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89화
35장 하이 엘프 여왕의 눈물(2)
테일러의 예상대로 가이우스는 숙소에 있었다.
다만, 테일러의 예상과 조금 벗어난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평소라면 훈련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어야 할 알버트 후안이 가이우스의 곁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미 들어와 있지 않은가? 어서 오게.”
가이우스는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거리가 많은 테일러에게 자신의 일로 인해 과한 신경을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버트. 오늘 훈련은 쉬기로 하신 겁니까?”
“네. 주군. 가이우스가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조금 있다가 중심도시 시내에 기분전환 겸 구경이라도 갈까 생각 중입니다.”
테일러의 물음에 알버트가 대답했다.
과거와 다르게, 테일러는 기사단장이 되고 난 후 바쁜 탓에 훈련을 조금 게을리하고 있었다.
그런 테일러와는 다르게 알버트는 매일 같이 훈련을 잊지 않고 챙기고 있었다.
알버트의 그런 점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부지런했다.
높은 벽이 보이더라도 꾸준히 수련해서 돌파하는 타입이었다.
알버트가 훈련을 쉬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바쁘지 않으십니까? 주군.”
알버트가 물었다.
기사단장이 된 이후, 테일러는 늘 바빴다.
“엘런데일스 후작께서 휴식 명령을 내렸습니다. 당분간은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테일러의 활약으로 왕국의 그림자 기사단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당장 제이드 기사단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엘런데일스 후작은 실버레인 중심도시에서 잠시 휴식하며 그동안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낸 후에 수도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덕분에 테일러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이거, 발터 슐츠 준남작께서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대화를 나누느라, 깜빡 잊을 뻔했던 과자 주머니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린 테일러는 군복의 안주머니에서 발터 슐츠 준남작이 준 과자 주머니를 꺼냈다.
고소한 향기가 방 안에 퍼졌다.
과자의 고소한 향기를 맡은 가이우스의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자주색 주머니를 받아든 가이우스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열고 과자를 하나 꺼내 베어 물었다.
“호오. 제법 맛있군. 수도에서 내가 즐겨 찾는 곳만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네.”
“떠나기 전에 슐츠 준남작을 만날 일이 있으면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가이우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테일러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럼 시내를 둘러보러 나갈까요?”
테일러의 말에 두 사람은 서둘러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숙소를 나서는 순간, 하이 엘프 일리아 웨스트우드와 마주치게 되었다.
“외출하시나 봐요.”
편한 여행복 차림의 일리아가 물었다.
그에 답하기 위해 테일러는 입을 열었다.
“예. 잠시 시내를 둘러볼 생각입니다. 이전에 실버레인 중심도시에 왔을 땐 바빠서 둘러보지 못했으니까요. 기분 전환도 할 겸 잠시 둘러볼 생각입니다.”
“저도 같이 가요!”
그렇게 해서 일리아도 시내 관광 파티에 합류하게 되었다.
네 사람이 실버레인 중심도시의 상점가에 출현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눈부신 외모의 하이 엘프 일리아 탓이었다.
간편한 여행복을 입었지만, 그녀의 눈부신 외모를 가릴 순 없었다.
사우스 왕국군 군복을 입은 두 명의 기사와 로브를 걸친 한 명의 고위 마법사도 다른 곳에선 나름 쉽게 볼 수는 없었지만, 북부 군단의 사령부가 위치해 있는 실버레인 중시도시에서 기사와 마법사는 흔히 볼 수 있었다.
“죄송해요. 급하게 따라나선다고 후드를 잊었네요.”
제이드 기사단원들은 일리아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녀는 주둔지에서는 후드를 쓰지 않았지만, 외출을 할 때에는 언제나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에 시선을 피하고자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오늘은 급하게 따라나선다고 후드를 미처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뭐, 가끔은 이렇게 시선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알버트, 가이우스.”
“물론입니다. 주군.”
“뭐, 가끔은 괜찮네만.”
그들의 대답에 일리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처음 합류할 때만 해도 그녀는 테일러를 제외한 파티원들에게 차가운 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티원들과 대화도 자주 나누고 친해지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테일러와 알버트, 가이우스 그리고 일리아는 먼저 제과점에 들러 과자를 몇 가지 골랐다.
그리고 다른 제과점과 과자 상점에 들러 맛을 보고 쇼핑을 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마법용품 상점이 눈에 띄었지만, 가이우스는 눈길을 한 번 준 뒤 말없이 지나쳤다.
예전에는 마법 상점에 자주 들리던 그였다.
그런데 아쉬움 없이 지나치는 모습이 의아했다.
“가이우스. 오늘은 특별히 제가 마법용품 하나 사드리겠습니다. 이번 임무의 성공으로 상여금을 받아서 여유가 있습니다.”
뱀파이어 대공 데네브를 처치했다는 사실에 사우스 왕국의 국왕은 크게 기뻐하여 테일러와 제이드 기사단 모두에게 상여금을 하사했다.
테일러 역시 상여금을 받았고, 현재 왕국 은행에 적지 않은 양의 금화가 보관된 상태였다.
왕국 은행에선 고객들의 정보를 마법사들이 마법망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예금을 한다면 왕국 은행 어느 곳에서든 보관된 돈을 찾을 수 있었다.
마법용품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침울해 있는 동료를 위해 그 정도는 아깝지 않았다.
말을 꺼내고 난 뒤에서야 테일러는 가이우스가 돈이 없어서 마법 상점을 지나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이우스 역시 제이드 기사단원이었기 때문에 상여금을 받았다.
아마 그가 마법 상점을 지나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이제 마법을 쓰지 못할 수도 있는데, 저런 거 사서 뭐하는가. 돈만 버리는 거지.”
가이우스의 말을 들은 테일러는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발터 슐츠 준남작이 건넨 과자는 건네주었지만 엘런데일스 후작이 방법을 찾고 있다는 말은 전해주지 않은 것이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실책을 인지하고는 서둘러 입을 열어 엘런데일스 후작이 방법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가이우스에게 전달했다.
어두웠던 가이우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고맙네. 하지만 오늘은 술이 마시고 싶군. 한 잔 사주겠나?”
“문제없습니다. 주점으로 가시죠.”
테일러는 앞장서서 걸었지만 이내 주변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그나마 주변 지리에 밝은 알버트 후안에게 선두를 양보했다.
알버트의 안내를 받아 근처의 주점으로 향한 그들은 주점의 문을 열고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에 홀로 술을 마시고 있는 레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술을 마셨는지 빈 병이 테이블 위에 가득 있었다.
술에 잔뜩 취해 약간은 흐릿한 레드의 눈동자가 테일러를 발견했다.
“아, 기사단장 왔네. 이쪽으로 와.”
테일러와 일행은 거절하지 않고 레드의 테이블에 앉았다.
알버트가 주문을 하는 사이, 테일러는 레드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꽤 취해 있었다.
“속상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테일러의 질문에 레드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기사단장. 나 같은 건 없어도 되지?”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레드는 안주를 집어 먹었다.
“아니, 그렇잖아. 다들 너무 화려한데, 나만 초라한 것 같아서.”
“당신은 초라하지 않아요. 레드. 유적에서 저희를 지키기 위해 싸우셨던 모습. 저와 실비아는 기억하고 있어요.”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일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레드는 뱀파이어 대공 데네브로부터 실비아와 일리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싸웠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일리아와 실비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초라하지 않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동료입니다.”
테일러가 일리아의 말을 보조했다.
레드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술잔을 채웠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 * *
요크 벨라크루소 준남작이 죽었다.
그는 평소 그림자 기사단에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기에 그를 아는 기사단원은 많지 않았지만, 아카사 유적에서 제이드 기사단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림자 기사단 전체에 순식간에 퍼졌다.
“들었어? 주군께서 직접 계획한 작전이 또다시 실패했다고 해.”
“나도 들었네. 요크 벨라크루소 준남작이 전사했다는군.”
프랑츠 제국의 수도 로열 프랑츠에서는 그림자 기사단의 기사단원 두 명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은 만약을 위해 주변을 경계하면서도 위험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요즘 주군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야.”
콧수염을 기른 그림자 기사단원은 그림자 대공의 상태가 이전과는 다르다고 지적했고 적발의 그림자 기사단원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림자 기사단 내에서 그림자 대공의 입지는 절대적이었지만 연이은 패배로 인해 그 바위 같은 입지에 실금이 생기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두 그림자 기사단원의 대화 같은 불경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적발의 그림자 기사단원이 입을 열려는 순간, 날카로운 무엇인가 그의 목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적발의 그림자 기사단원의 머리가 미끄러지듯이 옆으로 흘러내리고 잘린 목에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파토!”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콧수염을 기른 그림자 기사단원은 경악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파토의 목을 자른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 밤의 그림자…….”
콧수염을 기른 그림자 기사단원은 눈앞의 존재가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자처럼 긴 은발에 푸른 눈을 가진, 검은 전신 판금 갑옷으로 무장하고 기다란 검을 든 그는 그림자 기사단의 2인자 하야드 나이트쉐도우 후작이었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불충한 대화를 그가 들었다는 것이다.
“주군에 대한 불충은 죽음이다.”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하며 하야드 나이트쉐도우 후작은 검을 휘둘렀다.
“커헉!”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콧수염을 기른 그림자 기사단원이 절명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한 나이트쉐도우 후작은 달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돌프 백작에게 일러 특별헌병단을 움직여야겠군. 중앙이 이 정도로 혼란스러울 정도면 지방과 외국은 더 할 것이다.”
아돌프 백작은 그림자 기사단 소속 특별헌병단의 사령관이었다.
중앙의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보아 지방과 외국에 나가 있는 그림자 기사단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리라 판단한 나이트쉐도우 후작은 아돌프 백작에게 지시를 내려 특별헌병단을 움직이게 하기로 결정했다.
* * *
실버레인 후작령의 중심도시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한 테일러는 편의를 봐 준 실버레인 후작에게 감사 인사를 남긴 후 기사단을 움직여 수도로 향했다.
그림자 기사단이 여전히 제이드 기사단을 노리고 있었지만, 테일러의 활약으로 세력이 상당히 줄어든 탓에 그들은 함부로 제이드 기사단을 공격하지 못했다.
덕분에 제이드 기사단은 수도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사우스펠에 도착한 테일러는 즉시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유리 사우스 국왕의 부름을 받는 바람에,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을 만나러 가는 것은 당장 그만두고 국왕을 알현하게 되었다.
여러 종류의 꽃이 피어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정원을 지나쳐 중앙 홀의 입구에 도착했다.
고위 기사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한 고위 기사 2명이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서 있었다.
“테일러 경이십니까?”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실 시종은 문을 열고 들어가 국왕에게 테일러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