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44화
18장 연회와 단검(2)
가이우스는 감탄했고 알버트도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서둘러 주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테일러의 재촉에 종자는 경비병에게 명령서를 보인 뒤 테일러들과 함께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종자의 말대로 명령서를 보여주니 경비병들은 그들을 막지 않았다.
“필리스터 자작령의 중심도시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종자는 그렇게 말한 뒤 테일러들을 영주성으로 안내했다.
필리스터 자작 가문의 영주성은 국왕 기사단장의 영주성 답게 중무장한 기사들이 병사들과 함께 성벽을 지키고 있었고, 성벽 여기저기에는 수성병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테일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회귀 전, 그러니까 멸망의 길을 걸었던 당시에 국왕 기사단장의 죽음으로 필리스터 자작령은 몬스터 군단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었고 이렇게 훌륭한 영주성과 중심도시도 순식간에 몬스터 군단에 의해 점령되고 말았었다.
아시드 필리스터 자작이 병을 얻게 되는 원인은 루시드 필리스터의 죽음.
그것을 테일러가 막았고 지금 아시드 필리스터 자작이 살아 있으니 혹여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고 해도 필리스터 자작령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테일러. 무슨 생각을 하세요?”
테일러의 변화를 눈치챈 일리아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테일러의 얼굴만 보고 있는 그녀가 테일러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테일러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고개를 부드럽게 저었으나 일리아는 뭔가 의미심장한 눈동자로 테일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테일러와 일리아의 모습을 보고 가이우스가 질투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영주성의 성문이 열리고 두꺼운 철갑옷을 입고 면갑을 내린 투구를 쓴 채 창과 방패를 든 기사 10명과 고위 기사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한 중년의 고위 기사의 호위를 받으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에 푸른 눈. 허리에 걸려 있는 손으로 잡으면 부러질 것만 같은 얇은 레이피어.
테일러에 의해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난 루시드 필리스터였다.
“테일러! 이게 얼마 만인가! 정말 오랜만이로군!”
“예. 반갑습니다. 루시드.”
루시드는 테일러에게 친한 척을 하며 달라붙었다.
테일러를 꽉 끌어안고 등을 몇 번 툭툭 두드린 뒤에서야 루시드는 테일러를 풀어주었다.
테일러가 해방되자 루시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테일러의 파티원들에게 향했다.
알버트와 가이우스를 볼 땐 놀라움이 가득했다가 하이 엘프인 일리아에게 시선을 옮겼을 때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경악했다.
“보고가 사실이었군. 설마 설마 했는데, 이런 강력한 파티를 만들었을 줄이야.”
테일러에 관한 것은 왕국 정보부의 정보를 사서 대충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국에서도 유명한 두 명의 젊은 인재와 인간과 접촉을 꺼리는 하이 엘프가 동료로 있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것이었고 보고서를 읽어 볼 때까지만 해도 루시드는 쉽게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루시드. 제 뒷조사를 한 겁니까?”
테일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정보가 샜다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불쾌하다는 내색을 비추는 테일러의 모습에 루시드는 뜨끔한 것인지 미안한 얼굴로 애꿎은 턱을 긁었다.
“미, 미안하네. 아버님을 설득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이번만 봐드리겠습니다. 루시드. 다음부터는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네. 이런, 이런. 손님들을 너무 밖에 세워두었군. 어서 들어오게나.”
테일러의 질책에 조금 풀이 죽은 것인지 힘없이 대답한 루시드는 이내 테일러들을 밖에 너무 오래 세워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영주성 안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저택은 상당히 넓었고 국왕 기사단장이 영주로 있는 저택답게 커다란 연무장도 하나 있었다.
연무장에선 가문의 근위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고 있었다.
연무장을 지날 때 특히 알버트의 두 눈이 빛났다.
테일러와 그의 파티원들은 루시드의 안내를 받아 국왕 기사단장이자 필리스터 자작령의 영주인 필리스터 자작을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가진 뒤 저택 안에 각자 배정된 방으로 흩어졌다.
“오늘 밤에, 내 목숨을 구해준 자네를 환영하기 위해 연회를 열 예정이네.”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찾아온 루시드.
그는 가져온 과자를 깨물어 씹으며 말했다.
“저는 연회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습니다.”
가이우스는 로브를 입으면 되고, 일리아도 입고 있는 청결 마법이 걸려 있는 드레스를 입으면 되었다.
알버트 같은 경우엔 고위 기사 서임 당시에 받았던 예복을 가지고 다니는 것 같으니 그것을 입으면 되겠지만, 테일러는 입고 갈 만한 옷이 없었다.
갑옷만 신경 쓴 탓에 갑옷 안에 입고 다니는 옷은 형편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연회에 갑옷차림으로 갈 수는 없었다.
테일러의 말에 루시드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게. 내가 옷을 빌려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꼭 참석하라는 말을 함께 남기고는 루시드는 악동과 같은 표정을 지은 채 테일러의 방을 나갔다.
루시드가 방에서 나가고 3시간 정도 되는 시간이 흘렀다.
슬슬 연회에 참석해야 할 시간이 되었고 테일러는 소식이 없는 루시드를 찾아가기 위해 일어서려던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군가 방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테일러가 말하자 문이 열리고 시종 한 명과 3명의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예복이 들려 있었다.
“루시드가 보냈습니까?”
“네. 도련님께서 테일러 씨가 연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는 것을 도와드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시종이 말을 끝내며 시녀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자 모여 있던 시녀들이 일렬로 서서 옷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주시겠습니까?”
시종의 말에 테일러는 3벌의 예복 중에서 가장 화려하지 않은 푸른색 예복을 집어 들었다.
“입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혼자서 입을 수도 있었지만, 테일러는 입을 닫고 시녀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순식간에 입고 있던 옷이 벗겨지고 그 위로 푸른색 예복이 입혀졌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예복을 입은 테일러의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왕자 같은 모습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 연회장으로 가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시종은 연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준비가 완료된 테일러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연회는 저택 내의 연무장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연회장에서 시작될 예정이었다.
테일러는 연회의 시작과 동시에 연회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테일러 일행의 도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루시드가 개최한 작은 연회였기 때문에 다른 영지의 귀족들은 보이지 않았고 필리스터 자작령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필리스터 자작령의 사람들은 대부분 군인이나 기사였기 때문에 연회장에는 기사 예복이나 푸른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지나가는 시녀로부터 술이 담긴 잔을 받아 입술을 축인 테일러는 연회장의 중심으로 걸어가며 익숙한 얼굴을 찾기 위해 눈동자를 바쁘게 굴린 끝에 알버트와 가이우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고위 기사 서임 때 받은 청색 예복을 입고 짧은 망토를 고위 기사를 상징하는 브로치로 고정한 알버트는 마찬가지로 청색 예복을 입은 자작 가문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가이우스 또한 자작 가문 휘하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보기 힘든 젊은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
그에 비해 테일러에게 다가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테일러는 고위 기사급의 실력 있는 검사였지만 고위 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알버트처럼 고위 기사 브로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즉, 자신의 실력을 나타낼 뭔가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흠.”
하지만 테일러는 아쉬워하지 않고 조용히 다른 곳으로 물러나 술을 마셨다.
알버트와 가이우스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들은 지금 바빴으니, 잠시 물러난 것이다.
어차피 기다리면 루시드가 와서 말상대를 해줄 게 분명했기 때문에, 테일러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물러나 술을 마셨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루시드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많이 늦는다는 소식을 시종이 큰 소리로 연회장에 전파했다.
“하아.”
알버트와 가이우스를 둘러싼 사람의 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고, 테일러는 테이블 위의 요리를 몇 개 집어먹다가 한숨을 내쉬며 테라스로 나갔다.
하늘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들었고 소금 같은 별이 떠 있었다.
“후우.”
한숨을 내뱉으며 하늘을 보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몸을 돌리니 긴 금발에 푸른 눈이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서 있었다.
“경은 이 연회가 아주 지겹나 봐요?”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말하며 테일러의 옆으로 다가와 난간에 몸을 살짝 기댔다.
테일러를 경이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그를 기사로 오해한 것 같았다.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테일러가 입고 있는 청색 예복은 자작 가문의 기사들이 입고 있는 청색 예복과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았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한 구별이 힘들 정도였다.
“저는 경이 아닙니다.”
테일러가 정정했다.
젊은 여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서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는 기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 옷은 사우스 왕국 기사의 예복이 아니었던가요?”
그녀의 말에 테일러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그리고 이 옷도 빌린 옷입니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이죠?”
“저는 용병입니다.”
“용병? 와아!”
용병이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젊은 여인은 환호성을 내뱉었으며 두 눈은 호기심의 빛이 반짝였다.
“저는 세이라 필리스터라고 해요. 용병이랑 처음 얘기해 봐요.”
자신을 소개하는 세이라.
그녀는 루시드 필리스터의 사촌 동생인 세이라 필리스터였다.
테일러는 뒤늦게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루시드와 조금 닮은 부분이 있었다.
루시드의 사촌동생인 그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일찍 잃고 어머니와 함께 아시드 필리스터 자작의 보호를 받아왔다.
그 보호는 상당히 과하여 중심도시를 벗어난 적은 거의 없었고, 중심도시 안을 돌아다닐 때도 언제나 자작 가문의 근위대가 붙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용병과 얘기할 경험은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