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65화
25장 부러진 검(1)
늦은 밤 레딘 남작령의 레딘 숲에 진입한 테일러는 불안한 예감이 들어 기사단을 정지시켰다.
“기사단장. 무슨 일입니까? 한시가 급한 일로 알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테일러의 행동에 케이트 경이 의문을 표했다.
테일러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과연 호위대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을까?”
테일러의 말에 그의 주변에 있던 기사단원들과 파티원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보고를 받고 몇 시간이 흘렀다.
전령이 달려올 시간까지 합하면 더 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 긴 시간동안 전투가 이어지고 있을 확률은 낮았다.
“그렇다면 이미 전투는 끝났을 확률이 높겠군요.”
거대한 방패를 안장에 고정한 알폰스가 말했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알폰스. 이미 전투가 끝나고 로니엄 공은 소수의 호위대와 함께 도주 중이거나, 적에게 사로잡혔을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적도 로니엄 공이 왕족이라는 것을 알고 공격했을 테니, 아직까진 무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군대가 나타나면 로니엄 공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구먼!”
가이우스가 끝을 장식했다.
그는 고위 마법사답게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편이었다.
“레드.”
테일러는 레드를 호출했다.
테일러보다 앞에서 호위대의 흔적을 추적하고 있던 레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몰아 테일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테일러에게 향했다.
“나를 불렀나. 파티장. 아니, 기사단장이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호위를 붙여줄 테니 적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레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는 남부 레인저 여단의 에이스 레인저였어.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단, 나 혼자 가겠다. 그게 편해.”
에이스 레인저.
레인저 계열의 고위 기사라고 할 수 있는 레벨로 그 수는 고위 기사들보다 적다고 알려졌다.
실제로 레인저의 길을 걷는 이들이 적었기 때문에 에이스 레인저의 수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에이스 레인저들로만 구성된 분대는 숲에서는 절대 전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그만큼 지독한 생존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맡기겠습니다.”
테일러는 모든 것을 레드에게 맡기기로 했다.
* * *
테일러의 지시를 받은 파티원 레드는 말도 없이 활과 화살, 그리고 장검과 손도끼 가볍고 소리가 나지 않는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채 달빛이 비치는 숲길을 달려나갔다.
비릿한 혈향이 그의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할 때 아래를 내려다보니 쇠사슬 갑옷에서 뜯겨 나온 듯 보이는 쇠사슬 조각이 보였다.
시선을 다시 앞으로 향한 채 어둠 속에 녹아들어 천천히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큰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방이 시체로 가득했고, 부서진 병장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청색 군복을 입고 푸르른 청색 망토를 두른 왕국군의 시체가 사방에 늘어져 있었지만, 적으로 보이는 이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레드는 의문을 품었다.
적의 시체가 없다는 것은 시체의 수습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드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수풀 바로 옆에 쓰러진 시체를 발견하고 수풀로 이동해 조심스럽게 시체를 살폈다.
피는 굳어 있었고 질질 끌린 듯한 혈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연출된 상황이군. 그렇다면 여기 매복이 있다.”
레드는 결론을 내렸다.
연출된 전장이 분명했다.
아마도 적은 매복하기 유리한 지역으로 시체와 부서진 병장기를 옮겨 전장을 연출한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적의 시체는 없었고 시체를 끌어 옮긴 듯한 혈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테일러에게 전해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테일러에게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려 발걸음을 재촉하는 레드.
그런 그의 앞을 검은 그림자들이 막아섰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
달빛이 어둠을 걷어내고 날카로운 단검을 든 사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검은 칠을 한 얼굴에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사내는 웃었다.
레드는 대답 대신 조용히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해볼 생각인가? 그렇다면 고통과 함께하게 해주지. 마지막 가는 길! 고통과 함께하라!”
사내는 두 개의 단검을 뽑아들었지만 검은 마력검이 활성화되지는 않는 걸로 보아 그림자 기사단원이 아닌 고용된 암살자인 듯했다.
그의 뒤에 자리 잡은 3명의 암살자도 일제히 단검을 뽑아들었다.
“아, 그래. 한 번 해볼 생각이다.”
“근접한 이상 궁병에겐 무리다.”
암살자는 조소했지만 레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그를 비웃었다.
“나는 그냥 궁병이 아냐.”
빛의 속도로 시위를 당기는 레드.
그가 시위를 놓자 화살이 시위를 떠나 허공을 갈랐지만, 암살자는 간신히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해냈다.
“이제 끝이…… 헉!”
“나는 에이스 레인저다.”
레드의 시위에는 또 하나의 화살이 걸려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장전 속도.
레드는 암살자가 정신을 수습하기 전에 시위를 놓았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암살자의 이마 한가운데에 박혔다.
목숨이 끊어진 암살자는 허망한 표정으로 쓰러졌고, 그의 죽음을 목격한 동료 암살자 3명은 사방으로 흩어져 레드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거리를 벌려주니 고맙군!”
자신에게 날아온 단검 3자루를 여유롭게 피해내며 화살이 걸려 있는 시위를 놓는 레드.
“크악!”
비명이 터져 나오고 암살자 한 명이 나무에서 떨어졌다.
그의 가슴에는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냥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하나?”
뒤에서 들리는 서늘한 목소리에 레드는 옆으로 구르며 활을 버리고 장검을 뽑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를 단검이 스치고 지나쳤다.
레드가 암살자 한 명의 몸에 화살을 명중시키는 사이에, 뒤를 잡은 것이었다.
다른 암살자 역시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레드는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쥐고 검을 휘두르며 암살자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놈이!”
암살자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단검으로 검을 막아냈다.
그리고 레드의 급소를 노리고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다.
레드는 급소를 노리는 공격을 하는 훈련을 지독하게 받아왔다.
급소를 노리는 직선적인 공격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암살자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검으로 단검을 쳐낸 뒤 쥐고 있는 화살을 암살자의 어깨에 찔렀다.
“큭!”
어깨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전신으로 번지는 고통에 암살자의 몸이 흔들렸다.
자세가 흐트러지자 레드는 검으로 암살자의 목을 벤 후 자신에게 날아오는 또 다른 단검을 숨이 끊어진 암살자의 몸으로 막아냈다.
암살자의 몸에 단검이 박히고 그것을 다시 뽑아내는 순간 레드의 검이 그의 복부를 찔렀다.
“크악!”
암살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붉은 피가 검은 복면을 적셨다.
마지막 적을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레드는 전투 자세를 풀지 않았다.
검을 집어넣긴 했지만, 다시 활을 집어들고 화살을 시위에 걸고 주변을 경계했다.
방금 전 벌어진 전투는 조용하게 벌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매복 중이던 적이 눈치챘을 것이라고 레드는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5초도 지나지 않아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하군. 남부 레인저 여단의 레인저인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가 물었다.
그는 방금 전 처리한 암살자 3명과 다르게 철제 흉갑을 입고 있었다.
레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림자 기사단.
그림자 기사단이 분명했다.
암살단인지 전투단인지 헌병단인지 그 소속은 확실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그림자 기사단원이라는 사실이었다.
방금 상대한 3명의 암살자와는 전혀 다른 상대라는 소리였다.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엔 그곳 밥을 먹었지.”
“그렇다면 조금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림자 기사단원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드는 감각을 예민하게 키우고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다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거기냐!”
즉시 몸을 돌려 활을 조준하고 시위를 놓았지만, 화살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뿐이었다.
“유감이군. 이쪽이다.”
재빠르게 화살 하나를 다시 시위에 거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레드는 넘어지듯 몸을 굴렀다.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덕분에 그림자 기사단원이 휘두른 검을 피할 수 있었다.
그의 검에는 검은 마력검이 깃들어 춤을 추듯 일렁이고 있었다.
“제기랄.”
레드는 주웠던 활을 욕설과 함께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뽑아들었다.
마력검을 사용할 수 없는 레드는 자칫 잘못하면 검과 함께 몸까지 반 토막 날 수도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원의 눈이 빛나고 그림자 기사단원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레드는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마력검을 필사의 의지로 피해냈다.
마력검을 사용할 수 없는 그는 마력검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오직 피해야만 했다.
피해야만 살 수 있었다.
그림자 기사단원을 향해 레드의 검이 찔러 들어간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지점에 들어오는 공격에 그림자 기사단원은 피하지 않고 몸을 살짝 틀어 철제 흉갑 쪽으로 검을 유인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력이 깃든 검으로 레드의 머리를 노리고 위에서 내려쳤다.
“제기랄!”
레드는 철제 흉갑을 향해 찔러 들어가던 검을 회수하고 욕설과 함께 몸을 굴러 그림자 기사단원의 검을 피해냈다.
레드가 마력검을 사용했다면 철제 흉갑을 가볍게 뚫고 들어가 심장을 파괴할 수 있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레드는 마력검을 사용할 줄 모르는 데다가 힘도 부족해 철제 흉갑을 뚫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공격을 포기하고 회피를 선택한 것이었다.
“계속 도망치니까 짜증이 밀려오는군. 남부 레인저 여단에선 이런 것만 가르치나?”
“생존은 필수니까. 회피는 언제나 중요하게 가르쳤지.”
그림자 기사단원의 도발을 받아치며 레드는 주머니를 뒤져 천에 감싸인 둥근 폭약 2개를 꺼냈다.
그것을 꺼내 든 레드는 힘차게 바닥을 향해 던졌다.
펑!
굉음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급속도로 뿜어져 나와 사방을 점령했다.
“이 요란한 쥐새끼가 잔재주를!”
그림자 기사단원은 검은 마력검을 사방으로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하얀 연기는 더욱 집요하게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연기 틈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그림자 기사단원은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지만, 화살은 쉬지 않고 계속 날아왔다.
레드는 화살통에 든 화살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화살을 쏘았다.
그림자 기사단원가 레드가 쏜 화살을 모두 쳐내자 레드는 검과 손도끼를 든 채 그림자 기사단원을 향해 돌진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군! 쥐새끼!”
그러면서 검을 휘두르는 그림자 기사단원.
레드가 찔러낸 검은 마력검에 의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레드는 검을 버리고 손도끼를 휘둘렀다.
철제 흉갑에 손도끼가 깊숙이 박혔다.
“으악!”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림자 기사단원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레드는 그가 비틀거리는 틈에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림자 기사단원은 넘어지면서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검을 집어든 레드는 투구와 갑옷 사이의 틈, 목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목뼈를 박살 내고 관통한 검은 그림자 기사단원을 영원히 침묵시켰다.
“허억. 헉.”
레드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검을 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처음에 느꼈던 기척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흰 연기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2명 정도 더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