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32화
12장 유즈겔리스크(2)
제사장 카리스크의 죽음에 이은 족장 유즈겔리스크의 죽음, 그리고 상급 전사와 오크 전사 대부분이 목숨을 전사하여 피칼날 부족은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말았다.
생존한 오크는 어린 오크들과 여자 오크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제 다른 오크 부족이 그들을 공격한다면 피칼날 부족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상황이 그런 상황이니,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를 향해 보복 공격을 가할 여유는 당연히 없었고 주둔지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
3차례에 걸친 피칼날 부족과의 전투에서 상처투성이의 승리를 쟁취한 로렌시아 남작은 시체 수습이 끝난 늦은 밤 승리를 축하하고 전사자들을 애도하는 의미를 가진 작은 자리를 가졌다.
비록 피칼날 부족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주둔지가 거의 빈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다른 몬스터들이 알게 되면 쳐들어 올지도 몰랐기 때문에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술은 마시지 못 했지만 제법 화려한 요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굶주린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용병들은 오랜만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요리를 맛보았다.
“테일러.”
구운 닭다리를 집고 뜯고 있던 테일러를 로렌시아 남작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테일러는 들고 있는 구운 닭다리를 접시 위에 올려두고는 로렌시아 남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네의 활약을 눈여겨보았네. 혹시 군에 입대할 생각이 있는가? 있다면 내가 상급 장교 자리를 알아봐 주겠네.”
“죄송하지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저는 용병이 편합니다. 어디 소속되는 것은 불편합니다.”
상급 장교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는 로렌시아 남작의 제안을 테일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상급 장교는 왕립 사관학교나 중앙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하급 장교로 몇 년을 군에 복무한 뒤에서야 오를 수 있는 자리였지만 군에 소속되어야 한다는 게 테일러에겐 부담이었다.
그는 암살자들의 검은 마수로부터 사우스 왕국의 인재들과 영웅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급 장교로 군에 복무하는 것보다는 용병으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나았다.
만약 로렌시아 남작이 기사 작위를 추천하겠다고 말했다면 테일러는 승낙했을 것이다.
기사 작위를 받고 충성은 바치지 않는 자유 기사가 되면 되는 것이니까.
실제로 실버 등급의 용병 중에선 기사 작위가 있지만 모시는 자가 없는 자유 기사들도 조금 있었다.
“그런가? 아쉽군. 자네가 왕국군에 입대한다면 프랑츠 제국도 두렵지 않을 것인데.”
“하하하.”
로렌시아 남작의 말에 테일러는 소리 내어 웃었고 로렌시아 남작 또한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만 가 봐도 좋네. 좋은 시간 보내게나. 내일부터는 다시 바빠질 테니.”
“알겠습니다.”
로렌시아 남작의 말에 테일러는 다시 가이우스에게로 돌아갔다.
오늘을 즐기는 게 좋을 것이다.
로렌시아 남작의 말대로 내일부터 다시 바빠질 테니까.
최악의 경우 주둔지가 거의 비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또 다른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진 안심할 수 없었다.
오늘의 작은 연회는 마지막 휴식인 셈이었다.
가이우스에게로 돌아가니, 일리아나 옆에 앉아 있는 가이우스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테일러는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가이우스. 괜찮으십니까?”
가이우스의 시선이 테일러에게 향했다.
“아, 괜찮네. 다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말이야.”
“괜히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닭이나 뜯으렴. 꼬마야.”
어두운 얼굴로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뱉는 가이우스의 어깨를 감싸며 일리아나는 그의 입에 닭다리를 가져갔다.
가이우스는 마지못해 일리아나가 건넨 닭다리를 조금 뜯었지만 얼굴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가이우스의 마음도 조금 이해가 가는 것이 당장 피칼날 부족의 공격을 막아냈다고는 하지만 짧지 않았던 전투로 인해 수비대 주둔지는 텅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다른 몬스터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전투가 시작된다면 쉽게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테일러는 조용히 가이우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세요. 가이우스. 당신보다 배운 것은 없지만 그랑키아 숲의 몬스터들은 일정 규모 이상으로 뭉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자기들끼리 영역 다툼을 자주 벌이느라 바쁠 테니, 저희는 관심 밖일 겁니다. 누군가 고의로 소문을 내지 않는 이상 수비대 주둔지가 거의 비었다는 것을 몬스터 녀석들이 알 리도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즐기세요.”
테일러는 말을 마치며 얼음처럼 차가운 음료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가이우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린 채 마찬가지로 음료가 담긴 잔을 살짝 들어 올린 후 입가로 가져갔다.
* * *
밤이 깊어가고 로렌시아 남작이 주최한 작은 연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테일러와 일리아나 그리고 소수의 고위 기사와 고위 마법사 한 명이 심상치 않은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쥐었다.
“전원 무장하십시오! 적이 침입했습니다!”
고위 마법사가 큰 소리로 경고하며 맑은 빛을 뿜어내는 스태프를 한 바퀴 돌리자 하늘로 새하얀 빛 무리가 날아올라 흩어지며 주변을 밝혔다.
그러자 그림자가 깃든 무기를 든 채 조용히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 적이다! 크악!”
“으악!”
고위 마법사의 경고와 어둠을 밝힌 마법의 빛으로 인해 드러난 검은 암행복을 입은 암살자들의 모습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다급하게 음식을 놓고 무기를 뽑으려 했지만,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들이 던진 날카로운 암기가 어둠을 뚫고 날아가 병사들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실력이 우수한 기사 몇 명은 간신히 암기를 피하거나 쳐낼 수 있었지만, 병사들은 그러지 못한 듯했다.
테일러에게도 암기가 두 개 정도 날아왔지만, 레인저의 직감과 상급 방어 검술을 익힌 그에게 암기는 치명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쳐라!”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나타난 톨빈이 검은 기운이 깃들어 춤을 추는 검을 뽑아들며 부하 암살자들에게 살인 명령을 내렸다.
톨빈 휘하의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로렌시아 남작과 휘하 왕국군을 덮쳤다.
일리아나가 불의 정령을 소환하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가이우스!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알겠네!”
[바람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민첩이 증가합니다.]
[불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힘이 증가합니다.]
[대지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방어력이 증가합니다.]
[물의 기운이 함께합니다. 자연회복력이 증가합니다.]
가이우스는 대답과 함께 각종 유익한 버프를 테일러에게 부여했고 테일러는 가벼워진 몸을 움직여 암살자의 목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으나, 암살자도 만만한 상대는 아닌 듯 푸른 눈동자로 테일러의 검의 움직임을 추적해 허리를 옆으로 기괴하게 꺾는 것으로 목을 노린 검을 피했다.
“무슨…….”
테일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암살자는 검은 기운이 서려 있는 검을 내찔렀다.
테일러는 검을 휘둘러 암살자의 검을 쳐냈다.
하급 파마의 검과 마력검이 활성화된 테일러의 검과 부딪치자 암살자의 검에 깃든 검은 기운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검은 기운 역시도 근본은 마력이었기 때문에 파마의 검 스킬이 통한 것이었다.
“통하는군.”
“이럴 수가.”
테일러는 암살자의 눈동자에서 경악이라는 감정을 훔쳐 볼 수 있었다.
“마력을 깎아내는 마병기인 것인가? 하지만 상관없다. 닿지 않으면 그만이다.”
암살자는 자신만만하게 혼잣말을 쏟아내고는 테일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테일러가 검을 휘둘러 그것을 쳐내려 하자 팔을 기괴하게 꺾어서 옆으로 빙 돌려서 검을 회수했다.
“이건 무슨…….”
연체동물 뺨을 왕복으로 후려치는 움직임을 보이는 암살자의 모습에 테일러는 어이를 상실한 얼굴로 암살자의 가슴을 노리고 검을 내찔렀으나, 암살자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테일러의 검을 피해냈다.
그리고 반격을 가해 테일러의 복부에 얕은 상처를 남겼다.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검이라 갑옷은 소용없었다.
테일러가 급히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장기에 손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한 일격이었다.
“그 검은 기운! 그때 그 녀석들이군! 지긋지긋하네!”
테일러를 향해 아쉬운 눈빛을 보내는 암살자를 향해 가이우스의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강력한 마법이 작렬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통해 암살자의 눈앞에 나타난 붉은 화염의 폭탄이 요란한 소음과 함께 터져 붉은 불길을 뿜어냈다.
“크아아아!”
몸을 꺾어서 피하거나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인 암살자는 끔찍한 비명을 토해내며 대지에 누워 뒹굴다 숨이 끊어졌다.
가이우스의 도움으로 적을 하나 처리한 테일러는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수는 적지만 최정예인가.”
적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한 명 한 명이 최정예인 것인지 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극소수의 고위 기사들이 힘겹게 전황을 뒤집으려 노력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방진도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근접전에 고스란히 노출된 마법사들과 고위 마법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졌고, 병사들은 이미 순식간에 모두 살해당한 뒤였다.
지휘할 장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름 검술에 관심을 두고 배워 온 로렌시아 남작은 아주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만약 로렌시아 남작의 검이 마력검을 발현시키는 마병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습격한 암살자는 전원이 마력검과 흡사한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니까.
“테일러!”
테일러를 부르는 가이우스.
고개를 돌려보니 암살자 한 명이 가이우스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테일러는 빠른 속도로 움직여 암살자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방금전에 상대했던 놈에 비하면 지금 상대하는 암살자의 수준은 낮았다.
테일러는 금방 암살자의 목을 베어냈고 가이우스의 엄호를 받으며 다른 암살자와 검을 나눴다.
“모든 것은…… 그림자의 뜻대로! 순순히 우리의 뜻을 받들어라!”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복면을 쓰고 검은 철제 흉갑을 입은 채 검은 마력검이 발현된 무기를 든 암살자는 테일러를 향해 선언하듯 중얼거리며 날카로운 검격을 날렸다.
고위 기사 수준에 올라 있는 테일러조차 치명적이라고 느낄 정도의 검격이었다.
간신히 피해내니 다른 손에 들려 있는 날카로운 단검이 테일러의 목을 노렸다.
“제, 젠장…….”
피할 수도 없는 상황.
테일러의 입 밖으로 욕설이 튀어나오고, 절망적인 순간에 가이우스가 쏘아낸 마법의 불꽃이 테일러와 암살자의 앞에서 터진다.
“크윽!”
“윽!”
암살자는 물론이고 테일러 또한 다소 피해를 봤지만 가이우스의 선택은 훌륭했고 테일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만약 가이우스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테일러의 목에는 바람구멍이 뚫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크으으윽!”
암살자는 철제 흉갑을 걸치고 있었지만 강력한 폭발 앞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당하고 신음성을 흘렸고, 테일러는 그런 그의 빈틈을 노려 심장에 검을 꽂아 넣었다.
전투에 열중하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상대하고 있던 암살자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어 숨통을 끊은 뒤 주변을 살피니 아군은 5명도 남아 있지 않았고, 15명이 넘는 적에게 둘러싸여 포위당해 있었다.
일리아나도 어딘가에서 목숨을 잃었는지 그녀가 소환한 불의 정령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끝인가…….”
가이우스는 힘없이 스태프를 놓았다.
공간이동 마법을 전개하려고 했지만, 강력한 마법 방해 결계의 존재가 느껴졌다.
이미 한 번 공간이동 마법 탓에 가이우스를 놓친 적이 있는 톨빈이 그림자 기사단의 마법사에게 마법 방해 결계를 부탁한 것이었다.
“테일러. 자네와 함께해서 기뻤네.”
마지막이 온 것을 직감한 로렌시아 남작은 스스로 사망 플래그를 꽂았고 테일러 또한 희망을 잃었는지 쉽게 검을 들지 못했다.
“가이우스. 지켜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그랑키아 숲에 온 이상 제가 당신을 지켜 드렸어야 하는 건데.”
“짧은 인생이었지만 후회는 없네. 남은 마력을 모아 강력한 고위 마법을 캐스팅하겠네. 물론 우리도 휘말리겠지만 말이야.”
“그거 좋군. 저승 가는 길동무는 많으면 좋다네.”
가이우스의 말에 로렌시아 남작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고, 테일러도 입을 열었다.
“그냥 죽을 수는 없지요. 지원하겠습니다.”
가이우스가 떨어뜨린 스태프를 다시 들어 마법을 캐스팅했다.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을 정도로 예의 바른 톨빈 단장은 심상치 않은 가이우스의 행동에 즉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공격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어둠에 물든 하늘이 갑자기 밝아졌다.
수십 개의 조명탄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터졌다.
수비대 주둔지가 순식간에 낮이 된 것처럼 밝아졌고 무너진 성벽을 타고 수백 명의 무장한 레인저가 올라왔다.
녹색 망토를 걸치고 활과 석궁, 장검으로 무장한 남부 레인저 여단의 레인저들.
성벽 위에 올라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장을 살핀 그들은 이내 석궁과 활의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국왕 폐하 만세!”
“국왕 폐하를 위하여!”
우렁찬 함성과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들을 덮쳤다.
암살자들은 검을 휘두르며 화살을 쳐냈으나, 그것도 잠시뿐,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살비에 결국 하나둘씩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단장의 자리에 있는 톨빈은 그럭저럭 버텨내는 모습을 보였다.
검은 마력 갑옷을 활성화한 그에게 화살은 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레인저 중대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파마의 화살을 사용한다!”
“예!”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져 나오고 테일러의 파마의 검처럼 마법을 파훼하는 효능이 있는 파마의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거는 레인저들.
그들은 톨빈을 조준한 채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파마의 화살 수십 발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가 톨빈의 몸에 꽂혔다.
검은 마력 갑옷은 파마의 화살로부터 톨빈을 지켜주지 못했다.
마침내 고슴도치가 된 톨빈이 힘없이 쓰러졌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로렌시아 남작에게 다가와 손을 건넸다.
“남부 레인저 여단 빌란톨 중대, 중대장 토드 빌란톨 남작입니다.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이제 억제기 방어는 남부 레인저 여단 빌란톨 중대가 맡겠습니다.”
“살았군요.”
“그렇군.”
테일러의 말에 가이우스는 캐스팅을 중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 남부에 주둔하던 남부 레인저 여단의 중대가 그랑키아 숲에 있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살았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