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93화
37장 호기심 많은 여왕(1)
“큭.”
상황이 쉽게 풀리지 않자 테일러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무기를 잔뜩 챙겨오긴 했지만, 위그드라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수는 없었다.
“성문을 열어라.”
테일러가 한참 답답해하고 있을 때, 무반응을 유지하고 있던 하일리드 핀셔에게 전령기를 등에 꽂은 엘프가 다녀갔다.
그녀가 다녀가고 하일리드 핀셔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성문을 열 것을 지시했다.
“수비대장! 무슨 짓입니까?”
부관이 반발했지만 하일리드 핀셔의 굳은 의지는 변하지 않았고 결국 성문이 열렸다.
갑작스럽게 성문이 열리자 테일러와 파티원들은 조금 당황했으나 하일리드 핀셔가 들어올 것을 제안하자 이내 천천히 성문을 넘어 위그드라실 안으로 들어섰다.
성문을 넘기 무섭게 위그드라실의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지구에서 살았을 때의 아파트를 연상하게 하는 높은 나무와 나무에 붙어 있는 아름다운 건축물들.
마법등 역시 늙은 고목이나 어린나무에 붙어 있었다.
자연이 살아 숨쉬는 거리에는 엘프들이 가득했고 모든 도로가 이어져 있는 중앙에는 하이 엘프 왕의 왕성이 있었다.
왕성의 중앙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는데, 일리아는 그것이 세계수라고 설명했다.
“위그드라실에 온 것을 환영한다.”
성벽에서 내려온 하일리드 핀셔는 입으로는 환영을 말하고 있었지만 불쾌하다는 얼굴이었다.
마치 자신은 열고 싶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문을 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리아는 하일리드 핀셔에게 다가가 감사를 표했다.
하일리드 핀셔는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도로 쪽을 가리켰다.
“감사는 저분에게 해라.”
그의 말에 일리아는 물론이고 테일러를 포함한 파티의 시선이 하일리드 핀셔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엘프들 사이로 정교한 장식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엘프 3명이 서 있었고 그 중앙에는 긴 금발에 녹색 눈을 가진 하이 엘프가 있었다.
“왕실 친위대?”
일리아의 말대로 그들은 왕실 친위대였다.
왕실 친위대의 하이 엘프는 테일러를 바라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가 낯설지 않다고 테일러는 생각했다.
“오랜만입니다. 테일러.”
“맙소사, 이럴 수가.”
자신을 향해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 모습에 테일러는 눈앞의 하이 엘프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로이츠, 어떻게 당신이!”
테일러는 그에게 다가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껴안았다.
서로 갑옷을 입고 있는 탓에 그 모양은 우스꽝스러웠지만 두 사람은 진지했다.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의 갑옷을 입고 있으며, 하일리드 핀셔에게 성문을 열라고 명령을 내린 그는 다름 아닌 로이츠였다.
게임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로이츠가 분명했다.
그와 오랜 시간 동안 파티 플레이를 했던 테일러는 알 수 있었다.
격한 포옹이 끝나고 로이츠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또한 당신과 같은 이유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왕성에 가서 하시겠습니까?”
“그게 좋겠습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츠가 테일러와 파티를 왕성으로 안내하려는 순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하일리드 핀셔가 앞을 가로막았다.
“친위대장. 그들을 왕성으로 데려갈 생각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일리드 핀셔는 단호하게 말했다.
성문을 여는 것까진 양보했지만, 인간들을 왕성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하일리드 핀셔에게는 왕성과 관련된 권한이 없었다.
“수비대장. 당신에겐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도 왕명입니까?
하일리드 핀셔가 질문했다.
그의 질문으로 인해 성문이 열린 것도 왕명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실 친위대장이라고 해도 수비대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왕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왕명은 아닙니다만, 제 권한으로 왕성 출입 정도는 허가할 수 있습니다.”
로이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로이츠 펠베런.
그는 위그드라실의 왕실 친위대장이었다.
왕성 출입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당신에겐 권한이 없습니다. 수비대장. 왕성 출입은 제 관할입니다.”
“혹여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하일리드 핀셔의 말을 부드럽게 자르며 로이츠는 그의 옆을 지나쳤다.
테일러와 파티원들 역시 하일리드 핀셔의 옆을 지나쳤지만 하일리드 핀셔는 더 이상 그들을 막지 않았다.
로이츠의 말대로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들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뭐야. 여기 높은 녀석이랑 아는 사이였어?”
백색의 도로를 따라 왕성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레드가 테일러의 곁에 바짝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설명하자면 복잡합니다.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비밀이라는 이건가? 그래. 입 닫고 있어주지.”
“테일러. 위그드라실은 초행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레드는 물러났지만, 이번에는 일리아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테일러는 조금 당황했다.
확실히 얼마 전 말을 타고 위그드라실로 오는 길에 대화를 나누었을 때 위그드라실은 초행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제가 친위대장직을 맡기 전. 그의 마을에 우연히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당황하는 테일러를 대신해 로이츠가 변명거릴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테일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그드라실에서 인간을 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테일러 파티는 호기심 많은 엘프 꼬마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만 했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참을 이동했다.
위그드라실은 넓었고 한참을 이동한 끝에 왕성의 성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왕성을 지키고 있는 엘프 친위대원들이 날카롭고 적대감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긴 했지만, 도시의 성문보다는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왕성에 도착하고 로이츠는 테일러 파티를 친위대 주둔지로 안내했다.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는 왕성과 세계수를 지키는 집단으로 그 규모가 큰 편이었기 때문에 왕성 내에 제법 큰 규모의 주둔지가 있었고 친위대원들은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게 주둔지에서 머물렀다.
“여러분은 이곳과 이곳에서 쉬시면 됩니다.”
파티원들에게 쉴 수 있는 방을 배정해준 로이츠는 테일러와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왕실 친위대장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집무실은 단출했다.
양쪽 벽에 책장 두 개와 책상 그리고 테이블, 그 옆에 붙어 있는 몇 개의 의자가 전부였고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로이츠. 당신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까?”
집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테일러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로이츠는 테이블에 찻잔을 놓고 거기에 차를 채우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겁니다. 특히 묻고 싶은 게 많으시겠죠.”
테일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제가 대답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대답이 한정되어 있다니 무슨 말입니까? 로이츠.”
테일러의 질문에 로이츠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테일러. 아마도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째서입니까?”
로이츠의 태도에 테일러는 당황했다.
성문에서 로이츠를 만나고, 또 그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모든 의문이 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로이츠의 태도로 봐선 의문을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의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지만, 대답할 수 없습니다.”
로이츠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마음 같아서는 테일러가 묻는 모든 것에 대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사정이 있는지라 대답할 수 없었고 그것이 안타까웠다.
“그렇다면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곤란해하는 로이츠의 모습에 테일러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고 로이츠도 그런 테일러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회귀와 관련된 것만 아니라면 대답할 수 있으니, 차를 마시면서 천천히 긴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로이츠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테일러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테일러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빼서 앉았다.
로이츠가 찻잔을 부드럽게 밀어 테일러의 앞에 놓았다.
테일러는 깊은 향이 느껴지는 차가 담긴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한 모금 머금고는 내려놓았다.
차를 삼킨 뒤 그는 로이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외모도 달랐지만, 마법사였던 당신이 검을 차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게임 속에서 테일러는 검사였고, 익숙한 것도 검술이었다.
때문에 로이츠 역시 회귀를 했다면 익숙한 마법을 배운 마법사의 모습으로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설마 검을 차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로이츠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쁘게 살아오느라 많이 하지 못했지만.
“저는 당신과 다르게 특별한 능력을 받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사자이며 전령에 불과했고 그 역할을 수행한 보상으로 전생의 기억을 돌려받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것 뿐이었죠.”
테일러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로이츠는 알고 있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회귀한 테일러와는 다르게, 평범했던 로이츠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노력뿐이었다.
그는 하이 엘프였지만 명문가 출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재능은 없었다.
다만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이용해서 노력한 끝에 그는 친위대장이 될 수 있었다.
불에 달궈진 것처럼 걷기 힘들고 고난이 함께하는 길이었지만 로이츠는 피로 얼룩진 전생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길을 걸었다.
전생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전생의 평범한 하이 엘프 청년은 위그드라실 왕실 친위대장이 될 수 있었다.
“그랬군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 같다고 테일러는 생각하며 차를 마셨다.
목 넘김이 좋았고 향도 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친위대장이 대접한 차니까 꽤 귀한 차일 게 분명했다.
“당신이 어떻게 지냈는지는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테일러의 물음에 로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그드라실에도 작지만, 정보기관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위그드라실은 작은 나라나 다름없었다.
웬만한 기관은 다 가지고 있었고 정보기관도 포함되었다.
테일러는 사우스 왕국에서 아주 유명한 편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규모가 작은 편이었던 위그드라실의 정보기관이 테일러와 관련된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생활이 위협받는 느낌이군요.”
테일러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루시드도 왕국 정보부를 이용해 그의 행적을 추적한 적이 있었다.
왠지 지금도 감시받는 느낌이 들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생활까지 알아낼 정도로 저희 정보기관은 유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찻잔을 비웠다.
빈 찻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기 무섭게 테일러는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로이츠. 전하를 알현했으면 합니다. 도와주세요.”
테일러는 자신이 위그드라실로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그 말에 로이츠는 조금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미소를 잃지 않는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정말 곤란했을 때였기에 테일러는 잔뜩 긴장한 채 마른 침을 삼켰다.
“왕성 출입까지는 제 권한 내의 일입니다만, 알현은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말씀은 드려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워낙 괴짜이셔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로이츠는 솔직하게 말했다.
왕성 출입은 왕실 친위대장인 로이츠의 관할이었지만, 알현은 왕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로이츠는 왕실 친위대장이라는 높은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보고는 할 수 있겠지만 알현 여부는 왕이 결정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로이츠가 성문을 열어줄 것을 왕에게 부탁했을 때 왕이 흔쾌히 왕명을 내렸기 때문에 테일러 파티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숙소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긍정적인 답변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이츠.”
로이츠는 미소를 보인 뒤 왕성 안의 왕궁으로 향했고 테일러는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