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빙하
시윤이 정신을 차린 건 꼬박 이틀이 지나서였다. 여전히 링거를 주렁주렁 단 채였고, 곁에는 간이 의자에 앉은 선화와 심각한 표정의 시훈과 시준, 그리고 정원이 있었다.
“시윤아! 정신이 들어? 응?”
선화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시윤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머지 가족들도 시윤의 곁에 모였다. 하나같이 초췌한 행색이었다. 누가 보면 시윤이 아픈 게 아니라 그들이 아픈 줄 알 정도였다.
시윤이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주위를 살폈다. 지나치게 멀끔하고 커다란 병실이 눈에 들어왔다.
병실, 가족들, 그리고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청호.
시윤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마른 입술이 떨어지며 쓰라린 고통을 느꼈다. 시훈이 얼른 따뜻한 물을 입술에 가져다 대 줬다. 시윤이 꼴깍꼴깍 천천히 물을 마셨다. 그리고 탄식 같은 한숨을 흘리며 침대에 늘어졌다.
“어디가 아파? 응? 모건 부를까?”
선화가 시윤의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윤이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하게 별다른 고통이 없었다. 그냥 조금 찌뿌듯한 정도. 종일 격한 운동을 하고 곧장 잠들어 버린 것처럼 근육통이 느껴지는 정도였다. 화상으로 후끈거리던 발목도 이렇다 할 통증이 없었다.
모건이 또 무슨 짓을 한 건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시윤이 가족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며 흐릿하게 웃었다. 괜찮다는 표시였다. 청호와 관련해서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분위기만 안 좋아질 뿐이리라. 이제 가족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을 텐데, 여기서 청호의 편을 들어 봐야 긁어 부스럼일 게 뻔했다.
헌데 청호는 진짜 어디 갔나. 근래 그가 절 대하던 것을 떠올리면 절 이리 혼자 뒀을 리가 없었다. 가족들의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못 견뎌서 자리를 떴나. 하긴, 장의식에서도 사망자 가족들의 눈길을 힘들어하던 그인데 오죽하겠나.
그리 생각했더니 괜히 미안해졌다. 제가 A급만 되었어도 지금의 상황은 도래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다시 물을 마신 시윤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왜. 더 누워 있어.”
시준이 걱정스레 말했다. 시윤이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아프지 않다. 그러니 이렇게 게으르게 누워 있을 필요도 없었다.
시윤이 보란 듯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직 목구멍이 쓰라리고, 핏줄이 따끔하고, 근육이 파르르 떨리긴 했지만 청호의 숙소에 있을 때와 비하면 다시 태어난 수준이었다.
“어휴……. 내 새끼. 왜 이렇게 말랐어.”
선화가 코를 훌쩍이며 시윤을 바라봤다. 볼이 핼쑥하게 파인 아들의 모습에 심장이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일단 밥부터 먹자.”
시훈이 테이블에 놓인 도시락 통을 풀었다. 김이 폴폴 나는 죽과 목 넘김에 무리가 가지 않는 계란찜, 고기를 담뿍 넣은 미역국, 달짝지근하게 졸인 무와 감자조림 등이었다.
시윤이 그것을 기쁘게 반겼다. 선화도 형들도 모두 요리를 잘하기 때문이다. 시윤은 열심히 또 꾸준히 수저를 움직였다. 오랜만의 허기에 음식을 아주 때려 넣다시피 했다. 그런 시윤의 모습에 선화와 형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걱정보다 안도가 우선이었다.
시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종알종알 이것저것을 묻는 선화나 형들과 달리 정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윤이 이따금 그를 흘깃거렸으나, 시선이 마주치면 슬쩍 눈을 피하기까지 했다.
형들이 식사 뒷정리를 하는 동안 시윤은 가늘게 뜬 눈으로 정원을 바라봤다. 기분이 묘하게 떫었다. 저렇게 조용할 사람이 아닌데. 제 상태가 어땠는지 봤다면, 분명 청호를 어떻게 해 버리겠다고 분기탱천했을 텐데. 너무 평온했다.
시윤이 선화에게 자신의 손목시계를 찾아 달라 부탁했을 때였다. 정원이 가족들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가족들은 군말 없이 병실을 나섰다. 마치 이리될 걸 알았던 듯이.
그쯤, 시윤은 좋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왜요.”
“…….”
“설마…… 청호 대장님께 무슨 짓 하셨어요?”
“…….”
“하셨냐고요!”
“그놈은 괴물이야. 인간도 아니다. 어떻게 반려 가이드에게 이따위 짓을 해.”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시윤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정원을 노려봤다.
“무슨 짓 하셨어요?”
“해야 할 일을 했다.”
“그게 뭔데요.”
“…….”
정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윤은 눈알이 순식간에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반면에 정수리는 차게 식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배었다.
시윤이 손등에 박힌 링거를 아무렇게나 뜯어냈다. 그러고는 슬리퍼도 신지 않고 병실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정원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미 늦었다.”
“……뭐가요.”
“청호는 출정했어.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게다.”
시윤이 고개를 옆으로 갸웃 뒤틀었다. 출정한 청호가 돌아오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뭐, 청호가 전장에서 죽기라도 한단 소리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세상 어떤 적도 청호를 죽일 순 없다. 다칠 수야 있겠지. 그러나 청호는 금세 회복할 터였다. 더군다나 근 몇 주 내내 제게 가이딩을 받지 않았던가. 컨디션이 매우 좋은 상태일 거란 말이다.
근데 문제는, 정원도 그것을 알고 있을 거란 거였다. 그 역시 S급 에스퍼고, 수많은 전장을 겪어 봤다. 거기다 A급인 형들도 매번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지 않나. 그러니 SS급 에스퍼가 죽기 쉽지 않다는 걸 알 텐데.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걸까.
“저도 갈래요.”
시윤이 정원을 지나쳤다.
“이미 늦었다고 하지 않니.”
정원이 재차 시윤을 막아섰다. 시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원을 노려봤다.
“늦었든 말든, 저는 갈 거예요. 만약 대장님이 죽, 죽는다면 저도 그 옆에서 같이 죽을 거라고요.”
시윤이 빠른 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정원이 그런 시윤의 손목을 잡아채 확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엄청난 힘에 시윤이 속절없이 그에게로 끌려갔다.
“그게 무슨 미련한 말이냐! 그놈이 너한테 이따위 짓을 했는데, 어떻게 아직도 반려라고 생각하는 게야!”
“아버지.”
“그놈은 네 에스퍼가 아니다. 이건 다 오류야. 무언가가 잘못된 거다. 청호만 죽으면 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전부 괜찮아질 게다. 너도, 나도, 우리 가족도.”
“……아니요. 저는 못 돌아가요.”
“채시윤!”
정원이 귀청이 떨어질 듯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시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정원의 이런 악다구니에 질릴 만큼 질렸다. 그저 청호를 모함하는 것만으로도, 제 가이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뇌가 지글지글 끓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아예 청호를 죽이려 한단다.
시윤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제 손에 총이 있었다면, 정원을 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차게 식은 시윤의 눈동자를 보던 정원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떴다. 시윤의 아래에 보랏빛 원 하나가 생겨났다. 시윤이 그것을 피해 옆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원이 발아래를 정복한 상태였다.
시윤은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실이 온몸을 꽁꽁 동여매고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하물며 눈꺼풀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의사를 불러 진정제를 놔 주마. 며칠 푹 쉬면 다 괜찮아질 게다.”
정원이 자비로운 신처럼 말했다. 뒤를 돈 그가 의료진을 호출하는 벨을 꾹꾹 여러 번 눌렀다.
시윤은 그런 정원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허나 속은 전쟁통이었다. 청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반려 에스퍼를 잃은 가이드. 그나마 A급이면 가이드 없는 에스퍼의 가이딩을 도울 수 있을 텐데, 저는 고작 C급이다. 청호가 없으니 등급이 오를 리도 없었다.
그럼 정원의 말마따나 과거의 저로 돌아갈 터였다. 연구실에 처박혀 클롭스 동영상만 들여다보겠지. 그러다 신병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이따금 모건과 체스를 둘 것이다. 전장은 꿈도 못 꾸겠지. 나갈 이유가 사라졌으니.
또, 청호가 없는 포스는 어떻게 될 것인가. 누가 그의 자리를 대신하나. 누가 이 나라의 안위를 지키고, 국가에서 소모품 취급하는 병사를 걱정하고, 방랑자들을 구하나. 대체 누가 그 모든 것을 청호처럼 해낼 수 있나.
시윤은 점차 두통이 오는 걸 느꼈다. 누가 관자놀이에다 대못을 대고 망치로 쾅쾅 두들기는 것 같았다.
모든 인생을 포스에 바친 청호. 그의 어미와 그를 지옥 속에서 살게 한 인간들에게 끝내 복수하지 못하고 떠난 청호. 결국 그렇게 죽어 버린 청호. 시체가 된 청호. 몸이 갈기갈기 찢긴 청호.
그걸 상상했더니 숨이 턱 막혀 왔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분노가 솟구쳤다. 눈알이 활활 타는 듯했다. 핏줄이 팽팽해졌다. 청호의 힘을 받아들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몸속에 있던 무언가가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이 병실을 울렸다.
놀란 정원이 휙 시윤을 쳐다봤다. 시윤의 발밑을 감싸고 있던 보라색 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시윤아?”
정원이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그런 정원을 잠시 바라보던 시윤이 망설임 없이 문을 향했다. 그에 정원이 당혹도 접어 두고 얼른 그를 막아섰다. 그 후 다시 시윤의 발아래에 원을 만드는데, 시윤이 텁, 그의 손목을 잡아 쥐었다.
“제가…… 간다고 하잖아요…….”
시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쁜 담갈색이던 그의 눈동자가 은은한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아주 맑은 바다의 에메랄드색 같기도 했고, 빛을 투과한 여름의 나뭇잎 같기도 한 색이었다.
그러다 다시 갈색으로 돌아왔다.
“너…….”
생전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당황한 정원이 넋을 뺐다. 시윤에게 잡힌 손목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악력이 엄청나서는 아니었다. 시윤의 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고작 C급 가이드 수준에 불과했다.
근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시윤과 닿은 살갗이 지글지글 타는 듯했다. 손목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이 어버버, 턱을 떨자 시윤이 그의 손목을 툭 던지듯 놨다. 정원이 얼른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시윤의 손자국을 따라 손목이 움푹 파여 있었다. 누가 그의 손 모양대로 손목을 잘라 간 것처럼 말이다. 근육과 뼈가 죄 드러났는데, 희한하게 피가 나지 않았다. 사라진 부분을 제외한 근육과 핏줄은 평화로이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시윤은 정원의 상태가 어떻든,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정원을 지나친 시윤이 병실을 나섰다. 정원이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손목을 내려다봤다. 손목이 느릿하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윤이 제 손목에 해를 입힌 게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란 말이다.
그 어떠한 공격도 없었거늘 대체 어떻게.
정원이 뻐끔 턱을 떨어트렸다.
제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시윤은 정원을 등지고 나왔으나 어떻게 청호를 찾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일단 에로아스에게 연락해야 할 듯한데. 그러려면 홀로그램을 찾아야 했다. 제 연구실이나, 모건의 연구실로 가야 한단 말이다.
시윤은 자신의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 모건에게 갔다가 그가 절 정원의 손에 다시 넘길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연구실에서 여분의 손목시계를 챙기고, 무기는…… 무기가 없는데. 아, 있다 한들 제가 뭘 하겠나. 사실 청호를 따라가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환자복 차림의 시윤이 온 시선을 받아 가며 연구실 복도에 도착했다. 그러곤 우뚝 멈춰 섰다. 모건이 연구실 앞에 서 있었다. 흠칫 놀란 시윤이 뒷걸음질을 쳤다. 정원의 명령으로 그가 절 잡으러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건은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순식간에 시윤을 따라잡았다. 시윤이 가쁘게 숨을 들썩거리며 도망칠 준비를 하는데, 모건이 배낭 하나를 내밀었다.
“필요한 거 챙겼어. 가지고 가.”
“……예?”
“청호한테 가는 거잖아. 격납고에 헬기도 빼놨어. 검은색. UH-60. 좌표는 입력해 뒀고. 자동 비행이야. 옷은 이 안에 있어.”
모건은 꼭 지금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굴었다. 이것저것을 챙겨 둔 것도 그렇고, 제가 자신의 연구실로 올 줄 알았던 것도 그렇고.
시윤이 미심쩍은 눈으로 배낭을 받았다. 그가 절 속이는 것이든 아니든, 당장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시윤이 배낭을 메고 막 뒤를 돌려는 찰나였다.
“배낭 안에 손가락만 한 주사기가 다섯 개 있을 거야.”
“예?”
“그거 휴 머리카락으로 만든 거니까, 필요하면 써.”
“……휴요? 지금 휴라고 하셨습니까?”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모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윤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휴의 머리카락. 갑자기 그게 어디서 났단 말인가. 다섯 개나 만들었다 함은 한 가닥도 아니고 여러 가닥이 있단 말인데.
아아, 그래서 제 몸이 이리 가뿐해졌구나.
“그걸 어떻게 구하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일단 청호한테 가.”
시윤의 어깨를 잡고 한 바퀴 돌린 모건이 툭툭 그의 등을 밀었다. 잠깐 주춤거리던 시윤이 후다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모건이 멀어지는 시윤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 * *
Z2 구역은 멀었다. 헬기를 타고 가도 꼬박 열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시윤은 헬기에 있는 내내 청호와 폴, 또 알렌과 딜런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를 시도했으나 아무런 답도 얻지 못했다. 꼭 누가 통신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들의 정확한 위치도 알 수가 없었다.
Z2 구역은 온통 눈밭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새파란 바다에 빙하가 삐죽삐죽하게 올라와 있고, 높다란 설산이 여기저기 우뚝 솟아 있었다.
드문드문 있는 바다를 제외하곤 전부 하얀색이었다. 에로아스가 자리를 잡았다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투명 바리케이드를 쳤을 텐데. 이래서야 원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헬기는 모건이 지정해 둔 좌표에 착륙했다. 안타깝게도 헬기를 조종할 줄 모르는 시윤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춰야 했다.
시윤은 모건이 배낭에 챙겨 준 모든 옷가지를 껴입었다. 그리고 빈 배낭에다 헬기에 있던 무기를 죄 쑤셔 넣었다. 수류탄과 C4, 잘 다룰 줄 모르는 SR 총기들까지. 가장 중요한 붉은색 주사기는 외투 안주머니에 꼼꼼히 수납했다.
그리고 청호가 준 총을 손에 든 채 헬기에서 내렸다. 바깥은 추웠다. 얼음과 눈이 가득한 창밖을 보며 추울 거라 예상은 했다만, 정말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추웠다. 눈알이 어는 것 같았다. 사화산 작전 때도 추웠는데, 그보다 더했다.
시윤은 정처 없이 걸었다. 수시로 홀로그램을 켜 에로아스의 위치를 찾아보고, 열 감지 카메라도 만지작거려 봤으나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얼음 위를 세 시간쯤 걸었을까.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몸이 크고 작은 통증을 호소해 왔다. 화상을 입은 다리가 아직 다 낫지 못한지라 시큰거렸다. 거기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클롭스, 그리고 정원이 심어 놓았을 함정 등을 주의하고, 조심하고, 걱정하느라 정신이 다 혼미했다.
그래서일까. 평탄한 길만 골라가게 됐다. 울퉁불퉁한 지형은 피하고,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쌓인 곳도 피하고, 얼어붙은 얼음 위에 눈이 얕게 쌓여 걷는 데에 문제가 없는 길로만 다녔다.
그러나 그 영악한 수작도 오래가진 못했다. 전신의 근육이 방금까지 병실에 누워 있던 몸으로 이런 짓을 하는 게 제정신이냐며 농성을 부리고 있었다.
시윤은 어쩔 수 없이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커다란 돌산 아래, 그늘지고 음습한 곳을 찾아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모건이 챙겨 준 램프를 최대한으로 밝혔다. 대체 왜 기름과 불로 켜는 램프를 줬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뜨끈하니 좋았다.
잠시 그 열기를 느끼던 시윤이 장갑을 벗었다. 그 후 배낭에서 채혈 기계를 꺼내 엄지를 꾹 눌렀다가 뗐다.
[A]
매우 만족스러운 알파벳이 떠올랐다. 역시, 휴의 머리카락만큼 효과가 좋은 게 없다. 이제 청호만 만나면 되는데, 이 넓은 땅덩어리를 어떻게 헤집어야 그를 찾아낼 수 있으려나.
시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오늘따라 얄미웠다. 시간이 없다.
초조해진 시윤이 다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배낭에서 영양제 몇 개를 집어 물 없이 삼켰다. 그리고 뒷정리를 하는데, 눈치 없는 군화가 램프를 걷어찼다. 기우뚱, 흔들리던 램프가 그대로 쓰러졌다. 파삭.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
시윤이 짜증스레 미간을 구겼다. 램프 유리가 깨져 그 틈으로 기름과 불이 질질 새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다 하필 돌 사이에 낀 마른 나뭇잎과 만나 불이 더욱 활활 타올랐다. 시윤의 얼굴에 불그림자가 일렁일 정도였다.
시윤이 손으로 눈을 퍼다가 불을 덮었다. 그러나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이 추위에 어찌 그리 맹렬하게 세력을 넓혀 가는지. 누가 눈에다 기름을 뿌려 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짜증으로 시작했던 감정은 점점 초조함이 됐다. 전장에서 불을 피우는 건 그다지 똑똑한 짓이 아니다. 열기나 연기로 위치가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윤은 열심히 불을 껐다. 그러나 마음처럼 꺼지질 않았다. 대체 이 추위에, 사방이 눈밭인데 무슨 불이 이리도 거센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윤이 아득 이를 깨물었을 때였다. 문득, 머리 위로 눈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퐁퐁 내리는 눈송이는 아니었고,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게 꼭 누군가가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은근히 드리우는 그림자까지.
시윤이 버석하니 굳었다. 짐승인가. 아니면 클롭스인가. 천천히 몸을 숙인 시윤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총을 집었다. 그리고 흡 숨을 참으며 빠르게 뒤를 돌아 산 쪽으로 총을 겨눴다.
하늘을 등진 적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헌데 체형으로 보나, 움직임으로 보나, 너무나 인간이었다. 거기다,
“어……. 채 준위님?”
시윤을 알고 있는 인간. 일면식이 있는 병사였다. 에로아스 부대의 병사였단 말이다.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병사 뒤로 머리 몇 개가 더 나타났다.
“뭐? 채 준위님이라고?”
“어. 채 준위님이야.”
“아니, 왜 여기 계십니까? 연기가 올라와서 적인 줄 알았지 말입니다.”
“혼자 오신 겁니까?”
“이리 올라오십시오. 불은 저희가 끄겠습니다.”
“손잡으십시오. 부대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의 말에 시윤은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걸 참아야 했다.
에로아스 부대는 신기하게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꼼꼼히 쳐진 투명 바리케이드를 통과하자 익숙한 깃발과 막사들이 나타났다. 시윤이 청호를 찾으며 바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호 대장님은 저기 계십니다.”
시윤을 데리고 온 병사가 왼쪽 어귀를 가리켰다. 그곳엔 청호가 병사 몇몇과 지형을 스캔한 홀로그램을 보며 토론하고 있었다. 시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두 눈으로 그의 안전을 확인하니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올라왔다.
무거운 배낭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시윤이 청호에게 힘껏 달려갔다. 그러나 청호에게 닿기 직전 몸이 굳었다. 누군가의 ‘기습’을 느낀 청호가 능력을 쓴 거였다.
청호가 험상궂은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윤을 발견한 순간, 얼굴이 괴이하게 어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시윤을 막아서고 있던 힘이 풀렸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청호의 허리를 힘껏, 정말 있는 힘껏 껴안았다.
“너…….”
“걱정했습니다. 정말…… 너무 걱정했어요.”
시윤이 청호의 가슴팍에 볼을 마구 비볐다. 청호 특유의 냄새가 느껴졌다. 뜨끈한 온기도, 묵직하게 울리는 심장 박동도 느껴졌다.
청호가 바보 같은 얼굴로 시윤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시윤이 왜 여기에. 어떻게 여기에. 그를 더할 나위 없이 가까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시윤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반질반질한 담갈색 눈동자에 청호가 가득 들어찼다.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가 대장님을 죽이려 해요.”
“뭐?”
“이곳으로 출정 명령을 내린 게 아버지예요. 함정이라고요. 당장 떠나야 합니다.”
시윤이 청호의 손을 잡고 질질 끌었다.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지만 일단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제 가냘픈 힘으로 청호가 끌려올 리 없었다.
시윤이 낑낑대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청호가 손을 가볍게 당겼다. 그러자 시윤이 팔랑거리며 청호의 품에 안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말해.”
“아버지가 그랬어요. 대장님이 이번 작전에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저한테 다 잊고 살라고 했단 말이에요.”
“……근데 널 여기로 보냈어?”
“아니요. 도망쳐 왔습니다. 모건 대령님이 도와주셨고요. 아버지는 제가 벌써 여기 도착했으리라고는 예상 못 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가요. 군용기는 어디 있어요? 병사들도 모아야 해요. 시윤이 바쁘게 종알거렸다. 그런 시윤을 내려다보는 청호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제가 죽는 게 걱정되어 아버지에게서 ‘도망’까지 친 시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를 병원에 입원하게 만든 장본인이 저인데. 제가 걱정되어 지구 반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고? 말이 되나?
모건이 시윤과 귀걸이를 들먹이며 한 말도 믿지 않았는데. 이런 걸 보면 정말이라고 믿게 되지 않나.
……그게 정말이면 어쩌지? 시윤이 저 대신 아비를 택하려 한 게 아니면. 시윤이 절 버리고 휴에게 가려고 했던 게 아니면. 제게 거짓말을 고한 이유에 불순한 의도가 섞여 있는 게 아니면.
그럼 어쩌나. 제가 여태 시윤을 난도질한 근본적인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가.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거지? 행패? 파렴치한 패악질? 치졸한 질투?
“대장님?”
대답 없는 청호에 안달이 난 시윤이 다급하게 그를 재촉했다. 그러나 청호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윤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이 울상을 했을 때였다.
구르릉.
땅이 울렸다. 지진 수준이 아니라, 꼭 땅 아래에서 무언가가 폭발한 것 같았다. 사막 전투에서 땅이 내려앉을 때와 비슷했다. 놀란 시윤이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청호가 시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를 품 안 가득 껴안았다. 그와 동시에 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막에서는 잠깐 떨어졌었다. 사방이 모래라 콧구멍이며 목구멍이며 온통 모래가 들어오긴 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근데 이번엔 달랐다. 수십 미터나 되는 굵기의 얼음이 크고 작은 덩어리로 갈라지더니 아래가 뻥 뚫렸다. 청호가 툭툭 튀어나온 얼음 모서리를 잡아 보려 했으나, 그 덩어리 역시 낙하하고 있었고, 미끄럽기까지 했다.
무엇을 얼리려고 해도 이미 언 것들이라 쉽지가 않았다. 청호의 능력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얼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실존하는 무언가를, 이를테면 클롭스나 인간 또는 사물 따위를 얼리는 능력이었다.
그렇게 끝없이 떨어졌다. 가루눈과 희뿌연 연기가 뺨을 후려쳤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병사들의 비명이 아득히 멀어졌다. 그쯤엔 좁다란 구멍을 통과하고 있었다. 조금 비약하면 얼음 미끄럼틀을 탄 것 같았다.
시윤은 청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욱여넣다시피 했다. 청호는 그런 시윤을 껴안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풍덩, 영 반갑지 않은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던 수준의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쌌다.
기겁한 시윤이 팔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 형들과 이런저런 운동을 했던 터라. 하지만 빙하 아래에서 수영이라니.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짙은 물 색깔 때문에 시야가 어두웠다. 보이는 거라곤 제 콧구멍과 입술 사이로 보골보골 올라오는 거품뿐이었다. 청호의 단단한 손이 허리를 감싸고 있음을 알았으나 두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엄청난 공포였다. 장벽 전투에서 가고일 무리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콧구멍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울컥울컥 밀려왔다. 폐가 빵빵하게 부푸는 것이 느껴졌다. 바짝 곤두서 있던 시윤의 눈꺼풀이 묵직하게 늘어졌다. 그렇게 정신을 잃으려는 순간.
촤아악.
몸이 위로 솟구쳤다. 갑작스레 올라온 뭍에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컥컥거렸다. 그러자 청호가 등을 두드려 왔다.
“숨 쉬어. 숨.”
그의 낮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윤이 배 속에 가득 찬 물을 구역질하듯 토해 냈다. 목구멍에서 물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시윤이 호흡을 고르는 내내 청호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시윤은 수 분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흘끔 청호를 바라봤다. 검은 머리칼이 축축하게 젖은 청호가 자신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을 뭐라고 해야 할까. 꼭 걱정하는 것 같은데.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시윤은 또 다른 위험과 맞닥트려야 했다.
춥다.
진짜, 까무러칠 정도로 춥다.
몸이 매우 빠른 속도로 식었다. 입술이 순식간에 새파래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은 물론, 뼈까지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이러다 심장이 얼어붙으면 어쩌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청호와 시윤이 있는 곳은 황량한 얼음 벌판이었다. 바람이 불면 진눈깨비 같은 눈발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추워?”
청호가 물었다. 그 역시 시윤만큼이나 홀딱 젖어 있었다. 코트 너머의 군복 셔츠가 찰싹 달라붙어 가슴 근육과 복근이 죄 드러났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추워 보이지 않았다. 입술도 평소 색과 같았고, 안색 역시 그랬다. 체온이 얼마나 높은 건지 널따란 어깨 위로 하얀 김이 폴폴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시윤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춥다고 하면 괜히 민폐가 될 것 같아서. 시윤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청호가 재차 물었다.
“춥냐고.”
“아, 아니요.”
시윤이 얼떨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그런 거짓말은 왜 하는 거야?”
청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온몸으로 춥다고 표현하고 있으면서 내놓은 말은 부정이라니.
청호의 꾸지람 아닌 꾸지람에 시윤의 어깨가 펄떡 튀었다. 그가 얼른 고개를 고꾸라트렸다.
“어…… 아…… 죄송합니다. 버, 버릇이에요. 남한테 피해가 될까 봐. 저 때문에 귀찮아질까 봐…….”
“…….”
“어디가 아프면 늘 주위 사람들이 돌봐 줬거든요.”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시윤의 말에 청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시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너무 불편해서, 시윤은 그 잠시간 추위도 잊었다.
청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윤이 몸을 옹송그렸다. 청호가 제 꼴에 질렸나, 생각할 때, 그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탁탁 세게 털었다. 코트에 묻어 있던 물기가 떨어져 나갔다. 기온이 어찌나 낮은지, 흩날리는 물기가 그대로 얼어 가루눈처럼 흩날렸다.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 청호가 코트를 둘둘 말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시 넓게 펼쳐 시윤에게 입혔다. 후끈한 온도가 언 몸을 포근히 감쌌다.
“아…….”
시윤이 한숨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청호의 온기에 뼛속 깊이 스며 있던 한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식으면 말해.”
시윤의 앞에 쪼그려 앉은 청호가 기다란 손가락을 갈퀴처럼 세워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꽝꽝 얼었던 머리카락이 녹았다. 다시 쓸었을 땐 머리카락이 반쯤 말랐고, 또다시 쓰다듬었을 땐 머리가 보송하게 말랐다. 두피를 찌르는 듯했던 찬기가 사라졌다.
그런 청호를 멍하니 응시하던 시윤이 샐쭉 입을 벌리며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
자신의 머리칼은 대충 쓸어 넘긴 청호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주위를 크게 둘러봤다.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 울퉁불퉁한 돌산들이 비죽비죽 올라와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병사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졌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청호가 손목에서 홀로그램을 빼냈다. 기본적인 것들은 잘 작동하는데, 메시지나 전화는 여전히 불통이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기기들이 말썽이었다. 정확히는 통신 문제였다. 그래서 시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해발 고도가 높은 곳에다가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누가 EMP를 터트린 것 같은데, 인간이라곤 없는 이 Z 구역의 황량한 빙하에 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하나 싶었다. 그래서 사화산 전투 때처럼 휴의 짓이 아닐까 기대했거늘.
시윤의 말을 들어 보니 정원의 소행인 모양이었다.
근데 왜 통신만 끊었나. 설마 조금 전의 폭발도 그의 짓인가. 허나 그건 폭발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무언가를 땅 아래에 숨겨 두고 터트린 것 같다만, 직접적인 상해는 입히지 못했다. 왜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절 죽이고 싶었으면 그냥 포스에 있는 미사일을 떼로 쏟아부었으면 될 일 아닌가.
청호가 노을에 물들어 라일락색으로 변한 눈밭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시윤이 나지막이 청호를 불렀다.
“어……. 대장님.”
“왜.”
“방사능 수치가 이상합니다.”
“어떻게 이상한데.”
청호가 고개를 돌려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침울한 표정으로 홀로그램 하나를 크게 확대했다. 위험을 알리는 붉은 바탕에 무려 다섯 자리 숫자가 떠 있었다.
“만, 만이 넘어요. 이런 수치는 본 적이 없습니다. 꼭…… 핵전쟁 당시 같습니다.”
“……코트 입어.”
청호가 명령했다. 시윤이 예, 대답하며 얼른 청호의 코트를 입었다. 팔을 쑤셔 넣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웠다. 전투화는 기본적으로 방사선에 피폭되지 않도록 만들어졌지만, 이렇게 강한 것까지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청호는 가까이 있는 돌산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위에서 보면 다른 병사들이 보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시윤은 추위와 병든 몸을 추스르는 게 버거웠지만 늘 그랬듯,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 둘 다 마음이 급했다.
그때. 땅이 또 진동하기 시작했다. 폭발 때와 달리 잔잔한 진동이었으나,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시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바, 방금…….”
“쉬…….”
청호가 단조로이 시윤을 달랬다. 그리고 자신의 곁으로 그를 끌어왔다.
사위는 고요했다. 바람 부는 소리만 요란했다. 방금 땅이 울린 게 착각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땅이 흔들렸다. 지진이나 폭발이라기보다는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졌을 때 발생하는 울림 같았다. 그 울림은 점점 거세지고, 뚜렷해졌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방사능이 높으면 피해야 한다. 에로아스도 베이스캠프를 설치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게 방사능 수치였다.
왜냐하면 방사능이 높을수록,
“키에에엑!”
방사능을 빨아 먹는 고위 레벨 클롭스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땅을 뚫고 등장했다. 여덟 갈래로 벌어지는 입, 수백 개의 이빨, 빙하를 닮아 새파란 눈알, 물고기 같은 몸통, 길이가 죄 다른 네 다리, 천막처럼 펄럭이는 갈퀴, 태풍 같은 바람과 악취를 뿜어 대는 아가미, 문어처럼 빨판이 붙어 있는 꼬리. 등 위에는 돌기들이 비죽비죽 돋아나 있었는데 그저 살덩이가 아니라 다른 클롭스나 동물의 신체 일부였다.
징그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거기다 덩치는 또 어찌나 큰지. 하늘을 죄 가려 순식간에 밤이 도래한 것 같았다. 솟아 있는 산과 비교해도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맹한 낯을 한 시윤이 아래턱을 뻐끔 벌렸다.
생전 처음 보는 클롭스였다. 아직 포스가 발을 들여 본 적 없는 Z 구역에 있는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저 덩치와 생김새는 무엇인가. 시윤이 알고 있는 클롭스 종류가 수천 가지였는데, 저것은 무엇으로부터 파생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클롭스가 입을 있는 대로 벌리며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정말 한 톨의 거짓 없이, 공기가 파르르 진동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그러더니 아가미를 세차게 펄떡거리며 눈밭을 굴렀다. 꼭 흥분한 짐승 같았다.
“채 원수가 날 죽이려 방사능 폭탄을 터트린 모양이네.”
“하…….”
청호의 이죽거림에 시윤이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에로아스를 이곳으로 출정 보낸 거구나. 미리 폭탄을 잔뜩 설치해 두고, 청호가 오게 만든 것이다. 이 정도 방사선이면 저런 괴물들이 득실거릴 테니 알아서 청호를 처리해 주겠지.
시윤은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당장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그 순간, 특유의 무감한 얼굴로 클롭스를 노려보던 청호가 명령했다.
“달려.”
“예?”
“뛰라고.”
“그럼 대장, 대장님은…….”
시윤이 주제넘은 걱정을 내놓았다. 그에 청호가 으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리고 시윤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고 눈을 맞췄다.
“제발. 좀. 시키는 대로. 해.”
“…….”
시윤이 입술을 겹쳐 물었다. 청호를 혼자 두고 도망치라니.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허나 이러지 않고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산 중턱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시윤을 보고 있던 청호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는 클롭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훌쩍 몸을 날렸다.
시윤은 사력을 다해 달렸으나 그리 먼 곳까지 도망가지 못했다. 몸 상태가 영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다리는 절다시피 하고, 눈 때문에 발은 푹푹 빠지고, 그러다 미끄러지기 일쑤고. 몇 번 대차게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죄 까지기까지 했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오죽하면 아깐 그렇게 춥더니 지금은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밸 정도였다.
큼지막한 돌덩이 뒤에 몸을 숨긴 시윤이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아래에서 클롭스와 대치 중인 청호를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놀랍게도, 클롭스는 청호를 상대로 비등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얼지도 않았고, 불도 웬만큼 강하게 뿜지 않고서야 그을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청호가 클롭스의 발과 무릎을 발받침 삼아 점프했다. 그 후 기다란 다리로 클롭스의 턱 아래를 뻐억 세게 올려 찼다. 클롭스가 키이이이,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고꾸라졌다. 입 밖으로 삐져나온 혀가 펄럭거리며 나부꼈다.
그대로 클롭스 위에 올라탄 청호가 자신의 몸통보다 커다란 혀를 염력으로 쭈우욱 길게 빼냈다. 언젠가 사이먼의 혀를 뽑았던 것처럼 클롭스의 혀도 뽑아 버릴 생각인 듯했다.
혀는 끊임없이 나왔다. 징그러울 정도로 긴 혀였다. 그것이 움칠거리며 청호의 힘에서 빠져나가고자 발악했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청호의 눈이 번뜩이자 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혀뿌리가 찢어지기라도 했는지, 꽃잎처럼 벌어진 클롭스의 입가로 퀴퀴한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청호가 조금 더 세게 혀를 당겼을 때였다. 일순, 혀가 꿀럭거리더니 주먹만 한 굵기의 가시를 사방으로 튕겨 냈다. 마치 민들레가 씨를 퍼트리는 것처럼, 또는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시윤은 물론, 청호도.
청호가 다급하게 염력으로 가시들을 옆으로 밀어 치웠으나 수백 개가 넘는 가시 모두를 처리하진 못했다. 굵직한 가시가 그대로 청호의 복부와 허벅지에 박혔다.
“큭…….”
청호의 등이 구부정하게 굽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클롭스가 몸을 훌떡 뒤집었다. 청호가 속절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안 돼…….”
시윤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몸을 들썩였다.
클롭스가 바닥에 떨어진 청호를 밟으려 쾅쾅 발을 굴렀다. 그 발놀림을 따라 지반이 같이 경련했다. 벌떡 일어난 청호가 여기저기로 몸을 날리며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복부와 허벅지에 박힌 가시를 빼냈다. 하얀 눈 위로 청호의 피가 시뻘겋게 번져 갔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던 시윤이 다급하게 손목시계를 두드렸다.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제발 누구든, 아무나 연락이 되어야 할 텐데.
하지만 시윤의 바람과 달리 통신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게 어찌나 암담하고 서러운지. 시윤의 눈꼬리에 찔끔 눈물이 고였다.
청호가 다치는 게 정말이지 끔찍하게 싫었다. 다쳐 온 걸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는데, 제 눈앞에서 다치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메슥거리다 못해 멀미가 다 날 지경이었다.
청호와 클롭스가 다시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피를 줄줄 쏟던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무슨 의도였든 간에, 근래 시윤의 가이딩을 지나칠 정도로 받아 온 터라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청호는 슬슬 짜증이 났다. 클롭스 하나와 오랫동안 싸우는 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얼른 처리하고, 여기저기 흩뿌려진 자신의 병사들을 찾으러 가야 했다. 그들 역시 지금 눈앞에 있는 수준의 클롭스와 맞닥트렸을 터였다.
청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든 휘두를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보통 전투라면 바닥에 널린 게 무기다. 총이 아니더라도 커다란 도끼나 무딘 칼 따위가 얼마든지 있었단 말이다. 헌데 이곳엔 무기는커녕 나무조차 없었다.
청호가 바쁘게 주위를 탐색하는 와중에도 클롭스는 대차게 공격을 퍼부어 댔다. 수백 개의 이빨로 청호를 찍으려 했다가, 꼬리로 쾅쾅 바닥을 두들겨 청호의 무게 중심을 넘어트리려 했다가, 발로 짓밟으려 했다.
클롭스의 발톱이 청호의 팔뚝을 길게 찢고 지나갔다. 붉은 피가 반원을 그리며 흩뿌려졌다. 그쯤, 청호는 무기는 아니지만 꽤나 무기로 쓸 수 있을 법한 것을 발견했다.
후웁, 크게 숨을 들이마신 그가 클롭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클롭스가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태양만큼이나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청호를 위협했다. 청호는 클롭스에게 닿기 직전 그것의 가랑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러곤 우둘투둘 도드라진 클롭스의 비늘을 쥐고 몸을 타고 올라갔다.
“크이이익…… 케에에엑…….”
클롭스가 온갖 소리를 내며 청호를 떨어트리기 위해 몸을 굴렀다. 그러나 청호는 꿋꿋이 버티고 올라가 결국 클롭스의 돌기 위에 섰다. 그러고는 가까운 돌산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어깻죽지에서부터 피어오른 붉은 화염이 돌산과 충돌했다. 쿠궁, 마치 미사일이 떨어진 듯한 굉음이 울렸다. 곧 돌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클롭스는 그런 것에 하등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 몸뚱이 위에 올라탄 청호가 벼룩처럼 간지럽기라도 한 모양인지, 몸을 뒤흔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무너지던 돌산이 눈을 윤활유 삼아 속도를 더해 갔다. 청호는 그중 묵직한 덩어리 몇 개를 자신 쪽으로 끌어왔다. 그러자 그것에 이끌린 작은 돌들이 알아서 클롭스를 향해 쏟아졌다.
그렇게 무너진 돌산이 클롭스를 덮치기 직전, 청호가 그것의 등에서 먼 곳으로 펄쩍 점프했다. 미끄러지며 발생하는 엄청난 가속도는 뒤꿈치로 땅을 콱 지르밟아 멈췄다.
묵직한 돌덩이들이 클롭스를 마구 찍어 눌렀다. 하얀 눈가루 탓에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으나, 고통에 찬 울음소리로 말미암아 퍽 성공적인 공격인 듯했다.
그리고 수 분이 지났을 땐, 사위가 고요해졌다. 변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커다란 산이 생겨났다는 거였다. 돌무덤 같기도 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죽었나? 죽은 걸까? 의문은 곧 확신이 됐다.
죽었다. 클롭스가 죽었다.
만면 가득 환희를 띤 시윤이 몸을 일으켰다. 청호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청호는 클롭스가 묻힌 눈 무덤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일어난 시윤이 청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청호는 죽은 적을 보며 승리감, 도취감, 정복감 따위를 느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 무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클롭스의 꼬리가 푹 눈을 뚫고 나왔다. 다음엔 발 하나가 나왔고, 다음엔 희번들하게 치켜뜬 눈이 나왔다. 멀찌감치 선 청호를 발견한 클롭스가 크르륵 목으로 울었다.
킁, 콧김을 뿜은 그것이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클롭스를 깔아뭉개고 있던 돌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서는 순간, 청호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 후 손뼉을 치는 것처럼 손바닥을 양쪽으로 모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허공에 떠 있던 수백 개의 가시가, 그러니까 클롭스가 몇 분 전에 혀로 뿜어낸 가시들이 다시 클롭스를 향해 쏘듯 날아갔다. 날카롭고 단단한 그것들은 클롭스의 질긴 가죽을 뚫고 무른 살덩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가시는 눈, 얼굴, 몸, 다리를 가리지 않았다.
“키이이익……!”
클롭스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허나 청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손을 조금씩 조금씩 더 모았다. 클롭스에 박혀 있던 가시들이 완전히 속으로 파고들어 자취를 감췄다.
투둑, 두두둑, 괴이한 소리가 나더니 청호의 손이 엇갈리는 순간, 수백 개의 가시가 클롭스를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왔다.
허공에 우뚝 멈춰 선 가시들에게서 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따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살덩이나 근육 따위가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클롭스가 피에 절은 눈알로 청호를 노려봤다. 청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 주었다. 입가에 띤 옅은 미소는 유지한 채로.
몇 초 지나지 않아 클롭스의 눈알이 휙 뒤로 까뒤집히더니 느릿하게 옆으로 넘어갔다. 쿵! 땅이 울렸다. 넘어진 클롭스에게서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잠시 죽은 클롭스를 바라보며 생사를 확인하던 청호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옹골찬 돌산을 무너트리고, 그것을 옮기고, 수십 킬로그램짜리 가시 수백 개를 움직였더니 속이 후끈했다. 아무래도 시윤을 좀 만져야 할 성싶었다.
청호가 뒤를 돌았다. 저 멀리서 시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직 먼 거리인데 벌써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게, 안아 주려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너른 꽃밭을 통째로 얼리고 폭주가 온 저에게 전속력으로 뛰어와 안아 주던 때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당시를 상기한 청호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가이드가 전장에 함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황홀하며, 또 든든한 건지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는데.
“…….”
청호가 기다리지 못하고 시윤을 향해 발을 뗐을 때였다. 다시 땅이 진동했다. 청호가 호흡을 멈췄다. 뛰어오던 시윤 역시 우뚝 멈춰 섰다.
쿵, 쿵, 쿵. 땅은 끊임없이 울렸다. 그것도 한곳이 아니라 사위에서. 좋지 않은 신호였다.
시윤과 청호가 눈을 마주쳤다.
“뛰어.”
청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으나 상황과 입 모양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던 시윤이 급한 대로 돌 어귀로 숨어들었다.
곧 덩치 좋은 클롭스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니, 한둘이 아니라 수십 마리였다. 하늘에서 날아오는 것도 있었고, 땅을 뚫고 나오는 것도 있었고, 돌산 사이에서 뛰어나오는 것도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좋았다. 방금 청호가 쓰러트린 클롭스와 비등비등하거나 그보다 컸다. 에스퍼로 치자면 적어도 S급, 또는 청호와 같은 SS급 클롭스들이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시윤은 예상할 수 있었다. 청호가 저들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걸. 아무리 대단한 청호라지만 이건 아니었다. 방금 하나를 죽이는 데에만 해도 꽤나 힘을 들이지 않았던가.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시윤이 꽉꽉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시계는 여전히 불통이고, 사방은 훤히 뚫린 눈밭이다. 밤이라면 어찌어찌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돌산 어귀에 아직 손톱만 한 해가 걸려 있었다.
청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것들과 동시에 싸울 순 없었다. 하나하나 떨어트려 각개 전투 해야 했다. 청호가 빠르게 눈을 굴리며 모여드는 클롭스를 살폈다. 동족의 죽음에 짜증을 내는 것도 있었고, 사체에 얼굴을 처박고 식사하는 것도 있었다.
놈들은 아직 절 발견하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청호가 시윤이 숨은 곳과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아래에서 클롭스가 얼음을 깨며 올라오는 바람에 불발됐다.
이를 악문 청호가 클롭스의 머리를 염력으로 확 끌어왔다. 그리고 사선으로 기우는 머리를 뒤꿈치로 콱 내리찍었다. 얼음 사이로 올라오던 그것이 그대로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물이 촤아아 해일처럼 튀어 올랐다.
고꾸라진 클롭스를 타 넘은 청호가 다시 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야 했다. 수백 년 된 나무 밑동처럼 굵직한 다리 하나가 쾅, 청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청호가 앞에 선 것을 노려봤다. 기괴한 생김새를 보며 어디를 공격해야 가장 위협적이려나 고민했다. 그때,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뒤통수를 향해 다가왔다. 청호가 고개를 반만 돌려 그것을 바라봤다. 톱날 같은 돌기가 돋아 있는 촉수였다. 빠르게 다가오던 그것이 청호의 염력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서 언 듯 굳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수십 갈래의 촉수가 다가왔고, 청호는 대부분을 막아 냈으나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하나가 발목을 칭칭 감았다. 톱날 같은 돌기가 복사뼈를 뚫고 발목을 헤집었다.
이런, 씨발.
청호가 욕설을 지껄일 틈도 없이 몸이 훅 이끌려 갔다. 손을 갈퀴처럼 구부려 바닥을 긁어 봤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대로 날아간 몸이 쾅 돌산에 처박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닥에 내리찍었다가 다시 돌산으로 날렸다가, 아주 제멋대로였다.
얼결에 휩쓸려 다니던 청호가 눈을 부릅떴다. 돌산에 처박혔다가 다시 몸이 뜨려는 순간, 촉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카드득 촉수를 끊어 냈다. 톱날이 불룩불룩 손등을 뚫고 나왔으나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뚝 끊긴 촉수가 녹색의 질척한 점액질을 질질 흘리며 물러갔다. 그쯤엔 모든 클롭스가 청호가 서 있는 돌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청호가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피를 아무렇게나 털어 냈다. 회복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많은 힘을 소비했기 때문이겠지. 그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그리고 시윤이 숨어 있는 건너편을 잠시 바라봤다.
만약 제가 여기서 죽으면, 시윤은 어떻게 되려나. 이 미친 방사능 더미에서, 득실거리는 클롭스들 틈에서 버틸 수 있으려나. 누가 그를 구하러 와 주나.
아아……. 극성인 아비가 있었지. 지금쯤이면 시윤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터였다. 아연실색한 얼굴로 친히 여기까지 행차 중일지도 몰랐다.
그럼 됐다. 그 후가 어떻게 되든, 시윤은 살 것이다. 아껴 주는 이가 많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청호가 길게 호흡했다.
“후우…….”
그리고 오른쪽 귓불에 박혀 있던 검은색 귀걸이를 뜯어냈다.
“안 돼…….”
시윤은 청호가 귀걸이를 뜯어내는 걸 또렷이 보고 있었다. 귀걸이 없는 청호라니.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먼 과거에 제가 그의 귀걸이를 빼 주겠다고 호기로이 말하긴 했지만 그건 자신이 그와 같은 SS급이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귀걸이는 일종의 갑옷이다. 청호의 힘으로부터 청호를 지켜 주는 용도란 말이다. 근데 그 귀걸이를 저렇게…….
놀란 시윤이 ‘안 돼’라는 말만 버벅댔다. 그러나 이미 청호의 귀에서 귀걸이가 떨어져 나간 후였다.
청호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럼 주위를 둘러싼 클롭스들이 공격할 만도 한데, 어째서인지 그것들 역시 움직임이 없었다. 누가 움직이지 못하게 꽁꽁 싸매 둔 것 같기도 했고, 겁을 집어먹은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청호가 고개를 들었다.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는 폭주 때 으레 봐 왔던 붉음과는 사뭇 달랐다. 훨씬 강렬하고, 타는 듯 이글거렸다. 동공은 바늘로 찍은 것보다 작았고, 눈동자는 신기할 만큼 커졌다.
청호의 주위로 후끈한 열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를 감싼 공기와 풍경이 꼭 뙤약볕에 익은 아스팔트가 뿜어내는 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그리고 곧 어마어마한 화염이 대지를 집어삼켰다. 엄청난 불이었다. 태어나서 저런 건 처음 봤다. 미사일 수십 개가 동시에 터지면 저러한 화염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천지에 깔려 있던 눈과 얼음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어둑하던 세상은 새로운 태양이 뜬 것처럼 밝아졌고, 귓바퀴가 아릴 정도로 낮던 기온은 공기에 닿는 것만으로도 살이 익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뜨거워졌다.
“세상에…….”
기겁한 시윤이 얼른 청호의 코트를 뒤집어쓰고 몸을 옹송그렸다. 청호의 코트는 모건이 매우 신경 써서 만든 것이다. 청호가 불과 얼음을 함께 다루는 만큼 불에 타거나 얼지 않았다.
그런데도 코트 너머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누가 자신을 둘둘 말아다 오븐에 집어넣은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꽁꽁 얼었던 이마에 땀이 뱄다.
불은 수 분 동안 이글거렸다. 타는 것 또는 타지 않는 것까지 구분하지 않고 죄 태워 버렸다. 오죽하면 열에 익은 돌들이 폭탄처럼 펑펑 터질 지경이었다. 시윤이 숨어 있던 돌도 쩌저적 소리를 내며 갈라져 몸을 벌벌 떨어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등을 짓누르던 열기가 한층 사그라들었다. 시윤이 슬그머니 코트 자락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새까만 바닥이었다. 옅은 불씨가 나풀거리고, 타닥타닥 무언가가 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잃어야 했다.
“…….”
온 세상이 검었다. 인간의 흔적이 없어 지나칠 정도로 순백이던 풍경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제가 저도 모르게 순간 이동을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 많던 클롭스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간간이 정체 모를 덩어리와 뼈대 따위가 남아 있기도 했는데, 하나같이 매캐하고 역한 연기를 뿜어 댔다.
시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났다. 그럼 청호는? 청호는 어디에……. 시윤의 눈동자가 얼른 청호가 있던 곳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청호는 검게 그을린 돌산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재가 뒤섞여 탁해진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시윤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청호가 괜찮다. 멀쩡하다. 걱정으로 빵빵해졌던 폐부가 안도로 느슨해졌다. 반쯤 타 버린 청호의 코트를 껴입은 시윤이 얼른 청호를 향해 달려갔다.
시윤이 가쁜 숨을 내쉬며 막 청호가 서 있는 돌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청호가 크게 휘청거렸다. 놀란 시윤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대장님?”
“…….”
청호가 시윤을 내려다봤다. 헌데 그의 눈동자가 묘하게 이상했다. 체리를 짓뭉갠 듯 검붉은 색에, 초점이 없었다. 분명 시윤을 응시하고 있는데,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대장님.”
시윤이 재차 청호를 불렀다. 그러나 청호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어딘가 께름칙한 느낌에 시윤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때.
“쿨럭…….”
청호가 둔탁하게 기침했다. 그의 입가를 타고 질퍽한 핏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러더니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그 순간, 시윤은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청호가 쓰러지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느렸다. 분명 두 눈으로 또렷이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장님!”
기겁한 시윤이 청호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갔다. 청호는 바위 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축 처진 사지며, 창백한 얼굴이며, 아래턱을 죄 적신 피까지. 무엇 하나 청호와 어울리는 게 없었다.
시윤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통각을 느꼈다. 오장육부가 죄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시윤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청호의 곁에 주저앉았다. 그가 애절하게 청호를 불렀다.
“대장님.”
“…….”
“대장님…….”
하지만 청호는 대답이 없었다. 굳게 감긴 눈도 뜨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술 새로 흐르는 피는 멈추질 않았다. 시윤이 무심코 그것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청호의 피부와 닿는 순간, 손끝을 관통하는 통각에 놀라 팔을 거둬야 했다.
찰나, 정말 찰나 닿았을 뿐인데 손가락부터 팔까지 찌릿하게 저렸다. 핏줄이 단숨에 팽창하고 근육이 오므라들었다. 마치 C급일 때 폭주한 청호와 키스했던, 딱 그때의 고통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지금 저는 A급이다. 청호의 폭주쯤은 얼마든지 받아 낼 수 있단 말이다.
“아…….”
청호에게 귀걸이가 없구나. 시윤은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현재 청호는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한 SS급이었다. 여태 시윤이 한 가이딩은 귀걸이가 만든 커다란 댐에서 흘러넘친 힘을 받아 주는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 댐이 무너진 상태고.
그러니 A급 따위로 청호를 가이딩할 수 있을 리가. A, S, SS. 무려 두 급 차이였다.
시윤이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호가 버린 귀걸이를 찾는 거였다. 하지만 온통 검은 이곳에서 손톱보다 작은 검은색 귀걸이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시윤이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어떻게 해야…….
끔찍한 상황으로부터 말미암은 혼란과, 청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물든 머리가 올바른 사고를 하지 못했다. 시윤이 꾸역꾸역 아픔을 참으며 청호의 손을 쥐고 있을 때였다.
쿵……. 땅이 묵직하게 울렸다.
시윤이 헛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설마 또 다른 클롭스가……. 더는 안 된다. 저는 그것을 상대할 주제가 안 됐다. 거기다 청호도 위험하다. 제가 죽으면, 청호 역시 그것에게 잡아먹힐 게 뻔했다. 어디로든 몸을 숨겨야 했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시윤이 청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제 몸집의 두 배가 훌쩍 넘는 그가 끌려올 리 없었다. 한참 끙끙거리던 시윤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청호를 굴려 그 위에 올렸다.
코트 소매로 청호의 몸을 꽉 묶고, 있는 힘껏 코트를 끌어당겼다. 미약하게나마 청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윤은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더해 청호를 끌었다.
멀리까지 갈 자신은 없었다. 벌써 사지가 시큰거렸다. 올 때부터 엉망이었던 몸에 큰 기대를 걸 만큼 시윤은 어리석지 않았다. 괜히 멀리 가려다 평야 한복판에서 쓰러지면 꼼짝없이 죽음을 맞이할 터였다.
“하아…… 하아…….”
시윤은 가쁜 숨을 내쉬며 다리를 움직였다.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청호의 안위를 확인하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흘러내린 눈물이 볼을 축축이 적셨다. 그 와중에도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허나 안타깝게도 청호가 모든 걸 불태워 버린 탓에 숨을 곳이라곤 없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바위틈에 있는 자그마한 동굴이었다. 아니, 동굴이라고 해도 되나. 아, 그래. 토끼 굴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땀범벅이 된 시윤이 손목시계로 플래시를 켰다. 그리고 안을 살피려 하는데, 다시 땅이 쿵, 하고 경련했다.
마음이 급해진 시윤이 토끼 굴로 냅다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미끄럼틀을 뒤로 타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청호의 겨드랑이 아래에 팔을 건 채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
토끼 굴은 깊었다. 몸만 간신히 숨길 수 있을 정도일 줄 알았더니, 끝도 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구멍이 점점 넓어졌다. 나중엔 청호와 몸을 나란히 하고 떨어질 정도였다.
가속도를 더해 가며 점점 더 빠르게 떨어져 내려갔다. 겁을 집어먹은 시윤이 팔과 다리도 벌려 보고,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기도 했으나 손가락 끝만 터졌다.
이러다 또 물에 처박히면 어쩌나 걱정할 무렵, 파란빛이 보였다. 그리고 철퍼덕 바닥에 다다랐다. 청호를 껴안고 있던 시윤이 쭉 미끄러지며 돌부리에 쿵, 어깻죽지를 부딪쳤다.
“아윽…….”
시윤이 고개를 움츠리며 신음했다. 날개뼈가 으스러진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아파할 시간이 없었다. 청호를 꼭 끌어안은 시윤이 기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동굴은 제법 넓었다.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으레 생각하는 방 서너 개를 합친 크기였다. 또 귀퉁이엔 자동차만 한 호수가 있었다. 그곳엔 발광 플랑크톤이 가득했는데, 물결이 칠 때마다 하늘색 같기도 하고, 파란색 같기도 한 불빛이 일렁거리며 주위를 밝혔다. 덕분에 플래시를 켜지 않아도 환했다.
인기척은 없었다. 클롭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시윤이 바짝 곤두서 있던 어깨를 내렸다. 하지만 아직 더 큰일이 남아 있었다.
시윤이 청호를 둘둘 싸매고 있는 코트를 풀었다. 그리고 청호를 살폈다.
“대장님. 정신 차려 보세요, 대장님.”
“…….”
“제발요……. 대장님, 제발…….”
“…….”
시윤의 애절한 부름에도 청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시윤이 청호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가이딩을, 가이딩을 해야 하는데. 청호의 도움 없이 저 홀로 하는 가이딩은 처음이라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청호를 만지는 손바닥이 지끈거렸다.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시윤이 피에 물든 청호의 입술 위로 얼굴을 내렸다. 곧 입술이 맞물렸다.
그러나 입술이 닿자마자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청호의 힘에 놀란 건 아니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그의 체온에 놀란 거지.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낯으로 청호의 몸을 더듬었다. 손이 닿는 모든 곳이 차가웠다. 자신이 청호를 만지고 있는지, 아니면 꽁꽁 언 땅을 만지고 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
청호는 항상 뜨거웠다. 폭주했을 땐 델 듯 뜨거웠고. 근데 지금은 얼음장이다. 그 사실이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왔다. 청호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윤의 가슴팍이 빠르게 헐떡였다. 아랫입술은 덜덜 떨리고 눈꺼풀이 묵직해졌다. 이곳으로 떨어지느라 잠시 멎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동그란 눈물이 볼도 거치지 않고 힘없이 벌어진 청호의 손바닥 위로 투둑투둑, 낙하했다.
“아, 안 돼……. 안 돼…….”
“…….”
“대장님, 안 돼요……. 흐, 죽으면 안 돼요…….”
시윤이 다시 청호와 입을 맞췄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괘념치 않고 그의 입술을 핥았다. 핥고 또 핥았다. 그러나 굳게 다물린 청호의 입술은 열릴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그의 턱을 눌러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우윽…….”
혀는 물론, 목구멍까지 불에 타는 듯한 통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시윤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러려고 태어난 것이다. 청호를 살리기 위해 그의 반려 가이드로 태어난 거란 말이다. 허니 아픔 따위에 패배하고 청호의 죽음을 관망할 수는 없었다.
시윤이 꾸역꾸역 혀를 움직였다. 피로 가득한 입 안을 훑고, 차게 식은 청호의 혀를 빨았다. 묵직하게 밀려오는 청호의 힘을 삼키고 또 삼켰다. 손으론 청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5분쯤 흘렀을 때, 시윤은 자신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떼 손등으로 벅벅 아무렇게나 코를 닦아 냈다.
“대장……님.”
시윤이 재차 청호를 불렀다. 하지만 청호는 여전히 미동이라곤 없었다.
시윤이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재킷 지퍼를 끌어 내렸다. 아무래도 키스 따위로는 안 될 듯했다. 더한 걸 해야 했다. 제 몸이 버텨 줄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이 붙어 있는 한은, 죽기 직전까지는 청호를 가이딩할 자신이 있었다.
시윤이 연신 코피를 훔쳐 내며 막 재킷을 벗었을 때였다. 짤그랑, 짤그랑. 유리 덩어리 몇 개가 떨어졌다. 손가락만 한 굵기. 은은하게 빛나는 붉은색 액체.
“아…….”
모건이 준 주사였다. 휴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그 주사 말이다. 시윤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라면 청호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건에게 받은 건 다섯 개였으나 남은 건 세 개뿐이었다. 나머지 두 개는 이런저런 사고를 겪으며 깨진 건지 유리 조각만 남아 있었다. 주사기 캡을 벗긴 시윤이 하나를 손목에 쑤셨다. 그러자 코피가 멈췄다. 그리고 곧장 두 번째 주사를 놓고, 연달아 세 번째 주사를 놨다.
무슨 등급으로 오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처음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마음이 급한 시윤이 벌떡 일어나 옷을 벗어 던졌다. 시린 바람이 훤히 드러난 알몸뚱이를 마구잡이로 할퀴어 댔으나 상관없었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완전한 나신이 된 그가 청호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흉곽이 확 조여들었다. 누가 커다란 손으로 갈비뼈를 옥죄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윤이 몸을 옹송그리며 벽을 짚었다. 그러자 얼음으로 된 벽이 훅 손바닥으로 쓸려 들어왔다.
“…….”
벽이, 손바닥으로, 쓸려, 들어와. 말이 되는 문장인가. 헌데 진짜 그랬다. 놀란 시윤이 얼른 손을 뗐다. 희멀건 얼음벽에 자신의 손자국 모양이 움푹 파여 있었다.
휴의 머리카락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삼킨 부작용인가. 시윤이 손끝으로 벽을 길게 쓸었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벽과 자신의 손바닥을 번갈아 보던 시윤이 홱홱 머리를 흔들었다. 이럴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청호를 가이딩해야 했다.
청호의 위에 올라탄 시윤이 빠른 손놀림으로 그의 셔츠 단추를 풀어 갔다.
그리고 바지를 벗기려는데, 괜히 멈칫하게 됐다. 시윤이 흘끔 청호를 올려다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후웁, 숨을 크게 들이마신 시윤이 청호의 바지 벨트를 풀었다. 근데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넘어지고, 청호를 끌고, 얼음 구멍을 긁으며 손끝이 헤진 데다가 얼기까지 해서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오죽하면 청호의 벨트에 피가 묻어날 정도였다.
이를 악문 시윤이 끝내 청호의 벨트를 풀었다. 그것을 아무렇게나 뒤로 던지고 바지 버클을 끌었다. 그리고 바지와 드로어즈를 내렸다.
“…….”
그럴 거라 예상은 했다만, 청호의 성기는 발기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크기와 굵기는 위용이 넘쳤다. 시윤이 조심조심 성기 뿌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손짓으로 아래위로 흔들었다.
제발, 제발, 제발…….
하지만 차가운 살덩이는 도통 반응이 없었다. 기둥을 쓰다듬어 보고, 귀두 끝을 문지르기도 했지만 역시였다. 팔이 뻐근할 때까지 안간힘을 쓰던 시윤이 어쩔 수 없이 손을 뗐다. 그리고 냅다 얼굴을 처박았다.
구음은 수도 없이 해 봤다. 잘한다고는 할 순 없지만, 청호가 이래저래 가르쳐 준 덕에 어떻게 하는지는 알았다.
시윤은 가장 처음, 귀두부터 물었다. 자신의 온기를 묻히듯 부드럽게 빨았다. 가끔은 혀끝에 힘을 주고 할짝대기도 했다. 그 후엔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머금었다. 발기하지 않았음에도 목젖을 짓누르는 부피감이 대단했다. 그래도 야금야금 삼켜 갔다.
“흐우…….”
시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구역질이 끊임없이 올라와 눈물이 줄줄 쏟아졌지만, 성기를 뱉진 않았다. 그런 시윤의 간절함을 알았을까. 청호의 성기가 조금 부푼다 싶더니 기둥에 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입 안이 터질 듯 채워졌다.
시윤이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장 성기 위에 뒷구멍을 맞췄다. 전혀 풀리지 않은 데다가 건조하고, 추위에 오므라들기까지 한 구멍이라 고통스러울 게 분명했지만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시윤은 길게 숨을 내쉬며 몸을 내렸다. 귀두 끄트머리가 슬쩍 들어오더니 역시나 거기서 막혔다. 등줄기에 땀이 뱄다. 입술을 앙 문 시윤이 골반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서 꾸역꾸역 몸을 내렸다.
하지만 눈치 없는 뒷구멍은 청호의 것을 야무지게 물지 못하고 튕겨 내기만 했다.
“아흐……. 제발, 좀…….”
시윤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팔꿈치에 힘이 풀렸다. 청호의 복근을 짚은 채 상체를 지탱하고 있던 팔이 힘없이 꺾였다. 그 덕에 청호의 귀두가 쑥 들어왔다.
“아……!”
시윤이 고개를 휙 뒤로 꺾었다. 두툭, 뒷구멍이 터졌다. 대찬 고통이 척추를 가로질렀다. 가랑이가 반으로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른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잠깐 고통을 추스르던 시윤이 아득바득 몸을 내렸다. 성기의 가장 굵은 부분이 들어오고 나니 그 후로는 한결 쉬웠다. 몸에 무게를 싣고 주저앉기만 하면 됐다.
물론, 고통은 별개다.
“으흑, 아, 흐으읏…….”
내벽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귀두가 긁고 지나가는 배 속이 아팠다. 그래도 다행히 신체적인 고통뿐이었다. 청호의 힘이 스며 오는 게 느껴지긴 하지만, 그게 아프진 않았다. 주사를 세 개나 놓은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윤은 아득바득 청호의 성기를 반 이상 머금는 데에 성공했다. 그쯤엔 얼굴이 눈물과 식은땀, 그리고 고통으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하아…… 읏, 하아…….”
시윤은 잠시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아래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벽을 쓸고 나가는 성기가 아팠다. 내장이 죄 딸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주저앉으면 또 쿠욱, 하고 찔러 오는데 배가 욱신욱신했다.
그런데도 시윤은 연신 몸을 들썩거렸다. 숨이 가빴다. 하얀 입김이 폴폴 쏟아졌다. 몸은 추운데, 속에선 불이 들끓었다.
시윤은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몸은 아프고, 바닥을 고정한 무릎은 자꾸 미끄러지고, 팔은 매가리 없이 꺾였다.
평소 그가 제 뒷구멍을 헤집던 속도와 지금은 비할 바가 안 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새빨갛게 익을 정도로 빨라야 하는데. 둔부가 후끈할 정도로 세차야 하는데.
이래서야 청호가 사정을 할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래도…….
“하, 한 번만……. 한 번만요, 대장님…….”
제발……. 시윤이 애절하게 말하며 청호의 입술을 새처럼 쪼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자비라곤 없는 청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눈도, 입도 꾹 다물고 있는 게 꼭 제게 화라도 난 것 같았다.
……뭐. 내내 화가 난 상태긴 했다. 제 아버지 때문에. 제 나약함 때문에. 그걸 상기하자 눈알이 따끔따끔해졌다. 그러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번엔 꼭. 어떻게 해서든 그를 살리고 말 것이다.
눈을 부릅뜬 시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엉덩이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면서 제 배 속을 두들기는 성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파정할 만한 타이밍을 놓치면 안 됐다.
그렇게 얼마나 몸을 흔들어 댔을까. 턱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질 무렵이었다. 청호의 성기가 묵직해졌다. 핏줄도 우둘투둘하게 올라왔다. 그것을 느낀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주고는,
“아흐윽!”
확 몸을 내렸다. 새끼손가락만큼 남아 있던 청호의 성기가 뿌리 끝까지 파고들었다. 배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찢어진 구멍이 아프다고 아프다고 고함을 내질러 왔다. 어찌나 깊게 들어왔는지, 명치가 다 시큰거렸다.
질끈 눈을 감은 시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도 몸을 물리지 않고 꾸역꾸역 청호의 것을 물고 있었다. 그러자 다행스럽게도, 청호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큭…….”
질척하고 뜨거운 액체가 배 속 깊은 곳에 퍼졌다. 복부 전체가 찌릿찌릿했다. 휴의 능력으로도 귀걸이 없이 폭주한 청호의 정액을 삼키기엔 무리였던 모양이었다.
크고 작은 압정들이 핏줄 속에서 뛰놀았다. 날카로운 힘들이 근육과 피부를 찢고 바깥으로 나오려 했다. 배를 감싸 쥔 시윤이 허리를 동그랗게 말고 어깨를 접었다. 너무 아팠다. 여태 청호를 가이딩하며 아픈 적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오늘은 유독 아팠다.
그런데도 희한하지. 기분은 좋았다. 청호의 힘을 이만큼이나 받아들인 것 같아서. 이만하면, 이만하면 청호가 정신을 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동안 아픔을 갈무리하던 시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청호를 쳐다봤다.
“…….”
하지만 청호는 쉽사리 눈을 뜰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짙은 속눈썹은 차분하게 내리깔린 채 미동조차 없었다. 그것을 응시하던 시윤이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청호가 진짜 죽으려는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저는 결국 도움이 안 된 모양이다. 그 사실이 어찌나 아프고 애통한지. 갈무리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몰려왔다.
시윤의 묵직한 눈물이 청호의 상체 위로 투둑, 투둑 떨어졌다. 볼록하게 솟아 있는 근육 사이사이로 시윤의 눈물이 흘렀다. 시윤은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러다 숨 쉬는 게 벅찰 정도가 됐을 때, 무언가를 깨달았다.
청호가 조금, 아주 조금 따뜻해진 것 같았다. 시윤이 얼른 청호의 뺨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시윤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미처 추스르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진심으로 기뻤다.
다시, 다시…….
조금만, 조금만 더…….
시윤이 힘없이 퍼질러져 있던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시윤의 눈꺼풀이 묵직하게 늘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도 믿기가 힘들었다. 청호의 정액을 몇 번이나 받았더라. 세 번? 그쯤 되니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는 자꾸 아래로 고꾸라지고, 몸은 픽픽 힘없이 엎어지기 일쑤고, 식은땀으로 뒤덮인 전신을 후려치는 냉기는 고통스러웠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으니 청호의 사정을 유도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실로 청호는 세 번째 사정 이후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고통으로 난도질된 배 속은 제가 품고 있는 청호의 성기가 발기 상태인지 아닌지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희소식은 청호의 몸이 전보다 따뜻해졌다는 거였다. 비록 제 몸은 시시각각 차게 식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하아…….”
버티다 못한 시윤이 엉덩이를 올린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근육이 죄 녹아 없어진 기분이었다. 눈알은 따끔거리고, 청호의 골반 위에 앉아 체중을 받치고 있던 무릎은 짓무를 대로 짓물러서 시큰거렸다.
비쩍 마른 시윤의 어깨가 느릿하게 들썩였다. 이제는 호흡을 고르는 것도 힘에 부쳤다. 코피 역시 두 번째 사정을 받아 냈을 때까지만 해도 줄줄 흐르더니, 지금은 피를 쏟아 낼 기운도 없는지 더는 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을 죽이던 시윤이 허리에 힘을 주며 주저앉았다. 두툼한 성기가 노곤하게 풀어진 구멍을 헤집고 들어왔다. 시윤이 어깨를 올리고 이를 악물며 아픔을 삼켰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
“…….”
청호가 눈을 뜨고 있었다.
시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게 환각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거였다. 시원하게 뻗은 눈매, 가지런한 속눈썹, 그리고 짙고, 또 검은 눈동자. 분명 청호의 눈이 맞았다.
시윤이 어버버 말을 절었다.
“어, 대, 대장님?”
“…….”
“대장님. 저, 정신이 드세요?”
“…….”
“몸은 어때요? 저 보이세요? 아……. 다행이에요. 저는 진짜, 이, 이대로 어떻게 되실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 너무 무서웠어요. 근데 이렇게 눈을 뜨셔서…….”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청호가 목덜미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시윤이 버석하니 굳었다. 키스에 놀라서 굳은 건 아니었다. 청호의 입술 사이로 흘러오는 후끈한 온도에 놀랐기 때문이었지. 그 온기는 기적이자 은총이었다. 적어도 시윤에겐 그랬다.
바위처럼 굳어 있는 시윤에 청호가 그의 뺨을 감싸 쥐고 턱을 가볍게 눌렀다. 시윤의 입이 빠끔 벌어졌다. 그 사이로 청호의 뜨끈한 혀가 밀려왔다.
초점 없이 풀려 있던 시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그가 있는 힘껏 청호의 목을 껴안았다. 청호가 그대로 몸을 돌려 시윤을 바닥에 눕혔다. 물론, 그전에 엉망으로 구겨져 있던 코트를 펼쳐 시윤의 아래에 깔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응…….”
청호의 혀는 부드럽게 움직였다. 혀를 살살 빨아당겼다가, 치열을 문질렀다가, 조금 게걸스레 타액을 훔쳐 먹기도 했다. 시윤은 뭐든 좋았다. 이러다 그가 제 혀를 싹둑 잘라다 삼켜 버린다 해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청호는 키스하면서 시윤의 몸 여기저기를 문질렀다. 가느다란 팔뚝이나, 도드라진 갈비뼈, 홀쭉하게 들어간 배, 차게 식은 옆구리를 뜨거운 손으로 연신 매만져 줬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몸이 체온을 되찾았다.
그쯤, 청호가 손을 아래로 내려 한 손으로는 시윤의 무릎 아래를, 또 한 손으로는 말랑한 둔부를 받쳤다. 그리고 반쯤 빠져나왔던 성기를 느릿하게 집어넣었다.
“으흑…….”
뭉툭한 고통에 시윤이 고개를 오그렸다. 깊숙이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청호가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 마음에 시윤의 이마와 볼, 턱 아래, 목덜미에 꾹꾹 입술을 도장 찍듯 눌렀다가 뗐다. 그러면서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흐읏, 읏, 윽! 아흐…….”
“후우…….”
시윤이 청호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가 내뱉는 축축한 숨소리가 청호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콧구멍으로 스며 오는 시윤의 냄새에 매캐하게 타 버렸던 내장이 새로 태어난 것처럼 멀끔해졌다.
시윤을 조금 더 깊숙이 보듬어 안은 청호가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이건 섹스가 아니라 가이딩이다. 길게 끌어 봐야 시윤에게 좋을 게 없었다.
“하아……. 채, 시윤…….”
청호의 부름에 시윤이 빼꼼 눈을 들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그 눈망울이 어찌나 예쁜지. 청호가 붉게 익은 그의 눈가에다 쪽쪽, 쪽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윤이 잠시나마 멈췄던 눈물을 다시 터트렸다. 또, 청호의 팔뚝을 움켜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청호의 눈썹이 대번에 삐뚜름히 뒤틀렸다.
“아파?”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청호에게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제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게 청호라니. 이 뜨끈한 온기가 청호의 것이라니. 제게 다정하게 키스해 주는 청호라니. 무엇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그래서 눈물도 멈출 수 없었고.
청호는 대충 시윤이 또 거짓을 말하는 거겠거니 했다. 코피를 흘린 듯, 코 아래와 턱에 핏자국을 덕지덕지 묻혀 놓고 아프지 않다는데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청호는 어금니를 꾸욱 짓씹은 채 대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파정하는 순간, 시윤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청호는 상체를 훤히 벗은 채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시윤은 그런 청호의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겨 있었고. 청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시윤은 벌써 수십 분째 우는 중이었다.
청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윤의 어깨에 걸쳐진 자신의 코트를 추켜올렸다.
“그만 울어.”
그의 명령에 시윤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대답만 잘하는 꼴이었다. 청호가 코트 너머로 시윤의 등을 토닥이며 재차 추슬렀다.
“그만 울라니까.”
먹을 건 물론, 물도 없는 상태다. 더 울면 탈수증이 올지도 몰랐다. 이미 많이 울었고, 그로 모자라 코피까지 쏟지 않았던가. 주위가 온통 얼음이긴 했지만 무엇이 어떻게 섞였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녹여 먹일 수도 없었다. 소금물로 추정되는 호수 역시 그랬다.
청호의 채근에 시윤이 아랫입술을 불룩하게 내밀었다.
“흐우, 흑, 으……. 죄, 죄송해요……. 흐윽, 근데 멈출, 수가 읏, 흐윽, 없어서…….”
“…….”
“너무…… 너무 무서웠어요. 흐으, 진짜 주, 죽으신 줄 알고……. 으윽, 흑, 몸도 차갑고, 꿈쩍도 아, 안 하시고…….”
“안 죽어. 네가 살렸잖아.”
청호가 시윤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괜찮아지라고 한 말인데, 잠깐 호흡을 멈췄던 시윤이 더 세차게 울음을 터트렸다. 청호가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다 시윤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시윤의 엉덩이를 받친 청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윽…….”
그리 큰 움직임도 아니었는데 심장께가 지끈거렸다. 시윤을 그렇게 주무르고 헤집었는데 아직 몸이 덜 나은 모양이었다. 귀걸이를 처음 착용한 게 언제였는지조차 까마득하니 그럴 만도 했다. 제 몸뚱이도 낯설어하는 제 힘이라. 어이가 없었다.
쓰게 조소한 청호가 다시 시윤에게로 눈을 돌리는데, 시윤이 놀란 토끼 같은 눈동자로 절 올려다보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또, 또 아프신 겁니까?”
“아니야.”
“아프신 거죠? 한 번, 한 번 더 해요.”
“…….”
“버틸 수 있어요. 버틸게요. 정말이에요.”
시윤이 다급하게 말하며 청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러곤 뒤를 돌더니 냅다 엉덩이를 추켜올렸다. 덜덜 떨리는 허벅지에, 벌겋게 짓무른 무릎이 나 지금 겁먹었어요, 아파요, 무서워요, 힘들어요, 등을 절실히 피력하고 있었다.
청승맞기 그지없는 시윤의 모습을 노려보던 청호가 마른 발목을 움켜쥐고 자신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그리고 시윤의 볼을 부여잡고 강압적으로 시선을 맞췄다.
“너.”
“…….”
“나한테 대체 왜 이래.”
“……예?”
“왜 나를 위해 죽지 못해 안달이야.”
아주 먼 옛날부터, 아니, 시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끼던 이질감이었다. 지나치게 희생적이고 맹목적인 시윤.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픔은 물론 죽음도 불사하려는 시윤. 그리고, 그걸 절실히 바라는 듯한 시윤.
“아…….”
청호의 말에 시윤이 헛숨을 크게 삼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야 제가 대장님 가이드니까…….”
“개소리하지 마. 무슨 꿍꿍이야.”
“꿍, 꿍꿍이라니요. 저는 그냥, 그냥…….”
시윤이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무어라 변명하나. 무어라 거짓을 말할까. 고민하는데, 입이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청호가 더 이상의 거짓은 넘어가 주지 않겠다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있던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그래. 더 숨겨 봐야 무엇이 달라질까. 청호와의 관계는 이미 너절해졌고,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저를 혐오하게 된다 한들,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발목을 감싸 쥔 청호의 손등을 살살 매만졌다.
“긴, 긴 이야기예요.”
“해 봐.”
“…….”
시윤이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저는…… 대장님과 달리 지극히 평범했던 터라 열여섯 살에 도어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랬겠지.”
“아시다시피 결과는 퓨어였고요.”
“…….”
“사실 그렇게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 결과는 아니지요. 열 명을 무작위로 뽑으면 여덟 명이 퓨어거든요. 나머지 둘이 에스퍼 혹은 가이드고요. 그러니 비율상 제가 퓨어인 건 그렇게 의아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
“근데 저는 제가 당연히 에스퍼일 줄 알았어요. 부모님도, 형들도 능력자였고, 하물며 강했으니까요. 그래서 에스퍼가 아닌 제 미래는 찰나라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병사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멋들어지게 클롭스를 죽이는 걸 항상 꿈꿨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니라 제 또래 애들 대부분이 꾸는 꿈이었어요.”
“…….”
“나는 특별하다. 나는 남들과 다르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다. 10대라면 으레 하는 상상이지요. 근데 저는 그걸 꿈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처럼 절대적인 수순이라 생각했어요.”
“…….”
“조금 변명하자면, 주위 환경이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너는 보나 마나 에스퍼겠지. 그것도 A급 에스퍼. 엘렉트라인데 당연한 거 아니야? 형들도 모두 에스퍼잖아. 그 소리를 갓난쟁일 때부터 들었어요.”
시윤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단조로이 말을 이어 갔다. 이따금 호수가 찰랑거리는 소리만이 그의 음성에 섞여들었다.
“그래서 퓨어라는 결과가 떴을 때……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제 인생 최초의 충격이자 절망이었죠.”
“…….”
“제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존재라는 걸 확인받고 나서는 한참 울었습니다. 부모님께 떼도 쓰고, 대상 없는 원망을 종일 퍼붓기도 했어요.”
시윤이 헛웃음을 흘렸다.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는 조소였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종아리를 잡아다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고, 멀뚱히 있는 시윤이 추워 보여서. 그게 다였다.
시윤이 그런 청호의 손을 두 손으로 꼬옥 거머쥐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어 검사가 잘못됐거나, 제가 너무 편히 자라 와서 발현을 못 했거나, 가이아가 절 깜빡했다거나, 뭐 그런 오류가 있을 거라고 믿었죠.”
“…….”
“그래서 저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괜찮다고 위로하는 가족들에게도, 도어 검사 결과를 통보한 직원에게도, 절 잊은 가이아에게도요.”
“증명?”
“예. 클롭스와 싸워 보는 거였죠.”
“……뭐?”
청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런 이유로 능력자에 대한 갈망이 아주 커졌다거나, 그래서 가이딩을 잘 해내고 싶었다거나, 그래서 제게 그리 맹목적인 거라고. 뭐 그리 끝날 줄 알았는데. 열여섯의 시윤은 지금의 시윤과 퍽 달랐던 모양이었다.
넋 나간 청호의 얼굴에 시윤이 이해한다는 듯 작게 웃었다.
“등신 같은 생각이죠? 지금 생각하면 그런데, 당시의 저는 제가 클롭스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잠재력이 짠- 하고 나타나서 클롭스를 죽이고, 가족들이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절 추켜세워 주고, 도어 검사를 새로이 하고, A급 에스퍼라는 결과를 받는 그런 상상을 했어요. 그리고 곧장 실행에 옮겼습니다.”
“…….”
“등교하는 아침에 학교로 가지 않고 포스 바깥에 나갔어요.”
“……어떻게?”
“어……. 때로는 성인보다 어린아이가 더 많은 걸 알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열두 글자나 되는 공룡 이름이나, 운동장에 퍼질러 앉아 세어 본 축구공 면의 개수라거나, 건물 사이사이에 난 좁다란 지름길이나, 장벽 아래에 있는 개구멍 같은 거요.”
“…….”
“가끔 그 구멍을 통해서 바깥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그래 봐야 포스 주위라 황량한 흙바닥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바깥이라는 건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니까요. 저는 거길 통해서 나갔습니다.”
시윤이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시가 아직도 생생했다. 벽 하나 가로질렀을 뿐인데 묘하게 포스와 다른 분위기. 텁텁한 공기. 인기척이라곤 없는 적막함.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그게 퍽 나쁘지 않았다. 마치 엄청난 모험에 들어선 소년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시윤은 힘차게 발을 옮겼다. 훤히 뚫린 평야에서는 클롭스를 찾기 힘들 듯하고,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발을 옮겼다.
두 시간인가, 세 시간쯤 걸어서 도착한 산은 그다지 풍요롭지 못했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있고, 흙은 썩은 것처럼 검었고, 바윗덩이엔 정체 모를 진액이 끈적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거기다 퀴퀴하게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근데 그것도 괜찮았다. 포스 바깥은 지옥 같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 왔고, 클롭스의 악취가 심각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이곳 어딘가에 클롭스가 있다는 걸 뜻했다.
시윤이 허리춤을 매만졌다. 시훈의 방에서 슬쩍한 권총이 만져졌다. 시훈의 이니셜이 박힌 총은 정원이 시훈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 차가움과 부피감을 느끼고 있으면 눈치 없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윤은 한참 동안 산을 방황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존재도 만나지 못했다. 역시 포스 주위라 클롭스가 없나. 빨아 먹고 살 방사능도, 잡아먹을 인간도 없는 데다가 군인들이 수시로 정찰을 도니 없을 만도 했다.
시윤이 하늘을 쳐다봤다. 아침에 나왔는데 하늘이 벌써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발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더 돌아다녔다간 가족들이 저를 찾을 터였다. 포스 바깥으로 나온 걸 들키기라도 하면 몇 달은 외출 금지일 게 분명했다.
시윤이 내일을 기약하며 뒤를 돌았을 때였다.
“크르륵…….”
기이한 울음소리가 뒤통수를 간질였다.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춤에서 총을 빼내며 뒤를 돌았다.
“…….”
그리고 버석하니 굳어야 했다. 클롭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크고 위압감이 대단했다. 학교에서 홀로그램으로 배우는 클롭스는 이렇게 크고 징그럽지 않았던 것 같거늘.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고그마고그였다. 하급 클롭스. 도끼나 대못이 박힌 방망이 따위를 휘두르고 키가 3미터에 다다를 정도로 크며, 귀가 손바닥만큼 넓적하고, 전신에 털이 나 있는 클롭스.
“쿠에에엑!”
클롭스가 하늘이 뒤흔들릴 정도로 크게 으르렁거렸다. 시윤은 총 한 발 쏴 보지 못하고 냅다 달렸다. 고그마고그의 덩치만 작았어도 뭐든 해 봤을 것이다. 근데 커도 너무 컸다. 시윤은 단숨에 열여섯 살짜리 소년에서 여섯 살짜리 겁쟁이가 되었다.
클롭스는 붕붕 방망이를 휘두르며 시윤을 뒤따라왔다. 그것이 뛸 때마다 쿵쿵, 쿵쿵 땅이 울렸다.
“허억, 허억…….”
시윤의 얼굴은 어느새 땀과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클롭스는 작은 몸뚱이를 이용해 여기저기로 쏙쏙 피해 다니는 시윤에게 약이라도 오른 듯 쾅쾅 방망이를 여기저기 내리찍어 댔다.
그것은 이따금 시윤의 발치나 어깨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다 못 하나에 귓불이 스쳤는데, 여린 살이 그 날카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길게 찢어졌다. 피가 목덜미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허나 두려움에 사무쳐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한참 달리던 시윤이 쓰러진 나무 안으로 쏙 숨어 들어갔다. 썩어서 껍데기만 남은 나무라 안이 훤히 뚫려 있었다. 가운데까지 기어간 시윤이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클롭스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것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성난 콧김을 내뿜었다. 시윤의 피 냄새를 느끼는 듯 연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그러나 시윤을 쉽게 찾지 못했다.
시윤이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 냈을 때였다. 콰직! 클롭스가 나무 끄트머리를 짓밟았다. 나무가 속절없이 어그러졌다.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한 그것이 옆을 밟았다. 또 옆을, 또 옆을 밟으며 차근차근 시윤에게 가까워졌다.
시윤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무 무서우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반대쪽으로 기어 나가야 하나. 그럼 바로 잡힐 텐데.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밟혀 죽을 게 뻔했다. 저렇게 커다란 발에 밟히면 납작하게 짜부라져서 엄마 아빠가 제 얼굴도 못 알아볼 터였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는데,
“얘야.”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인간의 목소리였다. 시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바위 더미가 둥그렇게 쌓인 아래에 안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흔을 훌쩍 넘긴 듯한 남자였다.
“이리 와.”
“…….”
“얼른.”
시윤이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사람인가. 진짜 사람인가. 헌데 어째서 사람이 여기 있나. 혹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클롭스는 아닌가. 겁이 났다. 무엇 하나 믿을 수 있는 게 없었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는 사이, 가그마고그의 다리가 시윤이 숨은 나무 위를 노렸다. 그대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남자가 돌멩이 하나를 멀찌감치 던졌다.
타닥, 탁!
돌이 굴러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클롭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러더니 그곳으로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뛰어갔다.
그사이 바위 아래에서 뛰어나온 남자가 시윤의 겨드랑이 아래를 잡아 끌어냈다. 가까이서 보니 의심할 여지 없는 인간이었다. 매우 마른 몸에 꾀죄죄한 몰골이었지만, 어찌 됐든 클롭스보다는 나았다.
그에 안심한 시윤이 훌쩍훌쩍 울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손등으로 시윤의 볼을 훑었다.
“괜찮아. 우리랑 가자.”
“…….”
시윤이 고개를 갸웃 뒤틀었다. 우리? 우리라면 일행이 있다는 걸까. 시윤의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남자가 숨어 있던 바위 아래에서 몇 명이 더 나왔다. 남자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시윤과 비슷한 또래의 소년, 그리고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아마 가족인 듯했다.
시윤을 바로 세워 준 남자가 아들의 어깨를 껴안았다.
“조금만 더 가면 포스라는 곳이 있다더구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야. 그곳은 안전할 거라고 들었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걸어왔어. 내가 이만할 때부터.”
남자아이가 씨익 웃으며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열 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제 또래가 될 만큼이나 오래. 적어도 오륙 년은 걸어왔다는 뜻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썩은 포도처럼 검은 발가락이 죄 튀어나온 신발과 여기저기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처음 보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이따금 포스로 들어온 방랑자들이 하나같이 이 가족과 비슷한 행색이었으니까. 다만 놀란 건, 그들이 시윤을 자신들과 같은 처지라 생각했다는 거였다. 시윤이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종일 산을 헤집고, 넘어졌다가 일어나고, 운 데다가 먼지까지 묻은 꼴이 영 엉망이었다. 오해할 만도 했다.
시윤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산을 혼자 나갈 자신도 없었다. 근데 찢어진 귓불에서 자꾸 피가 흘렀다. 턱 끝에 핏방울이 고일 정도였다. 시윤이 그것을 대충 손바닥으로 훔쳐 바닥에 털었다. 크고 작은 핏방울들이 공기 중에 가볍게 휘날렸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크이이익!”
돌멩이를 쫓아 사라졌던 클롭스가 다시 나타났다.
결과는 뻔했다.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클롭스에게 막대 과자처럼 먹혔고, 어린 여자아이는 한입에 클롭스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시윤은 사람이 죽는 걸 태어나 처음 봤다. 아버지와 형들이 으레 전장에 나가곤 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들은 다쳐 오는 일도 극히 드물었고, 집에 피를 묻혀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간의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뼈가 으스러지며, 내장이 질질 새어 나오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단숨에 아버지와 딸을 잃은 가족들이, 그러니까 엄마와 아들이 세상이 무너지는 듯 비명을 내질렀다. 클롭스는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작은 발을 입으로 욱여넣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시윤은…… 시윤은 도망쳤다.
허리춤에 꽂혀 있던 총을 흘리는 줄도 모르고 꽁지가 빠지라 도망쳤다. 시윤의 인생에서 처음을 아주 많이 경험한 날이었다.
모험, 공포, 절망, 도망, 그리고 방관.
포스로 돌아온 시윤은 씻지도 않고 침대에 기어 들어가 한참이나 떨었다. 다음 날 시윤의 귓불에 난 상처를 발견한 가족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냥 놀다가 다쳤다며 대충 둘러댔다. 시훈의 총이 없어져 또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그 역시 어째저째 흘러갔다.
그날 이후, 시윤은 변했다. 더는 평범한 제 주제를 원망하지 않았다. 제가 그럴 그릇이 아니라는 걸 뼛속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윤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러고는 갈라진 귓불을 매만지며 죄인의 눈동자로 청호를 응시했다.
“저는 살인자예요. 비겁하고, 치졸한 살인자요.”
“……열여섯이었잖아.”
“열여섯‘이나’였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을 나이예요. 저는 도망치면서 그 가족들이 몰살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숨을 미끼 삼은 거지요.”
시윤이 자조적인 미소를 띠었다. 차라리 그때 같이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매년 딱 곱절로 부풀고, 무거워졌다.
악몽도 자주 꿨다. 죽어 가던 남자의 몸, 클롭스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어린아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던 가족들. 그 잔상이 시윤을 짓누르고 또 짓눌렀다. 그럴 때마다 귓불이 간지러웠다. 분명히 다 나았는데, 가끔은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무겁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준비할 땐 수시로 긁어 대서 피가 나고 딱지가 앉기 일쑤였다. 근데 귓불을 긁지 않은 지 좀 된 것 같다. 언제부터더라…….
시윤의 상념이 애꿎은 곳으로 흘러가는데, 청호가 툭툭 그의 볼을 두드렸다.
“그래서. 네가 그들을 버리고 도망친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아……. 그렇게 도망친 다음 날, 에로아스 부대가 복귀했습니다. 대장님이 수십 명의 방랑자를 구해 오셨는데…….”
“그런데?”
“거기에 제가 버리고 온 그 어머니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시윤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가 에로아스 부대의 복귀를 환영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방랑자들에게 고생했다며 물과 음식을 주었다. 시윤은 늘 그랬듯, 친구들과 함께 그 인파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 두 개를 발견한 것이다.
“기뻤습니다. 간사하게도, 제 죄가 반으로 뚝 줄어든 것 같았죠.”
“…….”
“그렇다고 그들 앞에 나타나진 못했습니다. 이름도 찾아보지 않았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우연히 마주치면 제가 무엇을 할지 몰랐거든요.”
그 말에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을 한다니.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그의 표정에 시윤이 으음, 목울대를 움직이며 신음했다.
“어…… 그러니까, 무릎 꿇고 용서를 빌면 다행인데. 저는 이기적이고 못된 인간이니까 그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갈 것 같았어요. 그럼 제가 얼마나 나쁜지, 제 밑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게 되는 거니까, 그게 두려웠습니다.”
“…….”
“그래서 그냥 그들이 어느 지역으로 갔다더라, 그들이 무슨 일을 한다더라, 그 아들이 학교에 입학했다더라, 그 정도만 조사하고 기부라는 이름으로 돈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가 아니라, 그들이 속해 있는 지역이나 학교 같은 곳에요. 알량한 속죄죠.”
그것도 제 돈이 아니라 부모님 돈이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였습니다. 시윤이 수치스럽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까진 손바닥이 따가워 말았다. 괜히 허공에다 탈탈 손을 턴 시윤이 청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무튼, 저는 대장님께 목숨을 두 개나 빚진 겁니다. 그래서 대장님 가이드가 되기 전부터 대장님을 존경해 왔고, 언젠가 대장님을 만나면 무엇이든 해 드리겠다고 다짐했어요.”
“…….”
“물론, 같잖은 다짐이지요. 퓨어인 데다가, 나약하고, 하는 거라곤 강의실에서 입만 나불거리는 제까짓 게 어떻게 대장님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대장님 반려 가이드가 된 겁니다. 저는 능력자가 됐다는 사실보다, 대장님을 가까이서 보필할 수 있다는 게 훨씬, 훨씬 더 기뻤습니다.”
시윤이 당시를 떠올리며 벅찬 얼굴을 했다. 모건이 반려가 맞는다고 땅땅, 결론을 내렸을 때,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른다. 능력자가 된 것도 좋았지만, 보다 제대로 속죄할 기회를 얻었다는 게 가장 기뻤다.
시윤이 엉금엉금 기어 청호의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 청호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정의로우며, 고결한 온기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적어도 시윤에겐 그랬다.
“정말…… 언젠가는…… 대장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그 가족도 제 죽음을 조금이나마 기뻐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던 제가, 자신들을 구한 사람을 위해 죽는다면 꽤 통쾌할 거라고요.”
“…….”
“물론…… 제가 하찮은 C급이라 상상했던 것만큼 도움이 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대장님을 위해 죽고 싶습니다.”
시윤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 털어놔 버렸다. 근데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제가 어찌 이따위 것으로 후련할 수 있겠나. 그냥 청호의 반응이 두려울 뿐이었다. 너 같은 놈이 내 반려 가이드라니, 화를 내며 저를 내칠까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청호는 전혀 다른 걸 생각하고 있었다. 여태 시윤이 제가 보여 주었던 맹목적인 헌신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저와 스킨십하고 덜덜 떨며 식은땀을 흘리는 걸 걱정했더니 그런 말을 했었지.
‘대장님은 언제든, 그냥 필요하실 때 저를 쓰시면 됩니다. 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요. 그러니까 새벽에도 상관없어요.’
또, 사막 전투에서는 내내 차갑게 대하는 저의 등에다 대고,
‘저는 제 반려 에스퍼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줄 겁니다. 해 주고 싶은 건 다 해 줄 거예요.’
‘…….’
‘저한테 대장님은 정말…… 정말 소중하거든요.’
이런 말도 했었고.
‘버티라고 하시면 버틸게요. 저 버티는 거 잘해요.’
지독하게 이어지는 정사에 시달려 퀭한 몰골을 하고서도 저를 받아 내려 엉덩이를 추켜세웠었고.
‘포, 포옹은 괜찮을 거예요. 안아 드릴게요. 가지 마세요.’
‘…….’
‘아니, 아니다. 우리 그냥 해요. 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
‘진짜 버틸 수 있어요.’
팔뚝이 터져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제대로 설 수조차 없어 연구실에 널브러져 있으면서도, 고작 제가 뒤를 돈 것에 놀라 제 소매를 잡아당겼었지.
‘다치지 마세요.’
‘……안 죽어.’
‘압니다. 금방 낫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다치지 마세요.’
장벽 전투에서는 크게 다친 것도 아닌 제게 달려와 입을 맞추며 유난스러운 걱정이란 걱정은 다 했었다. 그 후엔 클롭스들에게 둘러싸여 바들바들 떨면서도 부상병들을 가로막고 서 있었지. 그 작고 마른 몸뚱이로 뭘 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남은 전투를 홀로 마무리하겠다고 나서는 제 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다른 병사들은 죽으라 하세요. 죽는 게 뭐 어때서요. 저는 대장님만 살면 됩니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저한텐 그래요. 그러니까 저 데리고 가실 거 아니면 대장님도 가지 마세요. 그냥 가시면 저 혼자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다가…….’
‘죽겠죠. 아마 100미터도 못 갈 겁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대장님 아니었으면 10분 전에 죽었을 텐데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어울리지도 않는 독한 말을 쏟아 내었다.
그 후에 휴와 몰래 만난 걸 알고 나서 치졸한 질투에 들끓는 제 손을 잡고는,
‘하고 싶으시면 더 하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대장님이 원하시는 만큼요.’
그리 말했었다. 그에 더 화가 난 제가 함부로 주무르고, 멋대로 난도질한 몸뚱이는 결국 피를 토했었다. 오늘은 못 하겠다며 부탁하는 시윤의 가랑이를 강제로 벌리고 들어간 벌을 그가 대신 받은 거였다.
근데 그때도 뭐라 했던가.
‘죄송……해요…….’
‘…….’
‘죄송해요. 죄송해요, 대장님. 정말 죄송해요.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죄송해요.’
피가 튄 저의 얼굴을 닦아 주며, 퉁퉁 부은 눈으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제 쓰임새를 다 하지 못한 것에 사죄했었지.
그러다 결국 정신을 잃고 모건의 연구실까지 가서는 그랬더랬다.
‘한 시간 전에 잠깐 일어났었는데 그러더라. 자기가 죽으면 귀걸이로 만들어 줄 수 있냐고.’
‘뭐?’
‘네가 지금 귀에 달고 있는 그 귀걸이보다 효과가 좋지 않겠냐고 그러던데. 자기 가족들이 반대하고 반대해도, 꼭 자기를 네 귀걸이로 만들어 달래.’
청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놨다. 귀걸이 이야기를 듣고 시궁창처럼 썩어 버린 제 얼굴을 보며 모건이 그랬었지.
‘너 그런 애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게.
난 여태 너에게 무슨 짓을 했나.
청호와 시윤은 동굴 안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통신은 여전히 먹통이고, 나가 봐야 클롭스가 득실거릴 테고. 청호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았다. 괜히 나가서 여기저기 들쑤셨다간 도살당하기 일쑤였다.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시윤은 청호의 손을 꾹 쥔 채 멍하니 시선을 허비하고 있었다. 청호는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가 도망가서 다른 사람이 죽는 거. 전장에선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일이야. 하물며 내가 폭주로 죽인 인간만 해도 백은 족히 될걸.”
“……대장님은 그보다 살리시는 인원이 훨씬 더 많잖아요. 목숨의 개수를 따지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요즘 세상에 안 따질 수도 없죠. 대장님이 실수로 열 명을 죽이고, 백 명을 구한다면, 저는 그게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대장님이 없어서 열 명이 살았다 하더라도, 구하지 못한 백 명은 죽었을 테니까요.”
“…….”
“그리고 그 역시도…… 제가 너무 늦게 발현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않습니까. 제가 일찍 발현해서, 지금보다 더 강한 가이드로서 대장님 곁에 있었다면 그 죽은 열 명도 구할 수 있었겠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윤은 이런 쪽으로는 꼭 벽 같다. 무엇을 말해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기가 막힌 재주가 있다. 그 이유를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청호가 생각하기에 그건 정말 그렇게 죽을죄가 아니었다.
도망칠 기회가 있다면 응당 도망치는 게 맞다. 물론, 전장에서 군인이 도망가면 문제가 되겠지만, 퓨어는, 민간인은, 미성년자는 그래도 됐다.
그래도 시윤 때문에 그들이 죽지 않았냐고? 그것도 아니다. 시윤은 그들에게 도움을 바란 적도 없었고, 대신 죽으라고 클롭스에게 떠밀지도 않았다.
다만,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죽음을 처음 목도해서, 그 죽음에 하필 자신이 연관되어 있어 이성적인 사고를 못 하고 있을 뿐이지. 시윤은 사이먼이나 채정원 같은 새끼들에 비하면 천사 수준이었다.
하지만 청호는 구구절절 시윤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를 목줄 삼아 어떻게든 제 곁에 있겠다는데 굳이 뭐 하러. 이기적이기 그지없었지만, 청호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걸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청호는 아무런 말 없이 시윤을 당겨 품에 안았다. 혹여 또 아픈가, 걱정한 시윤이 얼른 청호를 마주 안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널브러진 주사기들이 청호의 시선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남은 붉은 액체에 그게 무엇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장벽 전투 때 휴 만난 건 왜 말 안 했어.”
그 말에 시윤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빼꼼 고개를 든 그가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었다. 청호가 지긋한 눈빛으로 시윤을 채근했다. 시윤이 어쩔 수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대장님이 기대하실까 봐요.”
청호의 한쪽 눈썹이 비죽 치켜 올라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내가? 무슨 기대?”
“제 능력이 오를 거라는 기대요.”
“…….”
“계속 A급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대장님이 저를…… 어…… 휴한테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청호는 비웃지조차 못했다. 제가 시윤을 타인의 손에 넘긴다니.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럴 일은 없었다. 시윤 없이 살 수 없는 몸이 된 지 오래였다.
“……내가?”
“예. 가이, 가이딩을 구걸하듯이 받는 게…… 싫다고 하셨으니까…….”
“…….”
청호는 그 말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걸 느꼈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다. 제 정액을 머금고 고통에 몸을 뒤트는 시윤을 내려다보면서.
청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과거의 자신이 너무 역겨워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지독한 썩은 내가 단전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런 청호의 속내를 꿈에도 모를 시윤은 청호의 낯이 어두워진 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 그가 다급하게 청호의 허리를 껴안았다. 꼭 잃어버렸던 부모를 찾은 어린아이처럼 간절하고 절박하게.
“저는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아요. 대장님 곁에만 있고 싶어요. 설사 휴에게 가서 S급이 된다고 해도, 대장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 없어요. 그건 정말…… 싫어요.”
“…….”
“장벽 전투 때도 만나고 싶어서 만난 건 아니에요. 갑자기 찾아와서는 따라오지 않으면 막사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어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모두 도륙을 낼 수도 있고, 산 채로 불태울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끔찍한 꽃밭을 또 만들겠다고.”
“…….”
“결국은 다 죽었지만…….”
시윤이 침울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이드 막사가 폭발한 건 제 탓이 아닌데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묵직해졌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뺨을 감싸 눈을 맞췄다.
“휴가 뭐라고 하던데?”
“별말 안 했습니다. 그냥 언젠가 제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잘 모르겠어요. 저도 궁금해서 캐물으려고 할 때, 가이드 막사가 폭발했고 휴는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청호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가늘어졌다. 시윤이 필요하다고? 그 귀신 같은 놈팡이에게 시윤이 왜 필요한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청호가 심각한 얼굴로 휴의 의도를 가늠하는데, 시윤이 청호의 허리춤을 꾹꾹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저 버리지 마세요.”
“…….”
“제가 앞으로 더 잘할게요.”
시윤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애원했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웠다.
청호는 시윤의 모습에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꼈다. 제가 가두어 두지 않아도 시윤은 제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 시윤에겐 오롯이 저밖에 없다는 충족감. 그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맞추고, 체온을 느끼고, 가이딩받을 수 있는 건 세상에 오롯이 저뿐이라는 우월감.
“안 버려.”
나는, 널 버리지 않아.
청호가 슬쩍 고개를 틀고 시윤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시윤이 순순히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막 입술이 맞닿으려 할 때였다.
삐빅. 손목시계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청호와 시윤은 EMP가 해제되자마자 에로아스 병사들을 찾아 나섰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병사들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을 잃은 이는 없었다. 이런저런 클롭스를 만나긴 했으나 청호와 시윤이 마주했던 것들만큼 고위 등급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방사능 수치도 보통 수준으로 내려왔다. 꼭 누가 방사능을 통째로 빨아들인 것처럼.
에로아스는 곧장 복귀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짐들을 챙기고, 군용기를 호출했다. 그쯤 되니 밤이 꼬박 지나 동트기 직전이 됐다. 하늘이 시린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시윤은 청호의 손을 잡은 채 그만 졸졸 따라다녔다.
시윤이 잡고 있는 건 아니었고, 청호가 놔주지 않는 거였다. 시윤은 그가 아직 폭주를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해서 제 손을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귀걸이가 없으니까.
시윤 딴에는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거였다. 청호가 과거의 그 다정하고 부드럽던 청호로 돌아왔으리라는 기대 말이다.
포스로 돌아가면 여느 날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목이 졸리고, 목구멍이 헤질 때까지 그의 것을 머금고, 몸 상태가 어떻든 간에 그에게 다리를 벌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상관없었다. 시윤은 어떻게든 청호 곁에만 있으면 됐다. 다만, 그가 절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선과 차가운 말투는 가슴을 따끔하게 들쑤실 터였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제 인생에서 기대는 한 번도 충족된 적이 없다. 실망은 지독한 열병과도 같다. 열여섯 이후로 몇 번이나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었다.
곧 병사들이 떠날 준비를 마쳤다. 이제 군용기만 오면 됐다. 청호가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그와 눈을 맞추며 흐릿하게 웃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손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치료해야겠네.”
“예?”
“손 말이야.”
청호가 쥐고 있던 시윤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였다. 넘어지고, 쓰러진 청호를 끌고, 토끼 굴에서 미끄러지며 입은 상해들로 손바닥과 손끝이 엉망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터라 피는 멈췄지만 치료가 필요한 수준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시윤은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돌아가서 치료받으면 돼요.”
그리고 손을 뒤집으려는데, 청호가 꾹 손목을 움켜쥐었다.
“내가 하게 해 줘.”
“……네?”
“적어도 하나는 치료하게 해 줘.”
“…….”
시윤이 고개를 갸웃, 옆으로 흘렸다.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닌데, 묘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적어도, 하나는, 치료를. 제 몸에 다른 상처가 있나. 물론, 몸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당장에 치료가 필요한 곳은 없었다.
시윤이 청호의 말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는 사이, 청호가 팔을 옆으로 뻗었다. 그러자 지나가던 의무병의 손에서 구급 키트가 붕, 하고 날아왔다. 순식간에 제 것을 빼앗긴 의무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청호와 시윤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뛰어왔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응.”
“어딥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 내가 할 테니까 가.”
청호가 가볍게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의무병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뭔데, 뭔데. 어디가 다쳤는데. 어떻게 치료할 건데. 그런 시선으로 청호를 바라봤다. 청호가 그런 의무병을 흘깃 째려봤다. 가라고. 그 말이 득실거리는 표정이었다. 뒤늦게 눈치를 챈 의무병이 바른 자세로 경례하곤 뒤를 돌았다.
청호가 멀찌감치 세워져 있던 무기 상자 두 개를 염력으로 끌어왔다. 그러고는 낮은 것에는 자신이 앉고, 조금 높은 것에는 시윤을 앉혀 놨다. 시윤은 여전히 바보 같은 얼굴이었다.
청호는 시윤의 손바닥을 아주 공들여 치료했다.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닌데, 행여 아플까 살살 소독하고, 면봉으로 조심조심 연고를 발랐다. 이따금 깊게 파인 상처를 치료할 땐 자신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
“…….”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가루눈이 섞인 찬 바람이 두 사람을 크게 훑고 지나갔다. 이따금 병사들이 바쁜 걸음으로 둘을 스쳐 가기도 했다.
청호는 그 넓은 어깨를 구기고, 고개를 숙인 채 시윤의 손바닥에 코를 박고 있었고, 시윤은 그런 청호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보이는 거라곤 우뚝 높게 솟은 코와 짙은 속눈썹뿐이었는데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청호와 함께 처음으로 출정했던 날. 그러니까 사화산 전투 때. 기생충에게 물린 손목과 이마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던 청호가 떠올랐다. 그때도 딱, 이런 모습이었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멀미나 긴장과는 조금 다른 울렁거림이었다. 괜히 눈알이 따끔거렸다. 그 낯선 감정을 눌러 보려 심호흡을 크게 하는데, 청호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추워?”
“아, 아니요.”
“돌아가면 모건한테 코트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할게. 조금만 참아.”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걸치고 있던 청호의 코트를 추슬렀다. 반쯤 타 버려서 전처럼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지만 그냥. 계속 입고 싶었다.
청호는 시윤의 손바닥에 넓적한 밴드를 붙여 주고, 손가락 끝에도 세심하게 밴드를 감아 주고서야 치료를 마쳤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시윤이 옅은 미소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청호가 시윤을 따라 웃으며 그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 없이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멀리서부터 묵직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군용기였다. 군용기가 새벽을 가르며 힘차게 날아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군용기의 착륙을 기다리며 짐을 들어 올렸다. 청호와 시윤 역시 몸을 일으켰다.
군용기는 천천히 착륙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병사들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근데 어째 군용기에서 나오는 병사가 더 많았다.
손에 들린 총. 딱딱히 굳은 입매. 정갈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군복. 하얀색 견장. 군사 경찰, 또는 헌병이라 불리는 병사들이었다.
시윤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아니, 시윤뿐만 아니라 에로아스의 모든 병사가 그랬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에로아스 부대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청호 주위로 모여들었다. 청호는 시윤을 뒤로 숨겼다.
“전체 차렷!”
이 열 종대로 선 헌병들이 우두머리의 호령에 따라 뒤꿈치를 착 붙이고 섰다.
“원수님께 경례!”
그 소리에 시윤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걸 느꼈다. 원수님이라니. 누군지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덩치 좋은 인영 하나가 헌병들 사이를 뚜벅뚜벅 가로질러 왔다. 정원이었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원이 여기까지 헌병들을 데리고 행차한 이유야 뻔했다.
정원은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청호와 시윤을 향해 다가왔다. 병사들이 그를 막아섰다. 그와 동시에 헌병들이 묵직한 총구를 병사들의 머리를 향해 겨눴다. 으득 이를 간 그들이 제각각의 능력을 쓰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이미 발아래에 보라색 원이 생겨난 이후였다. 몸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전부 체포해.”
정원이 낮은 음성으로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