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50화
19장 남부 레인저 여단의 에이스(3)
사실 테일러도 암살자들을 고문하는 것을 지휘하는 게 반갑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던 암살자들이 알버트와 가이우스를 죽이려 했던 암살자들과 비슷한 전투 방식과 기술, 그리고 검은 마력검을 사용한다는 것 때문에 이들의 배후와 정체에 대해 적지 않은 궁금증이 마음속 깊은 곳에 심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고문을 한다면 당연히 그들의 정체와 배후를 조사할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된다면 테일러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암살자들이 쉽게 입을 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선 시도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만, 끝없는 정의를 추구하는 알버트와 하이 엘프라고는 하지만 여성인 일리아는 이번 일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음. 이해하네. 자네와 가이우스라도 도와준다고 하니 정말 고맙네. 은인에게 이런 더러운 일이나 시키는 내가 부끄럽군.”
루시드도 알버트와 일리아의 불참을 이해해주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드 필리스터를 바라보며 테일러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고문 지휘는 언제 시작하는 겁니까?”
“내일 아침이 시작이라네. 비위가 약하다면 아침 식사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야.”
* * *
하루라는 시간은 금방 흘러가고 금세 아침이 되었다.
테일러는 일리아와 알버트에게 말하지 않은 채 가이우스와 함께 고문이 시작될 감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테일러.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문에 효과적인 마법이 많이 알지 못하네. 기본적으로 배운 건 있지만 말이네.”
감옥을 지키는 경비병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갈 때 가이우스가 조금은 자신 없어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일러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가이우스. 당신은 자리만 지켜줘도 좋습니다. 물론 마법으로 지원해준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죠.”
“말은 잘하는군.”
가이우스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감옥의 고문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문장을 지키는 경비병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고문 도구가 잔뜩 놓여 있는 탁자와 의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자에는 암살자로 보이는 남자가 묶여 있었고 고문 도구가 놓여 있는 탁자 앞에서 고문 도구를 점검하고 있는, 고문 기술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 명 더 있었으며, 두 명의 ‘병사’가 벽 쪽에 서서 죄수를 감시하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테일러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명의 병사가 군례를 취하고 고문 도구를 정리하던 고문 기술자가 고문장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로 테일러를 맞이했다.
그의 미소만 보면 어디 놀러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에 테일러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떨쳐낼 수밖에 없었다.
“옆에 분은 고위 마법사 가이우스 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수석 고문 기술자 토드라고 합니다. 성은 없습니다. 당분간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한다.”
테일러는 토드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낮추었다.
수석 고문 기술자라고는 하지만, 직위는 기사 작위가 있는 테일러가 조금 더 높았다.
서로를 소개하는 짧은 시간이 끝나고, 토드의 재촉으로 고문은 시작되었다.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죄수의 허벅지에 고통을 극대화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송곳이 파고들었다.
토드의 신묘한 송곳 움직임에 죄수는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토드는 송곳을 잠시 멈추고는 테일러를 바라보았다.
진행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계속 진행해.”
테일러는 차갑게 대답했고 고문은 계속 진행되었다.
고문을 진행하는 공간에 죄수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토드의 손놀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면 멈추어주겠다.”
“모, 모른다. 크아악!”
테일러의 말에도 죄수는 알고 있는 것을 불지 않았다.
테일러가 다시 손짓하자 토드가 불에 달군 쇠막대를 복부에 가져갔고 살타는 냄새와 함께 비명소리가 죄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끔찍한 모습에 테일러도 눈살을 조금 찌푸렸으나 곧 원래 표정을 되찾았다.
“기절했습니다.”
“고문을 계속 진행할 수 있겠나?”
“이자는 이제 무리입니다.”
테일러의 물음에 토드는 고개를 내저었고 테일러는 즉시 병사들을 시켜 다음 죄수를 데려오게 했다.
또다시 고문이 시작되고,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소수는 알고 있는 정보를 불었지만, 대부분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토드는 뛰어난 솜씨로 고문하며 죄수가 죽음에 가까워지면 고문을 멈췄고, 그 신들린 솜씨에 테일러는 혀를 내둘렀다.
“다음.”
테일러의 지시에 병사 한 명이 피투성이가 된 죄수를 끌어내고 새로운 죄수를 데려와 의자에 앉히고 묶었는데, 그 죄수의 얼굴은 테일러도 잘 아는 자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자였다.
‘레드!’
붉은 눈에 붉은 머리.
그는 남부 레인저 여단 출신의 레인저, 레드였던 것이다.
여동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부 레인저 여단을 나와 닥치는 대로 험한 일을 해오던 그는 국왕 암살에 까지 돈을 벌기 위해 뛰어들었던 것이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그는 암살은 실패하지만 도주에는 성공했었다.
하지만 테일러가 개입하는 것으로 인해 역사가 조금 틀어짐에 따라 붙잡히고만 것이었다.
“그럼 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만.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예? 알겠습니다.”
테일러는 자신의 권한으로 고문을 중단시켰다.
토드는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기사인 테일러에게 감히 대들지는 않았고 고문은 중단되었다.
레드는 병사의 손에 이끌려 다시 철창 안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하지.”
고문을 중단시키고 다급하게 감옥을 빠져나오면서 테일러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다듬는 것에 집중했다.
일단 당황한 기색을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고문을 중단시키기는 했지만, 내일이면 다시 고문이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레드는 끔찍한 고문을 받게 될 것이었다.
수석 고문 기술자 토드의 실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최악의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레드는 꼭 확보해야 하는 파티원 중 하나다.
그랑키아 숲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감각을 지닌 레인저가 필요한데, 레드만큼 뛰어난 레인저는 사우스 왕국에 없었기 때문에 그를 반드시 살려서 확보해야만 했다.
“테일러. 왜 그러는 건가? 안색이 좋지 않네.”
다급하게 감옥을 빠져나온 테일러의 뒤를 쫓아 온 가이우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을 걸어왔다.
테일러는 날카로운 눈동자를 빛내며 주변을 살핀 뒤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죄수 중에 제가 아는 자가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테일러의 말에 가이우스는 깜짝 놀라 말했다.
테일러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레드. 남부 레인저 여단의 에이스 레인저 출신입니다. 아마 아픈 여동생 때문에 이 일이 휘말렸을 겁니다. 어떻게든 그를 구해야만 하는데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레드에겐 아픈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로렌시아의 축복이 필요했는데, 로렌시아의 축복은 상당한 양의 금화를 요구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레드는 아픈 여동생을 위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자네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군! 왕성의 감옥에서 죄수를 빼낼 수 있다고 보는가? 내가 아무리 어려서 경험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네.”
주변을 살핀 뒤 가이우스는 테일러에게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말했다.
“차라리 루시드에게 부탁하는 게 어떤가?”
테일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우스의 말대로 경비가 삼엄한 왕성의 감옥에서 국왕 암살 미수범을 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루시드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루시드 필리스터는 국왕의 충신이고, 레드는 국왕암살미수범이다.
테일러가 목숨을 구해줬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테일러 혼자 할 수밖에 없다.
* * *
치밀한 준비 기간이 끝나고 마침내 결행이 다가왔다.
테일러는 우선 홀로 감옥을 찾아갔다.
고문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감옥을 방문한 것은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간단한 검문을 받고 들어가자 창백한 얼굴로 쉬고 있는 레드가 보였다.
“간수.”
테일러는 간수를 불렀다.
졸린 것인지 하품을 하고 있던 간수가 깜짝 놀라 테일러에게 다가왔다.
“예. 테일러 경.”
“죄수들의 식사는 언제지?”
“고문 기술자께서 식사를 금지하셨습니다.”
식사가 없으면 곤란했다.
식사에 열쇠와 쪽지를 숨길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당근도 필요한 법이지. 식사를 내오도록. 내가 전달하겠다.”
“알겠습니다.”
고문 기술자보다 테일러가 상관이었기 때문에 간수는 테일러의 명령을 따랐다.
간수가 내온 식사에 테일러는 교묘하게 열쇠와 쪽지를 숨겨서 레드에게 전달했다.
쪽지에는 도주로와 성벽 쪽문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열쇠와 쪽지를 발견했는지 레드의 눈빛이 빛났다.
이제 도주로에 가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테일러는 주변을 살피며 서둘러 감옥을 벗어났다.
도주로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레드가 나타났다.
테일러가 레드의 앞을 가로막자 레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를 구해준 이유가 뭐지? 원하는 게 뭐야?”
레드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병든 여동생을 걱정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해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고, 예민해져 있었다.
물과 빵을 꺼낸 테일러는 그것을 레드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제 밑에서 일하세요. 레드. 그 어떤 대상도 놓치지 않는 당신의 추적술과 숲을 앞마당처럼 훤히 아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저를 무시하고 떠난다면 저는 용병 레드에 대해서 아는 모든 것을 보고하고 전 군을 동원해서 수배할 겁니다. 아픈 여동생을 데리고 당신이 얼마나 도망을 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말에 레드는 테일러를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네 이놈!”
테일러는 협박과도 같은 말 다음에는 당근을 내밀었다.
“제 밑에서 일한다면, 당신의 범죄기록을 지워 드리고 조만간 여동생분께서 성녀를 통해서 로렌시아의 축복을 받도록 도와드리지요.”
레드의 표정이 변했다.
성녀.
성녀라면 로렌시아의 축복을 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된다면 레드의 여동생은 완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눈동자는 의심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걸 어떻게 믿지?”
테일러는 품속에서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를 꺼내 레드에게 던졌다.
주머니를 받아든 레드는 안에 들어 있는 상당한 양의 금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건 성녀가 저희와 함께할 때까지 당신을 고용하는 의뢰비라고 해두죠. 미친 소리 같겠지만, 성녀가 곧 저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만일 반년 이내에 성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 돈을 들고 그대로 떠나도 잡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테일러는 레드에게 당신이 손해를 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레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테일러의 말대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레드의 붉은 눈이 테일러에게 향했다.
그는 테일러를 바라보며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좋다. 너와 함께 하겠어. 이 정도면 나를 반년 정도는 고용할 수 있겠군. 명심해. 여동생의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떠난다.”
* * *
“이럴 수가! 탈옥이라니!”
테일러의 도움으로 레드가 탈옥하고 그의 탈옥을 눈치챈 감옥의 책임자는 하얗게 질렸다.
국왕 암살을 시도한 죄수가 탈옥했다는 것은 그의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는 사시나무 떨리듯 몸을 떨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대책을 강구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레드의 수감기록을 지우기로 했다.
그는 즉시 행동에 옮겼고 테일러는 레드의 수감기록이 삭제된 것을 눈치챘지만, 일부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