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51화
20장 신을 믿지 않는 성기사(1)
그레이 남매의 기억.
“빛이여!”
짧은 금발의 성기사, 알폰스 그레이가 녹색 눈을 번뜩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들고 있는 방패에서 밝은 빛이 깃들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여동생을 지키기 위해 성기사가 되었고, 성녀인 여동생의 축복을 받아 15살의 나이에 정식 성기사가 되는 기염을 토해냈다.
비록 신을 믿지는 않았지만, 성녀의 축복을 받은 덕분에 신성력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다.
“넌 지나가지 못한다!”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환한 빛이 깃든 방패를 휘두르는 알폰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환한 빛에 휩싸인 방패에 얻어맞은 그림자 기사단의 암살자는 얼굴이 완전히 박살 나 붉은 피를 흩뿌리며 멀리 날아가 뒹굴었다.
“실비아!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어!”
알폰스는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주변을 살피며 실비아의 앞으로 이동했다.
신성교의 성녀 실비아 그레이와 성기사 알폰스 그레이는 지금 그림자 기사단에 의해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끈질긴 공격에 실비아 그레이의 흘러넘치는 파도와 같았던 신성력 역시 가뭄을 겪는 땅처럼 메말라 버렸고, 알폰스 그레이 역시 상처가 누적되어 하얀 망토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갑옷도 여기저기 손상되어 있었고, 검은 손에서 놓쳐 어딘가에 떨어져 있었다.
“제길.”
주변을 살핀 알폰스는 건물의 지붕마다 가득한 검은 그림자의 향연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국왕이 사는 왕성이 있는 수도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암살자들이 움직이다니,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도로에는 이미 30여 명이 넘는 암살자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실비아의 지원을 받은 알폰스가 홀로 실비아를 지키면서 죽인 자들이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셉니다.”
“성녀가 함께 있어서 그렇지만 그것도 이제 끝입니다. 성녀의 신성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어요. 단원들을 더 투입합시다.”
성녀 실비아 그레이의 지원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잘린 팔도 붙일 수 있는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지원을 받는 천재 성기사의 무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실비아의 신성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모든 것이 훤히 보이는 지붕 위에서 그림자 기사단의 암살단 단장 두 명이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10여 명의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가 지붕에서 내려와 알폰스 그레이와 실비아 그레이를 포위했다.
“빛이여! 내게 오라!”
불안하게 눈동자를 떠는 실비아를 지키기 위해 알폰스는 다시 한번 신성력을 끌어냈다.
환한 빛이 어둠 속에서 터졌다.
이 빛기둥을 본다면 왕국군이 달려와 줄 것이다.
왕국군을 부르기 위한 일종의 신호탄이었다.
빛기둥에 깜짝 놀라 잠시 물러났던 암살자들이 알폰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중 2명은 알폰스의 뒤에서 실비아를 노렸다.
“지나갈 수 없다!”
알폰스는 눈앞에 다가온 암살자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은 뒤 빛나는 방패를 던져 실비아의 곁으로 다가온 암살자를 공격했다.
암살자 하나는 허리를 숙여 방패를 피해냈지만 뒤따라 오던 암살자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희뿌연 신성력이 깃든 방패는 예리한 칼날이 되어 암살자의 몸을 분단시킨 뒤 알폰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알폰스가 방패를 던지느라 생긴 짧은 틈을 타서 암살자 2명이 알폰스의 몸으로 파고들어 갑옷의 틈새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크악!”
방금 그 공격을 취한 그림자 기사단의 암살자는 검은 마력검을 구사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독한 훈련을 받았고, 살아 있는 인간 병기였다.
갑옷의 틈새를 노린 그 공격은 치명적이었고 알폰스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면서 그만 목숨과도 같은 방패를 놓치고 말았다.
“오빠!”
실비아의 다급한 외침이 희미해져 가는 알폰스의 정신을 깨웠다.
그는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검은 마력검이 깃든 검을 막아내기 위해 팔을 들었으나, 마력검은 갑옷과 함께 팔을 잘라내고 알폰스의 심장을 찔렀다.
“커흑!”
갑옷은 종이처럼 찢어지고 심장이 파괴되자 알폰스의 입 밖으로 붉은 피와 함께 고통에 찬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에에!”
알폰스 그레이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실비아의 뒤로 접근한 암살자는 단검을 들어 올렸다.
* * *
테일러에게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한 레드는 배후를 캐기 위해 암살을 의뢰한 고용주를 찾아갔지만, 고용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끈질긴 추격 끝에 822년 9월 레드의 고용주를 잡는 것에 성공하였다.
“즉시 고문을 시작하겠다. 준비하도록.”
여전히 고문 지휘를 맡은 테일러는 고문 기술자 토드를 불러, 고용주의 고문을 진행했다.
토드의 화려한 고문 기술의 향연이 고용주를 맞이했고, 고용주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정신은 강인했지만 3일 동안 쉬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고문 끝에 그는 결국 입 밖으로 그림자 기사단이라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림자 기사단? 프랑츠 제국의 그림자 기사단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
그의 입에서 그림자 기사단이라는 말이 나오자 테일러는 질문했고 고용주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림자 기사단.
프랑츠 제국의 그림자 대공 알 하이자르가 지휘하는 제국 최대의 특수기관으로 산하에 암살단, 특별헌병단, 이단심판단 등의 십여 개의 특수부대가 있는 무서운 조직이다.
특히 최정예가 많기로 유명했다.
“모든 것이 설명되는군.”
테일러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프랑츠 제국이 개입했다면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갑작스럽게 파괴된 억제기, 그리고 억제기가 파괴되기 전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왕국의 주요 영웅들과 인사들의 의문의 죽음.
모든 것이 프랑츠 제국의 사우스 왕국 침략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던 것이다.
프랑츠 제국이 사우스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선 그랑키아 숲을 지나야만 하는데, 그랑키아 숲에는 몬스터가 상당히 많았다.
억제기를 파괴하고 공작을 펼쳐 대부분의 몬스터를 남하시켜 사우스 왕국과 싸우게 한다면 양측의 전쟁이 끝난 후 거의 비어 있는 그랑키아 숲을 수월하게 통과해 전쟁으로 인해 힘이 다 빠진 사우스 왕국 또는 몬스터 군단을 깔끔하게 정리하면 게임이 끝난다.
사우스 왕국은 프랑츠 제국에 비해 작았지만 훌륭한 인재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미리 암살하여 몬스터 군단이 쉽게 사우스 왕국을 공격하여 유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고문은 여기서 중단한다.”
“알겠습니다.”
고문 기술자 토드는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고문 도구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테일러는 필리스터 자작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와 암살될 주요 인물들이 적혀 있는 메모를 꺼내 그 내용을 다른 종이에 옮겨 적은 뒤 고문으로 얻은 내용을 첨가하여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 작성을 끝낸 테일러는 즉시 루시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도련님께서는 지금 연무장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루시드는 집무실에 없었다.
집무실을 지키고 있는 기사는 루시드가 연무장에 있다는 정보를 테일러에게 알려주었고, 테일러는 즉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무를 추구하는 귀족 가문답게 넓은 연무장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있었고, 중앙에서 루시드 필리스터가 허수아비를 향해 레이피어를 찌르고 있었다.
“루시드!”
루시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는 테일러.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허수아비의 가슴과 배에 레이피어를 찔러 넣던 루시드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테일러를 발견하게 되자 환한 미소와 함께 반겼다.
“테일러! 여긴 어쩐 일인가?”
“이것을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그늘로 가지.”
보고서를 받아든 루시드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낸 뒤 그늘로 테일러를 인도했다.
9월이었지만 아직 태양은 뜨거웠다.
“후우! 어디 한번 읽어볼까?”
그늘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루시드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로부터 시원한 물을 받아 들이킨 뒤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테일러가 건넨 보고서를 읽어내려갔다.
웃음기 가득했던 표정을 짓고 있던 그였지만 보고서를 읽어내려 갈수록 루시드의 얼굴은 돌처럼 굳었다.
마침내 보고서를 다 읽은 그는 심각한 얼굴로 테일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게 사실인가?”
테일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심각하군.”
“국왕 폐하께 전달해주셨으면 합니다.”
“나만 믿게. 아버지를 통해서 국왕 폐하께 전달할 것이네.”
루시드 필리스터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테일러는 국왕의 호출을 받아 왕성으로 향했다.
무기를 잠시 맡기고 고위 기사 2명의 안내를 받아 국왕 집무실로 향한 테일러.
거대한 문이 열리고 고위 기사들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흑발에 푸른 눈의 사우스 왕국 국왕 유리 사우스가 읽고 있던 책을 꽂은 뒤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테일러는 무릎을 꿇고 국왕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테일러입니다. 국왕 폐하.”
“일어나라.”
국왕의 말에 테일러는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일어났다.
“이것이 모두 사실인가?”
국왕의 손에는 테일러가 루시드에게 건넨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루시드에게 준 보고서는 그를 통해 국왕에게 전달되었고, 사태가 심각한 것을 인지한 국왕은 즉시 테일러를 호출한 것이었다.
국왕 유리 사우스와 왕국 정보부의 빌리 엘런데일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국왕은 최근 왕국에서 벌어지는 연이은 의문의 죽음을 포착하고 인재들의 보호를 강화하도록 했었다.
그런 시점에서 테일러의 보고서가 제출되니, 그를 소환한 것이다.
“이 명단은 어떻게 입수했지?”
국왕이 질문했다.
테일러는 고민했다.
회귀했다는 사실을 말하더라도 미친놈 취급할 게 뻔하니 대답을 잘해야만 했다.
“고문으로 얻어냈습니다.”
잠시 고민한 끝에 테일러는 가장 신빙성 있는 대답을 했고 유리 사우스 국왕도 그것을 믿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테일러. 자네는 비록 고위 기사는 아니지만,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다고 들었네. 자네에게 기사 5명과 50명의 정예병을 지원해 줄 테니 인재의 보호를 도와줄 수 있겠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국왕 폐하.”
“좋아. 그대에게 맡기겠다.”
테일러의 대답에 국왕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을 불러 관련 절차를 밟았다.
사우스 왕국의 국왕 유리 사우스는 테일러에게 기사가 포함된 55명의 병력을 지휘할 권한과 함께 과거 통일 전쟁 때 이름을 날린 구국의 기사 제이드의 지혜가 담겨 있는 지휘교본을 하사했다.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 시스템은 스킬북으로 인식했고, 테일러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테일러는 스킬북을 들고 필리스터 자작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일리아는 저택을 산책 중이었고, 알버트는 수련 중이었으며, 가이우스는 과자를 사 먹으러 나간 듯 파티원들의 방은 모두 비어 있었다.
스킬북을 획득한 것은 처음이었고, 스킬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테일러는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뒤 스킬북을 펼쳤다.
스킬북을 펼친 그 순간 책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구국의 기사 제이드 경이 남긴 결사의 의지[A] 스킬을 배우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