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31화
12장 유즈겔리스크(1)
피칼날 부족의 제사장인 하이 오크 카리스크가 인간들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그의 형이자 피칼날 부족의 족장 유즈겔리스크에게 전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뭐라고? 카리스크가 전사했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족장님.”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제사장 카리스크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피칼날 부족 족장 유즈겔리스크는 충격에 빠져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유즈겔리스크의 동생 카리스크를 향한 애정은 남달랐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믿기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카리스크.”
차갑지만 가족에게는 따뜻했던 동생이 살아 있을 때 모습을 떠올리는 유즈겔리스크의 눈동자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동생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수록 인가들을 향한 증오 역시 함께 커졌다.
아들과 동생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잠시 깊은 추억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유즈겔리스크는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의자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고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서슬 퍼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날은 피가 묻어 있는 것도 아닌데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라도쉬!”
“네! 족장님!”
유즈겔리스크의 부름에 상급 전사 라도쉬가 대답하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몸은 2차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얼룩져 있었다.
녹색의 피부 위에 새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고 붕대는 붉은 피로 물들여져 있었다.
“지금 당장 소집 가능한 오크 전사의 수는 얼마나 되나.”
“5백이 안 됩니다.”
라도쉬는 즉각 대답했다.
라도쉬의 대답에 유즈겔리스크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보다 적은 숫자였다.
약화 결계만 없었다면 우습게 짓이겨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지만 문제는 인간들에게는 약화 결계라는 거대한 병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사들을 소집하라. 인간들이 재정비하기 전에 공격한다.”
하지만 유즈겔리스크는 망설이지 않았다.
많은 오크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인간들 역시도 상당수가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를 받았다.
남아 있는 인간의 수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유즈겔리스크는 생각했다.
“조, 족장님. 카리스크 님의 광전사 주술 없이는 힘들 것입니다.”
오크 주술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유즈겔리스크의 날카로운 시선이 오크 주술사를 향해 꽂혔다.
눈빛에 담긴 보이지 않는 살기에 오크 주술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인간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약화 결계의 힘 따위 숫자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다. 겁이 나면 빠져라.”
“죄, 죄송합니다.”
오크 주술사는 고개를 숙였고 유즈겔리스크는 검을 들어 올렸다.
“우리는 굶주렸다!”
“적의 피로 주린 배를 채우리라!”
유즈겔리스크의 외침에 상급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부하들을 유즈겔리스크는 복잡한 감정을 품으며 바라보았다.
* * *
2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지만 로렌시아 남작이 지휘하는 수비대와 원정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방진을 구성했던 병사들과 기사 대부분이 치열한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테일러의 작전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은 쓰러져 죽은 이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테일러를 포함한 장교들은 로렌시아 남작의 명령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모두 모였나? 생각보다 숫자가 적군.”
지휘소에 모인 장교들의 숫자를 헤아리며 로렌시아 남작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인 고위 기사의 수는 3명이었고, 장교들의 수는 테일러와 일리아나를 제외하면 5명이 전부였다.
그중에서 상급 장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대부분 2차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전서구가 도착했다. 이건 적진에 파견된 기사의 정찰 보고서다.”
말을 마치며 윌리암 로렌시아 남작은 품속에서 전서구를 통해 전달된 정찰 보고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테일러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펼치고는 읽어 내려갔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피칼날 부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은 즉, 피칼날 부족의 3차 공격이 곧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테일러는 생각했다.
피칼날 부족의 유력자인 하이 오크 카리스크가 목숨을 잃었으니, 그의 형이자 족장인 하이 오크 유즈겔리스크가 직접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찰 보고서를 다 읽은 테일러는 다른 장교에게 그것을 전달했다.
모든 장교와 고위 기사들이 정찰 보고서를 읽는 것을 끝내자 로렌시아 남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피칼날 부족은 다시 공격해 올 것이다. 이번에는 유즈겔리스크가 직접 공격해오겠지.”
로렌시아 남작의 거침없는 말에 지휘소에 모인 고위 기사들과 장교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을 하나하나 살핀 후 로렌시아 남작이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정찰 보고서를 자세히 읽었다면 알겠지만, 적의 수는 약 5백 정도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50명 정도가 전부다. 뭔가 작전이 있으면 뭔가 꺼내보도록.”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젊은 하급 장교 한 명이 뻣뻣한 움직임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말해보도록.”
“억제기를 포기하고 후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모두 죽습니다.”
질 게 뻔한 전투를 치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지휘관은 없다.
질 것이 확실하다면 그 전투는 피하라.
왕립 사관학교와 중앙 사관학교에서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군의 뒤에는 사우스 왕국을 보호해주는 억제기가 있다.
아군이 물러난다면 억제기는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건 아니 된다. 우리의 뒤에는 다름 아닌 억제기가 있다. 우리가 모두 죽더라도 사수해야 해.”
“알겠습니다.”
하급 장교는 풀이 죽었다.
로렌시아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위 기사 1명과 하급 장교 2명이 더 의견을 내놓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로렌시아 남작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별 소득 없이 회의가 끝나려는 순간 테일러의 머릿속에 작전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은 뒤 작전을 로렌시아 남작과 모두에게 설명했고, 로렌시아 남작은 테일러의 작전을 적극 수용하기로 결정 내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사우스 왕국의 미래가 걸려 있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우스 왕국이 멸망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게 제가 ‘돌아온’ 이유입니다.”
테일러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회의가 끝나고 테일러는 작전의 실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지휘소를 나섰다.
* * *
오후가 되자 북소리와 뿔나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피칼날 부족의 족장 유즈겔리스크가 5백의 오크군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었다.
주둔지 성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각 방진을 유지하고 있는 병사들의 손이 떨리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테일러는 통솔 스킬을 이용해 그들의 사기를 조금 올려준 뒤 무장을 점검하고 방진을 나서며 입을 열었다.
“가이우스. 일리아나. 잘 부탁합니다.”
“내게 맡겨.”
“자네가 절대 죽는 일은 없을 걸세!”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테일러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고위 기사 한 명이 테일러에게 다가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며 말없이 무엇인가 든 자루를 건넸다.
그것을 건네받은 테일러는 성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걸어가 멈춰 섰다.
성문을 넘어온 오크 전사들은 홀로 서 있는 테일러의 모습에 그를 먼저 공격하지 않고 우선 포위했다.
오크에게 완전히 포위당했다.
모든 오크가 성문을 넘어온 것을 확인한 테일러는 자루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저, 저 개 같은!”
테일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유즈겔리스크가 분노 가득한 포효를 내질렀다.
테일러가 자루에서 꺼낸 것은 다름이 아닌 제사장 카리스크의 잘린 머리였다.
눈앞에서 꺼내진 동생의 잘린 머리를 본 유즈겔리스크는 하이 오크 특유의 냉정함을 잃고 돌아버렸다.
“저 자살희망자를 내 눈앞에 끌고 와 사지를 찢어라!”
“명을 받듭니다!”
양손에 둔기를 든 상급 전사가 큰소리로 대답하며 테일러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둔기가 테일러의 머리를 향해 내려 꽂혔다.
당장에라도 테일러의 머리를 박살 낼 것 같은 기세로 내려 꽂힌 둔기는 테일러가 살짝 옆으로 몸을 피한 탓에 허공을 가르고 지나쳐 애꿎은 대지를 강타했다.
반격을 가할 기회였지만 테일러는 반격을 가하는 대신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단단하게 굳히는 것을 선택했다.
상급 전사의 공격이 다시 쏟아졌지만, 테일러는 적당히 그의 공격을 받아넘기면서 시간을 벌었다.
마치 뭔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테일러의 의도를 짐작하지 못했던 유즈겔리스크는 곧 그의 의도를 눈치챌 수 있었다.
“피, 피하라.”
테일러의 몸에 가이우스가 시전한 얼음 보호막이 씌워진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유즈겔리스크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고위 마법사들이 일제히 캐스팅한 화염계 고위 마법이 오크군을 덮쳤다.
뜨거운 불의 지옥에 갇힌 오크 전사들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지르며 타 죽어갔다.
그것은 상급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법 저항이 뛰어난 하이 오크 유즈겔리스크만이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불에 휩싸인 오크 전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성문을 향해 달렸으나, 성문에는 일리아나 웨스트가 소환한 불의 정령 3체가 지키고 있었다.
“빨리 피해야겠군.”
테일러 역시 얼음 보호막으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강력한 화염계 고위 마법에 노출되자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얼음 보호막이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냉기가 사라지고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때쯤 테일러는 무사히 몸을 빼내는 것에 성공했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뜨거워!”
오크어로 된 고통에 찬 비명이 멀리 떨어진 방진이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로렌시아 남작은 고기 타는 냄새에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다친 곳은 없나? 테일러.”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이우스 덕분에 다친 곳은 없습니다. 다만 전신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습니다. 찬물에 몸을 담그고 싶군요.”
“우리의 영웅에게 그 정도도 못 해줄까. 전투가 끝나면 자네는 푹 쉬게. 주둔지 중앙에 작은 계곡이 연결되어 있네. 거기서 몸을 식히게나.”
테일러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유즈겔리스크가 쓰러졌군. 우리의 승리라네.”
로렌시아 남작이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끝까지 버티고 서 있던 하이 오크 유즈겔리스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서 있는 오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 *
“톨빈 단장!”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달려와 호들갑을 떠는 부하의 모습에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톨빈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가이우스를 놓친 일로 상부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은 탓에 최근 톨빈의 정신 상태는 쾌적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고 부하들에게 의미 없는 벌을 주는 등 영양가 없는 행동을 하며 그랑키아 숲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가이우스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상부로부터 고된 질책을 받게 된 원흉 가이우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부하의 말에 톨빈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가이우스가 다시 그랑키아 숲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톨빈 단장의 두 눈에 희망이라는 빛이 감돌았다.
그는 암살 대상인 가이우스를 놓치는 바람에 그림자 기사단 상부로부터 상당한 질책을 받아야만 했었다.
지금이라도 가이우스를 잡아 죽인다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에 있습니다. 단장.”
“뭐야?”
부하의 말에 톨빈은 실망하는 기색을 나타내었다.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는 사우스 왕국에서도 엄선된 최정예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요새였다.
지금 톨빈이 동원할 수 있는 인원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한 곳이었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톨빈 단장. 지금 억제기 수비대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의 수는 50명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톨빈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억제기는 사우스 왕국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최정예 기사단 외에도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비해 강력한 약화 결계의 영향에 들어가 있었다.
주둔지에는 늘 100명 이상의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50명밖에 없을 리가 없었다.
“오크 부족의 대규모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온 것이군.”
톨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톨빈이 동원할 수 있는 그림자 기사단 암살자의 수는 25명.
현재 주둔지에 남아 있는 인원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였지만 그림자 기사단은 모두 프랑츠 제국에서도 지독한 훈련을 받아 온 최정예들이다.
고위 기사가 포함된 기사 50명 정도는 25명이 우습게 처리할 수 있었다.
“모두를 소집해라. 주둔지를 공격한다.”
“억제기도 파괴하는 것입니까?”
부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것은 아직 때가 이르다.”
톨빈은 고개를 저었다.
프랑츠 제국의 궁극적인 목적은 억제기 파괴였다.
억제기 파괴로 인한 몬스터 군단의 남하로 사우스 왕국에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전에 사우스 왕국이 몬스터 군단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도록 왕국의 영웅들과 인재들을 암살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 목표로 한 영웅과 인재들의 전부를 암살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억제기 파괴는 일렀다.
사실 그림자 기사단이 마음만 먹는다면 억제기는 언제든지 파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톨빈이 동원할 수 있는 암살자 전원이 모였다.
톨빈은 그들의 앞에 나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실패했다. 가이우스를 죽이지 못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톨빈의 말대로 그들은 실패했었다.
“하지만 하늘이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암살 대상 가이우스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당장 가서 죽여야 합니다!”
“그림자의 뜻입니다. 척살해야 합니다.”
부하 암살자들의 대답에 톨빈은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모두 무기를 들라. 가이우스를 죽이러 간다!”
그림자 기사단의 암살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검은 기운이 무기에 깃들고,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톨빈의 목소리가 허공에 메아리칠 때에는 이미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