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턴 플레이어-27화 (27/150)

리턴 플레이어 27화

10장 하이 오크(2)

깃발에 그려진 붉은 피를 머금은 검 문장은 로렌시아 남작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중앙의 귀족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배운 것이 많았고, 그랑키아 숲의 오크 부족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작은 부족들을 제외하면 상당수를 알고 있었다.

피칼날 부족은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부족들 중 하나였다.

다만, 의문점은 그동안 그들은 억제기 수비대와 큰 마찰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흐음.”

“포로를 한 명 잡았습니다. 정신계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고위 마법사님께서 계시다면 그의 생각을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로렌시아 남작의 고민이 깊어지자 기사가 서둘러 포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로렌시아 남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포로가 있다면 이 의문을 풀기는 쉬웠다.

바로 옆에 있는 샤니크 윌크로스필이 정신계 마법을 제법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안내하게.”

로렌시아 남작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일러들은 포로로 잡은 오크 전사가 갇혀 있는 임시 감옥으로 로렌시아 남작과 고위 마법사 샤니크 윌크로스필을 안내했다.

로렌시아 남작과 샤니크 윌크로스필이 도착하자 임시 감옥의 문이 열리고 병사들에 이끌려 오크 전사가 끌려 나왔다.

오크 전사는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크의 힘은 인간보다 강한 편이었지만 병사 3명을 당해내기엔 부족했다.

병사들이 오크 전사를 끌고 나오자 테일러는 오크 전사가 날뛰지 못하게 붙잡았다.

51레벨에 이른 테일러의 힘은 오크보다 한참 위의 수준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크큭.”

오랜만에 정신계 마법을 사용할 생각에 들뜬 것인지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을 오크의 머리에 가져가는 샤니크.

정신계 마법은 상당히 위험하고 사악한 마법인데다가 지성이 있는 생명체에게만 쓸 수 있는 특징 때문에 좀처럼 시험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샤니크 윌크로스필은 상당히 들떠 있었다.

하지만 오크의 머릿속을 읽어가면서 그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자신이 죽인 하이 오크가 피칼날 부족장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그의 동생이 오크 전사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오크의 머릿속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어떤가?”

로렌시아 남작이 질문했다.

샤니크는 그를 바라보며 어떤 말을 할지 잠깐 고민했으나, 곧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단…… 순히 길을 잃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작님.”

그는 진실을 숨기는 길을 선택했다.

여기서 진실을 말했다가는 그는 경솔한 행동을 한 죄로 큰 벌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샤니크의 성격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조심스럽게 도망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행이군요.”

일리아나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듯 기사와 로렌시아 남작 그리고 가이우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테일러는 의심이 깃든 눈동자로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위 마법사 샤니크 윌크로스필을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신나서 미쳐 날뛸 것만 같던 그가 오크의 머릿속을 읽고 나서는 너무 변했다고 테일러는 생각했지만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어 의심과 잡념을 날려 보냈다.

* * *

“정찰 결과를 보고하라.”

피칼날 부족의 제사장 하이 오크 카리스크의 목소리가 어두운 천막 안에 낮게 깔렸다.

억제기 수비대 주둔지 정찰에 나섰던 정찰대 중 하나를 지휘했던 오크 전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인간들은 주둔지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주둔지 주변에 들어서자 몸이 상당히 약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방어는 상당히 견고합니다.”

“돌아오지 못한 정찰대는?”

“한 개 정찰대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숲에 들어온 인간들과 전투를 벌였다가 전멸한 것 같습니다. 억제기의 인간들은 아닙니다.”

억제기 수비대는 평소 주둔지 주변 정찰을 소홀히 하는 편이었다.

수비대 주둔지 주변에는 약화 결계로 인해 일부러 접근하는 몬스터가 거의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주변 정찰을 나섰다가 주변의 몬스터들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몬스터들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다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레인저 훈련을 받은 기사 소수가 아주 가끔 정찰 활동을 하는 편이었다.

“현재 소집된 오크 전사의 수는 얼마나 되지?”

“9백이 조금 넘습니다. 제사장님. 오늘 밤이면 1천이 모일 것 같습니다.”

피칼날 부족의 제사장 카리스크의 물음에 오크 상급 전사가 대답했다.

“흐음.”

카리스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랑키아 숲의 오크 1천이면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었다.

반도에 존재하는 웬만한 크기의 도시를 공격해 볼 법한 규모의 군대였지만 문제는 수비대 주둔지를 보호하고 있는 약화 결계였다.

억제기의 기묘한 마력 때문에 호전적인 부분을 많이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몬스터들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억제기를 파괴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주둔지를 몇 번 공격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몬스터들은 약화 결계로 인해 약해진 몸 때문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최근 들어서는 억제기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조차 사라졌다.

“제사장님께서 무엇을 걱정하고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억제기를 공격했던 몬스터들을 하나같이 소규모였습니다. 많아 봤자 2백에서 3백이였죠. 하지만 지금 우리를 보십시오! 베일아우스트 님의 복수를 위한 깃발 아래에 1천 전사가 모이고 있습니다!”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인 가슴을 손으로 치며 호전적인 연설을 하는 이 오크의 이름은 켈바쉬로 피칼날 부족의 상급 전사였다.

상급 전사 켈바쉬의 말을 들은 카리스크의 두 눈이 빛났다.

애초에 주둔지의 약화 마법을 생각하고 전사들을 소집한 것이다.

이제 와서 겁이 난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것은 피칼날 부족의 제사장이자 하이 오크라는 위대한 종족인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었다.

카리스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알 수 없는 짐승의 뼈로 만들어진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다음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인간들을 쓸어버린다! 적의 피로 칼날을 붉게 물들여라!”

카리스크의 말에 천막에 모인 상급 전사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 * *

다음날 늦은 오후가 되자 억제기 보수 원정대는 억제기가 있는 주둔지에 도착하는 것에 성공했다.

수비대장으로서 억제기 수비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고위 기사 윌리엄 윌포드 남작은 밝은 얼굴로 윌리암 로렌시아 남작과 억제기 보수 원정대를 맞이해 주었다.

모두가 긴 여행으로 인해 지쳐 있었지만 억제기 보수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억제기는 사우스 왕국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고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우선되었다.

가이우스와 샤니크를 포함한 고위 마법사 5명을 주력으로 한 마법사들이 억제기 보수에 투입되었고, 테일러를 포함한 용병들과 로렌시아 남작이 지휘하는 원정대 병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왔다.

그랑키아 숲 전역에 어둠이 내려앉고 하늘에는 새하얀 달이 빛을 밝혔다.

그리고 그 주위를 소금 같은 별들이 흩어져 반짝였다.

밤과 함께 저녁 식사 시간이 찾아오자 한적했었던 식당이 주둔지를 찾아온 손님들 때문에 소란스럽게 북적였다.

특히 용병들이 시끄럽게 굴었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수비대 기사들의 시선을 곱지 않았다.

“테일러. 옆에 앉아도 되겠나?”

어딘지 모르게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초췌한 얼굴로 빵과 수프, 그리고 고기가 담긴 식판을 들고 있는 고위 마법사 가이우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억제기 보수 작업이 상당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물론입니다. 임시지만 당신의 저의 파티원이니까요. 옆자리는 늘 비어 있습니다. 앉으시죠.”

“고맙네.”

테일러의 말에 가이우스는 감사를 표하며 힘없이 자리에 앉아 빵을 뜯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음식을 씹고 있는 가이우스를 향해 시선을 보내며 테일러는 입을 열었다.

“다른 고위 마법사들의 표정도 좋지 않네요. 많이 힘드셨습니까?”

테일러의 말대로 식판을 들고 움직이는 다른 고위 마법사들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물론 일부는 용병들과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사실에 불쾌해서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이었지만 테일러는 알지 못했다.

씹고 있던 빵조각을 삼킨 가이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도 말게. 새로 마법진을 그리느라 내 마력의 대부분을 쏟아 부었어. 다른 고위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네. 아마 오늘 밤에 몬스터들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제대로 된 마법도 쓸 수 없을 것이야.”

가이우스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 다가올 줄은 테일러도, 가이우스도 알지 못했다.

식사가 끝나고 테일러와 가이우스는 숙소로 이동했다.

건물 내에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가이우스는 방이 좁다고 불평했지만 사실 건물 안에 숙소를 배정받은 것은 나름 특혜였다.

수비대 주둔지의 병영에는 빈방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원정대원 대부분은 성벽 안의 뜰이나 연병장에서 천막을 치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병영 건물 안의 방을 배정받은 자들은 고위 마법사나 상급 장교들뿐이었다.

테일러는 고위 마법사도, 상급 장교도 아니었지만, 가이우스의 호위를 자처한 덕분에 그와 같은 방을 쓸 수 있었다.

“난 먼저 자겠네. 테일러. 몬스터가 몰려오지 않는 이상 날 깨우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 말을 끝으로 침대에 몸을 던진 가이우스는 달콤한 잠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테일러는 잠자리에 들기에 앞서 억제기 파괴까지 구하거나 파티에 영입해야 할 사우스 왕국의 주요 인물들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일기장을 꺼내 페이지를 여러 번 넘기며 미리 적어둔 기존의 역사를 읽어가던 그는 시간이 상당히 늦었음을 깨닫고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몸을 가볍게 풀어 지친 근육을 달래고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경종 소리가 꿈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려는 테일러의 발목을 잡았다.

“적습입니다! 무장하고 밖으로 나오십시오!”

복도에서도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일러는 서둘러 침대에서 나와 옆 침대에서 세상 모르고 잠의 늪에 빠진 가이우스를 흔들어 깨웠다.

“가이우스! 가이우스! 일어나세요!”

“으으……. 테일러. 내가 깨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잠에서 깨어난 가이우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테일러에게 어린아이처럼 짜증을 냈다.

그런 그를 보며 테일러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적습입니다.”

“적습?”

테일러의 말에도 잠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상황 파악이 늦어지고 있는 가이우스는 밖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경종 소리와 복도를 뛰어다니며 적습을 알리는 기사의 목소리에 현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 심각한 얼굴이 되어 옷걸이에 걸려 있는 로브를 입고 벽에 기대어 둔 스태프를 집어 들었다.

테일러도 옷을 갈아입고 사슬 갑옷을 입고 그 위에 두꺼운 가죽 갑옷을 걸쳤다.

그리고 날카로운 장검을 집어 들었다.

준비를 끝낸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바깥은 아수라장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었다.

자다 깬 것이 분명한 기사들은 졸린 기색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침착하게 무장을 위해 무기고로 달려가고 있었다.

방 안에 장비를 두고 자는 몇몇은 이미 완전히 무장한 모습으로 달려나오고 있었다.

“나는 먼저 성벽으로 이동하겠네!”

“아니요! 가이우스. 저와 함께 용병들에게 먼저 가야 합니다.”

성벽으로 달려가려는 가이우스를 말리는 테일러.

상황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지금 가이우스를 홀로 전장에 보낼 수는 없었다.

자칫 잘못해서 가이우스가 목숨을 잃는다면 힘들게 그를 살린 테일러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린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따르도록 하지.”

다행히 가이우스는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지 않고 순순히 테일러를 따랐다.

테일러는 그런 가이우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그와 함께 용병들의 천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