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79화
31장 하츠 실버레인 후작(2)
황궁 내부에 위치한 그림자 대공의 집무실로 소리 없이 향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으니.
전신을 보호하는 검은 전신 판금 갑옷으로 무장하고 투구의 면갑까지 내린 그는 밤의 그림자라고 불리며 그림자 대공의 오른팔이라고도 불리는 하야드 나이트쉐도우 후작이었다.
소리 없이 접근한 그를 뒤늦게 알아본 그림자 기사단원들은 옆으로 물러났고 그런 그들을 지나쳐 나이트쉐도우 후작은 집무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주군. 나이트쉐도우입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분명 낮이지만 어둠에 지배당하고 있는 집무실 안으로 그림자처럼 부드럽게 미끄러지듯이 나이트쉐도우 후작이 들어섰다.
“나이트쉐도우 후작인가? 사우스 왕국의 소식을 가져온 것이냐.”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의 목소리는 밝았다.
충신 칠흑의 기사 클라크 위스펠 남작을 사우스 왕국으로 보낸 뒤로 긍정적인 소식이 연이어 그의 귓가를 울렸기 때문에 이번에 나이트쉐도우 후작이 가져온 소식 또한 당연히 긍정적인 소식일 것이라 예상한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나이트쉐도우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승전이겠지?”
승전보를 기대하는 그림자 대공의 모습에 하야드 나이트쉐도우 후작의 면갑 아래 숨겨진 얼굴이 굳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주군. 그림자 기사단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당하고 패주하였으며, 칠흑의 기사 클라크 위스펠 남작은 전사하였습니다.”
하야드 나이트쉐도우 후작의 입 밖으로 충격적인 소식이 흘러나오고 밝은 얼굴로 집무실을 서성이던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의 발걸음이 멈췄다.
“누구냐. 도대체 누가 위스펠 남작을 죽였다는 말이냐.”
충신이 전사했다는 사실에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가까스로 이탈하려는 정신을 붙잡고 물었다.
하야드 나이트쉐도우 후작은 고개를 숙인 채 그림자 기사단의 정보기관에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이드 기사단의 기사단장 테일러입니다.”
“또 그 녀석이라고?”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의 붉은 눈이 살기에 차올라 서슬 퍼런 빛을 발했다.
테일러.
최근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임의 버그 같은 존재.
알 하이자르는 그가 사소한 버그라고 생각했었다.
“단순한 버그가 아니군. 이건 심각한 위협이다.”
그림자 대공이 중얼거렸다.
그를 단순한 버그로 생각하고 대응하는 것은 이제 곤란했다.
그를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그림자 기사단의 전력을 퍼부을 필요가 있다고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는 생각했다.
알 하이자라, 이상현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그는 심히 고민한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이트쉐도우 후작. 지금 당장 산 크루소 백작과 그림자 기사단원 1천을 사우스 왕국으로 보내라.”
“주군. 산 크루소 백작은 남부 하이크 왕국에서 반란을 진압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1천이나 되는 기사단원을 남부로 보내게 된다면 황금 군단을 견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산 크루소 백작은 그림자 기사단 전투단의 부사령관으로, 사령관인 나이트쉐도우 후작을 보필하는 그림자 기사였다.
그는 지금 남부 하이크 왕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그림자 기사단을 이끌고 남부 하이크 왕국에 가 있었다.
그것을 순간 깜빡 잊을 정도로 그림자 대공은 지금 상당히 분노해 있었다.
그는 이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계속해서 자신을 방해하는 테일러라는 존재를 어떻게든 지우고 싶었다.
“그렇다면 준남작 2명과 마력검의 사용이 가능한 정예 기사단원 50을 뽑아보내.”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남부 레인저 여단의 레인저 중대가 다수 그랑키아 숲 국경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전처럼 쉽게 국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사우스 왕국의 국왕은 그림자 기사단이 국경을 상습적으로 넘는다는 북부 군단과 정보부의 보고를 받고 위험한 몬스터가 다수 존재하는 숲에 파견되어 근처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남부 레인저 여단의 레인저 중대를 다수 그랑키아 숲 국경에 투입했다.
그들은 산과 숲에서 적을 죽이고 찾는 것에 신들린 듯한 모습을 보이는 최정예들.
그림자 기사단이라고 할지라도 이전처럼 쉽게 국경을 넘는 것은 이제 힘들었다.
국경을 넘으려면 1차적으로 그랑키아 숲의 몬스터들과 교전으로 인한 전력 소모를 피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남부 레인저 여단의 레인저 중대와 교전이 벌어진다면 그림자 기사단의 피해는 상당할 것이었다.
“그렇군.”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는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술을 한 모금 마셨지만 쉽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주군…….”
나이트쉐도우 후작의 말에 그림자 대공은 몸을 돌려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일단 당분간은 사우스 왕국의 그림자 기사단에 대한 추가 지원을 보류한다. 셀본스에게 전달하도록.”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는 이를 악물며 간신히 명령을 내린 후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술맛이 상당히 썼다.
* * *
823년 9월의 끝.
테일러가 이끄는 제이드 기사단은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영주로 있는 실버레인 후작령의 중심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실버레인 후작은 자신의 차남이자, 북부 늑대 기사단의 기사인 하인즈 실버레인 경을 보내 테일러와 제이드 기사단을 안내하게 했다.
“하인즈 실버레인입니다. 실버레인 후작령은 경과 기사단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유력 가문의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실버레인 경은 예의 바르게 말에서 내려 테일러를 맞이했다.
테일러와 파티 동료들 또한 말에서 내려 그의 인사를 받았다.
“환영에 감사합니다. 실버레인 경.”
“중심도시 안에 주둔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실버레인 경.”
테일러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같은 왕에게 충성하는 입장이라고는 하나, 영지군이 아닌 다른 곳의 군대를 중심도시 안에 들여보내는 것은 상당한 배려였다.
제이드 기사단을 지휘하여 주둔지로 이동시킨 테일러는 파티원들과 함께 하츠 실버레인 후작을 만나기 위해 하인즈 실버레인 경을 따라 영주성으로 향했다.
북부 군단의 사령부가 위치한 영지의 영주성 답게 방어가 튼튼했고 무장 상태가 좋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실버레인 후작의 집무실에 도착하니 기사 2명이 양옆에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후작의 넓은 집무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츠 실버레인 후작으로 추정되는 이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알버트와 같은 고위 기사 브로치를 한 고위 기사가 3명 정도 옆에 있었고 푸른 로브를 걸친 마법사가 한 명 있었는데, 가이우스와 같은 브로치를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위 마법사가 분명했다.
“어서 오게.”
하츠 실버레인 후작이 깃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앉게나.”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테이블에 붙어 있는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테일러를 시작으로 그의 파티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앉자 실버레인 후작이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의 뒤로 고위 기사 한 명이 바짝 붙는 것을 실버레인 후작은 손을 드는 것으로 말렸다.
“산디아르 루폰 남작. 이들은 모두 국왕 폐하께 충성하는 자들이네. 과민 반응하지 않아도 좋네.”
“알겠습니다.”
후작의 호위대장을 맡은 고위 기사 산디아르 루폰 남작은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리고 그런 그를 대신하여 고위 마법사 한 명이 살짝 끼어들었다.
“저는 괜찮겠지요?”
“물론이네. 발터 슐츠 준남작.”
하츠 실버레인 후작의 허락을 맡은 슐츠 준남작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가이우스와 마주 보는 위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가이우스를 향해 나이에 맞지 않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가이우스는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이드 기사단의 기사단장 테일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가이우스, 알버트, 일리아, 알폰스, 실비아, 레드라고 합니다.”
“모두 들어본 이름들이군.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다 보니 여러 이름들을 듣게 돼서 말이네.”
“그렇습니까?”
하츠 실버레인 후작은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녀가 다과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갔다.
“중심도시에서 얼마나 머물 생각인가? 그랑키아 숲에서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만큼, 충분히 쉬었으면 좋겠네.”
“3일 정도는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지원병 편성을 끝내주셨으면 합니다.”
다행히 잘 정비된 도로가 아닌 몇 개의 숲을 가로질러 온 덕분에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고 3일 정도는 쉴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었다.
병력 보충을 위해 오랜만에 중심도시에 들린 김에 테일러는 가능하면 기사단원들에게 많은 시간을 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북부 늑대 기사단과 겨울바람 기사단에서 50명의 기사단원을 보충해주겠네. 3일이면 충분한 시간이니 걱정하지 말게.”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군. 전투를 끝내고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만 돌아가서 쉬게나.”
“배려에 감사합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파티원들과 함께 외성에 마련된 주둔지 옆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쾌적하고 편안했고 덕분에 모두가 일찍 잠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테일러는 알버트를 포함한 고위 기사들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회의를 끝낸 뒤 알버트, 그리고 가이우스와 함께 점심을 끝내고 주둔지 훈련장의 계단에 앉아 쟈크 경이 기사단원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일러!”
앙칼진 목소리가 들리자 훈련을 구경하고 있던 3명의 얼굴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가벼운 차림으로 테일러를 향해 달려오는 하이 엘프 일리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둔지를 경비하는 북부 군단 병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달려온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테일러의 곁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이우스. 과자를 사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오! 과자? 그것 좋지. 어서 안내하게나.”
과자를 사주겠다는 알버트의 제안에 고위 마법사 가이우스는 어린아이답게 순진한 웃음꽃을 피운 채 알버트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알버트는 가이우스를 데리고 가면서 테일러를 향해 묘한 눈길을 보냈다.
마치 방해꾼은 이만 사라지니 잘 해보라는 그런 뜻으로 보였다.
“테일러.”
일리아는 조용한 목소리로 테일러를 불렀다.
“네. 일리아. 말씀하세요.”
“그리드 평원에서의 전투 때, 당신은 심한 상처를 입었었죠.”
일리아는 클라크 위스펠 남작의 그림자 기사단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그리드 평원 전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