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26)

WHO WE ARE

시윤은 오늘도 가이드 없는 에스퍼들을 만났다. 이제는 아예 날짜를 정해 두고 주기적으로 만났다. 청호는 못내 싫은 티를 냈지만, 그래도 하지 말라는 말은 않았다. 모건에 의하면 연구실에 찾아와 거나하게 행패를 부리고 갔다는데. 용케 시윤의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청호가 행패를 부리는 모습을 상상하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큭,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의 손을 잡고 있던 에스퍼가 눈을 크게 떴다. 시윤은 미안하다며 손을 조금 더 꽉 잡아 주었다.

오늘 청호는 포스 근방으로 잠시 출정을 나갔다. 클롭스를 잡으러 가는 건 아닌 듯했는데, 굳이 뭐 하러 가냐, 언제 오냐, 캐묻지 않았다. 청호가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지. 때가 되면 말해 줄 것이고.

시윤은 에스퍼들의 손을 잡아 주며 오늘은 청호와 무엇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했다. 청호가 저녁 전에는 오겠다 했는데.

어제는 종일 ‘청호의 만물상’에서 이것저것 들춰 보고 들어 보고 읽어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종종 눈을 맞추고 그러다 입도 맞추면서. 참으로 따사롭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뭐가 좋을까…… 시윤이 눈을 가늘게 좁히는데 모건이 시윤의 앞에 앉아 있던 병사를 툭툭 두드리며 시간 됐으니 비키라 말했다.

시윤의 가이딩은 에스퍼 등급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이루어졌다. C급은 1분에서 2분, B급은 3분, A급은 5분, 그렇게. B급 에스퍼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시윤은 웃어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곧 다음 에스퍼가 시윤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시윤이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음? 당신은 뭐야? 목록에 없는데?”

홀로그램을 살피던 모건이 한쪽 눈썹을 비죽 올렸다. 시윤에게 가이딩을 받는 에스퍼는 모두 모건이 관리한다. 근데 지금 시윤의 앞에 앉은 에스퍼는 목록에 없었다. 거기다 나이가 지나치게 많았다. 대충 어림잡아 쉰쯤. 그 나이에 전장에 나가지 말란 법도 없고, 가이드가 있으란 법도 없긴 하지만 조금 이상했다.

보통 쉰쯤 되면 전장에 잘 나가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명령하는 쪽이지. 만약 먼 옛날 전장에 나가서 가이드를 잃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었다. 시윤이 가이딩을 기부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모건이 남자의 행색을 바쁘게 살폈다. 어딘가 낡아 보이는 군복. 깊게 눌러쓴 모자. 그 아래로 드러난 구레나룻은 희끗희끗하게 셌고, 얼굴은 까무잡잡했다. 그리고 명찰과 계급을 나타내는 배지가 없었다.

“뭐냐고.”

모건이 신경질을 내는데, 시윤이 됐다며 그를 밀어 냈다.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면 가이딩해 주면 되는 것이다.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목록에 좀 없으면 어떤가.

“손 주세요.”

시윤이 손을 내밀었다. 상처 하나 없이 하얀 손이 남자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남자의 부르튼 입술이 움직거렸다.

“6년.”

“네?”

“6년이 됐어.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

갑작스러운 타인의 죽음 소식에 시윤이 눈알을 좌우로 움직였다. 모건도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아버지는 엄청 건강하셨어. 일흔이나 먹었으면서 소리도 떽떽 잘 지르고, 화도 잘 내고, 힘도 셌지. 자전거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웬만한 젊은이보다 일을 더 많이 하셨어.”

“…….”

“그렇게 일해야 한대. 나한테 맨날 그랬어. 포스처럼 훌륭한 나라에서 안전하게 사는 건 축복이라고. 늘 고마워해야 한다고 하셨지.”

“…….”

“근데 어느 날 나라에서 건강 검진을 해 준다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참 좋은 나라라고 칭찬에 칭찬을 거듭했지. 다음 날 동네에 구급차가 왔어. 그리고 신난 아버지가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갔어. 뭐 이런저런 촬영도 하고 피도 뽑고 예방 주사도 맞았대.”

“…….”

“근데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으시더라고. 하루는 혈변을 보고 하루는 각혈을 하고 또 하루는 피눈물을 흘렸어. 그러다 온몸에 구멍이란 구멍으로 죄 피를 쏟으면서 돌아가셨지.”

시윤은 남자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심장이 옥죄는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속이 메슥거렸다. 두통이 일고, 눈알이 따끔따끔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제가 상상하는 그게 아니겠지. 그리 비는데 남자가 퀴퀴하게 죽은 눈으로 시윤을 바라봤다.

“맞아. 네 아비가 내 아버지를 죽였어.”

시윤은 머리 위로 묵직한 돌덩어리들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고개가 자꾸 아래로 고꾸라졌다. 어깨는 처졌고, 허리 역시 구부정하게 굽었다. 눈꺼풀도 아래로 내리깔렸다.

남자는 그런 시윤의 모습에 신이라도 난 건지 전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그 이유가 아주 기똥차!”

“…….”

“쓸모가 없다고. 공장에서 일을 못 할 거라고. 밥과 자원을 축내는 기생충이라고.”

시윤도 들었던 이유였다. 청문회 동영상에서 봤으니까. 비록 정원이 주가 되어 제안하고 실행한 살인은 아니었으나, 아무튼 정원 역시 그 자리에 있긴 했다. 그러니 그는 죄인이었고, 그의 아들인 저 역시 죄인과 다름없었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어깨를 옹송그리는데, 남자가 의자를 당겨 가까이 다가왔다. 청호가 붙여 둔 에로아스 병사들과,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에스퍼들이 총을 꺼내 병사를 겨눴다. 하지만 남자는 머리에 총알구멍이 나는 게 무섭지도 않은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너는 몰랐다면서?”

“…….”

“근데 그럼 너는 죄가 없나?”

“…….”

“우리 아버지도 죄가 없었는데 죽었잖아.”

“…….”

“그냥…… 그냥 뒀어도 얼마 못 살 노친네인데. 굳이 굳이 불러다가 죽였잖아. 그렇게 쉽게. 주삿바늘 하나로.”

시윤은 남자가 내뱉는 말에 흠씬 얻어맞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안구가 터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픈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남자는 이미 온몸이 피로, 눈물로 흠뻑 젖어 있어서.

“죄송…… 죄송합니다.”

시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제 아버지는 죽었는데, 그의 죄는 죽지 않아서 앞으로도 이렇게 그의 죄와 마주해야 할 듯싶었다. 숨이 자꾸 엉켰다. 마치 몸이 살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죽길 바라는 것처럼.

그때였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작고 번쩍이는 것을 꺼냈다. 군용 나이프였다. 중지와 검지를 합친 크기와 길이의 나이프.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이 남자를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는 황소 같은 힘으로 버텼다. 그러더니 으득 이를 갈며 나이프를 추켜세웠다. 뾰족한 칼끝이 시윤을 겨눴다.

시윤은 그걸 뻔히 봤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작은 칼이다. 저 칼에 찔린다 한들, 죽진 않을 터였다. 그냥 좀 아프고, 피부와 근육이 갈라지고, 피가 나고, 쓰러지는 정도겠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번 정도는 찔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모건이 치료해 주겠지. 청호가 화를 내겠지만, 잘 달래면 되겠지. 제 고통으로 이 사람의 분이 풀린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인 것 같았다.

시윤이 체념한 얼굴로 칼끝을 마주했을 때였다. 뎅그렁. 남자가 칼을 놓쳤다. 희멀건 바닥 위로 검은 나이프가 나뒹굴었다. 시윤은 병사들이 그의 손에서 칼을 쳐 낸 줄 알았다. 헌데 아니었다. 남자가 놓아 버린 거였다.

시윤이 혼란스러운 낯으로 남자를 쳐다보는데, 남자가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널 죽이고 싶었는데. 죽이진 못하더라도 칼로 배때기 한 번 쑤셔 줘야지, 생각했는데.”

“…….”

“보고 있으니까…… 그게 안 되네.”

“어째……서요?”

“나한테 너는 원수의 아들이지만, 여기 이 사람들한테는 고마운 사람인 거잖아. 그렇지?”

남자가 주위에 선 에스퍼들을 바라봤다. 남자는 몇 시간 전부터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아주 많은 것을 봤다.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들이 시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봤고, 시윤이 빙긋 웃으며 그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가이딩하는 것도 봤다. 깐깐하게 생긴 연구원이 에스퍼들을 함부로 대하면 조곤조곤 꾸짖는 것도 봤고, 에스퍼가 가이딩을 조금 더 요구하면 연구원 몰래 손을 길게 잡아 주는 것도 봤다.

정원을 닮아 아주 못되고, 이기적일 줄 알았는데. 그냥 마음씨 좋은 젊은 청년이었다.

“밀가루 반죽처럼 생겨서는…… 그 독하게 생긴 놈팡이랑 다를 것 같기도 하고…….”

“…….”

“칼을 빤-히 보고 피하지도 않는 게 불쌍하기도 하고…….”

남자가 쯧, 혀를 찼다. 여기까지 와서는 아무것도 못 한 자신에게 혀를 차는 건지, 지나치게 죄의식에 찌든 시윤을 향해 혀를 차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향해 물었다.

“나 잡혀 가나? 살인 미수 그런 거로?”

그 말에 에로아스 병사들이 시윤을 쳐다봤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 거였다. 시윤이 말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덕에 남자는 멀쩡히 두 발로 연구센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청호가 알 거야. 저 남자 죽을지도 몰라.”

모건이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시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덩그러니 남은 나이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 * *

“시윤아. 시윤아.”

청호가 시윤을 찾으며 다급하게 숙소로 뛰어 들어왔다. 부엌에 있던 시윤이 청호를 마중 나왔다. 손에는 사과잼으로 번들거리는 티스푼이 들려 있었다.

“오셨어요? 어머니가 사과잼을 잔뜩 보내 주셨…….”

시윤이 싱긋 웃으며 말하는데, 청호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시윤이 눈을 끔뻑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오늘 연구센터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시윤이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청호가 품에서 시윤을 떨어트려 놓더니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 댔다. 일그러진 눈에 짜증과 걱정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시윤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주었다.

청호가 옳다구나 하고 시윤을 세밀히 뜯어보았다. 하얗고 보드라운 피부에 상처가 나진 않았는지. 피가 흐른 흔적은 없는지. 쓸리거나 멍이 들진 않았는지.

위협은 있었으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 보고를 받긴 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었다.

청호는 시윤을 빙글빙글 돌려 보다 못해 그를 소파에 앉혀 두고 옷까지 들추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시윤이 입에서 티스푼을 빼내며 말했다.

“저 안 다쳤어요.”

“…….”

“정말 안 다쳤어요.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운 게 다예요.”

시윤이 청호와 지그시 눈을 맞췄다. 거짓일랑 하등 없는 표정이었다. 그제야 청호의 미간이 풀어졌다. 티스푼을 테이블에 내려둔 시윤이 찹찹 입맛을 다셨다. 희한하게도, 달짝지근한 사과 맛이 쌉싸래하게 느껴졌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저…… 화내고 짜증 내러 온 사람이었어요. 네 아버지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다. 그것을 잊지 마라. 알고 살아라. 그런 거요.”

“죽일까?”

청호가 소파 아래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시윤이 재빨리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돼요. 그 사람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고, 저는 그 사람이 정말 칼을 휘둘렀다고 해도 원망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 걸요.”

시윤은 잔인한 말을 무감한 얼굴로 잘도 해 댔다. 청호가 신경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몇 초 전에 펴졌던 미간이 그새 다시 구겨졌다.

시윤이 엄지로 청호의 미간을 살살 문질렀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저라도 누군가가 청호에게 위협을 가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근데, 그래도…… 그래도, 저와 청호는 엄연히 다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시윤이 어쨌든 다친 곳은 없으니 괜찮다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채 가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리고 가만히 시윤을 올려다봤다.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시윤에게서 전해지는 청량함과 따스함에 불처럼 올라가 있던 체온이 정상의 궤도로 돌아오고 있었다.

“시윤아.”

“네.”

“뻔뻔하게 살아.”

“……네?”

“네가 슬퍼하고 우울하게 산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이 줄진 않아.”

청호의 말에 시윤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맞는 말이다. 제가 속죄하며 평생을 산다 한들, 이미 죽은 자들이 되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도리가 있지.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있는 인간이라면, 그 슬픔을 해갈해 주진 못하더라도 공감은 해 줘야지. 미안하다고 입으로나마 나불거려야지. 행복하게 살면 안 되지.

시윤의 생각과 이치론 그게 맞았다.

“하지만…….”

“조금 나빠져도 돼.”

“…….”

“이기적이어도 되는 세상이야. 포스 바깥에서는 통조림 하나로 서로를 죽여. 인간의 시체를 조각내서 보관해 놨다가 클롭스를 유인할 때 쓰기도 해.”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끔찍한 말이었다.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 끔찍했다. 파르르 경련하는 시윤의 눈동자에 청호가 그를 더 몰아붙였다. 낮은 목소리가 시윤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마구 내몰았다.

“그런 사람들도 뻔뻔하게 잘 살아가. 근데 넌 뭘 했는데?”

“저, 저도 열여섯 살에…….”

“박종우 이야기라면 집어치워. 그건 이미 계산 끝났으니까.”

화가 섞인 청호의 목소리에 시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잡아 쥐었다. 그러고는 시윤의 허벅지 사이에 볼을 파묻었다. 시윤이 무심코 반대 손으로 청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청호가 기분 좋다는 듯 코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윤이 그런 청호를 달래듯 조곤조곤 말했다.

“박종우 하사 일은…… 그래요, 계산이 끝났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근데 아버지 죄는 아니에요.”

그 말에 청호가 슬쩍 고개를 들어 시윤의 허벅지에 턱을 괬다. 그리고 특유의 낮은 음성으로 어르듯 말했다.

“채정원이 저지른 일은, 말 그대로 채정원이 한 일이야. 네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

“…….”

“그러니까 네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슬퍼하지 마.”

“…….”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청호의 말에 시윤이 갸웃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대장님을 위해서요?”

“그래. 날 위해서. 네가 자꾸 이러면 내가 채정원을 닮고 싶어져.”

“……네?”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청호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다시 시윤의 허벅지에 뺨을 묻었다. 그러고는 중얼중얼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다 죽여 버리고 싶단 말이야. 네가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들을 다 도륙 내어서, 그들의 목을 매달아 두고 싶어. 그 누구도 네 앞에선 입도 벙긋 못 하게.”

상당히 잔인하고 무서운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시윤의 손을 살살 쓰다듬는 게 그렇게 이질적일 수가 없었다. 시윤이 차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 있는데, 청호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낮게 웃었다.

“협박 같지?”

“……네.”

“협박 맞아.”

“…….”

“내가 그런 괴물이 되게 하지 말라는 협박.”

시윤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야 말았다.

“……그럴게요.”

그냥 이 사람은 제가 죄책감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꼴을 보느니, 자신이 악역이 되고 싶은 거다. 그걸 너무,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 청호의 모진 말들이 그저 귀엽게 느껴졌다.

“내가 말했지. 난 지금까지 의도했든 아니든, 아주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고.”

청호는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시윤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네.”

“내가 폭주로 죽인 사람들의 가족들. 내가 일부러 죽인 사람들의 가족들. 또는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가족들. 하나같이 나를 미워했을 거야. 원망하고 혐오하고 저주했겠지.”

“…….”

“근데 그들은 나에게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어. 눈짓 따위면 모를까. 감히 나에게 와 입을 놀리거나 복수하겠다며 이를 간 적도 없지.”

“…….”

“왜일 것 같아?”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청호는…… 청호지 않는가. 그 한 문장으로 모든 답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시윤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청호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청호의 독백 아닌 독백을 들어 주고 있었다. 청호가 제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강해서? 덤벼 봐야 안 될 걸 아니까? 자기들 목숨이 아까워서?”

“…….”

“아니야. 가족이 죽으면 그런 거 다 상관없어져. 복수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 따위 수백 번이고 내놓을 수 있단 말이야.”

“…….”

“근데도 날 찾아오지 않은 건, 나에게 원망을 토로하지 않은 건, 내가 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언젠가 시윤도 말한 적 있지 않던가. 청호가 실수로 열 명을 죽이고, 백 명을 구한다면 그게 정의라고.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게 얼마나 흔한지 알아. 그리고 기적이라는 게 얼마나 귀한지도 알지.”

“…….”

“내가 죽인 자의 가족들은 내가 얼마나 많은 희망을 주는지 알고 있어.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사는 거야. 자기 자식이, 자기 부모가, 자기 친구가 나 때문에 죽었는데 또 다른 이의 자식을, 부모를, 친구를 내가 구하니까.”

“…….”

“그들은 가족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받고, 나는 그걸 확인시켜 주거든.”

시윤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전보다 힘찬 끄덕임이었다. 지극히 동의하는 바이다. 제가 종우의 일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거라 생각했을 때도, 청호가 그들을 구해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근데 그걸 지금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청호처럼 많은 사람을 구하지도,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도 않는데. 고작 해 봐야 가이드 없는 에스퍼들을 가이딩해 주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정원이 저지른 죄들과 같은 선상에 놓기엔 민망한 수준이었다.

시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여태 청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하지만 쉽사리 결론을 도출할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말했다. 그러자 고개를 든 청호가 씨익 웃어 보였다.

“너도 그럴 수 있어, 시윤아.”

“……제가요? 어떻게요?”

“박종우가 왜 너를 용서해 줬다고 생각해.”

“어……. 제, 제 아버지를…….”

“채정원을 죽여서?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지. 원래 복수는 곱절로 커지는 법이야. 온전한 복수가 되려면 채정원은 물론, 네 어머니와 너까지 죽였어야지. 근데 그러지 않은 건…….”

“않은 건요?”

“네가 내 가이드라 그래.”

“……예?”

“네가 없으면, 내가 죽으니까. 박종우는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살린 날 죽일 수 없어서 널 살려 둔 거야.”

시윤이 뻐끔, 턱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제가 청호의 가이드라서.

……그렇네. 처음 청호의 반려 가이드가 됐을 때 그런 생각 한 적 있었다. 저는 그 대단한 청호의 고통을 덜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신난 마음에 철없이 한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청호가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저는 죄가 많은 정원의 아들이라, 그 흙탕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있다. 근데 또 수많은 사람을 지키는 청호의 가이드이기도 해서, 그 영광스러운 일에 일조하고 있기도 하다.

시윤의 눈이 고운 호선을 그리며 사르르 접혔다. 그가 청호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짧게 키스했다.

“……고마워요, 대장님.”

비록 제 죄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건 깨달았다. 제가 다치면 청호를 가이딩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럼 죽은 이들의 가족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일 역시 사라지는 거니까.

청호가 몸을 일으키며 시윤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 채로 소파에 엎어졌다. 시윤이 익숙하게 청호의 목을 마주 안았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이마와 콧잔등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다 시윤과 지그시 눈을 맞췄다.

“내일 나랑 갈 곳이 있어.”

“어디요?”

“네가 포스의 국민을 구할 수 있는 곳.”

단번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시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청호는 답 없이 웃기만 했다.

* * *

청호는 손수 지프를 운전했다. 시윤은 조수석에 탔다. 독특한 출정이었다. 포스 바깥으로 나왔는데, 클롭스를 죽이러 가는 건 아니란다. 그래서 에로아스 부대가 동행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목적지 역시 그리 멀지 않단다.

시윤은 청호에게 목적지를 넌지시 물어보기도 하고, 궁금하다는 티를 내기도 했으나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지프는 포스를 벗어나 한 시간 정도 달렸다. 황량한 뜰이 한참이나 이어지더니 곧 나무가 빽빽하게 선 숲이 나왔다. 지프는 곧장 숲으로 들어섰다.

숲에는 신기하게도, 길이 나 있었다. 포장도로는 아니었고, 누가 수시로 드나든 듯 풀이 죽어 흙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청호가 그 길을 따라 산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시트에 짓눌린 엉덩이가 지끈거릴 때쯤, 지프가 멈췄다. 청호가 먼저 차에서 내리고, 시윤이 뒤따라 내렸다.

시윤이 청호를 곁눈질로 살폈다. 약식으로 챙겨 입은 군복 차림, 총은 물론 나이프도 챙기질 않은 데다가, 병사들도 끌고 오지 않았다. 정말 클롭스를 죽이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도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리 와.”

청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윤이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청호는 나무와 나무가 얽혀 있는 틈으로 걸어갔다. 가끔 나뭇가지들이 팔뚝을 스치고, 무성한 풀들이 무릎과 종아리를 스치는 울창한 숲 그 자체였다. 숲 특유의 축축하면서도 상쾌한 냄새가 느껴졌다. 포스에선 쉽게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저 멀리서는 정체 모를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숲을 만끽하며 3분쯤 걸었을까. 시멘트 벽 하나가 나왔다. 아니, 자세히 보니 문이었다. 차고 문처럼 위로 열리는 문 말이다. 그 문은 전투기가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고, 무거워 보였다. 이 울창한 숲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문이었다.

청호가 주머니에서 ID 카드 하나를 꺼냈다. ‘마이클 크라우즈’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원수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쯤, 시윤은 이곳이 원수들의 또 다른 죄가 묻혀 있는 곳임을 알아차렸다.

청호가 ID 카드를 귀퉁이에 붙어 있던 리더기에 가져다 댔다. 삑. 전자음이 울리고, 리더기가 푸른빛을 띠더니 곧 문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 안에 갇혀 있던 서늘한 바람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런데도 아주 넓은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청호가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시윤이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이 완전히 들어서자 문이 닫혔다. 그러더니 머리 위에 있던 전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렇게 켜진 불을 따라 가까운 것부터 하나둘씩 켜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격납고만큼이나 커다란 공간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자동차만 한 크기의 은색 통 수천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아니, 통이라고 묘사해도 되나. 꼭 조립 전의 미사일 같기도 하고, 수통 같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게 끝없이 있었고, 군데군데 그것을 운반하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나 지게차 따위도 보였다.

반대편에는 연구실처럼 생긴 공간이 있었는데, 크기가 각양각색인 유리병들이 잔뜩 보관되어 있었다. 주사약병도 있었고, 링거 팩도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 들어 있고, 환풍기나 온풍기 따위가 함께 있는 걸 보아하니 습도나 온도 같은 걸 조절하는 듯했다.

분명 인간이 만든 공간이다. 클롭스가 만드는 무딘 도끼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근데, 듣도 보도 못한 공간이었다. 흔히 들르던 무기고나, 격납고나, 홀로그램 보관소와는 전혀 달랐다. 무엇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인지, 무엇을 보관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게…… 이게 다 뭐예요?”

시윤이 물었다. 청호가 시윤을 따라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방사능.”

“…….”

“그리고 전염병.”

“…….”

“미래에 인간을 죽일 것들이지.”

시윤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원수들이 모아 둔 것이구나. 사람들을 개로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모으고 있던 그 죽음들이 여기 있었구나.

시윤이 초점 없는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새어 나가면 큰일 날 것들이다. 핵전쟁이 일어났던 때처럼, 끔찍한 종말이 도래할 터였다. 인간은 물론, 동물에 자연까지 죽겠지. 비명이 공기를 타고 흐르고 묘지가 대지를 지배하게 될 게 분명했다.

그걸 상상했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시윤이 속절없이 휘청거리는데, 청호가 그를 당겨 눈을 맞췄다.

“시윤아.”

“……네, 네?”

“네가 없애야 해.”

“이……걸요? 제가요?”

“너만 없앨 수 있어.”

청호의 말에 시윤이 다시 눈앞의 것들을 쳐다봤다. 제가 없애야 한다 생각하니 그저 물체이던 것들이 저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숨이 껄끄러워지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파기가 불가능한 것들이야. 태울 수도, 얼릴 수도 없는 것들. 파기할 방법을 찾는다 하더라도, 잠깐 실수해서 공기 중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포스에 있는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할 거야.”

“…….”

“그러니까 네가 없애야 해. 완전한 소멸. 알지?”

완전한 소멸. 흔적도, 자취도 남지 않는 소멸.

청호의 말이 맞았다. 파기하다가 병이 하나라도 깨지면, 하필 그 전염병이 공기 중으로 전파되는 것이면, 우리는 또 다른 지옥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잖아도 슬픔이 범람하는 시대이다. 또 다른 눈물을, 피를, 죽음을 맞이할 순 없었다.

시윤이 턱을 당기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네가 포스를 살리는 거야.”

“…….”

“지금의 포스도. 훗날의 포스도.”

그 말을 끝으로 시윤의 눈동자에 연둣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텅 빈 창고를 등지고 나오자 오후 특유의 주홍빛이 세상에 내려앉고 있었다. 가끔 해가 반짝일 때마다 눈부심에 눈을 찡그리게 됐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굵직한 나무 몇 개를 지나치자 드넓은 억새밭이 펼쳐졌다.

“와…….”

시윤이 순수한 감탄을 내놓았다. 뭉근한 노을빛을 머금은 억새들이 흔들리며 파도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바람이 콧구멍을 통해 폐부로 스며 왔다. 숲 특유의 냄새가 났다. 잘 익은 노을 냄새도 났다.

청호와 시윤은 손을 잡은 채 그 억새밭을 걸었다. 시윤이 반대 손을 뻗어 억새들을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잎들이 손가락을 스쳤다. 그 간지러움에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대신 수시로 눈을 맞추고, 입을 맞췄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억새밭의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절벽이었다. 뚝 끊긴 산 너머로 아주 먼 곳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반쯤 모래에 뒤덮인 폐허도 보였고, 그저 황량하기만 한 벌판도 보였고, 벽을 둘러싸고 있는 포스도 보였다.

두 사람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늘 바쁘게, 다급하게 움직이는 포스인데. 이렇게 멀리서 보니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고 한적해 보였다.

시윤이 청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단단한 가슴에 볼을 묻었다. 청호가 시윤을 마주 안으며 속삭였다.

“시윤아.”

“네.”

“지금은 아픈 세상이야. 너도, 나도, 다른 사람들도.”

“…….”

“근데 매일 아파하진 말자.”

“…….”

“우리는 그냥 오늘처럼 이렇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해 가면 되는 거야.”

시윤은 바람에 실려 오는 청호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청호가 커다란 손으로 시윤의 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땐. 이미 지나간 일이고 되돌릴 수 없을 땐.”

“…….”

“그냥 놀자. 나랑.”

그 말에 시윤이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눈치 없이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졌다. 청호가 시윤의 눈가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울지 마. 다정한 말에 어째서인지 시야가 더 뭉그러졌다.

우리는 매번 지나간 일로 아파하고 슬퍼한다. 앞으로 헤쳐 갈 일도 많은데, 과거를 놓을 수가 없어서 그 그림자에 갇혀 울고, 또 울다가 끝내는 피를 본다.

저도 그랬고, 청호도 그랬다.

그러지 않았으면 훨씬 더 일찍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덜 울고, 조금 더 웃을 수 있었을 텐데. 햇볕이 얼마나 따사로운지, 풀이 얼마나 보드라운지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이 지독한 세상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시윤이 훌쩍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땐. 지나간 일이라 되돌릴 수 없을 땐.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보며 빙긋 웃었다.

“여기까지 나온 김에 놀러 갈까?”

“…….”

“바다도 좋고. 이런 산도 좋고.”

청호의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먹빛 눈동자는 은은히 반짝였고, 도독한 입술은 시원하게 벌어졌다. 그 미소를 보던 시윤이 봄을 맞이한 꽃봉오리가 터지듯, 그를 따라 웃었다.

“네. 가요.”

아픈 세상이지만,

오늘은 울지 말고.

오늘은 아파하지 말고.

놀러 가요, 우리.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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