이 아닌 엘프였다.
그들의 체력은 인간보다 뛰어났다.
엘프들은 숲과 산에서도 평지처럼 달리는 종족이었다.
평지에서의 움직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테일러의 부대가 그들에게 속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테일러의 부대에 속도를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대의 병사들은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체력은 엘프에 비하면 조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찰대장 엘리아는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군을 지휘했다.
정찰대를 운용해 철저하게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하기를 4일째.
테일러 부대와 엘프들은 북부 군단이 장악한 땅에 진입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테일러 부대의 병사들과 엘프들은 비교적 안전한 곳에 도착했기에 지친 몸을 쉬게 하고 밤을 보내기 위해 야영지를 건설했다.
짧지만 힘들었던 여정 때문에 엘프들도 상당히 지쳐 있었다.
쉬지 않고 이동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였다.
야영지가 건설되고, 소수의 초병을 제외한 모두가 잠이 들었다.
환한 달이 짙은 구름에 가려지고, 어둠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자 어둠 속에서 검은 말을 탄 기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뱀파이어 기병대였다.
그들은 투구의 시야 구멍 사이로 붉은 눈을 번뜩이며 기병창을 앞세우고 검은 말을 몰았다.
그들은 마법으로 말발굽 소리마저 지우고 소리 없이, 하지만 빠른 속도로 접근했다.
“적습…… 커억!”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을 든 채 망을 보고 있던 병사가 뒤늦게 뱀파이어 기병대의 접근을 눈치채고 적습을 알리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지만,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경고가 아닌 붉은 피였다.
기병창에 가슴이 관통당한 채 붉은 피를 입 밖으로 쏟아내며 병사는 뱀파이어가 창을 들어 올리자 그대로 들려졌다.
뱀파이어 기병이 창을 크게 흔들자 관통한 창이 빠지면서 병사의 몸이 힘없이 허공을 날아 땅에 떨어져 기괴하게 꺾였다.
선두의 뱀파이어 기병이 야영지 근처에 도달한 순간, 가이우스가 만약을 위해 설치해둔 알람 마법이 울렸다.
야영지 전체에 경보음이 울리고 당황한 뱀파이어 기병들이 고삐를 잡아당겼다.
“주군! 적습입니다!”
테일러가 눈을 뜨니, 알버트가 전쟁의 나팔을 건네고 있었고, 평소의 판금 갑옷 차림이 아닌 사슬 갑옷 차림의 알폰스가 실비아를 찾기 위해 천막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었다.
“오, 제기랄.”
가이우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일어나 로브를 걸치고 벽에 기대어 둔 스태프를 들었다.
적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갑옷을 입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테일러는 갑옷도 입지 않고 전쟁의 나팔만 든 채 밖으로 튀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엘프 레인저들과 다르게, 우왕좌왕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 진정하고 집결하라!”
[전쟁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군의 사기가 증가합니다. 지휘관이 살아 있는 한 절대 패주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의 나팔을 뽑으며 소리쳤다.
전쟁의 나팔의 효과가 발휘되자 혼란스러워하던 병사들이 조금 진정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가장 먼저 테일러 부대가 집결하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부대의 병사들이 집결했다.
소수를 제외한 전원이 집결한 것을 확인한 테일러는 갑옷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전투의 소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순찰대장 엘리아가 이끄는 엘프 순찰대가 뱀파이어 기병대를 상대하고 있었으나, 애초에 근접 병과가 아닌 탓에 고전하고 있었다.
“돌격!”
뱀파이어 기병대는 엘프 순찰대와 전투를 벌이느라, 속도를 잃은 상태였다.
속도를 잃은 기병대를 상대할 때 방진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었기 때문에 테일러는 과감히 방진을 구축하는 선택지를 버리고 진형 없는 돌격을 명령했다.
“와아아!”
병사들은 스스로의 몸에서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창을 앞으로 하고 달려나갔다.
“절대 혼자서 상대하지 마라! 최소 3명이 붙어서 공격해!”
검은 말의 목을 자르고 무너지는 뱀파이어 기병의 복부에 전쟁의 나팔을 찔러 넣으며, 테일러가 지시를 내렸다.
속도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그랑키아 숲의 뱀파이어 기병은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검술 실력은 매우 우수하고 신체 또한 인간보다 월등했다.
최소 3명 이상의 합격을 필요로 했다.
“으악!”
“크악!”
3명 이상 합격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아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뱀파이어 기병대 50 정도가 거리를 벌리려고 한다! 거리를 벌리고 돌격을 감행할 모양이야!”
“가이우스!”
레드가 경고하고 테일러가 가이우스의 이름을 불렀다.
가이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말 안 해도 알고 있네.”
마법이 완성되고 길고 거대한 흙의 성벽이 대지에서 솟아나 뱀파이어 기병들이 거리를 벌리는 것을 봉쇄했다.
“일리아! 정령 군주로 야영지를 보호해주세요!”
소수의 뱀파이어 기병대가 소수의 엘프 레인저를 제외하면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야영지를 노리고 움직이려 했다.
정령 군주 소환을 준비하고 있던 일리아는 야영지 근처에 바람의 정령 군주를 소환했다.
야영지를 노리던 뱀파이어 기병들은 바람의 칼날에 몸이 분단되어 숨을 놓았다.
비교적 안전한 야영지에 있는 실비아가 축복을 모두에게 내려 주었다.
축복의 힘을 받아 아군은 더욱 힘을 내 뱀파이어들을 공격했다.
테일러가 기병대를 지휘하는 뱀파이어 준남작의 목을 날리고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뱀파이어 기병대는 죽은 뱀파이어 준남작의 지시로 후퇴를 시작했다.
* * *
824년 10월.
테일러가 지휘하는 부대들과 순찰대장 엘리아가 지휘하는 엘프 레인저들, 그리고 엘프 마을의 주민들이 실버레인 후작령의 실버레인 중심도시에 도착했다.
엘프 연방의 참전 소식을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으로부터 미리 들은 탓에 순찰대장 엘리아의 등장에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크게 놀라지 않았지만, 합류하는 엘프 레인저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엘프들이 합류하고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북부 군단의 주력이 하츠 실버레인에 모두 집결했다.
실버레인 중심도시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실버레인 평원에 오우거 루우거드가 본군에서 병력을 추가로 보충하여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지만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집결한 북부 군단의 주력은 무려 3만이었다.
그랑키아 숲의 몬스터 군단이 정예라고는 하지만, 1만이나 차이 나는 수를 극복하긴 힘들 것이라고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생각했다.
“출진한다! 실버레인 평원에서 적을 맞이한다!”
북부 군단의 사령관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직접 지휘하는 3만의 군대가 실버레인 중심도시의 열린 성문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보병대의 속도에 맞춰 실버레인 평원으로 진군했다.
늦은 밤 실버레인 평원에 도착한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군대는 야영지를 세웠다.
목책을 세우고, 기병 장애물을 설치했다.
많은 수의 공병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책을 세우고, 기병 장애물을 설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야영지가 완성되고 경계 부대가 배치되자 야영지 중앙의 거대한 지휘부 막사에서 모든 지휘관이 참석하는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모든 지휘관이 참석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말단 지휘관인 테일러도 참석할 수 있었다.
과거는 아니었지만, 현재는 100명 남짓한 작은 부대를 지휘하는 말단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테일러는 지휘관 회의가 시작하기 한참 전에 지휘부 막사로 들어섰다.
맨 끝에 있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고 얼마 뒤 유난히 깔끔해 보이는 군복을 입은 상급 장교 펜드로건이 걸어 들어왔다.
“음?”
그는 테일러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자신이 첫 번째를 장식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먼저 온 지휘관이 있으니 조금 기분이 상한 것인지 어두운 얼굴로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테일러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가장 사령관석의 뒤에 있는 군사 지도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 테일러와는 다르게 상급 장교 펜드로건은 테일러를 유심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아, 이제 보니 억제기 파괴의 주범인 테일러 경이셨군요. 아직 살아계셨습니까?”
군사 지도를 주목하고 있던 테일러의 눈매가 꿈틀했다.
명백한 비아냥이었다.
상급 장교보다 고위 기사가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전시엔 부여되는 지휘권에 따라 서로의 위치가 반전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나일 쉬바스 백작께서 친히 들려주셨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분과 꽤 가까운 관계라서 말입니다. 하하.”
상급 장교 펜드로건은 말을 마치며 비열한 웃음소리를 슬며시 흘렸다.
그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나일 쉬바스 백작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정식 소속은 왕국군이었지만 사실상 하는 행동은 백작의 영지군 소속 상급 장교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불안합니다. 억제기 파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경께서 함께하니 말입니다. 차라리 탈영하시는 게 군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하하하.”
상급 장교 펜드로건은 대놓고 테일러를 조롱했다.
적대적인 조롱에 테일러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끝이었다.
그 누구도 테일러를 변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는 조용히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다른 지휘관이 지휘부 막사에 들어오는 것으로 이 불편한 분위기가 바뀌길 기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다른 지휘관들은 좀처럼 지휘부 막사의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테일러와 상급 장교 펜드로건이 심하게 일찍 온 모양이었다.
상급 장교 펜드로건의 조롱과 비아냥은 계속되었다.
참다못한 테일러가 입을 열었다.
“증명하겠습니다.”
상급 장교 펜드로건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제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말입니다.”
테일러의 말에 상급 장교 펜드로건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100명 정도 되는 병사들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상급 장교 펜드로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3만과 2만의 병력이 맞부딪치는 전투에서 고작 100명 정도 되는 병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아니, 극히 드물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의 부대보다 더 많은 공적을 따낼 테니.”
“호오라. 기대하겠습니다.”
비장한 각오로 말하는 테일러를 보며 상급 장교 펜드로건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휘부 막사의 문이 열리며, 지휘관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로 인해 둘의 신경전은 끝을 고하게 되었다.
파도처럼 몰려 들어온 지휘관 무리에는 살라다르 경과 루시드 경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일러를 발견하고는 우호적인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테일러도 그들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사령관께서 들어오십니다.”
지휘부 막사의 문이 열리고 기사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사령관의 등장을 알렸다.
이윽고 북부 군단 사령관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두 아들과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차렷!”
하츠 실버레인 후작보다 한 발 먼저 들어온 고위 기사가 큰 목소리로 외치자 자리에 앉아 있던 지휘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 자세로 하츠 실버레인 후작을 맞이했다.
“앉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