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70화
27장 마병기 ‘전쟁의 나팔’(1)
823년 3월.
그림자 기사단을 한 차례 격퇴했지만, 또다시 공격을 걸어올지도 몰랐기 때문에 라모르 르와이얄과 대장장이 길드의 안전을 위해 레딘 광산 마을에 제이드 기사단이 주둔한 지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림자 기사단과 대적하는 것에 전권을 일임 받은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은 수도 인근을 위협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았다며 라모르 르와이얄과 대장장이 길드의 안전을 위해 당분간 광산 마을에 주둔해 줄 것을 명령했다.
제이드 기사단원 대부분은 납득했지만, 파티원 중에서 실비아가 레딘 남작령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광산 마을에 당분간 머물러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토라지는 바람에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알폰스가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동안 다들 광산 마을 생활에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가출할 당시만 해도 사이가 나빴던 스승과 언제 관계를 회복하였는지 통신 마법을 통해 심심하면 연락을 해 대화를 나누거나 광산 마을을 돌아다니며 상점가를 방황했다.
광산 마을은 작은 마을이었지만 상점이 몇 곳 모여 있는 곳이 있었고, 모두가 그곳을 상점가라고 불렀다.
다행히 가이우스가 좋아하는 과자 상점도 있었다.
덕분에 테일러는 가이우스의 불평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알버트는 쟈크 경과 살라다르 경, 로펜 경과 같은 제이드 기사단의 고위 기사들과 친해져서 테일러와 함께하지 않을 때는 그들과 수련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고위 기사 작위를 얻고 바로 테일러와 여행을 함께하기 시작해서 다른 고위 기사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적었던 알버트에겐 유익한 시간이었다.
일리아는 오랜만에 자연과 함께할 시간을 가져서 기분이 좋은 것인지 늘 웃고 다녔고 레드도 에이스 레인저답게 근무가 없을 때는 가끔 산속을 누비며 토끼나 새 같은 것들을 잡아 왔다.
가끔은 기사단원 2명이나 3명을 데리고 가서 사슴을 잡아오기도 했다.
실비아는 성격은 조금 별나지만 그래도 성녀라고 일과 대부분을 기도하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광산에서 부상자가 발생하면 신성 기도문으로 치료해주기도 했다.
물론 치료하고 나선 늘 불평을 했지만.
알폰스는 평소처럼 실비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대규모 인원에 광산 마을의 작은 여관은 터져나갔고, 수습 기사들 같은 경우엔 광산 마을의 공터에서 천막을 치고 불편한 생활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여관이 제이드 기사단 전원이 숙박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밤바람은 여전히 차갑군.”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광장으로 나온 테일러는 분수대 앞의 벤치에 앉았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잠시 외출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지금 청색 군복을 입고 있을 뿐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물론 언제 무슨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검은 허리에 차고 있었다.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테일러를 향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여린 그림자가 있었다.
기척을 느낀 테일러의 시선이 그림자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이윽고 그림자는 광장 중앙의 어둠을 몰아내는 마법등의 영향권으로 들어왔다.
마법등의 빛이 어둠을 걷어냈다.
탐스러운 금발에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
조각 같은 얼굴과 앵두 같은 입술.
그리고 오똑한 콧날과 긴 귀.
그녀는 에이옌 숲에서부터 따라온 하이 엘프 일리아 웨스트우드였다.
“고민이 있으신가 봐요?”
그렇게 말하며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테일러의 옆에 밀착해서 앉았다.
일리아 정도 되는 미녀가 옆에 바짝 붙어 앉자 테일러는 조금 부담을 느끼고 살짝 옆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일리아는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잠도 오지 않고, 그냥 생각이 많아지는 밤입니다. 고민은 없습니다. 일리아.”
“고민이 있다는 것과 생각이 많아진다는 비슷하게 들려요.”
“그렇습니까? 하하.”
테일러의 웃음에 일리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이내 뭔가 결심한 듯 비장한 각오가 느껴지는 얼굴로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테일러. 제가 좋은 곳을 알아요. 따라오시겠어요?”
“좋은 곳이요?”
테일러의 물음에 일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면 생각이 정리될 거예요.”
“가깝습니까?”
멀리 있다면 곤란했다.
“네.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아요.”
“흠.”
걸어서 30분이라면 다녀올 만했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한 번 가보죠.”
테일러의 승낙에 일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최근 발견한 비밀 장소로 그를 안내했다.
둘은 30분 정도의 시간을 걸어서 한 폭포 앞에 도착했다.
“이곳이에요.”
“아름답군요.”
테일러는 감탄했다.
폭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아름다웠다.
달빛을 받은 폭포수는 은빛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떨어진 물은 물길을 따라 계곡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광산 마을에 오고 나서 가끔 머리가 복잡할 때 찾아와서 생각을 정리하고는 해요.”
테일러를 생각하는 일리아의 머릿속은 언제나 복잡했다.
특히 자신의 마음이 좀처럼 전해지지 않자 더욱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곳에 찾아와서 폭포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정리하면 신기하게도 복잡했던 심정이 금세 정리되었다.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테일러 또한 일리아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폭포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으니, 부모님 생각과 피로 얼룩졌던 전생으로 복잡했던 심정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테일러는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에 눈을 떴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리아. 즉시 돌아가야겠습니다.”
“네? 네.”
갑작스러운 테일러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리아는 질문 없이 그를 따라 광산 마을로 돌아왔다.
광산 마을로 돌아온 테일러는 가이우스를 깨웠다.
가이우스는 불평을 늘어놓으려 했지만 심각한 테일러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나를 깨운 이유가 무엇인가?”
쏟아지는 잠의 정령을 쫓아내며 가이우스가 물었다.
테일러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국 정보부로 통신을 보내서 제 부모님이 무사한지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테일러는 그림자 기사단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는 그를 처단하기 위해 칠흑의 기사까지 보냈다.
그림자 기사단은 정보기관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테일러의 부모님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복수를 위해서 테일러의 부모님께 해를 가할 수도 있었다.
가이우스는 짧은 순간에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즉시 왕국 정보부의 고위 마법사에게 통신 마법을 연결했다.
짧지만 길게 느껴졌던 침묵이 지나간 끝에 가이우스가 입을 열었다.
“노스리빌 백작령에 연락해서 수도로 자네의 부모님을 데려오겠다고 하네.”
“부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군요.”
“별일 없을 것이네.”
걱정하는 테일러를 가이우스가 위로했다.
일리아는 말없이 조용히 테일러의 차가운 손을 잡아주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하이 엘프의 따뜻한 체온에 테일러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 * *
시간은 흘러 823년 4월이 되었다.
테일러의 부모님 두 사람은 노스리빌 영지군의 하급 장교와 10여 명의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에 도착했다.
테일러의 부모님 죠셉과 레이나는 테일러가 수도로 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임시로 레드의 여동생 아이린이 사는 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레드는 흔쾌히 허락했다.
우선은 그곳에서 지내시게 하고 빌리 엘런데일스 후작이 다시 수도로 테일러를 불러들이게 되면 그때 수도의 외성에 두 사람이 지낼 집을 구입할 생각이었다.
자유 기사 신분이었을 때는 따로 돈을 지급받지 않았지만, 제이드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되면서 정식으로 왕국군에 소속되자 기사단장으로서 적지 않은 양의 보수를 얻을 수 있었다.
거기다 최근 기부를 쉬면서 모아둔 돈도 제법 있고 최근 그림자 기사단을 연이어 저지한 공로로 받은 상금도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지낼 수 있는 작은 집을 구하는 정도는 큰 무리 없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도 상당한 타격이군.”
라모르 르와이얄이 그래도 기사단장이라고 길드 사무소에 임시로 마련해준 임시 집무실에 앉아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테일러는 집 구입에 들어갈 돈을 계산하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가 모은 돈이 제법 있다고는 하지만 작더라도 수도에 집은 구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양의 금화가 소모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 기부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고, 기부를 못한다면 더 강해지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안전도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테일러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서류 작업을 끝내고 가이우스로부터 수탈(?)한 과자를 입에 넣고 씹고 있으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벼우면서도 은밀한 걸음걸이는 레드가 분명했다.
“들어와도 좋습니다. 레드.”
테일러의 허락이 떨어지자 노크 없이 문이 열리고 레드가 걸어 들어왔다.
“언제 봐도 놀라워. 마치 레인저의 직감이 있는 것 같은걸?”
감탄하는 레드를 보며 테일러는 대답 대신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실제로 테일러는 기척을 감지하고 적의 수를 파악하거나 공격 경로를 읽어내는 레인저의 직감이라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입니까?”
“아, 오늘 밤에 술 약속 때문에. 나와 알버트는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 야간 순찰이 있거든.”
“아, 그러고 보니.”
테일러는 순찰 근무표를 꺼내들어 살폈다.
레드의 말대로 오늘 레드와 알버트는 야간 순찰 근무가 잡혀 있었다.
순찰 근무표는 로미오 로펜 경 담당이었기 때문에 테일러도 몰랐던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오늘 테일러는 파티원과 제이드 기사단의 고위 기사를 전부 모아서 주점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가질 생각이었다.
레드와 알버트가 빠져서 아쉽지만 모임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난 가볼게.”
용건을 해결한 레드는 손을 흔들며 망설임 없이 임시 집무실을 떠났다.
테일러는 서류 정리에 몰두했다.
저녁 식사를 한 뒤 서류 정리를 조금 더 하자 테일러는 오늘 해결해야 할 업무를 모두 해결했다.
이제 할 일이 없어진 테일러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길드 경비대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라모르 르와이얄은 제이드 기사단을 배려하여 길드 경비대의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고집 세고 툴툴거리며 불평을 늘어놓고 다니지만, 그래도 나름 제이드 기사단을 신경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길드 경비대의 훈련장은 넓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훈련을 하기엔 충분한 넓이는 되었기 때문에 제이드 기사단은 이 훈련장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청색 망토를 두르고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테일러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제이드 기사단은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테일러도 이런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훈련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기사단장. 오셨습니까?”
훈련을 감독하고 있던 살라다르 경이 청색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와 예의를 차렸다.
테일러에게 반말을 찍찍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던 그가 이렇게 예의를 갖추다니, 정말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훈련을 계속하도록. 잠깐 시간이 나서 산책삼아 온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알겠습니다.”
살라다르 경은 고개를 숙인 뒤 다시 훈련장으로 달려가 훈련의 지도감독을 했다.
시간은 흘러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하늘은 완전히 어둠으로 물들었다.
훈련장에서 더운 땀을 흘리던 기사단원들도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기사들은 여관으로 향했고, 수습 기사들은 공터에 설치한 불편한 천막으로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술자리를 가지기로 한 시간이 다가왔다.
살라다르 경이 테일러에게 다가왔다.
테일러는 살라다르 경과 함께 갑옷을 벗고 주점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쟈크 경이 합류했다.
“기사단장. 지금 시간이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일을 끝낸 광부들과 대장장이들이 주점에 모여들 시간이니 말입니다.”
쟈크 경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광산 마을의 주점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주점은 규모가 큰 편이었지만 대장장이들과 광부들은 술을 상당히 좋아하기 때문에 매일 밤이면 주점에 남는 자리는 없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가이우스가 미리 자리를 잡아두기로 했거든.”
“그렇군요.”
기사단 업무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고위 마법사 가이우스였다.
그가 기사단에서 맡은 임무는 다른 지역의 고위 마법사와의 통신으로 기사단에 신속하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
그래서 평소에는 할 일이 없었다.
평소 할 일이 없는 가이우스는 과자 상점에 들리거나 할 일 없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가 많았다.
쟈크 경 그리고 살라다르 경과 함께 주점에 도착하니 가이우스가 자리를 잡고 음식까지 시켜 먹고 있었다.
다행히 술은 먹지 않고 늦은 저녁을 해결하고 있었다.
“아, 왔는가, 다들?”
닭다리를 주욱 뜯어 씹다가 삼키고는 가이우스는 일어나 테일러들을 반겼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이우스.”
테일러가 식탁에 붙어 있는 의자를 꺼내 앉으며 말했다.
“술은 일행이 모두 오면 주문하도록 하죠.”
“네.”
“그러는 게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