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92화
36장 재회(2)
“내일 출발하는 건가?”
창 밖에 떠 있는 달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이우스는 조금 슬프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열린 창문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가이우스는 한기가 느껴지는지 로브를 여몄다.
하이 엘프 왕의 왕국 위그드라실로 향하는 여행의 짐을 챙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테일러는 가이우스가 말을 건 김에 휴식할 겸 의자에 앉아 차가운 물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네. 내일 출발할 예정입니다. 가이우스.”
“무리하지 말게. 나는 괜찮으니, 절대로 엘프 연방과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면 안 되네.”
물을 마시고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한 테일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그 속셈이 가이우스에게 들통 나고 말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테일러의 질문에 가이우스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자네가 챙기는 짐의 절반이 무기라는 것을 자네는 모르고 있는 건가?”
가이우스가 지적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테일러와 파티가 위그드라실로 출발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가이우스는 늦었지만, 테일러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짧은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의 숙소를 찾아왔었다.
그때 테일러는 짐을 챙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가이우스는 창 밖의 달빛을 보며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을 살짝살짝 테일러에게 옮기는 것으로 그가 무엇을 챙기고 있는지 확인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 테일러가 상당히 많은 양의 무기를 챙기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데네브를 상대하러 갈 때보다 더 많은 무기를 챙기고 있었다.
위그드라실로 향하는 길에 전투는 있겠지만, 전투를 위해 향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무기는 적당히 챙겨도 되는데 비상식적으로 많은 양의 무기를 챙기는 테일러의 모습에 가이우스는 그의 생각을 대충 짐작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명심하게. 절대로 엘프 연방과 척을 져서는 안 되네. 자네의 파티엔 엘프 연방의 간부 일리아도 있지 않은가? 신중하게 생각하게.”
가이우스가 조언했다.
그는 나이가 어리고 가끔 떼를 쓰거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고위 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실력자답게 아는 것도 상당히 많았고 지혜로웠다.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엘프 연합과 적대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맹세하겠습니다.”
테일러가 맹세까지 하고 나서야 가이우스는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내일이며 당분간 못 보겠군. 언제나 함께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흩어지게 되니까 너무 혼란스럽다네.”
조금 슬픈 목소리로 가이우스가 말했다.
테일러는 짐을 챙기는 것을 그만두고 가이우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다시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가이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언제나처럼 자네를 믿겠네.”
가이우스는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테일러의 손을 어깨에서 밀어내고 테일러의 침실을 벗어났다.
가이우스가 떠나고 테일러는 한참을 짐을 챙기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서야 겨우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국왕의 깃발을 든 테일러의 파티가 사우스 왕국 수도 사우스펠에서 출발했다.
파티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쉬지도 않고 위그드라실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힘든 이동이 일주일 정도 계속되자 참다못한 성녀 실비아 그레이가 쌓아 두었던 불만을 터뜨렸다.
“아, 몰라! 몰라! 몰라! 테일러!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미친 듯이 말 타고 달릴 거예요! 좀 쉬면서 가자고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가이우스를 생각해서 꾹꾹 참아왔던 불만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실비아 그레이는 늦은 밤 남자들이 생활하는 천막에 쳐들어와 큰 소리로 항의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잠을 자는 시간을 빼면 쉬지 않고 말을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그녀는 상당히 지쳐 있었고 짜증도 많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작위는 없지만,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승마를 배운 덕분에 말을 타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였다.
미친 듯이 말을 타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이동하니, 비록 성녀라고는 하나 여린 여자의 육체를 가진 실비아 그레이는 상당히 지칠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종족이 다른 하이 엘프 일리아 같은 경우엔 신체 조건 자체가 달라서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지만, 실비아의 육체는 평범한 여성의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강행군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테일러. 저희들은 모르겠지만, 실비아는 체력이 좋지 않습니다.”
실비아 그레이의 오빠인 알폰스 그레이가 실비아를 엄호했다.
“그래. 테일러. 알폰스의 말이 맞아.”
실비아의 로렌시아의 축복 덕분에 여동생이 회복한 레드도 조심스럽게 그녀를 엄호했다.
알버트와 실비아를 뒤따라 온 일리아는 침묵을 지켰다.
레드와 알폰스까지 실비아의 편을 들고 나서니 테일러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실비아. 내일부터는 휴식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 약속! 꼭 지켜야 해요!”
“지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실비아는 테일러로부터 확답까지 받은 뒤에서야 천막을 떠났다.
실비아가 먼저 떠나고 홀로 남은 일리아는 테일러를 바라보며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테일러. 제가 말린다고 말리긴 했는데,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실비아 그레이가 테일러가 있는 천막을 찾아오기 전에 일리아가 말리긴 했었다.
하지만 실비아의 고집을 누가 말리겠는가, 결국 일리아가 먼저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일리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테일러가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리아는 미안한지 한참을 서성인 뒤에서야 실비아가 있는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상황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일리아가 실비아에게 가이우스를 들먹이며 질타했을 것이고, 그것에 욱한 실비아가 먼저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하아.”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오자 테일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알폰스가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실비아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선 가이우스를 하루라도 빨리 도와주고 싶지만, 실비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삐쳤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폰스 그레이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알폰스 그레이는 실비아 그레이의 오빠로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옆에서 그녀를 지켜왔다.
당연히 언제나 그녀의 편을 들었고 웬만한 일에는 화도 내지 않았다.
실비아는 어려서부터 성녀의 자질을 인정받아 신성교에서 지냈고, 신성교의 사제들은 그녀에게 예절보다 신성 기도문을 먼저 가르쳤다.
그래서 실비아 그레이는 버릇이 없는 편이었고 실비아 그레이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알폰스 그레이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테일러도 두 사람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알폰스의 처지를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다들 기분이 꿀꿀한 것 같군. 이럴 때 필요한 건 하나지.”
“그게 무엇입니까?”
레드의 혼잣말을 들은 알버트가 질문을 던졌다.
레드는 대답 대신 천막을 벗어났다.
천막을 나간 그는 야영지에 세워둔 말의 안장주머니를 뒤적이더니 그 속에서 술병을 하나 꺼냈다.
술병을 꺼내 든 그는 천막으로 그것을 가지고 들어갔다.
“바로 이거지!”
그렇게 말하며 술병을 테일러를 향해 던지는 레드.
알버트는 그것을 공격으로 인식하고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술병을 잡아챘다.
“위험하잖습니까?”
위험하다는 알버트의 말에 레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나보다 훨씬 괴물 같은 놈들이 위험하다고 하니까 코미디가 따로 없군!”
“알버트. 술병 주시겠습니까? 레드가 힘들게 꺼내 왔는데, 맛이나 보겠습니다.”
“예. 주군.”
고위 기사 알버트 후안이 병마개를 뽑아낸 술병을 테일러에게 건넸다.
테일러는 입을 대지 않고 술을 입 안에 쏟아 부었다.
쓴맛이 혀를 휘감고 아련히 퍼졌다.
무슨 술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비싼 술은 아닌 게 확실했다.
레드는 비싼 술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불치병을 앓아온 동생의 치료비를 확보하기 위해 돈을 최대한 아껴야만 했고,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술도 최대한 저렴한 것으로 즐기게 되었다.
“테일러. 저도 주시겠습니까?”
갑옷을 벗고 가벼운 옷을 입은 알폰스가 술을 찾았다.
테일러는 말없이 그에게 다가가 술병을 건넸다.
테일러로부터 술병을 건네받은 알폰스는 입 안에 술을 들이부었다.
“캬.”
“이런 미친 놈이! 혼자서 절반을 마시다니!”
레드의 불평 소리가 들려오고 모두의 웃음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만 갔다.
위그드라실을 향한 여행은 계속되었다.
다만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강행군이 중단되고 조금 여유를 찾은 것이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이른 824년 2월 엘프 왕의 왕국 위그드라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은 하이 엘프들의 강력한 인식장애 결계로 보호받고 있어서 파훼법이나 길을 아는 엘프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길을 잃고 위그드라실을 찾지 못하게 되지만 테일러의 파티에는 하이 엘프이자 엘프 연방의 간부인 일리아 웨스트우드가 함께 하고 있었다.
덕분에 위그드라실의 성문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하이 엘프인 일리아가 파티에 함께 있어서 그런지 망루의 엘프 궁병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파티를 노려보긴 했지만, 화살을 쏘지는 않았다.
만약 일리아가 없었다면 위그드라실을 수비하는 엘프들의 성향상 먼저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인간에게 중립적인 반도의 다른 엘프들과 다르게, 위그드라실의 엘프들은 인간을 다소 적대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성문 앞으로 다가가 사우스 왕국 국왕의 깃발을 힘차게 흔들었지만, 위그드라실은 무반응을 유지했다.
“여기 국왕의 깃발이 보이지 않는가! 이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인가!”
무시를 참다못한 테일러가 국왕의 깃발을 흔들며 성벽을 향해 소리치자 성벽 위로 짧은 금발에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하이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엘프다. 인간 국왕의 깃발이 가지는 의미 따위 알 바 아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사우스 왕국의 기사 테일러다!”
테일러가 신분을 밝히자 하이 엘프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하! 고작해야 기사 따위가 국왕의 깃발을 흔드는 것인가? 사우스 왕국도 별거 아니군!”
테일러는 국왕의 깃발을 땅에 꽂았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어 마력검을 발동시킨 뒤 검으로 하이 엘프를 겨눴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엘프 궁병들이 시위에 화살을 걸고 당겼다.
평범한 기사라고 생각한 인간이 고위 기사의 상징인 마력검을 발동시키자 하이 엘프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국왕 폐하와 조국을 모욕하는 발언은 참을 수 없다!”
수십 명의 정예 궁병이 활을 조준하고 있었지만, 테일러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점은 내 사과하지. 나는 위그드라실의 수비대장 하일리드 핀셔다.”
하일리드 핀셔의 사과에 테일러는 마력검을 해제하고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겠는가? 하이 엘프 왕을 뵙고 긴히 전할 말이 있다.”
테일러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하일리드 핀셔는 고개를 저었다.
짧은 금발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흔들렸다.
“불가하다. 인간들에게 위그드라실의 성문을 열어줄 수는 없다.”
인간들에게 성문을 열지 않겠다는 하일리드 핀셔의 의지는 완고했다.
결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엘프 궁병들은 하일리드 핀셔의 명령에 활을 내리긴 했지만, 테일러 파티를 향한 적대감 어린 시선은 거두지 않았다.
하일리드 핀셔가 명령만 내린다면 그들은 즉시 활을 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테일러는 품속에서 나뭇잎 피리를 꺼내 들었다.
나뭇잎 형상을 한 피리를 꺼내 들어 엘프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 올렸다.
하이 엘프 일리아로부터 받은 것으로 불면 엘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피리였지만 하일리드 핀셔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금 놀라는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곧 무반응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