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90화
35장 하이 엘프 여왕의 눈물(3)
사우스 왕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웅장한 중앙 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있었고 벽에는 선대 국왕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초상화 옆에는 고위 기사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한 고위 기사가 배치되어 있었고, 붉은 카펫이 이어지는 중앙의 끝에는 왕좌가 있었다.
왕좌에는 유리 사우스 국왕이 앉아 있었으며, 그 옆에는 아이반 사우스 왕자와 왕실 근위기사단의 부단장 라크 듀렌달 자작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반 왕자는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테일러는 빠른 걸음으로 국왕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도 좋다.”
국왕의 목소리가 들리자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일어나며 옷차림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아이반 사우스 왕자가 입을 열었다.
“경의 이름이 테일러인가?”
“그렇습니다. 왕자 전하.”
대답과 함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테일러를 아이반 왕자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살폈다.
두 사람의 나이는 같았다.
“아이반. 우선은 내가 그를 불렀으니, 잠깐 물러나 있도록 해라.”
“예. 폐하.”
유리 사우스 국왕의 말에 아이반 왕자는 순순히 따랐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고, 유리 사우스 국왕은 왕좌에 앉은 채 테일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테일러 경. 뱀파이어 대공을 영원히 침묵시켰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예. 사실입니다. 국왕 폐하.”
테일러의 대답을 들은 국왕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주었다. 만약 그가 그림자 기사단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면 왕국은 크나큰 위험에 빠졌을 것이야.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테지.”
유리 사우스 국왕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뱀파이어 대공이 그림자 기사단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면, 가장 먼저 억제기가 파괴되었을 것이다.
억제기 수비대는 사우스 왕국의 최정예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 앤타빌 프랑츠 황제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던 뱀파이어 대공을 상대하기엔 부족했다.
억제기가 파괴된다면 그랑키아 숲 몬스터 군단의 발을 묶는 족쇄는 사라지게 되고, 그림자 대공의 공작으로 인해 몬스터 군단은 남하하게 될 것이다.
몬스터 군단이 남하하게 된다면 사우스 왕국은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테일러의 활약으로 국가의 많은 영웅이 목숨을 건졌기에 왕국이 멸망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을 조금 더 번 것에 그치지 않았다.
대륙을 제패한 프랑츠 제국은 사우스 왕국을 노리고 있었고, 그랑키아 숲의 몬스터 군단이 남하하는 것으로 인해 그랑키아 숲이 거의 비게 되면 그 길을 이용해 군대를 투입하여 사우스 왕국을 공격할 것이다.
그 선봉의 깃발은 황금 군단이 들 것이고, 몬스터 군단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본 사우스 왕국은 프랑츠 제국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테일러는 이번에 정말 큰 일을 해낸 것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작위를 주고 싶지만, 반대하는 귀족이 제법 많아서 지금 당장은 무리라네. 이해해주게.”
테일러의 승전 소식이 전해진 직후, 유리 사우스 국왕은 중앙 회의에서 테일러와 작위에 대한 얘기를 꺼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귀족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유리 사우스 국왕의 권력을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심하다면 그도 방법이 없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테일러는 조금 아쉬웠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를 보며 입을 닫고 있던 아이반 왕자가 입을 열었다.
“중앙 귀족들의 지지가 두터운 나일 쉬바스 백작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나일 쉬바스 백작.
수도 인근에 영지를 두고 있는 그는, 영지 내의 수많은 광산과 상업이 발달한 중심도시 덕분에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만큼은 아니지만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고, 그에게서 풍기는 돈 냄새에 중독된 귀족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정보 활동으로 바쁜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과는 다르게, 나일 쉬바스 백작은 한가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정치 공작을 펼쳐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젊은 인재들을 시기하고 질투했는데, 불행하게도 최근 그의 눈에 테일러가 포착되고 말았다.
젊고 평민 출신에,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출세하여 국왕의 신임을 받는 기사단장이 된 테일러는 나일 쉬바스 백작이 전형적으로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가이우스에 대한 소식은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으로부터 보고받았네. 사우스펠 마탑은 물론이고, 왕국도 그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가이우스는 훗날 최연소 대마법사가 될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마법계의 신성이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희는 방법을 찾을 것입니다. 한데, 국왕 폐하, 저를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고작 이런 간단한 것으로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 테일러는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물었다.
유리 사우스 국왕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 경을 부른 것은 경고를 하기 위함이네.”
“경고 말씀이십니까?”
테일러의 얼굴이 굳었다.
그 모습을 본 국왕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실은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말에 의하면 나일 쉬바스 백작과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좋지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하네.”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왕국 정보부는 귀족들 역시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부터 나일 쉬바스 백작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잠시 입을 닫았던 국왕이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추측에 의하면 나일 쉬바스 백작이 노리는 건 경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네. 적어도 경의 주변을 노리겠지. 꼭 목숨을 노린다는 게 아니라, 경의 행보에 적극적인 방해를 할 것으로 보이네.”
나일 쉬바스 백작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자세한 정보는 인원 부족으로 인해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테일러와 관련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니 앞으로 행동을 조심하게. 사소한 실수라도 보이면 쉬바스 백작이 굶주린 개처럼 물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야.”
국왕의 말이 끝나고 아이반 왕자가 입을 열었다.
“좋든 싫든 간에 경도 이제 정치판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잘 이용하면 정상에 서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게 될 거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테일러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일 쉬바스 백작의 어리석음에 가슴이 답답했다.
프랑츠 제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노리고 있는 지금, 평소처럼 단단하게 뭉쳐도 모자랄 지경인데, 방해를 하겠다고 나서는 귀족이 있다니.
그의 어리석음에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사우스 왕국이라서 조금 나은 편이었다.
만약 프랑츠 제국의 정치판이었다면 겉으로는 웃으며 지지를 표하겠지만, 뒤에서는 암살자를 보내 적을 몰살시켰을 것이다.
알현이 끝나고 테일러는 왕성을 나와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수도답게 깔끔한 도로에는 마법등이 가득했고, 사람은 많았으며 가끔 왕국군 군복을 입은 기사나 병사도 만날 수 있었다.
“엘런데일스 후작을 만나러 왔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테일러의 방문은 미리 전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비병은 테일러의 신분만 확인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집무실 앞에서 다시 한번 더 확인 작업을 거치자 집무실 문이 열리고 엘런데일스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책으로 가득한 집무실의 중앙 거의 끝에 있는 의자에 엘런데일스 후작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서류가 가득 쌓인 책상이 있었다.
왕국 정보부의 특수 요원들이 넓은 집무실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었고, 고위 기사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한 고위 기사 2명이 엘런데일스 후작을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위 기사도 아니고, 왕국 정보부 요원도 아닌 처음 보는 얼굴이 한 명 있었는데, 엘런데일스 후작은 그를 자신의 아들인 게스 엘런데일스라고 소개했다.
아버지를 닮아서 게스 엘런데일스 또한 안경을 끼고 있었다.
“테일러 경. 만나고 싶었습니다. 게스 엘런데일스라고 합니다.”
테일러를 발견한 게스 엘런데일스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일을 물려 받기 위해 왕국 정보부에서 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일러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그의 영웅적인 행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테일러도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했다.
“게스. 나가 있거라.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은 게스 엘런데일스를 내보내고 중앙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바짝 붙어 있는 의자를 빼내 앉았다.
“앉게.”
그는 테일러를 의자에 앉혔다.
의자에 앉은 테일러의 시선이 엘런데일스 후작에게 집중되었다.
그 시선에서 부담감을 조금 느끼며 엘런데일스 후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법을 찾았네.”
“정말입니까?”
테일러의 몸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호위에 배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국 정보부 특수 요원은 순간 암기가 들어 있는 군복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론 테일러의 행동을 지켜본 뒤 바로 손을 빼기는 했지만, 옆에서 같이 호위를 수행하고 있던 상관은 마음속으로 부하 특수 요원의 섣부른 행동에 대해 기록했다.
“진정하고 앉게.”
“죄송합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의자에 앉았다.
테일러는 엘런데일스 후작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방법을 찾았다는 것은 분명 기쁜 소식인데 후작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 모습에서 테일러는 작은 불안을 느꼈다.
“일단 마력 탈진을 회복하기 위해선 성녀의 축복이 필요하네. 잘 알겠지만, 로렌시아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축복이지.”
“걱정 없습니다. 저희 파티에는 실비아 그레이가 있습니다.”
테일러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파티에는 성녀 실비아 그레이가 소속되어 있었다.
그녀의 성격이 별나다고는 하지만 목숨을 구해준 가이우스를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실비아에게 가 봐야겠습니다.”
“일단 앉게나.”
의자에서 다시 다급하게 일어서려고 하는 테일러를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은 다시 앉히며 테이블의 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다.
조금 초조한 듯 한참을 씹은 뒤에서야 삼킨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이 엘프 왕의 심장이 필요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