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턴 플레이어 25화
9장 정찰(3)
여정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최대한 빨리 억제기에 도착하기 위해 거대한 숲 한두 곳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20여 명 정도 나오긴 했지만.
제일 실력이 좋지 않은 용병이 브론즈일 정도로 수준 높은 용병들 덕분에 목숨을 잃은 병사나 용병은 나오지 않았다.
중간에 슐츠 요새를 지나치긴 했지만 시간이 많이 없다는 사정으로 요새에 들려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바로 그랑키아 숲을 향해 말을 달렸다.
용병들 전원이 승마술을 익히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원정대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릴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식 시간을 최소한으로 하여 달린 덕분에 에이옌 중심도시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랑키아 숲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보내겠다.”
로렌시아 남작의 지사가 전령들을 통해 원정대 전체에 전파되었다.
하늘은 어둠에 점령당했고,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위험한 숲에서 밤을 보내는 대신에 비교적 안전한 숲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선택한 로렌시아 남작이었다.
야영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만약을 위해 장애물이 설치되고 그 안으로 천막이 하나둘씩 세워졌다.
“내일이면 그랑키아 숲에 다시 들어가게 되는군.”
천막을 치고 있는 테일러의 곁에서 가이우스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한 빛무리에 의지한 채 책을 읽으며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가이우스는 나머지 4명의 고위 마법사가 있는 곳에서 머물러야 했지만 테일러가 가이우스의 호위를 자처한 덕분에 이동할 때를 제외하고는 함께할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 전력이면 작은 성 하나를 공략해 볼 법한 수준입니다.”
테일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가이우스 외에도 4명의 고위 마법사가 함께하고 있었고, 200여 명의 정예 병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200여 명 안에는 골드 등급의 용병도 함께하고 있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쓸데없는 걱정을 그만두도록 하지.”
가이우스는 책을 덮었다.
가이우스 주변을 맴돌던 빛무리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천막. 완성되었습니다.”
흐르는 땀 줄기를 닦으며 일어서 천막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래도 용병들의 지휘를 맡았다고 다른 용병들이 지급받은 천막에 비해서는 좋은 편이었다.
“가이우스, 슬슬 식사하러 가시죠.”
“그러지. 마력을 보충해야 해.”
둘은 사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저녁 식사를 배급받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둘을 향해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땀을 흘리며 바쁘게 뛰어오고 있었다.
그는 테일러와 가이우스의 앞을 막아섰다.
순간 검을 뽑으려던 테일러는 앞을 막아선 이가 브론즈 등급의 용병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검에서 손을 뗐다.
“자네, 무슨 일이지?”
“큰일 났습니다, 조장!”
용병들은 테일러를 조장이라고 불렀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싸움이 터졌습니다!”
“안내하도록. 가이우스, 함께 가시죠.”
가이우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앞서가는 용병의 뒤를 따라갔다.
용병의 뒤를 따르며 테일러는 부디 도착할 때까지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기를 빌었다.
혈기왕성하고 호전적인 용병들은 사소한 싸움으로 시작해서 끝내는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큰 싸움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도착한 현장에서는 브론즈 등급의 용병 한 명이 도끼를 들고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용병을 위협하고 있었다.
옆에는 술병이 굴러다니는 것으로 보아 술을 한잔한 것 같았다.
다른 용병들은 싸움을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을 빙 둘러싸고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테일러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도끼를 든 용병과 겁에 질린 어린 여자 용병.
상황을 대충 파악한 그는 도끼가 내려쳐지는 순간 번개와 같은 움직임으로 여자 용병 앞을 막아서고 도끼를 검으로 쳐냈다.
그리고 발로 용병의 다리를 걷어차 쓰러뜨린 뒤 목을 발로 밟고 날카로운 장검의 끝을 용병의 눈앞에 가져갔다.
“오오…….”
“와아.”
테일러의 빠르고 치명적인 검술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것을 무시하며 테일러는 차가운 눈빛을 용병에게 보내고는 입을 열었다.
“좀 진정되었나? 여전히 흥분한 상태면 피를 조금 빼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지, 진정되었습니다.”
테일러는 검을 거두고 발을 치웠다.
그러자 용병은 도끼를 가져갈 생각도 못 하고 줄행랑을 쳤다.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이것도 전투로 취급되는 것인지 알림음을 들으며, 테일러는 겁에 질린 얼굴로 장검보다는 조금 짧은 검을 쥐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수잔입니다, 조장.”
“용병패를…….”
“여기 있습니다.”
용병패를 요구하는 테일러에게 수잔은 자신의 용병패를 순순히 건넸다.
동으로 만들어진 용병패였는데, 발급일을 확인해 보니 브론즈 용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용병인 듯했다.
“오늘은 위험하니까 내 숙소로 가지.”
테일러는 수잔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방금 그 용병이 다시 올 수도 있었고, 다른 용병이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을 수도 있었다.
“잠깐!”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고 테일러의 귓가로 파고든다.
고개를 돌리니 골드 등급의 용병이 긴 적발을 휘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모세의 기적처럼 용병들이 좌우로 물러섰다.
그녀는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테일러를 응시했다.
그녀의 이름은 일리아나 웨스트.
실버 등급 용병들의 통제를 맡은 골드 등급 용병이자 불의 정령사였다.
“그녀는 내가 보호하겠어. 남자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
그러면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일리아나 웨스트.
기분 나쁠 법했지만 테일러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데려가시죠.”
“아, 그래. 고마워.”
테일러는 순순히 수잔을 넘겼다.
골드 등급의 용병인 그녀라면 수잔을 더욱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통제해야 할 수잔을 넘기는 것은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문제가 될 경우 수잔이나 일리아나가 잘 설명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수잔을 일리아나에게 인계한 테일러는 가이우스와 함께 말없이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사건 없이 흘러갔다.
다음 날 아침, 야영지를 정리한 원정대는 그랑키아 숲으로 진입했고 부지런히 움직여 821년 12월에 억제기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밤이 찾아왔고 원정대는 마지막 야영지를 찾아 야영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마법을 쓰고 싶은 밤이군요. 잠시 산책을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게. 대신 북부 군단의 기사 2명과 장병 20명이 함께할 것이네.”
샤니크 윌크로스필의 외출 요청에 로렌시아 남작은 잠시 고민한 끝에 승낙했다.
마법사들 중에는 괴짜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샤니크는 특히나 괴짜였고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원정대가 수도에서 처음 출발하고 샤니크와 함께 지내오면서 그에 대해 알게 된 로렌시아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를 붙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로렌시아 남작님.”
샤니크 윌크로스필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한 뒤 물러갔다.
잠시 후 그는 기사 2명과 장교 1명, 그리고 병사 19명과 함께 야영지를 벗어났다.
야영지를 벗어난 그는 마법으로 야행성 몬스터인 변이 박쥐 몇 마리를 죽이고 야영지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활성화시켜 둔 탐지 마법의 범위 안에서 뭔가 몬스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뭔가가 느껴지는군.”
그는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흘리며 움직임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몸집의 오크 상급 전사 하나와 꼬마로 보이는 어린 오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어린 오크의 모습은 다른 오크와 달랐다.
인간에 상당히 가까운 것이었다.
“저, 저건 뭡니까?”
하급 장교가 휘둥그레진 눈을 좀처럼 떼지 못하고 말했다.
샤니크는 뭐가 그리 즐거운 것인지 웃음꽃을 피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하이 오크다.”
하이 오크.
오크보다 진화한 종족으로,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지능과 외견을 자랑했다.
귀가 조금 더 길고 피부가 녹색인 점을 빼면 인간과 다를 바 없지만 인간보다 뛰어난 마력 적성과 정령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하이 오크를 죽이면 어떤 느낌일까. 후후후.”
그는 마법을 전개했다.
얼음 화살 수십 개가 하늘에 생겨났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오크 상급 전사는 꼬마 하이 오크를 감쌌고, 얼음 화살들은 상급 전사를 덮쳤다.
“칼레도쉬!”
“도……망치십시오. 베일아우스트 님…….”
그 말을 남기고 상급 전사 칼레도쉬의 숨이 끊어졌다.
“도망치게 놔두지 않는다.”
베일아우스트는 도망치려 했지만 보이지 않는 마력의 거미줄이 어린 하이 오크를 포박했다.
그리고 마력의 창이 어린 하이 오크의 목을 꿰뚫었다.
인간에 비해 생명력이 질긴 하이 오크지만 급소가 공격당한 이상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샤니크는 베일아우스트의 최후를 지켜본 뒤 병사들과 함께 야영지로 돌아갔다.
샤니크와 병사들이 사라지고 오크 수십 마리가 쓰러진 베일아우스트를 발견했다.
그들은 즉시 베일아우스트의 아버지이자 피칼날 부족의 족장 유즈겔리스크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형님, 바람칼날 부족의 상급 전사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 인간의 군대가 숲에 침입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억제기 보수를 위한 군대일 겁니다. 그들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유즈겔리스크의 동생이자 피칼날 부족의 제사장인 하이 오크 카리스크는 하이 오크답게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복수해야 합니다! 족장님!”
피칼날 부족의 상급 전사 라도쉬가 복수할 것을 진언했다.
다른 상급 전사들과 샤먼들도 하나 같이 복수할 것을 진언했다.
희귀한 몬스터들의 뼈가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회의장 안에서 유즈겔리스크는 결단을 내린다.
“전사들을 소집해라. 억제기를 공격한다.”
억제기 주변은 강력한 마력 결계로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몬스터는 가까이 접근하면 상당히 약해진다.
이 마법 결계 때문에 여태껏 많은 몬스터들이 억제기 공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왕국은 비교적 적은 수의 인원으로 억제기를 수비해올 수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복수심에 눈이 먼 피칼날 부족에게 마법 결계라는 장애물은 보이지 않았다.
하이 오크 족장의 말에 피칼날 부족의 전사들이 소집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