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시윤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산 정상은 신기하리만큼 굴곡이 없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평지 가득 꽃이 피어 있었다. 손바닥을 쫙 편 크기와 비슷한 꽃은 꽃잎은 얇고 수술은 길었다. 그리고 누가 형광 물질이라도 발라 놓은 듯 은은하게 빛이 났다. 꼭 달을 먹고 자란 것처럼.
수천 평을 가득 메운 꽃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일사불란하게 춤추며 안개 같은 꽃가루를 흩날렸다. 그것은 물안개처럼 산을 타고 내려갔다.
시윤이 꽃 앞에 쪼그려 앉았다. 꽃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보고 예쁘다는 감탄은 할 줄 알았다. 포스에도 여기저기 잘 관리한 화단이 있는데, 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곳이 훨씬 생동감 넘치고, 화려했다.
“예쁜 건 독이라더니…….”
이렇게 생겨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과 동물을 홀렸단 말이지. 시윤이 톡톡 꽃잎을 두드렸다. 그러자 꽃이 짜증이라도 내는 것처럼 파르르 경련하며 더 많은 가루를 퍼트려 댔다. 시윤이 킥킥 아이처럼 웃었다.
“이거 다 없애야겠죠?”
그가 청호를 올려다봤다. 주머니에 비스듬히 손을 꼽은 청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깝네…….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시윤이 줄기를 움켜쥐고 꽃 하나를 투두둑 뽑았다. 말과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채집을 위해서. 포스에 가져가 연구하면 좋을 테니까. 환각이 꼭 나쁜 건 아니다. 의학적으로도 쓸 수 있고, 무기로도 활용할 수 있고 이래저래 쓰임새가 많을 터였다.
근데…….
“으아아아아아악!”
꽃이 비명을 내질렀다. 정확히는 꽃 뿌리에 달린 어떤 이의 머리가.
“…….”
기겁한 시윤이 꽃을 내던지며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흙에 짓무른 눈알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움푹 파인 코와 흙을 한가득 문 입술 역시 인간의 것이 맞았다. 퀴퀴하게 썩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멈추고 피가 차게 식었다.
“으아아악, 으아아악, 으아아아악!”
나동그라진 머리가 끊임없이 고함쳤다. 청호가 그것을 뻥, 멀리 차 버렸다. 그러고는 시윤의 팔꿈치를 들어 자신의 뒤로 숨겼다.
시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청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꽉 막힌 숨구멍이 터지질 않았다. 끅끅 뒤틀리는 호흡이 괴로운데, 방금 본 것의 잔상이 너무 또렷하게 남아 그것까지 추스를 신경이 없었다.
청호가 꽃밭을 훑어봤다. 그 시선을 따라 꽃이 무 뽑히듯 쑥쑥 올라왔다. 그것들의 뿌리에도 역시 머리가 달려 있었다. 인간의 머리도 있었고, 동물의 머리도 있었으며 클롭스의 것도 있었다. 꽃은 정수리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 있었다. 꼭 토양이 아니라 머리를 영양분으로 삼은 듯한 모양새였다. 화분 대신 머리에 심긴 모양새기도 했다.
머리들이 각기 다른 음성으로 비명을 쏟아 냈다. 두통이 일 정도로 끔찍한 발악들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름답던 꽃밭이 순식간에 잔혹한 무덤이 됐다.
질끈 눈을 감은 시윤이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가시 같은 비명들이 속속들이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청호는 역겹지도 않은지, 누군가에게 뜯긴 듯 잘린 머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러다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쿤 부대야.”
쿤 부대 대령의 머리였다. 눈알이 없고, 한쪽 볼이 문드러져서 식별하기 힘들지만 분명 그 머리가 맞았다. 청호의 낯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건 내 병사네.”
그 옆의 것은 시윤의 눈에도 익었다. 아돌프 C를 이끄는 대위의 머리였다.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는 사이라 명명할 정도는 됐는데.
또, 그의 머리가 이곳에 있다는 건 다른 아돌프 C의 병사들 머리 역시 이곳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걸 뜻했다. 시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 누가 이런…… 짓을…….”
대체 어떤 클롭스가 이다지도 끔찍한 살인을. 클롭스는 대부분 본능에 의해 살아간다. 몇몇 고위 클롭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명령이 없을 땐 먹고, 섹스하고, 잠을 잔다.
가끔 유흥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죽이곤 하지만, 이렇게 괴이한 취미는 없었다. 이건 꼭……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가 자신의 살인 업적을 전시해 놓은 것 같지 않은가. 그게 아니면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일 수도 있고.
시윤이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움직였다.
“도, 돌아가요. 에로아스 병사들이 위험합니다. 다 데리고 얼른 포스로 복귀해요. 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공포였다. 찔끔찔끔 눈물이 다 흘렀다. 청호와 함께 있는데도 두려울 수 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대로 두고 가면 안개가 계속해서 흘러올 거야.”
“그럼 얼른 불을 지르고…….”
“안 돼. 머리가 다 타 버리잖아. 병사 가족들에게 해골을 보낼 순 없어.”
청호가 후우 자신의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그러더니 꽃줄기 하나를 움켜쥐고 꾸욱 힘을 줬다. 그의 손끝에서부터 살얼음이 퍼져 나갔다. 꽃과 머리가 어는 데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머리가 비명을 지르던 채로 단단하게 굳었다.
청호가 그것을 툭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얇은 꽃잎이 모래처럼 바스러지고, 머리만 남았다. 결과를 확인한 청호가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땅에 댔다.
비로소 그의 계획을 알아챈 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 넓은 곳을 통째로 얼리시겠단 말입니까?”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넓이다. 더군다나 물도 없다. 습기가 별로 없는 땅을 얼리려면 그 힘이 곱절은 더 필요할 터였다. 아무리 청호라도 무리다.
“할 수 있어.”
청호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시윤이 냅다 그의 옆에 퍼질러 앉아 그를 말렸다.
“할 수 있고 없고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힘을 한 번에 쓰시면 분명 몸에 무리가…….”
“너 있잖아.”
“…….”
“네가 손잡아 줄 거잖아.”
청호가 씨익 보기 좋게 웃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시윤은 그를 더 말리지 못했다. 이대로 그가 폭주라도 하면, 고작 손잡는 것으로는 안 될 텐데.
물론, 제가 아플까 두려운 게 아니었다. 키스든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지만 그것으로도 청호를 안정시키지 못할까 봐 우려하는 거였다.
시윤이 진흙탕 같은 감정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청호가 넌지시 말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 힘 조절 못 해서 너까지 다치게 할지도 몰라.”
“대장님.”
“얼른.”
시윤이 한숨과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 구석에 박혀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 청호의 코트를 꽁꽁 싸맸다.
시윤과의 거리를 확인한 청호가 손바닥으로 힘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의 주위에 있는 꽃들에 하얗게 성에가 꼈다. 그 성에는 타원형을 그리며 점점 퍼져 나갔다. 흔들리던 수술이 꼿꼿하게 굳고, 안개가 옅어졌다. 순식간에 다른 세상이 됐다. 또 다른 의미로 장관이었다.
꽃밭 반절이 얼었을 땐, 입김이 나올 정도로 주위가 싸늘해졌다. 시윤이 코트를 조금 더 여몄다. 그러는 동안에도 청호의 널따란 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손등이 따끔거렸다. 흠칫 몸을 떤 시윤이 손등을 바라봤다. 엄지만 한 모기가 시윤의 피부에 주둥이를 꽂고 쭉쭉 신나게 피를 빨아당기고 있었다.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시윤이 손을 털어 모기를 쫓아냈다. 허나 어찌나 끈질긴지, 결국 반대 손으로 튕겨 내야 했다. 모기가 특유의 가느다란 소음을 내며 멀어졌다.
근데 이번엔 또 목덜미가 따끔거렸다. 시윤이 자신의 목덜미를 탁, 세게 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기를 잡진 못했다. 목덜미와 손등을 번갈아 문지른 시윤이 다시 청호에게 집중했다.
꽃밭 전체를 얼리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빠르게 퍼져 나가던 성에 타원은 크기가 커질수록 속도가 더뎌졌다.
그러나 끝내는 전체가 얼었다. 으스러진 꽃잎들이 별처럼 공기 중에 둥둥 떠다녔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봤다면 은하수가 지구로 내려온 것 같다며 감탄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끔찍하기만 했다.
마침내 청호가 땅에서 손을 뗐다. 마스크를 벗어 던진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전속력으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온몸으로 그를 껴안았다. 팔로 그 널따란 등을 감싸고, 가슴으론 그의 머리를 품었다.
“대장님. 괜찮으세요?”
“……응.”
청호가 꽈악 시윤을 마주 안았다. 맞닿은 살갗을 통해 미처 분출되지 못한 청호의 힘이 흘러왔다. 다행히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포옹에 불과한지라.
“전장에 내 가이드가 있는 게 이런 기분이군.”
시윤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청호가 나지막이 웃었다. 시윤은 그 웃음에 동조하지 못했다. 눈을 내려 청호의 낯빛을 살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을 지배한 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청호가 아파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냥, 본능이었다.
시윤이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키스……할까요?”
“…….”
어둠 속에서 청호의 검은 동공이 번뜩거렸다. 시윤이 조심히 그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청호가 그 손을 쥐고 볼을 비볐다.
“여기서 말고. 여기서는 싫어. 조금 이따가.”
그 말에 시윤이 알겠다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잠깐 시선을 얽고 있던 청호가 몸을 일으켰다. 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뽑아낸 그가 알렌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대장님.
곧 자그마한 화면에 알렌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을 피웠는지, 그의 얼굴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안개는?”
―옅어지고 있습니다. 병사들 몇몇은 벌써 깼지 말입니다. 처리하신 겁니까? 대체 무슨 클롭스길래 안개를 다 뿜는답니까?
“좌표 보낼 테니까 직접 와서 봐.”
―뒤처리가 필요한 겁니까?
“사체 수습.”
청호의 답에 알렌의 얼굴이 대번에 각졌다. 청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제가 죽인 것도 아닌데, 제가 죽인 듯한 죄악감이 들었다.
―……누구의 사체입니까.
“쿤 부대.”
―…….
“그리고 아돌프 C.”
―…….
알렌이 볼 안쪽을 세게 짓씹었다. 아돌프 C가 사체로 발견됐다. 청호의 반응을 보아하니 부대 전체가 몰살당한 모양인데. 이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에로아스 부대 일부분이 뜯겨 나간 것이다.
―적은 어떻게 됐습니까?
“인제 처리하러 가려고.”
―같이 가겠습니다. 부대 두 개를 통째로 없앤 놈입니다. 함께 가시는 게…….
“사체 수습부터. 얼른 안 하면 안개가 다시 생길 거야.”
알렌의 미간이 가늘게 좁아졌다. 청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사체를 수습하지 않으면 안개가 다시 생긴다니. 상관관계가 이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청호는 알렌이 이해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와서 보면 알아. 애들 정신 차리는 대로 바로 출발해. 사체 수습하고, 포스에 보내고, 그다음 나와 합류한다.”
―……예.
알렌은 더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묻지 못했다. 통화는 그렇게 종료됐다. 잠자코 듣고 있던 시윤이 고개를 갸웃 뒤틀었다.
“이 꽃밭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아십니까?”
“저기, 잔디가 죄 눌려 있잖아.”
청호가 수 미터 떨어져 있는 곳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거진 수풀 사이 좁다란 길 하나가 나 있었다.
“누군가가 지속해서 드나든다는 뜻이야. 저걸 따라가면…….”
그 순간. 청호의 몸이 기우뚱, 앞으로 넘어갔다.
“대장님!”
기겁한 시윤이 얼른 청호를 받쳤다. 그러나 태산 같은 그의 덩치를 받치기엔 역부족이었다. 급한 대로 가까운 바위에 그를 앉혔다.
“대장님…….”
시윤이 청호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무슨 방도를 취해야 할 성싶은데 당황으로 굳은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질 않았다. 일단 입술부터 붙이고 볼까. 아니, 그건 싫다 했으니까 힘껏 안아 줄까.
쓸데없는 고민을 이어 가는데, 청호의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나중에는 불에 덴 것처럼 손끝이 따끔할 정도였다.
“후우…….”
청호가 한숨 같은 신음을 흘렸다. 살짝 고꾸라진 머리가 그와 참 어울리지 않았다. 단단한 어깨와 두툼한 팔뚝에서 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올라왔다.
시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건 제가 갈무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제 미천한 능력으로는 품을 수 없는 폭주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던 시윤이 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뽑았다. 알렌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청호와 오랜 시간 함께한 그이니 그의 폭주 역시 경험한 적 있겠지.
시윤이 홀로그램에서 알렌의 이름을 찾았다. 등신같이 덜덜 떨리는 손이 터치조차 버거워했다. 그러다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았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시계를 텁, 하고 덮었다. 홀로그램이 까무룩하고 죽었다.
“안 돼.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텐데. 나까지 혼란을 더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냥…… 안아 줘.”
청호가 팔을 벌렸다.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불은 안 되는데. 여기서 불길이 일면 청호가 기껏 얼려 둔 꽃들이 죄 녹을 것이다. 거기다 운 나쁘게 이 꽃밭의 주인이라도 나타나면, 청호와 저 역시 잔혹한 꽃의 거름이 되고야 말 터였다.
시윤이 청호의 팔을 어깨에 이고 그를 일으켰다.
“대장님, 일단 여길 벗어나요.”
조금만, 조금만 떨어지자. 10분, 아니, 5분만. 어디 구석진 곳으로, 조금이나마 안전한 곳으로, 이 비루한 몸뚱이로도 그를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이를 악문 시윤이 막 첫발을 뗐을 때였다. 몸이 덜렁하고 들렸다.
“너한테 얹혀 갈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야.”
청호가 시윤을 안아 들었다. 시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청호가 그런 시윤과 시선을 맞춘 채, 빙긋 웃었다.
“여태 너 없이 버틴 나날들이 얼만데. 이 정도는 괜찮아.”
“그, 그래도…….”
“얌전히 있어.”
지금은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나지막이 말한 청호가 빠르게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뭇잎, 밤하늘과 달이 바람처럼 스쳐 갔다. 시윤은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쉬어 갈 곳을 찾았다.
잠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몇 시간만, 청호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만, 딱 그만큼의 평온을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면 되는데.
동굴 같은 게 있으면 좋으랴만. 산 정상에 꽃이 핀 걸 보아 용암 동굴은 없을 것 같고, 석회암 동굴은 지나치게 울퉁불퉁해서 몸을 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사방이 훤히 트인 산 중턱보다는 나으리라.
시윤이 바쁘게 홀로그램을 두드렸다. 산을 스캔해 동굴을 찾을 심산이었다. 그 순간, 홀로그램 위로 붉은 점 하나가 떠올랐다. 시윤이 살풋 눈살을 구겼다.
이게 왜 지금……. 그가 두 손가락으로 점을 쭉쭉 확대했다. 그리고 여러 번 새로 고침 했다. 그러나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류가 아니란 뜻이다.
시윤이 어딘가 붕 뜬 목소리로 청호를 불렀다.
“어…… 대장님.”
“응.”
“쿤 부대 GPS가 켜졌습니다.”
쿤 부대의 베이스캠프는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대 전체가 몰살당했으니 여기저기 불이 나고, 피가 튀어 있고, 머리가 없는 시체가 즐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큼 온전한 모습이었다.
우뚝 서 있는 막사와 텐트는 깔끔했고, 한쪽 구석에는 수많은 무기가 가지런히 서 있었다. 하물며 투명 바리케이드까지 작동하고 있어 GPS 없이는 찾을 수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막사 안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올 것 같은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하다. 인간만 증발한 것 같아 무섭기까지 했다. 움직이는 거라곤 쿤 부대를 뜻하는 녹색 깃발뿐이었다.
“한 바퀴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시윤이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레 켜진 GPS가 이상하니 주변을 수색해야 했다. 평소의 용기라면 꿈도 못 꿨을 행동인데, 청호가 아프니 못 할 게 없었다.
“같이 가.”
그러나 청호가 순순히 시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퉤, 허공에다 피 섞인 침을 뱉은 그가 시윤을 따라나섰다. 시윤이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또 많은 힘을 소비한 그다. 잘생긴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올라와 있거늘, 대체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시윤이 그를 만류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청호가 조금 더 빨랐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날 지키게 하진 않을 거야.”
“…….”
“그러니까 같이 가.”
“…….”
시윤은 그의 검고 검은 눈동자를 이기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것뿐이었다.
예상대로 베이스캠프에는 아무도 없었다. 막사 안에 가지런히 놓인 가족사진이나, 곱게 개켜진 옷과 담요, 먹다 남긴 맥주병으로 누군가가 있었구나 짐작할 따름이었다.
청호와 시윤은 구석진 막사에 자리를 잡았다. 숲과 가까우면서도 앞이 트인 게,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좋았다.
청호는 막사 한쪽에 쌓여 있는 생수 통들 앞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속에서 치받는 피를 뱉어 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입을 헹구고, 헹구고, 또 헹궈도 금세 혀 위로 피가 고였다.
시윤은 그런 청호를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기만 했다. 제가 뻔히 있는 걸 알면서 안아 달라고도, 입을 맞춰 달라고도, 그 이상도 요구하지 않는 청호가 의아한데, 또 먼저 나설 오지랖도 없었다.
좁고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은 시윤이 달달달 정신 사납게 뒤꿈치를 들썩거렸다. 아랫입술을 씹다가 손톱으로 손바닥을 파내다가 모기에 물려 살짝 부푼 손등을 벅벅 긁기도 했다.
그렇게 수십 분이 지났다. 그러나 청호는 여전히 시윤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생수 통이 그가 뿜는 열기에 우그러졌다. 그가 딛고 선 땅은 파도치듯 꿈틀거렸고, 옆에 있던 철제 서랍장은 끼긱, 끽 듣기 거북한 소음을 내며 뒤틀렸다.
그걸 목도하고만 있던 시윤이 끝내는 참지 못하고 청호에게 다가갔다.
“대장님.”
“잠시만.”
“네?”
“잠시만 기다려. 지금 너랑 닿으면…… 내가 주체를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청호가 신경질 섞인 손짓으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행여 적이 알까, 부러 은은하게 켜 놓은 조명에 붉게 충혈된 그의 눈동자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시윤이 그 모습을 보며 볼 안쪽 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제가 보다 강했다면, 급이 높았다면 청호가 저리 참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단숨에 그의 고통을 해갈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야 원, 없느니만도 못한 가이드가 아닌가.
시윤의 만면이 눅눅하게 젖었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의 나약함을 잊어 본 적 없는데, 이렇게 확인하고 곱씹을 때마다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시윤이 가방을 헤집었다. 각진 기계 하나가 손에 잡혀 왔다. 어빌리티를 확인하는 채혈 기계였다. 그것을 꺼내 곧장 엄지를 쑤셨다.
혹시 모르니까. 정말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종일 청호와 몸을 부딪치고 있었으니 그새 변화했을지도 모르지.
시윤이 핏방울이 고인 엄지를 빨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그런 시윤을 놀리듯 뜸을 들이던 홀로그램이 곧 알파벳 하나를 띄웠다.
순간, 시윤의 호흡이 멈췄다. 제가 보고 있는 단어가 제가 아는 그 단어가 맞는지 믿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눈을 세게 감았다가 뜨고 봐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가 다시 봐도 알파벳은 변화가 없었다.
[A-]
“……A라고?”
갑자기 왜? 수 시간 전, 이곳으로 오는 군용기에서 검사했을 땐 분명 B였다. 헌데 어째서 A가…….
기쁨보다는 당혹이 먼저 왔다. 목구멍이 떫을 정도로 얼떨떨했다. 그다음으로는 안도했다. 아, 이 정도면 청호를 편히 만들어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
시윤이 기계를 들고 청호에게 다가갔다. 청호가 흠칫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엄한 눈빛으로 시윤을 응시했다. 왜 말을 듣지 않고 다가오냐는 꾸지람이었다. 시윤이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눈앞에 기계를 쑥 내밀었다.
“…….”
청호가 그것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 A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반사됐다.
“저 지금 A급이에요. 이 정도면 대장님이랑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을…….”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를 감싸 쥐고 그대로 입술을 삼켰다. ……거예요.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문장이 청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청호의 입술은 비렸다. 근 한 시간 내내 피만 뱉어 냈는데 비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또, 혀가 매우 뜨거웠다. 체온을 훨씬 웃도는 온도라 닿는 부분마다 데는 것 같았다.
근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게 묘하게 좋았다. 이토록 활활 타오르는 그의 고통을 제가 삼키고 있다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거친 입맞춤에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쳤다. 본능에 충실한 청호의 혀가 입술을 핥았다가, 혀를 옭아맸다가, 가끔은 턱을 날름거리기도 했다.
“응, 읏…….”
흡사 동물의 교미 같은 키스에 시윤이 어깨를 귓불까지 올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프진 않은데, 매우 생경한…… 뭐랄까……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느낌인데. 아랫배가 찌릿찌릿하고 등줄기는 선득한 게, 몸이 자꾸 공처럼 돌돌 말리려 했다.
원래 입맞춤이 이런 기분이었나. 이렇게 질척하고, 야했나. 여태 그와 입 맞췄던 순간을 되뇌다 문득 깨달았다. 제가 맨정신으로 그의 입술을 받아 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그것을 깨닫자 연한 수줍음과 동시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흔한 키스인데. 하물며 에스퍼처럼 스킨십이 의식주처럼 필수 요소가 아닌 퓨어도 숱하게 하는 것인데. 청호는 반려 가이드가 있음에도 제대로 못 했다.
그걸 깨달은 시윤이 청호의 목 뒤로 팔을 둘렀다. 그로 모자라 발뒤꿈치까지 들고 그의 입술에 열렬히 부응했다. 서툴게나마 청호의 혀를 쫍쫍 빨아 보기도 했다.
그러자 청호가 짐승처럼 으르댔다. 그 목 울림이 고스란히 시윤에게로 넘어왔다. 조금, 정말 조금 무서웠다. 갑자기 입을 호랑이만큼이나 크게 벌린 그가 저를 한입에 꿀꺽하고 삼켜 버릴 것 같았다.
“흐, 으응…….”
청호는 오랫동안 시윤의 입술을 물고 있었다. 혀를 어찌나 세게 빨아 당기는지. 또, 침은 왜 그리 빼앗아 가는지. 혀뿌리가 아리고,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종국에는 입술이 똑 떨어져 나가면 어쩌나, 시답잖은 걱정까지 됐다.
첫 키스 때는 청호와 닿는 모든 부분이 너무 아파서 다른 걸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넘나드는 타액과 비벼지는 입술, 섞이는 혀가 지나치게 선연해 발가락이 자꾸 안으로 말렸다.
청호는 시윤의 입술이 퉁퉁하게 부풀었을 때야 물러났다. 그런데도 모자란지 형형한 눈빛으로 붉은 입술을 노려봤다. 시윤이 얼른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더 빨렸다간 정말 입술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허리를 답싹 들어 침대로 향했다. 흘깃, 종착지를 훔쳐본 시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드디어 때가 온 모양이다.
청호는 시뻘건 눈을 해 놓고도 시윤을 조심히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침대를 꽈악 움켜쥐었다. 울룩불룩하게 핏줄이 올라온 그의 손에 침대의 철제 프레임이 속절없이 어그러졌다.
청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두툼한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 호흡을 고르더니 고개를 들고 시윤과 눈을 맞췄다.
“아프면 말해야 해. 참지 말고.”
“괜찮…….”
“안 괜찮아. 말 안 하면 모를 거야. 아니, 모르는 척할 거야.”
“……대장님.”
“내가 널…… 너무 오래 참았어.”
청호가 시윤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는 엄지로 손바닥을 꾹꾹 누르듯 매만졌다. 손바닥에 하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센 힘이었다.
“아프면 소리쳐. 내가 안 들으면 때려도 좋아.”
“대장님.”
“아니, 아니. 그걸로는 안 되겠다.”
청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한편에 쌓인 짐 더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윤이 벗어 놓은 재킷이 들썩거렸다. 그 틈에서 보라색 물체가 휙 날아왔다. 총이었다. 청호가 그것을 베개 옆에 놔두며 말했다.
“자. 여기 둘 테니까 그냥 쏴 버려.”
“아니, 그게 무슨…….”
“농담 아니야. 내가 진짜 너를 씹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청호는 더없이 진지했다. 시윤이 답을 찾지 못하고 어버버 말을 절었다. 쏴 버리라니. 어느 미친 가이드가 가이딩 중에 아프다고 에스퍼를 쏴 버린단 말인가.
“정말 괜찮습니다.”
시윤이 총을 밀어 냈다. 그러나 청호가 총과 시윤의 손을 함께 움켜쥐고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대단하니까…… 굳이 끝까지 안 가더라도…… 충분히 회복할 수 있어. 방금 키스한 거로도 조금…… 괜찮아졌으니까…… 무리 안 해도 돼.”
말에 두서가 없다. 그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괜찮다면서, 전혀 괜찮지 않은 모양새였다.
청호가 시윤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경고하듯,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이성을 잃고 심하게 대하면, 그냥 쏴. 머리가 뚫려도 안 죽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시윤은 청호가 이리저리 흩뿌리는 문장들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이리 저를 밀어내나,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싶었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그가 내뱉는 음절 하나하나가 모두 걱정이라는 걸.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혀가 아직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데. 어깨 위로는 연한 불길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데. 한껏 구겨진 미간은 물론, 경련하는 볼에 고통이 가득한데.
그러는 와중에도 무능력한 가이드가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게 참…… 안쓰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 내 에스퍼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시윤이 청호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리고 자신의 셔츠 단추를 툭툭, 툭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청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럴 일 없어요.”
“채시윤.”
“저는 절대로 대장님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예요.”
“…….”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걸요.”
단추가 다섯 개쯤 풀리자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하얗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살결에 분홍빛 유두가 꽃처럼 피어 있었다.
청호의 얼굴이 버석하니 굳었다. 그의 시야 가득 달처럼 빛나는 시윤의 가슴팍이 차올랐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순결한 영역. 동시에 오로지 저에게만 허락된 천국. 신이 제게 내린 고결한 안온.
청호는 그러지 않아도 절절 끓던 피가 터질 듯 요동치는 걸 느꼈다. 초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산란했다. 세상에 또렷한 것이라곤 시윤뿐이었다.
그런 청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윤이 드러난 맨가슴으로 겁 없이 청호의 손을 끌어왔다.
“이런, 씨발…….”
보드라운 살결을 느낀 청호가 짧은 욕을 짓씹었다. 색욕, 육욕, 식욕, 정복욕, 파괴욕 등 온갖 욕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치솟았다. 어금니 사이로 침이 새어 나왔다. 정말 짐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시윤이 반대 손으로 셔츠를 마저 헤쳤다.
“얼른요. A급일 때 해요. 언제 다시 떨어질지 몰라…….”
어째 폭주 온 청호보다 그가 더 다급해 보였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다. 어쩌면 다시는 안 올 수도 있다. 그러니 제발 빨리, 빨리, 빨리.
청호가 그 모습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떻게든 이성을 다잡아 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무의미했다.
시윤을 만나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그를 갈망하지 않은 적이 없다. 더군다나 반쯤 헐벗은 시윤이 저를 조르니 눈앞이 다 시뻘겋게 발광했다.
결국 청호는 본능에 패배했다. 진즉부터 정해져 있던 순리였다. 그가 그대로 시윤을 밀어트렸다. 시윤의 결 좋은 머리칼이 이불 위로 민들레 씨처럼 흩어졌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시윤의 위에 올라탄 청호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시윤이 빙긋 웃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청호의 단단한 목덜미를 매만지거나, 검은 귀걸이가 박힌 귓불을 조물거리기도 했다. 그 딴에는 청호가 조금 더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는 거였다.
청호가 자신의 셔츠를 쥐어뜯듯 풀어 멀찌감치 내던졌다. 어스름한 빛 아래에 그의 상체가 드러났다. 널따란 어깨, 시윤과 달리 탄탄하게 올라붙은 가슴, 우둘투둘하게 도드라진 복근, 두툼한 팔뚝, 곧고 우직하게 뻗은 쇄골. 무엇 하나 청호답지 않은 게 없었다.
시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를 따라 몇 개 남지 않은 제 단추를 풀어 갔다. 청호가 그 손을 부드럽게 밀어 내고 손수 단추를 풀었다. 마침내 시윤의 상체 역시 나신이 됐다.
시윤의 몸은 대체로 선이 가늘었다. 내내 연구실에 처박혀 있어 햇볕에 탄 자국일랑 없었다. 도드라진 근육도 없고, 그저 미끈하고 말랑해 보였다.
그 몸을 찬찬히 훑어보던 청호가 허리를 숙이고 시윤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서로의 숨결이 순서 없이 넘나들었다. 슬쩍 고개를 비튼 청호가 본격적으로 입술을 섞으려 했다. 그러다 잠깐 행동을 멈추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도 아프면 총 쏴.”
그 짧은 문장에 진심이 어찌나 담뿍 묻어 있는지. 시윤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호가 시윤의 볼을 사탕이라도 먹듯 삭삭 핥았다. 가느다란 목에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툭 도드라진 쇄골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그렇게 큰 자극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윤은 입을 앙다문 채 파르르 몸을 떨어 댔다.
남 앞에서 벗고 있는 것도 처음이거늘, 배가 마주 닿고, 피부가 마찰하고, 혀가 넘나드는 건 천지가 개벽할 수준의 낯섦이었다.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목석처럼 굳어 있는데, 청호가 시윤의 손을 끌어 자신의 어깨에 얹어 놨다.
“만져 줘. 응?”
“아, 네.”
시윤이 더듬더듬 어색하게 청호의 몸을 쓸어내렸다. 꼭 로봇 같은 몸짓에 청호가 픽, 실소했다. 어이가 없기보다는 귀여웠다. 시윤의 온몸이 이런 행위가 처음이라 소리치고 있는 게 기쁘기도 했다. 저는 닳을 대로 닳은 주제에. 같잖기 그지없다.
청호가 시윤의 가슴팍으로 입술을 내렸다. 긴장으로 바짝 곤두선 유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적당한 크기의 연분홍빛 유륜. 거기에 연지색 유두. 어떻게 이런 곳도 참 시윤답게 생겨 먹었다.
날름, 아랫입술을 핥은 청호가 시윤의 한쪽 가슴팍을 통째로 머금었다. 그러고는 힘주어 쭈우웁, 빨자 연약한 살결이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엄청난 흡입력에 유두가 바짝 곧추섰다. 그러자 청호가 혀의 평평한 부분으로 유두를 짓이겼다.
“으응…….”
생경한 느낌에 놀란 시윤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청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윤의 반대쪽 가슴을 꽉꽉 주물러 댔다. 그 딴에는 힘 조절을 한 것이었으나 그의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홍색 길이 생겨났다.
시윤이 저도 모르게 청호의 팔뚝을 꼬집듯 움켜쥐었다. 허나 돌처럼 단단한 피부는 손톱 끝조차 들어가질 않았다. 그저 뜨거운 벽에 손을 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청호의 애무는 텀이 매우 짧았다. 순식간에 가슴을 해치우고는 늘씬한 배를 크게 핥았다. 오목하게 파인 배꼽에 혀를 쑤셔 넣어 시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침내 청호의 손이 시윤의 바지에 다다랐다. 잠깐 고개를 든 그가 시윤과 눈을 맞췄다. 한 것도 없는데 뺨이 붉게 물든 시윤이 색색 가쁜 숨을 내쉬며 청호를 내려다봤다.
청호가 시윤의 눈가에 꾹 입술을 눌렀다 떼며 말했다.
“아프면…….”
“안 쏠 거예요.”
시윤이 얼른 그의 말을 잘랐다.
“…….”
청호는 구태여 다시 경고하지 않았다. 이만하면 됐지. 이만하면, 충분히 노력했지. 이후는 시윤의 몫이다.
마른침을 삼킨 그가 시윤의 바지를 내렸다.
희멀건 사타구니가 드러났다. 상체와 마찬가지로 근육이라곤 없었는데, 그래도 깡마른 게 아니라 제법 통통하니 살집이 있어 참…… 맛깔나 보였다. 정말 입 안 가득 삼키고 우물우물 씹어 먹고 싶어지는 살결이었다.
아아, 브리프 안에 숨겨진 그곳은 어떠려나. 또 엉덩이는 어떠려나. 청호는 놀이동산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시윤의 골반을 단단히 움켜쥔 청호가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시윤의 다리가 저절로 A 자로 벌어졌다. 그 사이에 자리 잡고, 가느다란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시윤이 시트를 말아 쥐었다. 청호는 무릎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도장이라도 찍듯,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가끔은 혀를 내어 핥기도 하고, 세게 흡입해 입 안 가득 말랑한 살덩이를 담기도 했다. 킁킁거리며 냄새까지 맡을 땐 정말 죽어 버리고만 싶었다.
청호는 애무하는 와중에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시윤을 올려다봤다. 반질반질한 검은 눈동자가 수풀 사이로 비추는 맹수의 안광 같았다.
결국엔 시윤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그래 봐야 시선일 뿐인데, 꼬리뼈가 간질간질했다. 그러자 청호가 꾸지람이라도 하듯, 냅다 브리프를 내려 버렸다.
“으아…….”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부끄러워 까무러칠 것 같다. 이 민망한 행위를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는 하루가 멀다고 반복한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
청호가 훤히 드러난 시윤의 사타구니를, 정확히는 사타구니 사이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시윤이 무릎을 오그리며 그 시선을 피하려 했다. 멀찌감치 구겨져 있는 이불을 끌어오려 한껏 손을 뻗어 봤으나, 제게는 사이코키네시스 능력이 없는지라 실패로 끝났다.
손으로 가리자니 어째 그것이 더 부끄러워 눈만 질끈 감았다. 그런데도 폭우처럼 떨어지는 청호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보, 보지 마십시오.”
“되게…….”
“…….”
“예쁘네.”
청호가 어딘가 붕 뜬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윤의 것은 제 것에 비하면 한참 작았으나, 나름대로 적당한 크기에 적당한 굵기를 가지고 있었다. 음모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피부는 진분홍색이었다. 동그란 귀두는 모난 부분 없이 반질거렸는데, 꼭 귀한 구슬 같았다. 핏줄 하나 없는 기둥은 매끄럽게 쭉 뻗어 있었으며, 고환은 탱글탱글한 게 매우…… 맛있어 보였다.
함께 씻으며 봤던 병사들 것은 이렇게 예쁜 생김새가 아니었는데. 흉흉한 제 것과 같은 신체 부위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 그, 그런 걸 보고, 예쁘다고…… 하시는…… 거예요…….”
시윤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베개에 볼을 파묻었다. 잘 타고난 외모 덕에 예쁘다는 말은 종종 들어 왔다. 근데 하필 거길 보고 예쁘다니. 분명 칭찬인데도 영 거북했다.
청호는 구태여 시윤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축 늘어진 살덩이를 가볍게 움켜쥐고 살살 아래위로 흔들었다.
“흣!”
방심하고 있던 시윤의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남에게 보이는 것도 처음인데, 만짐을 당하는 게 처음이 아닐 리 없었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위도 즐기지 않는 터라 그가 주는 모든 자극이 지나치게 크게 다가왔다.
“아, 흐응, 읏…….”
청호가 손가락을 조이면 조일수록 시윤의 다리 역시 안으로 모였다. 그래도 그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청호의 손이 점차 빨라졌다. 그와 비례해 그의 손바닥 역시 뜨거워졌다. 나중엔 청호가 제 그곳에 불을 붙이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말려야 했다.
아니, 사실은…… 아랫배가 시큰거리며 요의가 올라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러다 그의 손에 소변이라도 지리면, 아까 봤던 꽃밭의 거름이 되기 위해 머리를 처박을지도 몰랐다.
“대, 대장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시윤이 헤엄치듯 다리를 움직였다. 허나 청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만 더 빨리 흔들었다. 시윤의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허벅지 안쪽은 달달 떨렸고, 무릎은 자꾸 허공으로 쭉 펴졌다. 그러다 청호가 엄지로 귀두 끝을 짓이기듯 누르는 순간…….
“아힉! 아! 흐으으…….”
희멀건 탁액을 쭈욱 싸질렀다. 시윤의 고개가 휙 뒤로 넘어갔다. 혹한에 서 있기라도 한 듯 턱이 덜덜 경련했다. 속눈썹은 직선으로 쭉 뻗었고, 반대로 눈앞은 가물가물하게 흐려졌다.
안정을 되찾는 데에는 수 초가 걸렸다. 힘없이 입을 벌린 채 늘어져 있던 시윤이 별안간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뒤늦게 제가 한 짓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떡, 어떡해…….”
울상을 한 시윤이 아래를 살폈다. 막연히 상상한 건, 끈적한 액체를 손에 묻힌 채 역겹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청호였다. 근데 청호는…… 손등을 핥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등에 묻은 시윤의 정액을.
“그, 그걸 왜…….”
“좋아.”
“뭐가요?”
“네 정액.”
“…….”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어이없는 말을 너무 진심으로 하니 얼이 다 빠졌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바라보며 빙긋 눈을 휘었다. 말랑말랑하고 쫀득해 보이는 시윤의 살덩이를 씹어 먹을 순 없으니 이거라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실로 목구멍을 넘어가는 탁액이 그렇게 황홀할 수 없었다. 내내 뙤약볕에서 구르다가 마시는 냉수 같았다. 가능만 하다면 시윤의 저 작은 고환이 텅 빌 때까지 정액을 뽑아 먹고 싶을 정도였다.
청호는 손 여기저기에 튄 시윤의 정액을 삭삭 남김없이 핥아 먹었다. 시윤은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걸 목도하고 있었다. 한창 맛있게 식사를 이어 가던 청호가 아차, 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시윤은 청호가 무엇을 찾는 건지도 모르면서 덩달아 사위를 훑었다. 그때였다. 관물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로션 하나가 직선으로 날아왔다.
그것을 낚아챈 청호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로션 통이 그대로 퍽, 하고 터지면서 내용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손을 로션으로 담뿍 적신 청호가 구겨진 통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 일련의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시윤이 고개를 갸웃 뒤틀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미안. 내가 많이 급해서.”
시윤은 네? 그게 무슨, 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훌떡 몸이 뒤집히는 바람에 헛숨만 잔뜩 삼켜야 했다. 네 발로 엎드린 시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데구루루 눈을 굴리는데, 엉덩이가 벌어졌다.
“대, 대장님…….”
이런 쪽으로 문외한인 시윤이라 할지라도 섹스라는 행위가 어떠한 순서로, 어떻게 행해지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 안다고 수치스러움이 사라지겠는가. 엉덩이 골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그 위로 쏟아지는 청호의 시선, 그리고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오물거리며 움직이는 뒷구멍이 어찌나 부끄러운지. 정신이 다 아찔했다.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던 시윤이 그냥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 봐야 부정과 거절뿐이라.
곧 옹기종기 밀집한 주름 위로 찬 로션이 닿아 왔다. 그 촉감에 적응하기도 전에, 청호가 엄지로 주름을 꾹꾹 누르듯 문질렀다. 뭉툭한 손톱으로 긁기도 하고, 비비기도 했다. 마찰열에 로션이 물처럼 녹아내렸다.
청호가 볼기 양쪽을 크게 벌렸다. 주름이 펴지고, 살짝 틈이 벌어졌다. 그 틈으로 로션이 줄줄 흘러들어 왔다.
“아흐…….”
묘한 기분에 시윤의 발가락이 꼬물꼬물 춤을 췄다. 이거 별로 안 좋은데. 본디 섹스라고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그저 불쾌하고, 낯설기만 했다.
시윤이 베개에 이마를 문지르며 아픈 강아지처럼 신음하는데, 순간 쑥 하고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청호의 검지였다.
“흑!”
시윤의 허리가 튕겼다. 이건 조금 아프다. 한 번도 무언가를 받아 본 적 없는 구멍이라 이물감이 심했다. 그러나 청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구멍을 크게 한 번 휘젓더니 또 다른 로션을 가져와 엉덩이 위로 줄줄 쏟아부었다. 그의 힘이 묻은 로션이 따끈따끈했다.
곧장 두 번째 손가락이 들어왔다. 이번엔 중지였다. 놀랄 틈도 없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행위에 시윤은 온전히 아파하지도 못했다. 그저 진득이 버티려고 노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두껍고, 딱딱한 무언가가 주름 위에 맞물렸다. 훤히 드러난 등줄기 위로 청호의 후끈한 숨소리가 흩어졌다.
시윤은 잠시 고민했다. 뒤를 돌아 제 뒷구멍에 맞물린 것의 정체를 확인할까, 말까. 결론은 후자로 났다. 괜히 봤다가 도망치고 싶어질 듯해서. 어쩌면 베개 옆에 있는 총을 쥐고 싶어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마침내, 청호의 것이 시윤의 뒤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헉…….”
시윤이 호흡을 멈췄다. 몸뚱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누가 뒤를 갈퀴로 마구 헤집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손가락이 드나들 땐 얕잡아 봤다. 섹스 그거 별거 아니구나. 눈앞에 별이 튈 정도로 좋은 건 아니지만, 괜히 겁을 먹었구나. 그런 아둔한 생각을 했단 말이다.
근데 이건…… 이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통각에 나약한 몸뚱이가 파들파들 경련했다. 저절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간신히 들어왔던 귀두가 내부의 조임에 다시 튕겨 나갔다.
“아흑!”
“후우…….”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신음했다. 청호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선 이미 시윤의 몸을 움켜쥐고 침대가 부서지라 흔들고 있는데, 겨우 들어갔던 귀두마저 빠져나오니 그 아쉬움과 조급함에 이가 다 으득으득 갈렸다.
더군다나 찰나 맛보았던 시윤의 안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아서, 황홀해서, 환상적이라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청호는 재차 진입을 시도했다. 성기를 잠깐 물었을 뿐인데 동그랗게 벌어져 뻐끔거리는 시윤의 구멍이 얼른 다시 들어오라, 유혹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보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흉흉하게 부풀어서 울룩불룩 핏줄이 튀어나온 성기가 하얀 둔덕 사이로 3분의 1쯤 사라졌다.
“흐으으…….”
시윤이 억세게 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이마는 물론, 등줄기에도 송골송골 식은땀이 고였다.
시윤의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순간은 발현하고 맞았던 청호의 첫 폭주 때, 호기로이 입술을 붙였던 그 순간이었다. 그보다 더 아플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다른 방식의 고통이었다. 그의 힘을 받아 삼키는 고통과, 생살이 찢어지고 벌어지는 고통은 전혀 달랐다.
시윤이 끔찍한 아픔 속에서 몸부림치는 동안, 청호는 착실히 자신의 것을 욱여넣어 갔다. 이성은 진즉 저편으로 내던진 상태였다. 당장 이 욕구를 해갈하지 않으면 몸이 뻥 하고 터져서 죽어 버릴 듯했다. 심장이 뜨겁고 눈앞은 붉었다.
“아흑, 읏, 큭, 으으…….”
깊어지는 삽입에 시윤이 박박 이불을 긁었다. 흘러내린 눈물로 볼이 축축했다. 터진 줄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던 입술에선 피 맛이 났다. 차라리 뒤가 찢어졌으면 좋겠다. 배가 뚫려서 그의 것이 마구 드나들고, 얼른 이 행위가 끝났으면 했다.
지옥 같은 수 분이 흐르고, 마침내 청호의 것이 시윤의 가랑이 사이로 모두 사라졌다.
“하아…….”
나른히 눈을 감은 청호가 길게 신음했다. 이 황홀경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몸 전체가 충만해지는 느낌. 오장육부 여기저기에 고여 있던 고름이 증발하고 새살이 돋는 느낌. 실타래처럼 꼬여 있던 핏줄이 직선으로 빳빳하게 펴진 느낌. 지나치게 무디던 오감이 되살아나는 느낌. 말 그대로 극락의 정점이었다.
성행위로 말미암은 쾌감은 그 후였다. 사실 성기를 절단하겠다는 듯 조여 대는 내벽은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 그냥 채시윤. 내 가이드. 나의 성역. 그 모든 것이 리비도로 작용했다.
청호의 눈동자가 점점 혼탁해졌다. 수십 년간 고통에 파묻혀 살던 육신이 모든 걸 보상받겠다는 듯 발광했다. 시윤의 골반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채로 성기를 반쯤 뺐다가 콱! 찔러 넣었다. 동글동글한 시윤의 엉덩이가 납작해질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시윤이 악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부릅뜬 눈에 거미줄 같은 실핏줄이 곤두섰다. 그가 울먹거리는 눈으로 청호를 뒤돌아봤다.
“아흑! 대, 대장님…….”
아파요. 너무 아파요. 그 말이 혀끝에서 찰랑거렸으나 차마 내뱉지 못했다. 청호의 입가에 뜬 미소를 봐 버렸기 때문이다.
……제가 아프다고 징징거려서 청호가 이 행위를 멈춰 버리면 어쩌나.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A급인데.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 지금 그가 경험하고 있는 저 안온 역시 지금이 마지막일 텐데.
시윤이 꾹 눈을 감았다. 속눈썹에 방울방울 매달려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윤은 이 순간을 감내하기로 했다. 저를 만나기 전의 청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겪어 온 고통이다. 고작 한 번을 못 참아 나약한 소리를 지껄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단단히 입술을 겹쳐 물었다.
청호는 느리지만 정확하고 깊게 시윤의 안을 넘나들었다. 마치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는 것처럼 시윤을 공들여 느꼈다.
“후…….”
“윽, 흐, 아, 읏! 큭, 흐으…….”
청호의 귀두가 배 속을 북북 긁고 지나갈 때마다 시윤의 잇새로 신음이 끊겨 나왔다. 그래도 아주 멍청한 몸뚱이는 아닌지라 뒷구멍이 미약하게나마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두꺼운 살덩이가 그렇게 나왔다가 들어가는데 벌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것을 알아챈 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청호가 쑥 성기를 뽑더니, 매우 거칠고 빠르게 배 속을 파고들었다. 둔부와 사타구니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던 로션이 사방으로 튕겨 나갈 만큼 센 충돌이었다.
“아……!”
시윤의 머리가 천장을 향해 쳐들렸다. 입은 빠끔 벌어졌고, 눈꼬리 아래로 가느다란 눈물 길이 생겼다. 잠시나마 안도한 게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청호가 시윤의 머리맡에 팔을 고정하고, 등 뒤로 가슴을 붙였다. 그리고 퍽, 퍽 성기를 들쑤셔 댔다. 그의 태산 같은 체격에 짓눌린 시윤은 옴짝달싹 못 하고 그 허리 짓을 받아 내야 했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청호도, 시윤도 각자의 몫을 견뎌 내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문득, 청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댔다.
“아, 씨발……. 너무 좋아.”
가까운 거리 탓에 그 음성이 곧장 시윤의 귓구멍을 갉았다. 시윤은 엉엉 울면서도 그 말이 못내 좋았다. 몸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아픔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제에 제 쓸모를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그렇게 시윤은 수십 분을 청호의 아래에 구겨져 있었다. 종국엔 뒷구멍을 비롯한 아랫도리 전체가 지이잉 울리기만 할 뿐, 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청호의 움직임이 끝을 모르고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오롯이 받아 냈으면 눈 뒤집고 까무러쳤을 터였다.
청호가 시윤의 양쪽 둔부를 틀어쥐고 옆으로 쩍 갈라냈다. 빡빡하게 청호의 것을 삼킨 주름이 가로로 벌어졌다. 붉게 달아오른 주름이 또 다른 세계의 꽃 같았다. 몽롱한 눈동자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청호가 힘껏 성기를 처박았다. 그리고 허리를 뒤틀며 시윤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후, 파정했다.
“하아…….”
청호가 안개처럼 자욱한 신음을 내뱉었다.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만함이 전신을 감쌌다. 오물통을 뒹굴던 뇌를 깨끗하게 씻어 다시 머리에 넣은 것처럼 정신이 맑았다. 지금 이 순간이 꿈같을 정도였다.
“흐으으…….”
시윤 역시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청호의 긴 사정이 괴로웠다. 뜨겁고 질퍽한 액체에 배 속이 더부룩해졌다. 끓는 물처럼 뜨겁고, 이상하리만큼 내벽에 들러붙는 정액에 헛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참아 냈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저는 그의 가이드로서 할 일을 모두 해냈으니까. 그 알량한 안도가 시윤을 이불처럼 감싸 안았을 때였다.
뒤에 박힌 성기가 쑥 하고 빠져나가더니 몸이 뒤집혔다. 그러자 청호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시윤이 축축이 젖은 눈꺼풀을 가물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청호는 조금 전과 달리 제법 인간다운 눈을 하고 있었다. 고통에 내몰려 악에 받친 눈동자도 아니었고, 쾌락에 영혼과 이성을 팔아 버린 탁한 눈동자도 아니었다. 그냥 조금…… 슬퍼 보였다.
“미안해.”
그가 사과했다. 단조롭고 짧은 사과였다. 그렇다고 성의가 없진 않았다. 세 음절에 꾹꾹 눌러 담은 진심이 가득했다. 그의 엄지가 눈물로 짓무른 시윤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었다. 시윤이 아스라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버틸 만했어요.”
“거짓말.”
청호는 같잖은 거짓에 속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통에 민감한 그다. 아무리 정사 내내 이성을 놓은 상태였다 하더라도 머리가 이상해진 건 아닌지라 시윤이 어떻게 울고, 어떻게 아픔을 삼켰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프면 쏴 버리라고 했잖아. 왜 울면서 버텨.”
못내 속상한 티를 숨기지 못한 청호가 시윤의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었다.
“그냥, 버텨 보고 싶었어요.”
시윤이 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고는 얼른 주제를 돌렸다.
“이제 안 아프시죠?”
“응.”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시윤이 싱긋 눈을 휘며 웃었다. 퉁퉁 부푼 눈 주제에 웃는 건 사무치게 예뻤다. 청호가 그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시윤의 머리칼을 만지던 그의 손이 뺨으로 내려왔다. 그러다 귓바퀴를 쓸어내리고, 귓불을 조물거렸다.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작약한 턱선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 손가락 마디마디에 아쉬움이 담뿍 묻어 있었다. 무엇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시 발기한 그의 성기가 허리춤을 쿡쿡 찔러 댔다.
시윤은 수천 번 고민했다. 모르는 척 등을 돌릴까. 기절하듯 자 버릴까. 아니면 눈 딱 감고 한 번 더 할까.
결론은 후자로 났다. 시한부인 제 능력을 최대한 써먹어야 했다. 평생 A급이라면 어떻게든 나중으로 미루겠지만, 당장 한두 시간 뒤에 C급이나 D급으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럼 섹스는커녕, 손잡는 것도 힘들어질 것이다.
시윤이 조심히 청호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저와 달리 두툼하고 단단한 뼈대가 정말 멋졌다.
“우리 하, 한 번 더 할까요?”
호기롭게 내놓은 말인데 볼품없이 더듬어 버렸다. 청호가 잘못 들었다는 듯 눈살을 구겼다.
“……뭐?”
“한 번 더 하자고요.”
“…….”
순간, 청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마 이성과 욕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리라. 시윤의 자그마한 얼굴을 터트릴 듯 강렬하게 쳐다보던 청호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아니. 나 이제 안 아파.”
고통에 휘말려 파르르 떨리던 시윤의 등줄기를 기억했다. 억눌린 울음소리와 이불을 세게 움켜쥐어 하얗게 질렸던 손가락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섹스를 아프지 않게, 서로 즐길 수 있도록 다정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다. 청호는 죽지 않기 위해 수많은 가이드와 잠자리를 해 왔고, 원치 않더라도 그런 쪽으로는 통달한 상태였다.
근데 시윤에게는 그게 안 됐다. 닿기만 하면 이성이 휘발했다. 또 개처럼 시윤을 내몰 게 뻔했다. 폭주 상태는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득도한 승려처럼 육신과 심신의 평화를 찾은 건 아니었다. 평생 억누르기만 하던 고통이 단번에 해갈될 리 없었다.
애써 참고 있는 청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윤이 꼬물꼬물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제, 제가 위에서 해 보고 싶습니다.”
영 설득력 없는 말과 함께.
청호가 픽, 조소했다. 눈동자에 겁이 바글바글 끓는데 쓸데없이 용기와 패기만 가득한 시윤이 우스웠다.
“너는 거짓말을 참 못해.”
“맞아요. 못합니다. 그러니 대장님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세요.”
시윤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 싱그러운 얼굴에 청호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아프잖아.”
“천천히 하면 괜찮을 거예요. 섹스가 원래 아프기만 한 건 아니니까요.”
“내가 천천히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
청호가 시윤의 가슴부터 허리까지 길게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살결이 신기하리만큼 보드라웠다. 저와 같은 인간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힘주어 꼬집으면 살덩이가 떨어져 나올 것 같았다.
군침이 돈다. 허기가 진다. 목이 말랐다. 정확히는, 시윤이 고팠다.
“…….”
시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청호의 표정을 오롯이 보고 있었다. 저렇게 열렬히 아직 모자란다고 소리치고 있는데,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시윤이 몸을 기울여 청호의 뺨에 수줍게 입을 맞췄다.
“그럼 노력해 주세요. 저도…… 노력하고 있으니까.”
청호가 그대로 몸을 엎어 시윤을 아래에 눕혔다.
“아, 으응, 아! 흡, 하응…….”
짙은 신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터져 나갔다. 참다못한 시윤이 자신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노력하라는 게 이런 말이 아니었는데. 청호는 상상도 못 한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대장……님, 그만……. 흣, 네? 아응! 제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 시윤이 간곡히 빌었다. 그러나 청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벌써 수십 분째 시윤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뭐 그리 맛있는지 끈덕지게 혀를 놀리고 있었다.
시윤의 다리를 쩍 벌려 위로 올리고, 말랑말랑한 성기는 물론, 탱글탱글한 고환과 미끈한 회음부, 그리고 잔뜩 혹사당해 붉게 익은 구멍까지 남김없이 핥았다.
“아으응!”
시윤의 사타구니가 덜덜 떨렸다. 조금 전의 정사와 달리 쾌감과 오르가슴으로 말미암은 경련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사정했다. 자극에 나약한 몸뚱이라 손으로 만져 줘도 질질 실금하듯 싸지를 판에 뜨겁고 축축한 입 안으로, 혀로, 또 가끔은 이로 성기와 뒷구멍이 애무당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청호는 시윤의 정액을 맛있다는 듯 싹싹 빨아 먹었다. 그로 모자라 귀두 끝에 혀를 쑤시며 더 내놓으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빠끔거리는 뒷구멍에도 게걸스레 혀를 욱여넣었다.
그러잖아도 예민한 점막이 한껏 곤두섰다. 회음부에 흩어지는 청호의 숨소리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찌릿찌릿한 아랫배가 생경했다. 간질거리는 뒷구멍도 낯설었고, 너무 발기해서 뻐근한 성기도 이상했다.
“제발…… 아흐윽, 그마안…….”
시윤이 찔끔찔끔 눈물을 짜냈다. 그는 너무 좋아도 괴로울 수 있다는 걸 태어나 처음 깨달았다. 아까 청호가 마구잡이로 성기를 처박았을 때가 차라리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다.
청호는 더 나올 정액이 없어 성기가 쪼그라들겠다, 싶을 무렵에야 떨어졌다. 사지가 노곤하게 풀린 시윤이 색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청호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시윤이 다리를 옹송그렸다. 행여 그가 다시 아래를 삼키기라도 할까, 무서웠다. 다행히 청호는 곧장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시윤의 턱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 와중에도 통통하게 부푼 유두를 엄지로 짓이기듯 눌렀다. 아래를 빨기 전, 한참이나 먹어 치운 유두가 꽃망울처럼 부풀어 있어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으응!”
시윤이 허리를 크게 들썩였다. 청호는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시윤의 귓불을 쭙 빨았다가 놨다.
청호는 생각보다 평정심을 매우 잘 유지하고 있었다. 배가 부를 정도로 시윤을 물고 빨았으니 당연했다. 이 정도 마인드 컨트롤이면 다음 순차로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청호가 시윤의 뒷구멍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살살 쓰다듬듯 문질렀다. 열과 성을 다해 물고 빤 덕에 전과 달리 말랑말랑한 주름이 만져졌다.
“흣…….”
시윤이 청호의 팔뚝을 움켜쥐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아무래도 전의 고통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라 겁이 먼저 났다. 청호가 괜찮다는 듯 시윤의 이마와 콧잔등에 쪽쪽 키스해 줬다.
“네가 아프면 안 할 거야. 지금이라도 그만할 수 있어.”
“괜, 괜찮습니다.”
시윤이 청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내뱉는 긴장한 숨결이 피부를 간질였다. 그러잖아도 꺼떡거리며 발기한 청호의 성기가 더 단단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참아야지. 정신 차려야지. 깊게 숨을 들이마신 청호가 검지를 느릿하게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
“윽…….”
시윤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청호는 손가락을 천천히 넣었다가 빼며 내벽을 신중히 매만졌다. 덕분에 구멍은 착실히 느슨해져 갔다.
검지가 아무런 무리 없이 드나들 때쯤, 이번엔 중지가 주름을 문질러 왔다.
중지는 검지보다 빠르게 들어와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내벽을 드나들었다. 손가락이 죄 묻힐 만큼 깊이 파고들기도 하고, 가위질하듯 내벽을 벌리기도 하고, 갈고리처럼 꺾여서는 도톰하게 부푼 내벽 어딘가를 쿡쿡 짓누르기도 했다.
그 순간, 시윤의 엉덩이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으응…….”
말랑하던 둔부가 단단해져서는 청호의 손가락을 터트릴 듯 조여 댔다.
“방금 뭐, 뭐…….”
시윤의 눈동자에 당혹이 차올랐다. 방금 청호가 내부 어느 곳을 건드리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성기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꼭 청호가 스위치를 누르고, 그에 반응한 것처럼. 무조건 반사 같았다.
“…….”
청호는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다급하게 손을 빼내더니, 곧장 귀두를 맞춰 왔다.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갑자기 빨라진 청호의 행동에 행여 그가 다시 이성을 잃은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런 시윤의 공포를 읽은 청호가 마른 등줄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괜찮아. 천천히 할게.”
시윤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곧 청호의 뭉툭한 성기 끝이 꾸욱 주름을 밀었다. 생각만큼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허무할 정도로 부드럽게 귀두를 삼켰다.
시윤과 청호가 동시에 긴 신음을 쏟아 냈다. 청호는 그 후로도 꾸준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반쯤 들어왔을 땐 속이 더부룩하고, 버거웠다. 과식이라도 한 듯 배 속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리고 3분의 2쯤 들어왔을 때부터는 아프기 시작했다. 시윤이 청호의 목을 답싹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괜찮다며. 천천히 해 주겠다며. 아프잖아! 열락에 휩싸인 사고가 자꾸 퇴화했다.
그러나 청호는 물러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대로 주우욱 내벽을 긁으며 뿌리까지 욱여넣었다. 그러면서 그의 귀두가 봉긋 솟아 있는 부분을 세차게 할퀴었다.
“흐잇…….”
시윤의 고개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빨간 입술은 동그랗게 벌어지고, 속눈썹이 위로 말렸다. 쭉 펴진 무릎과 안으로 접힌 발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윽.”
옴팡지게 움츠러드는 내벽에 청호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굳어 있었다. 정적이 깨진 건 시윤이 길게 호흡하며 다시 허리를 세웠을 때였다. 땀에 젖어 축 처진 그의 앞머리를 대신 쓸어 준 청호가 고개를 내리고 눈을 맞췄다.
“계속할까?”
그가 물었다.
“…….”
잠깐 고민하던 시윤이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울어서 눈도, 코끝도, 입술도 붉어져서는 더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청호가 나지막이 웃으며 그의 입술을 쪽쪽 빨았다.
청호가 시윤을 바르게 눕혔다. 그 후 마른 다리를 양어깨에 걸치고 살짝 빠진 성기를 깊숙이 쑤셔 넣었다. 이번엔 그의 귀두가 전립선을 반으로 가르듯 들어왔다. 시윤의 목이 달팽이 더듬이처럼 움츠러들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느낌이었다. 전신에 두드러기가 돋듯 간질간질하고 찌릿찌릿한데, 무언가를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안달 나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청호는 일그러졌다가 펴지길 반복하는 시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움직였다. 느리게 움직이다가도 그의 골반에 부딪치는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세게 들어왔다. 또 가끔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퍽퍽 빠르게 쑤시기도 했다.
헌데 신기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어쩌면 아팠을지도 모른다. 근데 북북 긁히는 내벽이 너무 좋아서, 벌어지는 구멍이 황홀해서, 그가 만져 주는 유두와 허리가 짜릿해서 고통까지 느낄 오감이 부족했다.
“으응, 읏, 앙, 흑, 좋아……. 아…… 좋아요, 대장님…….”
시윤이 달큼한 신음을 연달아서 이었다. 그로 모자라 청호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매가리 없이 풀린 눈 코 입에 쾌락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청호가 그에 응하듯 퍽퍽 힘차게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 쑤시면 쑤시는 대로 오물거리며 성기를 씹는 뒷구멍에 뒷덜미가 다 선득했다.
“하아…… 채 준위.”
“대장님, 흐응, 읏, 대장……니임…….”
“시윤아.”
청호가 절절한 음성으로 시윤을 불렀다. 그와는 그저 닿기만 해도, 아니, 같은 공간에서 숨만 쉬어도 좋은데 이렇게 성적인 쾌락까지 더해지니 딱 미치기 직전이었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럼 그것을 빌미 삼아 시윤을 멋대로 씹어 댈 텐데 말이다.
청호가 시윤의 골반을 바투 쥐고 붕 뜬 허벅지 아래로 무릎을 넣고 섰다. 그리고 허리를 아래에서 위로 힘껏 쳐올렸다.
“하앙…….”
시윤이 자지러지며 몸을 뒤틀었다. 깊게 처박힌 성기에 끅끅, 숨을 뒤틀다가 종국엔 청호의 가슴팍을 밀어 내기까지 했다. 지나친 쾌락이 괴로웠다.
“대, 장님…… 너무 깊, 윽, 깊어요……. 배가 뚫릴 것 같, 흐윽…….”
그러나 청호는 물러나 주지 않았다. 시윤의 두 팔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머리 위로 결박했다. 그리고 집요하게 허리를 놀렸다.
시윤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 청호는 그 역시 무시했다. 저는 ‘아프면 하지 않겠노라’ 말했지, 다른 약속은 한 적이 없었다.
청호는 시윤의 엉덩이를 거머쥐고 퍽퍽, 힘차게 성기를 넣었다가 뺐다. 시윤은 몇 번이고 잠깐만, 천천히 따위의 부탁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지속해서 마찰당한 시윤의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청호가 그것을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꼭 잘 익은 복숭아 같다. 딱히 과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도 입맛이 돌았다.
그 절경에 정신을 놓은 청호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시윤의 전립선을 꿰뚫듯 쿠우욱 뭉개 버렸다.
“히윽…….”
시윤의 동공이 점처럼 작아졌다. 전신이 목석처럼 단단하게 굳더니 곧 성기 끝으로 픽, 힘없이 탁액을 갈겼다. 그러면서 구멍이 확 움츠러들었다.
“큭…….”
청호의 눈매가 잔뜩 구겨졌다. 성기를 터트릴 듯 조여 대는 시윤의 뒷구멍은 아무리 청호래도 감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굵직한 신음을 짧게 쳐 낸 청호가 그대로 시윤의 안에 시원하게 사정했다.
“하으응!”
콸콸 세차게 쏟아지는 정액에 시윤이 찔끔 눈물을 짜냈다. 그리고 안심했다. 아, 비로소 이 긴 행위가 마침표를 찍었구나 싶어서. 그의 성기에 꿰여 흔들리는 동안 겁도 없이 한 번 더 하자고 조른 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시윤이 이불 위로 매가리 없이 늘어졌다. 그리고 색색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직 배 속에 든 청호의 성기가 뚜렷한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으나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빼 달라고 말할 힘도 없었다.
청호는 긴 사정을 마치고도 느릿하게 성기를 움직이며 후희를 즐겼다. 그가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벌어진 구멍 틈으로 삐직삐직 정액이 새어 나왔다. 시윤은 끙끙 앓는 신음을 흘리면서도 그것을 방관했다.
청호가 통조림 시금치처럼 늘어진 시윤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눈도, 코도, 입술도 빨갛고. 속눈썹에는 미처 떨어지지 못한 눈물이 동그란 보석처럼 매달려 있고. 짓무른 눈가는 진분홍빛이고. 빠끔 벌어진 입 속에는 촉촉한 혀가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고.
그걸 보고 있으니 자연히 아랫도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시윤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이 차올랐다.
“왜, 왜, 왜…….”
청호가 그런 시윤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는 어딘가 초점이 묘하게 빗나간 눈으로 읊조렸다.
“한 번만 더 하자.”
“흐…… 대, 대장님?”
“한 번만. 응?”
청호가 시윤의 여린 턱선을 따라 혀를 놀렸다. 이렇게 예쁜 몸뚱이를 가진 주제에 저도 사내라고 톡 튀어나온 목젖을 잘근잘근 깨물기도 했다.
청호가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시윤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이 어찌나 애처로운지.
“…….”
저런 얼굴로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훌쩍, 눈물을 삼킨 시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씨익, 쓸데없이 멋들어지게 웃은 청호가 조금 빠진 성기를 다시 쑤셔 넣었다.
무려 3차전이었다.
시윤은 반쯤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온갖 액체로 꿉꿉하게 젖은 이불이 불쾌했으나 몸 전체가 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한 상태라 그냥 참기로 했다.
청호는 길고 길었던 정사가 끝난 후 한참 동안 저를 껴안고 있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시윤은 어디 가냐, 언제 올 거냐 묻고 싶었으나 입술을 달싹이는 게 태산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버거워 묻지 못했다.
시윤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옆으로 뒤집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엉켜 있는 옷가지가 보였다. 주머니 여기저기에 쑤셔 놨던 나이프와 탄창, 작은 수류탄들 역시 나동그라진 채였다.
그것을 보고서야 지금 이곳이 전장이라는 걸, 몰살당한 부대의 베이스캠프라는 걸 깨달았다. 찬물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청호는 왜 돌아오지 않지. 에로아스 부대는 어떻게 됐지. 다들 정신은 차렸나. 청호가 얼려 놓은 꽃밭에 도착하긴 했나. 혹, 그들 역시 꽃밭에 심긴 머리처럼 당한 건 아닐까. 걱정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시윤이 홀로그램 바를 찾기 위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허리를 다 펴기도 전에 “아흐흐…….” 꼴사나운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야 했다.
아프다. 홧홧한 뒷구멍과 뻐근한 허리보다, 명치가 갑갑하고 핏줄이 따가웠다. 청호의 힘이 몸속에 얹혀 있었다.
청호가 제 속에 네 번쯤 절정을 토해 냈을 무렵부터였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섹스로 말미암은 육체적 고통과는 전혀 다른 고통이었다. 몇 번 경험했다고 제법 익숙해진 그 고통.
시윤은 그때 깨달았다. 아, 내 능력이 연소하고 있구나. 얼떨결에 A가 됐던 어빌리티가 다시 추락하고 있구나. 역시, 오래가지 못하는 능력이었구나.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씁쓸했다. 청호의 마지막 사정에는 내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 티도 못 냈다. 그가 세상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래도 감내할 수 있는 상태일 때 섹스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또 추잡하게 코피를 줄줄 쏟으며 까무러쳤으리라.
잠시 고통을 곱씹던 시윤이 재차 상체를 일으켰다. 절벽처럼 느껴지는 침대 아래를 가만히 보다가 이를 악물고 다리를 던졌다. 그러고는 관물대를 지지대 삼아 섰다.
목적지는 구석에 놓인 책상이었다. 정확히는 그 책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채혈 기계. 아까 청호에게 보여 주고 냅다 입술이 먹히는 바람에 떨어트린 거였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책상까지 도착하는 데에 무려 3분이나 걸렸다. 열 걸음이 채 안 되는 거린데, 감각도 없는 하반신으로 가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시윤이 그새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철제 의자와 마찰하는 엉덩이가 차갑고, 척추는 으스러지는 듯 아팠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후우…….”
네모난 기계를 든 시윤이 길게 심호흡했다. 무섭다. 엄지를 찌를 때마다 공포가 곱절로 부푼다. 어빌리티가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실로 떨어지면 죽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간혹 오르면 날아갈 듯 좋다가, 서너 시간 후에 다시 손가락을 찌르며 다시 공포에 침몰한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시윤이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내일 아침까지라도 미루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장 새벽에 어떤 적이 어떻게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청호가 또 얼마나 많은 힘을 쓸 줄 알고.
후우, 후우, 몇 번이나 숨을 고르던 시윤이 바늘에다 엄지를 쑤셨다. 따끔한 통각이 느껴지고 기계가 옅게 진동했다.
시윤의 오른쪽 다리가 달달달 방정맞게 떨렸다. 손톱도 씹었다. 결과가 나오는 데는 늘 그랬듯,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B-]
“…….”
반짝하고 떠오른 홀로그램에 시윤이 탄식했다. B다.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C나 D를 예상했던 터라. 이 정도면 청호와 포옹까지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시윤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계를 내려놓은 시윤이 이번엔 홀로그램 바를 찾아 들었다. 알렌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막 그의 이름을 찾아 누르는데, 펄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막사 천막이 들썩거렸다.
히익, 기겁한 시윤이 벌떡 일어났다. 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따라 주질 못했다. 시야가 기우뚱, 하더니 몸이 사선으로 넘어졌다.
“어어…….”
시윤이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는데, 등 뒤로 단단한 공기가 느껴졌다. 군용기에서 하늘로 뛰어내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끌려갔다.
“왜 일어나 있어.”
종착지는 바람기를 담뿍 묻힌 청호 앞이었다. 그가 시윤을 조심히 안아 들었다.
“아, 대장님이셨구나…….”
시윤이 몽중을 헤매듯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도와 동시에 잊고 있던 고통이 고개를 내밀었다. 간신히 신음은 삼켰는데, 구겨지는 미간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아파?”
청호의 미간이 덩달아 구겨졌다. 차마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시윤이 애매하게 웃었다.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시윤을 곱게 침대 위에 내려다 놓았다.
시윤이 청호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수한 물건들이 공중에 동동 떠 있었다. 시윤을 안기 직전, 가지고 온 것들을 죄 던져 버린 모양이었다. 비상식량, 진통제, 연고, 돌돌 말린 새 시트와 담요, 하얀 수건, 버너와 코펠 따위가 원을 그리듯 움직였다.
급한 대로 새 담요만 덮어 준 청호가 곧장 진통제를 내밀었다. 구석에 쌓여 있던 500밀리리터짜리 물통 역시 둥둥 날아왔다. 시윤이 짧게 감사를 전하고 알약 두 개를 꿀꺽 삼켰다. 내내 신음을 내지른 목구멍은 그 알약조차 버거워했다.
약을 먹고 나니 청호가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을 내밀었다. 이런저런 액체로 끈적한 몸을 닦으라는 뜻 같았다. 시윤이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그것을 받았다.
청호 앞에서 사타구니를 닦자니 좀 부끄러운데, 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행히 그가 뒤를 돌았다. 시윤이 몸을 닦는 동안 청호는 막사 가운데에 작은 버너를 설치하고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수프 가루를 넣고, 수분기가 없는 빵을 꺼내고, 짠 치즈를 태워 녹였다.
시윤이 바쁘게 움직이는 너른 등을 보며 물었다.
“이것들 찾아오느라 늦으신 겁니까? 안 오셔서 걱정했어요.”
“……어? 뭐, ……그렇지.”
어딘가 여백이 많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시윤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 저든 그가 사지 멀쩡히 돌아왔으니 다 괜찮았다.
청호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수프를 휘저었다. 사실 생필품만 찾아온 건 아니었다. 대개 베이스캠프는 부대에 따라 크기만 다르지 배치나 수납 등은 비슷했다. 마음만 먹으면 5분 이내에 원하는 모든 걸 찾아올 수 있었다.
물론, 청호처럼 중간에 헛짓을 하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수 있다. 예를 들면 텅 빈 샤워실에서 시윤을 떠올리며 자위를 하거나, 방금 끝낸 섹스를 되뇌며 군침을 삼키거나, 지쳐서 해롱해롱하는 시윤에게 한 번만 더 하자고 조를까, 말까, 고민하거나 등등.
이건 시윤이 알면 저를 짐승 보듯 할 게 뻔하니 함구하기로 하자.
청호는 간이 테이블 위에 김이 폴폴 오르는 수프와 따뜻하게 데워 속에 치즈를 넣은 빵, 그리고 가공 초콜릿을 녹여 만든 핫초코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수저와 포크도 열 맞춰 놨다. 그리고 테이블째로 침대에 착 붙였다. 시윤이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손이 닿을 수 있도록.
그런 청호의 배려에 익숙한 시윤이 꼬물꼬물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허기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닌데, 식사 대용 알약도 먹었는데 이상하게 배가 고팠다. 하긴. 그렇게 격렬하게 몸을 흔들고 땀을 뺐으니 고프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시윤이 수프를 떠 호호 바람을 불어 식힌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씹을 것도 없는데 우물우물 볼을 움직였다. 맞은편에 앉은 청호가 그런 시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몇 번 수프를 떠먹은 시윤이 청호에게 물었다.
“에로아스 부대는 괜찮을까요?”
“응. 꽃밭에 무사히 도착했대.”
“아, 다행입니다.”
다들 괜찮구나. 불편하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빌리티도 아직 B급이고, 에로아스 부대는 무사하고. 모든 게 평화로웠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듯이 아픈 제 몸뚱이만 빼면.
시윤은 바지런히 수저를 움직였다. 그러다 시야에 자꾸 뭐가 거슬려 움직임을 멈췄다. 다름 아닌 제 손목이었다. 정확히는, 손목에 묻어 있는 청호의 입술 자국.
시윤이 손목 안쪽에 피어난 붉은 울혈을 따라 자신의 팔과 팔뚝, 가슴과 배, 사타구니와 발끝까지 훑어봤다.
“…….”
아래고 위고 전신이 온통 청호의 입술 자국으로 가득했다.
시윤은 말을 잃었다. 청호 역시 그랬다. 그가 봐도 시윤의 작약한 몸을 뒤덮은 제 잇자국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
청호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이 상황에서는 제가 무엇을 한다 해도 죄인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입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시윤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언급해 봐야 부끄러움만 커질 것 같아서. 청호가 어떻게 허리를 움직이며 어떤 표정으로, 어떤 눈동자로 제 팔을 씹어 댔는지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그 이유는 모르지만, 대충 가늠하기로서니 제가 버거운 쾌감을 견디기 위해 그의 팔뚝을 쥐어뜯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설마 저를 진짜 고기처럼 뜯어 먹고 싶었던 건 아니겠지.
시윤은 만개한 붉은 자국들을 애써 무시하며 식사를 이어 갔다. 그마저도 목 넘김이 거칠어 많이 먹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핫초코를 홀짝였다. 빠른 속도로 식사를 끝낸 청호 역시 핫초코 잔을 들었다.
허나 한 모금 마시더니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늘 밍밍한 차만 마시다 달고 뻑뻑한 액체를 마시니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시윤이 작게 킥킥거렸다. 그러다 손등으로 벅벅 눈을 비볐다. 어찌나 대차게 울어 댔는지, 눈두덩은 무겁고 눈알은 따가웠다.
“졸려?”
청호가 물었다.
“네, 조금.”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
“그래도 전장인데 잠을 자기가……. 다른 병사들은 사체 수습하느라 바쁠 텐데요.”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걔들은 종일 해롱거리다가 이제야 할 일을 하는 거고. 너는 할 일 끝났으니까 자도 돼. 해 뜨면 깨워 줄게. 어차피 밤에 움직여 봐야 좋을 거 없어.”
“대장님은요?”
“나는 괜찮아. 네 덕에 방금 태어난 것처럼 컨디션이 좋거든.”
청호가 보란 듯이 어깨를 폈다. 그의 말마따나 얼굴에 반질반질 윤이 흘렀다. 항상 굳어 있던 표정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그 모습에 시윤이 다 기분이 좋았다. 그의 편안함이 저로부터 말미암았다 생각하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와 동시에 몸이 나른해졌다. 그래.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 두어 시간 눈 붙일 자격은 있지. 그런 알량한 생각도 들었다.
“그럼…… 잠깐만 누울까요?”
턱을 안으로 집어넣은 시윤이 은근히 물었다. 청호가 그러라며 손수 시트를 갈아 줬다.
시윤이 끙,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웠다. 일반 막사의 침대는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보드랍지도 않고, 푹신하지도 않고. 꼭 짚더미 위에 천을 깔고 자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몸은 더없이 피곤한데 잠들 수가 없었다.
시윤이 흐리멍덩한 시야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철제 의자에 앉아 그를 보고 있던 청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잠이 안 와?”
“네. 분명 졸렸는데.”
“카밀러 같은 걸 마시면 좋은데. 쿤 부대에는 차 마시는 놈이 없는 모양이야. 티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더라고.”
청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툴툴거렸다.
“아무래도 티백은 일반 병사가 사기엔 가격이 높으니까요.”
시윤이 잔잔한 음성으로 그를 달랬다. 먹는 것도 알약으로 때우는 사람이 대부분인 현세에 차는 고급 취미였다. 시중에 유통되는 것도 많지 않아 돈이 있대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청호쯤 되니까 차를 ‘골라’ 먹는 거지.
모건이 그랬다. 청호는 돈이 아주아주 많다고. 유서 깊은 ‘너희’ 집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많댔다. 뭐라더라. 국가가 억 소리 나게 돈을 입금해 주는데, 쓸 시간도 없고 쓰는 방법도 몰라서 0이 엄청나게 불어 있단다.
시윤이 옆에서 지켜본 결과, 그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청호가 사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찻잎 혹은 티백이 다였다.
“이런 말 하면 조금…… 건방집니다만…….”
“뭔데?”
“제가 가진 고정관념으로 말미암아, 대장님이 차를 좋아하실 거라곤 상상도 못 했거든요.”
시윤이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근데 꼭 물어보고 싶었다. 시종일관 무심한 그가 하필 차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분명 있을 듯해서.
청호는 잠시 침묵했다. 비스듬히 턱을 괸 그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사색에 잠긴 얼굴은 아주 먼 과거를 되짚는 것 같기도 했고,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되뇌기 위해 시간을 유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가…… 좋아했어.”
청호의 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시윤이 숨을 거꾸로 삼켰다.
“……예?”
“엄마가 좋아했다고.”
“대장님…… 어머니께서요?”
“응.”
시윤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크게 움직였다. 이불 아래에 숨어 있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꼼지락 부산을 떨었다.
설마 여기서 그 존재가 등장할 줄이야. 괜히 아픈 곳을 들쑤신 것 같아 송구했다. 시윤이 데구루루 눈알을 굴리며 어떻게 말머리를 돌리나 고민하는데, 청호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묻지 않은 설명을 더했다.
“어릴 땐 포스에서 안 살았거든. 지하 갱 같은 곳에서 모여 살았어. 궁핍했었지. 엄마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찻잎 같은 걸 구하면 그걸 말려 차를 내려 주곤 했어. 먹다 남은 과일도 말려서 타 먹었고. 식량이 없으면 수십 번씩 내렸던 걸 또 내려 먹었어. 밍밍하고, 배도 안 차고. 그땐 되게 싫어했었는데 엄마는 엄청 좋아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냥 그런 척을 한 거겠지.”
“잠깐, 잠깐만요. 대장님이 ‘방랑자’셨다고요?”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청호가 ‘방랑자’였다니.
현재 지구에서 인간의 ‘나라’는 포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포스의 국민인 건 아니었다.
핵전쟁으로 지구는 망가졌지만, 크기는 여전히 거대했다. 이동 수단이 없으면 끝과 끝으로 이동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직 포스로 오는 중인 사람도 있었고, 포스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크고 작은 무리로 모여 사는데, 클롭스를 피해 산기슭에 숨어 살기도 하고, 방사능을 피할 도리가 없어 여전히 땅속에 살기도 하고, 또는 수 세기 전의 원주민처럼 살기도 하고, 폐허가 된 도시를 전전하며 간신히 목숨 줄만 이어 가기도 했다.
포스에서는 그들을 통틀어 ‘방랑자’라 칭했다.
포스는 매일 적으면 두엇에서, 많으면 수백 명의 방랑자를 구출했다. 그런데도 한참 모자랐다. 바퀴벌레만큼이나 명줄이 긴 인간은 지구 곳곳에 퍼져 있었고, 그들만의 또 다른 사상과 문화로 점철되어 융화가 어려웠다. 포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들을 전부 구해 온전한 인간의 나라를 구축하는 거였다.
근데 청호가 그 방랑자 출신이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소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는 거지만, 정말 청호와 관련한 소문 중 진실은 몇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과거처럼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이 없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헛소문이 자꾸 부푸는 모양이다.
충격에 턱을 떨어트린 시윤을 아는지 모르는지, 청호가 심드렁히 말을 덧붙였다.
“그랬지. 포스에 잡혀 오기 전까지는.”
“……잡혀, 잡혀 오셨다니, 그게 무슨…….”
시윤은 이제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잡혀 왔다고? 제 발로 온 게 아니라? 구조된 게 아니라? 혹시 단어 선택을 잘못한 걸까. 가끔 엉뚱한 말을 하는 그이니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열 살인가 열한 살인가, 입마개에 손까지 묶여서 왔었으니까 잡혀 온 게 맞아.”
“…….”
시윤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왜 그를 속박했지. 클롭스에게 어머니를 잃은 그가 폭주라도 했나. 이 역시 소문이긴 하지만,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독보적인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사망에 충격받고 갱에 있던 방랑자들을 몰살한 걸까. 그래서 포스가 어쩔 수 없이 그를 속박해 끌고 왔나.
시윤은 본능적으로 포스의 상황을 대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여태 그가 알던 포스는 방랑자를 ‘잡아’ 올 리 없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생존자에게 너그럽고 친절한데. 늘 그랬는데. 어째서 청호를 짐승 대하듯 했을까.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었다.
시윤이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무의미한 시선을 허공에 흩뿌리고 있으니 청호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케케묵은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포스가 과거 국가들의 인공위성을 해킹해서 쓰고 있는 건 알지?”
“예. 그것으로 방사능 수치도 체크하고, 클롭스 본거지도 파악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에스퍼나 가이드를 찾기도 해.”
“……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클롭스에 비해 에스퍼와 가이드는 많지 않으니까, 방랑자 중에서도 능력자가 있다면 얼른 데려와서 전쟁에 참여시켜야 하거든.”
“에스퍼와 가이드 어빌리티를 어떻게…… 파악합니까? 방사능처럼 방사선이 나온답니까?”
“글쎄. 모건은 아는 것 같던데, 죽어도 말을 안 해 주더군.”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모건이 눈앞에 있으면 목이라도 조를 기세였다. 시윤이 덩달아 눈살을 구겼다. 새로운 사실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알게 되어 정수리가 다 지끈거렸다.
“아무튼, 엄청 추웠던 날이었는데, 포스 병사들이 나를 찾아왔어. 덫에 걸린 다람쥐를 쥐고 있던 나에게 총부터 칼까지 온갖 무기를 다 들이밀더군. 그때 나는 작은 불씨도 간신히 틔우는 열 살짜리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말이야.”
“…….”
“그래도 회유는 말로 했어. 자기들을 따라가면 음식도 주고 집도 주겠다고.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지. 날 찾아왔던 이들은 분명 두 팔에 두 다리가 달린 인간이었고, 입은 옷도 좋아 보였고, 들고 있는 무기도 반짝반짝한 게, 그 정도면 땅에 숨어 살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었거든.”
“…….”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아팠는데, 엄마를 치료해 주겠다고 했어.”
“어머니가 아프셨다고요?”
“응. 그렇게 큰 병은 아니었어. 갱 주위에 클롭스가 많았는데, 그중 하나의 손톱에 종아리가 긁혔었어. 근데 약이 없으니 소독도 못 하고, 치료도 못 해서 다리가 문드러져 갔거든.”
“…….”
“그래도 합병증이 오기 전이어서 항생제를 투여하고 그 부분만 절단하면 금세 나을 정도였어. 갱에 같이 살던 사람들은 반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돼서, 그들에 비하면 아주 괜찮은 상태였지.”
“…….”
“엄마도 그 제안을 좋아했어. 더군다나 자비롭게도, 갱에 살던 모든 사람을 구해 주겠다더군. 거절할 이유가 없었어. 우리는 사는 것에 지쳐 있었거든. 엄마를 제외하곤 다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냥 늘어져서 죽는 순간만 기다렸던 터라. 다들 비쩍 말라서 신음만 흘려 대는 산송장이었지.”
청호가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큭큭거렸다. 그러나 시윤은 따라 웃지 못했다.
“근데 왜 대장님을 속박했답니까?”
“그러게. 제 발로 가겠다고 했는데도 입마개에 손이랑 발까지 묶더라고. 근데 그 덕에 어렴풋이 깨달았어. 아, 나한테 이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큼의 힘이 있구나. 그런 거.”
청호가 재차 조소했다. 그가 다 식어 빠진 핫초코를 들여다봤다. 일렁이는 검은 액체 위로 비쩍 마른 얼굴 하나가 비쳤다. 냄새나고, 좁고, 눅눅한 데다 춥기까지 한 구덩이에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얼굴이. 피골이 상접한데도 아름답게만 보이던 얼굴이.
청호가 티스푼으로 핫초코를 마구 휘저었다. 얼굴이 사라졌다.
“포스는 좋았어. 새로 지은 건물에, 빵도 있었고 물도 있었지. 거기다 사람들을 지키는 군인에 전투기에 무기에. 나라라고 명명되기에 부족함이 없더군. 사람들도 많았고 하나같이 바쁘게 움직였어. 갱에 있던 무기력한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지. 그들은 삶이라는 걸 살고 있었거든.”
“…….”
“나는 신이 났어. 더는 먹을 걱정을 안 해도 되니까. 나뭇잎 따위나 우려먹는 생활에서, 방사능에 피폭된 들짐승을 먹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인간다운 생활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게 살 수 있겠구나 싶었지.”
“…….”
“한동안은 병원에 있었어. 피폭 상태, 건강, 전염병 유무 같은 걸 검사하더군. 지극히 당연한 거라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어. 하물며 항상 약에 굶주려 있던 터라 항생제든 진통제든 주사만 보면 감사하다고 고개를 조아렸다니까. 그리고 나는 그 병원 안에서 열두 살이 됐지.”
“…….”
“사지 멀쩡한 사람들은 퇴원하고 사회에 투입됐어. 공장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 밭으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 에스퍼와 가이드는 신병 교육을 받았지. 우리 엄마는 다리 때문에 입원했고.”
“대장님은 바로 입대하신 겁니까?”
“응. 그리고 이틀 뒤에 출정했어.”
“……예?”
시윤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청호가 일찍이 입대한 건 알고 있지만, 방랑자 신분을 벗어난 지 이틀 만에 전장에 합류했을 줄은 몰랐다.
포스의 국민이 된 방랑자는 그의 말마따나 잠시 병원에 있다가, 한 달에서 세 달 정도 사회 적응 단계를 가졌다. 법과 규칙 없이 살아온 자들이니 어느 정도의 교육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우리를 돌봐 주는 가이아의 전지전능함을 배운다. 다음으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도둑질하면 안 된다, 군인은 존중되어야 한다, 출정이 아닌 이상 포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일한 만큼 돈을 번다, 학교는 나이와 관련 없이 항상 열려 있다, 열여섯 살이 되면 모두 도어 검사를 받아야 하며, 에스퍼와 가이드는 반드시 입대해야 한다, 같은 것들을 배웠다.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 후에야 입대가 가능했다. 그마저도 도어 검사 적정 나이인 열여섯 살 미만은 그냥 ‘어린아이’의 신분으로 살았다. 놀이터에 모여 놀고, 학교를 다니고, 공을 찬단 말이다.
근데 청호는 왜……. 십수 년 전이라 프로세스가 달랐나.
시윤의 만면에 혼란이 넘실거리는데, 청호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도어 검사에서 S가 떴거든.”
“열, 열두 살 때요?”
“어. 연구동에 있던 반은 좋아하고 반은 괴물 보듯 하더군. S가 뭔지도 몰랐지만, 나쁘지 않았어. 약한 것보다야 강한 게 나으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일반 병동에 있던 엄마가 VIP실로 이동됐어. 극진한 치료를 받았지. 주위에선 다 내 덕이라고 했어. 내가 강하니까, 국가가 보상 차원에서 엄마를 돌봐 주는 거라고.”
“아…….”
“그건 꽤 큰 동기였지. 더 강해져야겠구나. 열심히 싸워야겠구나.”
청호가 그때를 회상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산기슭이나 헤집고 다니던 저에게 그런 책임감은 제법 멋진 훈장이었다. 젊은 모건이 제 능력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는데, 그 역시 멋있었다. 당시에는 제가 세상의 주인공 같았다.
등신 같은 생각이었지.
청호가 피식 조소했다. 그리고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시윤을 바라봤다.
“근데 내가 말했었지. 나는 전장이 싫었다고.”
“예. 아무래도 열두 살 아이가 버티기엔……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니까요.”
“그래. 그리고 무엇보다 클롭스가 무서웠어. 커다란 덩치와 이빨로 사람을 깔아뭉개고, 뜯어 먹고, 뼈를 쪽쪽거리면서 빨아 먹는 걸 갱에 살면서 너무 많이 봐 왔거든. 그러니 호기로이 마음을 먹고 나갔다 한들, 뭘 제대로 했겠어?”
“…….”
“그래서 나는 첫 전투에서도, 두 번째, 세 번째 전투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숨기에 급급했고, 도망칠 틈만 찾아다녔고, 얼른 포스로 돌아가 엄마 품에 안겨 징징거리고 싶었지.”
시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숨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역시 그랬고, 여전히 그러니까. 사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전장에서 그런 마음이 아닌 이가 없으리라.
“그러다 하루는 너무 무서워서 눈 까뒤집고 기절했는데, 정신 차리니 클롭스는 물론 병사들까지 다 죽어 있더군. 움직이는 거라곤 시체 더미 위에서 꿈틀거리는 화마뿐이었어.”
“…….”
참혹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시윤이 입술을 겹쳐 물었다. 지금 상상해도 끔찍한데, 그걸 마주한 열두 살의 청호는 어땠을까. 제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을 터였다.
청호가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프게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아마 포스는 당황했을 거야. 강할 거라 생각하고 데리고 왔는데. S급이라 기대했는데. 클롭스를 먼지 쓸 듯 쓸어 오길 바랐는데. 애꿎은 부대 하나를 몰살시켜 버렸으니 말이야. 그냥 병사 몇몇이 내 힘에 휩쓸려 죽을 수도 있겠다, 수준의 예상만 했지 부대 전체를 죽일 거라곤 상상이나 했겠어?”
“…….”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병적으로 전장에 나가기를 거부했어. 싫다고 건물을 부수기도 했고, 격납고를 불태우기도 했지.”
“…….”
“근데 말이야, 윗대가리 중 몇몇은 그저 활자로만 명명되던 내 능력이 실재한다는 걸 알고 흥분한 것 같더군. 부대를 몰살하고, 건물과 격납고를 부수는 거로 내 힘을 확인한 거지.”
“네? 어째서 그런…….”
시윤의 눈동자에 혐오가 차올랐다. 아무리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 죽음에 고통받는 이가 있는데. 대체 누가……. 시윤이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의 친우들을 되뇌는 거였다.
분명 원수나 그 언저리에 있는 계급일 것이다. 누가 그런 비인간적인 명령을 거듭했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특정되는 이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봐 왔던 그들은 하나같이 인자하고 친절했으니까.
시윤이 해답 없는 고민을 이어 가는 동안, 청호는 허공으로 시선을 띄웠다.
“근데, 엄마가 내 등을 떠밀더라고. 가이아가 나에게 그런 힘을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사람들을 지켜 주라고. 아직 구덩이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
“그래서 전장에 나갔어. 내 세상은 엄마가 전부였고, 엄마로 시작해서 엄마로 끝났거든. 그렇게 나간 전장에서 다행히 병사는 죽이지 않았지. 그렇다고 클롭스를 죽인 것도 아니었어. 난 여전히 겁쟁이였거든. 괜히 힘썼다가 또 죄 없는 이들이 다치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고.”
“…….”
“그렇게 전장에서 돌아와 당연히 엄마를 먼저 찾아갔어. 그날이 퇴원하는 날이었거든. 근데 병실에 아무도 없는 거야. 이따금 마주쳤던 간호사가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어.”
“…….”
시윤은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 후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호의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 국민이 알고 있었다.
“엄마가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일찍 퇴원하고 나갔대. 이상했어. 그럴 리가 없었거든. 내가 돌아오면 같이 나가기로 했는데. 갈 곳도 없는 사람이 어딜 갔지.”
“…….”
“온갖 군데를 다 쏘다녔어.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엄마 못 봤냐고 물어봤지. 근데 하나같이 모른다고 하더라고. 발바닥이 터질 때쯤 되어서 병실로 다시 돌아왔어. 근데 엄마가 있더라고.”
“대장님.”
“사지가 갈기갈기 찢긴 엄마가 말이야.”
“……대장님.”
“나름 전장에서 구르면서 별별 시체를 다 봤는데. 우리 엄마만큼 찢긴 시체는 한 번도 못 봤어.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꿈같더라고. 기이할 정도로 말끔한 엄마 얼굴이 아니었으면, 그냥 고깃덩인 줄 알았을 거야.”
“…….”
“엄마 시체를 가져온 군인이 그러더라. 엄마가 규칙을 무시하고 포스 바깥에 나갔다가 클롭스를 만났다고. 사체도 간신히 찾았다고. 병실에 오래 있다 보니 답답해서 나간 것 같다고.”
그 말에 시윤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이상한 말이었다. 포스 바깥에 나갔다가 클롭스를 만나다니. 군인도 아니었던 청호의 어머니가 포스 바깥으로 어떻게 나갔단 말인가.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계획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시윤이 잘 알았다.
시윤이 의문을 알려 주려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호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선수를 쳤다.
“열두 살의 나는 등신같이 그걸 믿었어. 심지어 스무 살 때까지 믿고 있었지. 클롭스가 지독하게 싫더군. 그래서 전장에서 살았어. 클롭스를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발악했지. 포스가 그토록 원하던 살인귀가 된 거야.”
“…….”
“근데 어느 날, 출정 갔다가 군용기를 타고 복귀하는데 포스 벽이 내려다보이더라고. 20년 전과 다름없이 높고, 두꺼운 회색 벽 말이야. 그때 문득 의문이 들었어. 다리 하나가 없다시피 한 엄마가 저 벽을 어떻게 넘었는지. 출입문은 병원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더군다나 수십의 병사가 지키고 있는데, 환자복 차림의 엄마가 대체 거길 어떻게 통과했는지.”
“…….”
“그때 깨달았어.”
청호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잖아도 커다란 그의 가슴팍이 더 우람하게 부풀었다. 그러고는 음절 하나하나를 짓씹듯 말했다.
“아, 이 개새끼들이 나를 속였구나.”
그 목소리가 어찌나 분노로 점철되어 있는지. 시윤은 제가 죄를 지은 것처럼 목을 움츠려야 했다. 그러다 눈을 번뜩이며 청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범인은, 범인은 찾으셨어요? 일을 보아하니 한둘이 관련된 게 아닐 것 같은데요.”
그가 나열한 모든 일이 포스 안에서 일어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근데 피해자임과 동시에 증인인 청호가 버젓이 눈앞에 있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때를 기다렸어. 스무 살의 나는 힘만 셌지, 그 일을 파헤칠 권위도, 능력도, 부릴 수 있는 수족도 없었거든. 더 강해져야 했어. 그놈이 누구든 간에 벌할 수 있도록.”
청호가 시윤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이불도 올려 주고, 머리칼도 쓰다듬어 줬다. 오늘 일이 많았는데. 쉬어야 하는데. 괜히 컴컴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닌가, 염려가 됐다.
“그리고 스물네 살. 대령이 되고부터 범인을 찾기 시작했어. 쉬운 일은 아니었어. 시간도 많이 흘렀고, 증거는 없었고, 당시에 현역으로 있던 병사들 반은 전장에서 죽었고. 까마득했지.”
“…….”
“그래도 결국엔 찾았어. 엄마가 입원해 있을 당시 병원을 지키던 대위였는데, 상부 명령으로 엄마를 VIP실에서 병원 지하로 옮겼다더군. 그때는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었대.”
“지……하요?”
“그래. 엄마는 병원 지하에서 죽었어. 클롭스가 아니라, 인간한테. 클롭스에게 당한 것처럼 보이려고 부러 엄하게 팔다리를 뜯어내고 난도질했겠지.”
시윤이 꾹 입술을 겹쳐 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구역질할 것 같았다. 시윤은 여태 부모님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고, 형들도 그렇고, 제가 갓난쟁이일 때부터 수시로 전장에 나갔던 터라 그런 것에 무뎠다. 주위에서 하도 대단한 가족이라 칭송하니 웬만해선 다치거나 죽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 같다. 머리가 제법 컸을 땐 부모님이 아예 전장에서 은퇴하셨고.
그러니 청호의 말이 지나치게 크게 다가왔다. 제 엄마가, 또는 가족이 그리 끔찍하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면 심장이 뒤틀리고 목구멍이 쪼그라들었다.
저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청호처럼 독하게 힘을 키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가이아를 비난하다 제 손으로 숨통을 끊었겠지.
시윤이 벅벅 눈두덩을 문질렀다. 눈알이 따끔거릴 정도로 피곤한데 이대로 잘 순 없었다.
“그 병사는 어찌 됐습니까? 추후 증인으로 재판에 세우려면 잘 감시해야 할 텐데요.”
“글쎄…….”
청호가 시선을 허공에 띄웠다.
“…….”
시윤은 그 행동에서 충분히 답을 유출할 수 있었다. 죽였구나. 언젠가 사이먼의 혀를 뽑았을 때처럼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죽여 버렸구나.
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참아 왔고, 그렇게 오랜 시간 괴로워했는데 죽이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 지금까지 찾은 공범은 그 병사가 답니까?”
시윤이 수완 좋게 말을 돌렸다.
“아니. 하나 찾으면 다음부터는 쉬워. 타고 올라가면 줄줄이 끌려 오지. 명령을 내린 이가 누구냐. 그때 엄마를 끌고 갔던 지하에 누가 있었냐. 그것만으로도 열댓이 넘었어.”
“……주동자를 찾은 겁니까?”
“아직. 근데 얼마 안 남았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청호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무릎을 문질렀다. 잔뜩 구겨졌던 시윤의 미간이 한결 느슨해졌다.
“정말 다행입니다.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런 놈들은 포스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어떻게 대장님을 이용하기 위해 가족을 죽인답니까.”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
청호가 피식 웃었다.
“자, 내 옛날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인제 그만 자.”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아니면 한 번 더 할 거라고 익살맞게 콧잔등을 찡그렸다. 기겁한 시윤이 얼른 눈을 감았다. 장난임을 알지만 실로 무서웠다.
청호가 나지막이 웃으며 시윤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그러곤 퍽 어색한 폼으로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려 줬다. 언젠가 제 엄마가 이리 해 주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윤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잠이 올 리 없었다. 꾸물꾸물 몸을 돌린 시윤이 청호를 바라봤다.
“근데요, 대장님.”
“응.”
“대장님은 포스가 밉지 않으십니까?”
“무슨 뜻이야.”
“포스는 함부로 대장님을 끌고 왔고, 어머니를 살해했고, 여태까지 뻔뻔하게 대장님의 힘을 빌리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포스를 위해 싸우시는 이유가 뭡니까? 쉬지 않고 출정하시잖아요.”
꽤 심오한 질문이었다. 청호가 으음, 목울대를 움직이며 고민했다. 사실 답은 진즉 나왔는데, 내놓기가 영 낯간지러웠다.
“나는 포스를 위해 싸우지 않아.”
“……네?”
“굳이 따지면 포스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싸우지.”
“…….”
청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윤이 턱을 안으로 말았다. 청호의 가족들이라……. 혹 아버지가 살아 있나. 소문으로는 청호가 아주 어릴 때 죽었다고 들었는데. 오늘 그의 이야기에도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았다. 혹 형제가 있던가.
시윤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청호가 그런 시윤의 볼을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내 병사의 가족들.”
“아…….”
“그리고 아직 포스에 도착하지 못한 ‘방랑자’의 가족들.”
“…….”
“포스가 좆같든, 아니든. 어쨌든 클롭스는 적이 맞고, 죽여야 하니까. 엄마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그거였어. 유언은 아니었지만, 유언이라 여기며 살고 있지.”
청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윤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몇 분 전 그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가이아가 나에게 그런 힘을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사람들을 지켜 주라고. 아직 구덩이에 숨어 사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구나. 비로소 이해가 됐다. 나라의 번영을 위해서, 국가에 헌신하기 위해서, 당연히 충성해야 하니까, 전장에서 죽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니까, 따위의 흔하디흔한 이유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멋졌다.
청호의 엄지가 시윤의 아랫입술로 다가왔다. 한참 물고 빨아서 평소보다 더 통통해진 게 참…… 맛깔나 보였다. 청호의 눈동자가 한층 짙어졌다.
“더군다나 널 만나기 전에는 시한부였으니까, 어차피 죽을 거 클롭스를 없애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안 돼요. 이제 제가 있으니까 죽지 마세요.”
시윤이 다급하게 말했다.
“죽으시면 안 됩니다. 범인 찾으면 출정도 조금 줄이세요. 대장님이 아무리 강하셔도 휴식은 필요하니까요.”
“출정 안 하면 뭐 해? 나는 전장이 편해.”
“음…… 그냥…… 음…… 저랑 같이 차 마시고, 밥 먹고, 책도 읽고, 체스도 두고, 에펠 탑도 하나 더 만들어 주시고, 이, 이렇게 세, 세, 섹스도 하고, 어, 또…… 아무튼 그렇게 살아요.”
더듬더듬 흘러나온 계획은 제법 구체적이고 알찼다. 청호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묘하게 초점이 탁했다.
“가끔 느끼는 건데.”
“예.”
“널 보고 있으면 기분 좋은 살의가 솟구쳐.”
“……예?”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살의가 솟구치는 것만으로도 경악할 판에, 기분 좋은 살의는 또 뭔가. 청호에게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었던가. 현세에 사이코패스는 병력으로 이용하기 매우 좋은 성향으로 새로이 정의되고 있으나, 그에게서 전혀 느껴 본 적이 없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뭐든 터트리고 싶고, 부수고 싶고, 움켜쥐고 싶은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자.”
청호가 시윤의 눈 위로 손을 덮었다. 커다란 손이 조막만 한 얼굴을 죄 가렸다. 그 덕에 시윤은 순식간에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잠이 안 옵니다.”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그러자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청호가 그것을 기껍게 바라봤다.
“그래도 자.”
“……명령입니까?”
슬쩍 고개를 뒤틀어 청호의 손아귀를 벗어난 시윤이 쓸데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청호가 실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말을 못 하지.
“아니. 걱정이었어.”
그의 말에 시윤이 배시시 눈을 휘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해사한지. 어두컴컴한 막사에 햇살이 비추는 듯했다.
청호는 시윤을 끊임없이 매만졌다. 목젖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욕구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여린 눈가를 쓰다듬고, 말랑한 볼을 매만지고, 동그란 어깨를 쓸어내렸다가 쭉 뻗은 턱선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귓불이었다. 누가 가위로 싹둑 잘라 놓은 것처럼 갈라진 귓불. 시윤과 하등 어울리지 않는 상처였다. 청호가 그것을 집요하게 조물거렸다. 그러나 비몽사몽인 시윤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네 귓불은?”
청호가 물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물어보고 싶던 거였다. 다만 아직 그럴 관계가 아닌 듯해 참고 있었을 뿐. 근데 오늘이면 물어도 될 것 같았다.
“……예?”
게슴츠레 눈을 뜬 시윤이 되물었다.
“귓불 말이야.”
청호가 그런 시윤을 깨우듯 손톱으로 귓불을 가볍게 짓눌렀다.
“나만큼 우울한 사연이 있을 것 같은데.”
“아…….”
눈을 번쩍 뜬 시윤이 급하게 손으로 귀를 가렸다. 그런다고 상처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리됐다.
당혹으로 물든 시윤의 만면에 청호가 꾹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말해 주기 싫어?”
“아…… 어…….”
“싫으면 안 해도 돼. 아픈 기억을 굳이 까뒤집을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청호는 너그러웠다. 시윤에게 한해서는 늘 그랬다. 시윤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저 역시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됐으니 눈이나 붙이라며 이불을 추켜올렸다.
“…….”
시윤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목구멍이 가시라도 삼킨 듯 따끔따끔했다.
비밀이라는 게 그렇다. 하나를 들었으면, 제 것도 하나 건네줘야 할 것 같았다. 물물 교환처럼 말이다. 그의 치부를 낱낱이 들어 놓고 저는 침묵하면, 그건 공평하지 않았다.
시윤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연거푸 핥았다.
“제, 제 사연은 가해자가 저라서요.”
“…….”
“들으면 실망하실 겁니다.”
“그건 내가 판단할게.”
청호가 비스듬히 머리를 괴고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가족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이야기인데. 청호에게 말해도 되려나. 그래도 괜찮으려나.
사실 말하고 싶었다. 비밀은 덮어 두기만 한다고 가벼워지지 않는다. 왜 세상의 비밀들이 자꾸 수면 밖으로 올라오겠나. 타인의 비밀은 너무 흥미로워 방방곡곡 떠들고 싶고, 내 비밀은 너무 무거워 다른 사람과 함께 들고 싶기 때문이다.
첫 전장의 기분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는 그라면 저를 이해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됐다. 그럴 수도 있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하고 공감해 주지 않을까.
이불 속에 숨긴 손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하던 시윤이 천천히 입을 뗐다.
“나중에,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끝내 부정을 내 놓고야 말았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포용해 줄 가족들에게마저 말하지 않았다는 건, 지은 죄가 그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저는 겁쟁이라, 두려운 게 너무 많았다.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청호도 잃고 싶지 않았다. 물론, 청호의 가이드라는 자리 역시 잃고 싶지 않았다.
제가 이 비밀을 털어놓으면 아마 앞서 나열한 모든 것을 잃게 될 터였다. 그건 싫었다. 제가 아무리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대도, 그것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시윤이 눈을 내리깔았다. 청호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분명 실망할 터였다. 하지만 정말 말할 자신이 없었다.
청호는 잠시간 별다른 말 없이 시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수록 시윤의 등은 동그랗게 굽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꾸지람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청호가 시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그래. 기다릴 수 있어. 말했지? 너 만나서 시간이 많아졌다고.”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그는 연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헌데 어째서인지 더 미안해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청호가 괘념치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시윤이 재차 사과하려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갑자기 청호가 손으로 입을 막아 왔다.
“쉬…….”
“…….”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엔 제가 너무 시끄러웠나, 했다. 그런데 청호의 시선이 제 어깨 너머에 박혀 있었다. 시윤이 눈알을 굴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허나 아무것도 없었다. 차게 식은 수프와 빵 조각 따위가 다였다.
그런데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서늘한 청호의 눈동자가 꼭 맹수의 안광 같았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침묵은 수 초간 이어졌다. 시윤은 청호를 바라보며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색색거리는 호흡조차 사그라들고, 두꺼운 막사 천 밖으로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 정체 모를 동물이 우짖는 소리도 들렸다.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소음이었다. 포스의 벽 가까이에 서 있어도 들을 수 있는 소리들.
그때. 바스락. 마른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뭐가 왔는데.”
청호가 특유의 저음으로 읊조렸다. 시윤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였다. 에로아스 부대는 아닐 것이다. 그들이라면 연락했겠지. 전투 중 언질 없이 다가오는 건 매우 몰상식한 행위였다.
시윤의 입을 가린 손을 거둔 청호가 작게 속삭였다.
“옷 입어.”
“예.”
냉큼 일어난 시윤이 청호가 곱게 의자에 걸어 둔 옷을 찾아 입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지가 욱신거리고 뼈가 조각나는 듯했는데, 너무 긴장하니 아무런 통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쿵쾅쿵쾅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북처럼 귓구멍을 울렸다.
어떤 적일까. 그 꽃밭의 주인이려나. 강하겠지. 쿤 부대와 아돌프 C를 단번에 몰살했으니 분명 보통 적이 아닐 터였다.
시윤이 옷을 입을 동안 청호는 막사 안의 모든 불을 껐다. 달빛도 들어오지 않는 막사가 온통 검어졌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시윤이 청호를 찾아 휘적휘적 팔을 흔들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 나타난 손아귀가 손을 잡아 왔다. 손가락이 얽히고, 손바닥이 틈 없이 맞물렸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내 옆에 붙어 있어.”
“예.”
시윤이 냉큼 그의 곁에 붙어 섰다. 반대 손으로는 어설프게나마 총을 들었다.
막사 구석으로 간 청호가 나이프를 이용해 천막을 손바닥만큼 찢었다. 달빛이 기다랗게 스며들었다. 청호가 그 틈을 통해 기척의 주인을 확인했다.
“…….”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윤은 잠자코 기다렸다. 적이 아직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아니면 실체 없는 귀신이기라도 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청호와 제가 바람 소리를 잘못 들었나. 나도 보고 싶다. 클롭스면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궁금한 게 많았으나 눈치껏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숨소리라도 방해가 될까, 목구멍만 바짝 조이고 있었다.
억눌린 호흡에 가슴이 터지겠다, 싶을 때쯤 청호가 시윤을 끌어 자신의 앞에 놨다. 그리고 천막 틈을 살짝 벌렸다. 직접 보라는 뜻 같았다.
까치발을 든 시윤이 푸른 달빛이 뿜어지는 바깥세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제가 지금 현실을 보고 있는 건지, 또 환각에 취해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쨍한 달빛 아래에 수십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익숙한 포스 전투복에 총을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군인 같았다. 그렇다고 에로아스 부대는 아니었다. 달을 등진 얼굴에 그림자가 져 정체를 알 순 없었지만, 녹색으로 마감된 총구, 어깨에 붙은 녹색 견장으로 말미암아…… 쿤 부대 같았다.
그러나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쿤 부대는 모두 죽었는데. 그들의 목이 꽃밭에 묻혀 있었는데. 설마 살아남은 이들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인원수가 제법 된다. 저들이 진짜 생존자라면 두 팔 벌리고 환영할 일이지만 어째 등줄기에 자꾸 소름이 돋아났다.
시윤은 몇 번이고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청호가 어째서 한참 동안 바깥을 보고 있었는지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설마 쿤…… 부대는 아니겠죠?”
“아니어야 하는데. 맞는 것 같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에스퍼의 어빌리티는 수백, 수천 가지 종류로 나뉜다. 그러나 시윤이 아는 선에서, 부활이나 환생이라는 절대적인 어빌리티는 없었다. 그건 신의 영역이니까.
그러니 쿤 부대가 부활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지. 우리가 봤던 머리가 가짜거나, 아니면…… 저게 가짜거나.”
청호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부대를 응시했다. 그들은 시윤과 청호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처럼 이 막사를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적인지 아군인지부터 알아야겠군.”
말을 마친 청호가 그대로 막사 한쪽 천막을 통째로 확 걷었다. 푸드덕, 마치 독수리가 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깥의 찬 바람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쿤 부대의 고개가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청호와 시윤을 향했다. 찰나, 정적이 흘렀다. 움직이는 거라곤 대차게 부는 바람과 묵직하게 펄럭이는 깃발뿐이었다.
쿤 부대의 총구가 일제히 청호와 시윤을 향한 건 몇 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윤 역시 총구를 그들에게 조준하려 했지만, 쿤 부대의 발사가 더 빨랐다. 총구에서 동시에 불꽃이 튀었다. 총소리가 하늘을 찢을 듯 요란하게 울렸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전장에서 죽는 건 예상했는데, 같은 편의 총에 맞아 죽을 줄은 몰랐다.
“…….”
그런데 어째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가 뚫려 죽으면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나. 그건 좀 다행이다. 이마와 복부에 구멍이 숭숭 나 피가 흐르는 걸 느끼다 죽으면 몹시 끔찍할 것 같았다.
이제 눈을 뜨면 지옥이 펼쳐져 있을까, 천국이 펼쳐져 있을까. 아마 지옥이겠지. 시윤이 침울한 낯으로 찔끔 한쪽 눈만 떴다. 헌데 전과 다름없는 풍경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굳이 다른 걸 꼽자면,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총알이 허공에 멈춰 있다는 거였다.
쏟아지다 말고 얼어 버린 총알의 한 가운데에는 청호가 우직하니 서 있었다.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그래, 옆에 있던 사람이 다른 이도 아닌 청호였는데. 고작 총알 따위에 죽을 걱정을 했다. 민망해서 다른 이에겐 말도 못 할 일이었다.
“적인 것 같지?”
청호가 휙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총알들이 소나기처럼 한쪽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예.”
시윤이 나지막이 긍정했다.
쿤 부대는 끊임없이 총을 쐈다. 탕, 탕, 탕탕, 탕! 타타타, 타타타타……. 수천 개의 총알이 쏟아졌으나 어느 하나 청호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청호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시윤과 진득하게 몸을 섞은 덕에 컨디션이 정점에 이르러 있는지라 이런 건 공격 축에도 못 꼈다.
근데 이상하지. 총이 안 통하는 걸 알면 다른 공격으로 부딪쳐 와야지, 왜 총만 죽어라 난사할까. 쿤 부대 역시 에스퍼와 가이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말인즉슨 총이 아니더라도 공격할 방도가 많단 뜻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총알만 막아 내던 청호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가 안으로 당겼다. 그러자 가까이 있던 소위 병사 하나가 질질 끌려왔다. 청호가 검지를 까딱이자 그가 들고 있던 총기가 붕, 뒤로 날아갔다.
끌려온 소위가 팔다리를 퍼덕거렸다. 헌데 동작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발버둥이 아니라 꿈틀거림 같달까. 발끝이 허공에 동동 떠 퍼드득퍼드득 몸을 떠는 게 갓 뭍에 나온 물고기 같았다. 거기다 그르륵, 그르륵, 기이한 소리를 냈다. 꼭…… 목구멍에 모래라도 차 있는 것처럼.
소위가 지척에서 멈췄다. 가까운 거리에 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
“…….”
청호와 시윤이 동시에 말을 잃었다. 붉은 꽃 하나가 소위의 볼을 뚫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달빛에 얹혀 있던 구름이 사라지고, 사위가 훤해졌다. 자연히 쿤 부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른 병사들 역시 귓바퀴나 턱 아래, 또는 눈썹 위에 빨간색 꽃이 한두 개씩 피어 있었다. 그리고 정수리에 뾰족이 솟아 있는 줄기. 청호가 얼린 덕에 꽃잎은 모두 떨어져 버렸으나 줄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쿤 부대긴 한데, 쿤 부대가 아니네요…….”
참담한 표정의 시윤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새 녹았나. 꽁꽁 얼려 뒀는데. 몸은 또 어디서 찾았대. 알렌 이 새끼는 사체 수습 잘하고 있다더니 대체 뭘 한 거야?”
청호가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쿤 부대가 휘갈기던 총소리가 뚝 하고 멎었다. 총알이 모두 떨어진 모양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앞머리를 서늘하게 할퀴었다. 그리고 잠시 바람이 멎었을 때, 쿤 부대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시윤이 반사적으로 총을 쐈다. 탕! 얼떨결에 날아간 총알은 달음박질쳐 다가오는 한 병사의 어깻죽지에 박혔다. 시윤의 눈썹이 동그란 아치를 그렸다. 명중은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사격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병사는 전혀 피해가 없어 보였다. 분명 검붉은 피도 튀었는데, 총알의 반동으로 상체를 들썩이기도 했는데. 아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꼭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당황한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뻑이자, 청호가 가까이에 있는 깃발 하나를 뽑으며 말했다.
“인간이 아니야. 일종의 좀비지. 아픈 걸 느낄 수 있을 리가.”
좀비. 좀비라니. 클롭스가 판치는 세상에도 좀비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핵전쟁 전의 인간이 만들어낸 유흥거리에 불과했다. 당시의 영화나 만화책 따위로 현대인도 알고 있을 뿐, 즐기진 않았다. 온 세상에 좀비보다 더한 괴물이 득실거리는데 그런 걸 유흥거리로 삼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근데 진짜 좀비가 나타난 것이다. 원인이 바이러스인지, 인체 실험인지조차 모르고, 인간의 피와 살을 먹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행동과 반응은 좀비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떡합니까?”
시윤이 총 방아쇠를 문지르며 동동 발을 굴렀다. 좀비 주제에 날쌔기까지 한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비 죽이듯이 해야지.”
청호가 깃발의 천을 찢어 내고, 깃대를 거꾸로 쥐었다. 그러더니 깃대 끄트머리에 불을 냈다. 활활 타오르던 철 깃대가 시뻘건 색으로 발광하더니 곧 힘없이 축 늘어졌다. 청호가 그것을 엄지와 네 손가락으로 잡고 쭉 밀자 순식간에 칼날 같은 것이 생겨났다.
곧 모양이 잡힌 깃대 위로 하얀 성에가 꼈다. 차게 식은 깃대가 다시 단단해졌다. 언젠가 유리 에펠 탑을 만들던 때와 같은 순서였다.
순식간에 장검을 만든 청호가 허공에 붕붕 몇 번 휘둘렀다. 청호의 키보다 긴 깃대가 식식거리며 공기를 갈랐다.
“……좀비 죽이듯이요?”
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좀비를 어떻게 죽이는데? 제가 아는 건 클롭스를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방법이지 좀비를 처리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설사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청호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여가에 좀비 영화라도 보나.
“딜런이 좀비를 좋아해. 클롭스도 있는 세상에 좀비가 없으란 법은 없다나. 언젠가 나타나면 이렇게…….”
청호가 가장 선두에 선 병사의 목을 향해 깃대를 휘둘렀다. 잘 벼려진 날에 목이 댕강, 속절없이 날아갔다. 몸과 분리된 머리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홀로 남은 몸뚱이는 관성의 법칙으로 앞으로 계속 뛰어오더니 몇 걸음 지나지 않아 고꾸라졌다.
“목을 자르라고 하더군.”
청호가 깃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시윤이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는 목을 잘라야 하는구나. 어깨에 총알구멍을 내 봐야 끄떡도 않는구나. 오늘 새로운 지식을 깨우쳤다.
청호는 그 후로 다가오는 병사들의 목을 족족 쳐 냈다. 기다란 깃대는 한 번에 네다섯 명의 목을 잘랐다. 병사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시윤은 그저 입을 헤벌리고 그것을 감상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죽어 가면서도 에스퍼 능력을 쓰지 못했다. 이미 죽은 몸이라 그런 듯했다.
청호가 수십의 병사를 거의 다 베었을 무렵, 머리 하나가 바람에 휩쓸려 시윤의 앞으로 굴러왔다. 눈을 부릅뜬 머리가 시윤을 올려다봤다. 시윤이 으, 짧은 신음을 내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클롭스 시체는 수도 없이 봐 왔으나 사람의 사체는 영 낯설었다. 아니, 무섭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공포와 함께 동정심이 솟구쳤다. 이렇게 죽을 사람들이 아닌데. 모두 포스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던 이들인데. 이름 모를 적에게 죽음마저 농락당하는 듯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윤이 청호가 뜯어낸 쿤 부대 깃발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병사의 머리 위에 덮어 주려 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그 순간, 병사의 콧구멍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굵직한 털실 같기도 하고, 지렁이 같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시윤이 허리를 굽혔다. 묘하게 익숙한데. 사위가 어두워 단번에 식별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기생충이다.
사화산에서 봤던 그 기생충. 제 손목을 빨았던 그 기생충.
이게 왜 여기…….
시윤이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졌다. 실험용 핀셋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구복 차림도 아니고, 쿤 부대가 가져왔을 실험 키트 역시 죄 막사 안에 있을 테니 지금 당장 뭐가 있을 리 없었다.
시윤이 하는 수 없이 맨손을 뻗었다. 또 물리긴 싫은데. 아프진 않았지만, 미끈거리고 축축한 게 닿는 느낌이 썩 좋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건 사람 사체 안에 있던 거라 그 거리낌이 곱절이었다.
그래도 나름 박사이니 할 건 해야지. 사화산과 이곳의 환경은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같은 개체가 있다는 건 두 환경의 공통점이 있다는 거였다. 그 공통점으로 말미암아 기생충에 관한 또 다른 정보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시윤이 꿈틀거리는 그것에 막 손을 가져다 댔을 때였다.
기생충이 몸을 세게 튕기더니 앞으로 쭉 뻗어 나갔다. 다행히 시윤 쪽은 아니었다. 그것은 사화산에서 발견한 것보다 훨씬 길었다. 눈, 코, 입, 하물며 절단된 목에서 뻗어 나온 기생충들은 끝을 모르고 계속 길게 늘어났다. 꼭 고무줄처럼. 시윤의 고개가 자연히 기생충을 따라갔다. 그리고 목적지를 발견하는 순간…….
“미친…….”
평소 잘 쓰지도 않던 비속어를 읊조리게 됐다.
기생충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병사의 몸뚱이였다.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널브러진 몸뚱이.
몸뚱이에서도 기생충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곧 머리에서 나온 것과 맞닿더니 서로 엉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엄청난 힘으로 양쪽을 끌어당겼다. 목과 머리가 바닥을 질질 쓸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시윤은 그 끔찍하면서도 신기한 광경을 홀린 듯 보고 있었다. 사화산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보지 못했는데. 왜 여기선……. 머리와 몸이 가까워지면 부활하나? 그래서 꽃밭에 있던 머리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던 건가?
줄줄이 탐구를 이어 가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사위를 둘러보자 청호가 베고 지나간 모든 머리가 각각의 몸을 찾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장, 대장님!”
시윤이 멀찌감치서 머리를 베고 있는 청호를 불렀다. 행여 시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놀란 청호가 얼른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시윤은 멀쩡했다. 주위에 있는 병사들은 멀쩡하지 못했지만.
“……하여튼 딜런 이 새끼는 도움이 안 돼.”
청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병사의 머리를 베며 중얼거렸다. 좀비는 머리 베면 죽는다더니. 개소리였다.
마지막 병사를 참수한 청호가 쓸모없어진 깃발을 내던졌다.
“아…… 태우면 안 되는데……. 머리는 꼭 포스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가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베고 베어도 끊임없이 재생할 병사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불 지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나 그럼 사체 수습이 힘들다. 치아 배열 등을 증거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의 부모는 그게 아닐 거란 말이다.
그렇다고 얼리자니 이미 저의 힘을 깨고 나온 이들이라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었다. 잠시 시간을 벌 수야 있겠지만 그다음엔? 그냥 여기 두고 도망치나?
청호가 목과 몸을 기워 맞춰 그르륵거리며 다가오는 병사를 노려봤다. 그러자 죽은 몸뚱이가 붕 옆으로 날아가 다른 병사와 부딪쳐 바닥을 나뒹굴었다.
청호가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빼냈다. 에로아스 부대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이 좀비 병사들을 둘둘 묶어 그 채로 포스로 돌아가는 게 나을 듯했다. 그러기 위해선 에로아스가 필요했다. 저 혼자선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가 막 알렌의 프로필을 터치했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밤이슬에 젖은 잔디가 짓눌리는 소리, 나뭇잎이 부서지는 소리, 기다란 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소리. 쿤 부대와 마찬가지로 수십 명쯤 되는 듯한 인기척이었다. 청호가 안광을 번뜩이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바위처럼 버석하니 굳고야 말았다.
“……내 병사들이네.”
아돌프 C였다. 쿤 부대와 마찬가지로 꽃밭에 묻혀 있던 그들 말이다.
청호가 아릿한 시선으로 병사들을 바라봤다. 에로아스에서 사상자가 생기는 건 몹시 드문 일이다. 능력이 특출 난 자만 뽑으니 그런 것도 있고, 웬만큼 강한 상대는 청호가 직접 처리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가 있는데 구태여 위험한 일에 병사들을 방패로 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떼죽음당한 병사들을 마주하는 건 청호에게도 매우 드문 경험이었다.
“…….”
청호는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는 그들을 차마 공격할 수가 없었다. 몇 년을 진창에서 함께 구른 동료들이었다. 비록 살갑게 대하진 못했으나 속으론 아끼고 보듬던 이들이었다. 그러잖아도 지켜 줄 새도 없이 가 버려 속이 매웠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목젖이 다 시큰거렸다.
청호는 아돌프 병사들의 총알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그들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청호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찰그랑찰그랑 떨어지는 총알들이 꼭 누군가가 오열하는 소리 같았다.
“……대장님.”
그런 청호를 응시하던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 청호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겁고 아픈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반려 가이드가 늦게 나타나 죽음을 항상 목전에 두고 살던 그.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 손으로 죽인 병사들의 시체 가운데에 서 있던 그.
누군가의 계략으로 사지가 찢긴 어미의 죽음을 목도한 그.
그 후로도 수백, 수천 명의 죽음을 겪고, 보고, 떠나보냈을 그.
말도 못 하게 안쓰러웠다. 제 주제에 감히 청호를 동정한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진짜 그런 걸 어쩌겠나. 시윤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그를 불러야 하나, 아니면 직접 다가갈까, 근데 그와 저 사이에 널브러진 병사들이 너무 많은데, 따위의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희뿌연 안개가 잠깐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좀비 병사일 거라 생각했다. 반 이상은 아직 몸을 기우는 중이었으나, 일찍이 목을 붙인 몇몇 중 하나겠거니, 했다.
시윤이 인기척을 향해 총을 겨눴다. 머리가 잘려도 멀쩡한 것들이긴 하나 무릎을 노려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미간을 노려 시간을 버는 것도 괜찮으리라.
근데…….
“안녕?”
붉은 머리칼을 가진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시윤이 끔뻑, 끔뻑 그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미남형의 얼굴에 가벼이 걸친 흰 와이셔츠, 검은 팬츠, 반질반질한 구두, 그리고 머리만큼이나 붉은 눈알. 분명 처음 보는 이가 맞았다.
“……누구세요?”
시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발 물러섰다. 이상한 남자다. 눈 코 입이 멀쩡히 붙어 있고, 팔다리 역시 쭉쭉 뻗어 있는데 묘한 거리낌이 들었다.
“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남자가 빙긋 눈을 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높다란 코가 시윤의 코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기겁한 시윤이 고개를 한껏 뒤로 뺐다. 그러다 발이 엉켜 휙 뒤로 넘어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맑은 밤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시윤이 뒤늦게 사지를 퍼덕거릴 때였다. 남자가 시윤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더니 훅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심해야지. 넘어지면 아파.”
“…….”
시윤이 홀린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가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렇다기엔 청호도, 모건도, 제 형들도, 하물며 아버지도 잘생겼는데.
그도 아니면 화염처럼 일렁이는 머리칼과 루비 같은 눈동자가 신기하기 때문일까.
한동안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시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청호를 부르기 위해 입을 달싹이는데, 남자가 턱을 부여잡아 왔다. 보드라운 손과 달리 매우 억센 아귀힘이었다. 턱이 뒤틀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쉬. 쟤는 자기 병사들이랑 못다 한 이야기 나누게 놔둬.”
남자가 보기 좋게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시윤이 눈동자만 굴려 멀리 서 있는 청호를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아돌프 C의 하찮은 공격을 방관하고 있었다. 방관이 아니라 조의를 표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
시윤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일단 이 낯선 이가 위험한 건 아닌 듯하니 조금 더 버텨 볼까. 만약 제게 해를 가하려 했다면 진즉 했겠지.
시윤의 단념을 알아차린 남자가 기특하다는 듯 시윤의 턱 아래를 살살 쓰다듬었다. 꼭 애완동물을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시윤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붉은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너. 가까이서 보니까 더 신기하네.”
“…….”
시윤의 눈살이 설핏 일그러졌다. 가까이서 보니까, 라니. 그럼 원래는 멀리서 봐 왔나? 언제부터? 5분 전부터? 아니면 한 시간 전부터?
그리고 신기하다니, 뭐가 신기한데. 저는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축에 속했다. 남자처럼 붉은 머리칼도 아니었고, 청호처럼 매우 힘이 센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능력을 가진 가이드에 불과하단 말이다.
시윤이 그를 힘껏 밀어 냈다. 남자가 여유로이 웃으며 뒤로 물러나 주었다.
“누구야, 너.”
시윤이 뾰족한 음성으로 캐물었다. 평소라면 특유의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예의 있게 물었겠으나 그는 군인도 아니었고, 계급도 없었다. 하물며 포스의 국민 같지도 않았다. 시윤이 그를 존중해 줄 필요가 없단 뜻이다.
더군다나 뭐가 그렇게 기꺼운지 시종일관 웃는 낯이 매우 얄미웠다.
시윤의 질문에 남자가 흐음, 목으로 신음하며 고민했다. 진짜 고민하는 건 아니었고, 알려 줄까 말까 놀리는 거였다. 그걸 알아차린 시윤이 쥐고 있던 총을 더 세게 말아 쥐었다. 정체 파악이고 뭐고 그냥 쏴 버릴까. 청호라면 분명 잘했노라 머리를 쓰다듬어 줄 텐데.
시윤이 진지하게 실행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남자가 느지막이 답을 내 놓았다.
“나는 너랑 쟤가 헤집어 놓은 꽃밭 주인이야.”
“꽃밭…… 주인?”
꽃밭 주인, 꽃밭 주인이라……. 그의 소개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시윤이 네 음절을 여러 번 곱씹었다. 그러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산 정상의 붉은 꽃밭을 떠올렸다.
그 사이코 짓을 한 범인이구나.
눈을 크게 뜬 시윤이 빠르게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남자는 총알이 두렵지 않은 건지, 아니면 시윤이 두렵지 않은 건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시윤이 이를 아득 짓씹었다. 머리에 꽃이 심긴 채, 하늘이 찢어지라 비명을 지르던 이들이 선연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한 쿤 부대와 아돌프 C가 아직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시윤이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 힘을 줬다. 총 안의 총알이 철컥거리며 총구로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몸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손은 물론,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꼭 몸 안에 정신이 갇힌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더할 나위 없이 빠르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몸만 정적이다.
첫 살인을 앞두고 긴장한 몸이 등신같이 굳어 버렸나. 아니면 이 붉은 머리 남자의 능력인가. 시윤의 눈동자에 혼란과 공포가 차올랐다.
남자가 그런 시윤을 보며 또 빙글빙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서 검지와 엄지로 총을 쏙 빼 갔다.
“이런 거로는 나 못 죽이는데, 그래도 압수.”
청호가 손수 만들어 준 총이 휙 허공으로 날아갔다. 시윤의 동공이 점처럼 작아졌다. 전신이 굳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그런 같잖은 위협으로 물러날 리 없었다. 그가 시윤의 손을 퍽 다정히 거머쥐었다.
“자, 그럼 잠깐 손 좀 빌릴게.”
시윤의 몸이 흠칫 경련했다. 남자의 손은 매우 차가웠다. 찬 바람을 버티고 선 바위 같았다. 보기와 달리 딱딱했고, 오돌토돌한 비늘 같은 게 느껴졌다. 흉터 하나 없이 미끈한 손임에도 그랬다.
시윤의 심장이 쿵쾅쿵쾅 거칠게 뛰었다. 손을 빌린다니. 잘라 가기라도 하겠단 뜻일까. 댕강 잘린 제 손이 꽃밭 사이에 묻혀 있는 장면이 상상됐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남자는 한참 동안 시윤의 손을 주물렀다. 그러더니 별안간 입으로 가져갔다. 움츠러들었던 시윤의 동공이 잔뜩 커졌다. 남자가 제 손을 뜯어 먹으려나 보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남자는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있었다. 마치 입술로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처럼.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손등을 살랑살랑 간질였다.
그렇게 한참 있던 남자가 손을 뒤집어 이번엔 손목에다 입을 댔다. 청호의 입술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영 마뜩잖은지 “아주 난도질을 해 놨네.”라며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남자의 입술 틈으로 검은 혀가 삐져나왔다. 검은 혀라니. 생전 처음 보는 거였다. 그것이 시윤의 손목을, 정확히는 동맥 위를 살살 핥았다.
“으…….”
말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기이한 느낌이었다. 수 시간 전 청호도 이와 비슷하게 제 피부를 빨고 핥았는데, 이렇게 불쾌하지도, 끔찍하지도 않았다. 먼 과거 사이먼이 제 볼을 핥았던 때와는 또 다른 색의 불쾌함이었다.
시윤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으나 나약한 몸뚱이는 제 뜻을 따라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남자의 입술 사이로 무언가가 번뜩였다. 송곳니 같았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 그것은 곧장 시윤의 손목을 뚫고 들어왔다.
“흐, 으으…….”
시윤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그러나 정신적 충격이 상당했다. 남자는 아무래도 드라큘라처럼 제 피를 다 빨아 먹을 모양이었다. 근데 이상하지. 피가 빨리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송곳니만 꽂은 채 가만히 있었다. 구멍 난 피부 사이로 찔끔찔끔 피가 배어 나오는데, 그것을 삼키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러잖아도 붉었던 남자의 입술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
뭐 하는 거지. 대체 뭐 하는 거야. 목적이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당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피부가 뚫린 통각은 곧 사그라들었다. 남은 건 깊숙이 박혀 있는 남자의 차가운 어금니뿐이었다. 아니, 가만히 느끼고 있으면 뭔가가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시윤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눈을 한껏 휘며 웃어 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남자의 희멀건 얼굴만 가득하던 시야에 굵직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익숙한 불이었다. 장작 따위로 만든 불과 달리 훨씬 붉고, 선명한 불꽃. 그것은 남자를 크게 휘감고 회오리처럼 움직이며 그를 조여 갔다.
그와 동시에 시윤이 “허억…….”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허리를 굽혔다. 사지를 꽁꽁 죄고 있던 무형의 힘이 사라진 덕이었다.
시윤이 피가 흐르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금니가 제법 깊게 박혔던 모양인지 손바닥이 피로 금세 뜨끈해졌다. 입술을 겹쳐 문 시윤이 남자를 노려보는데, 커다란 등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건드리지 마.”
청호였다. 시윤이 얼른 그의 등에 딱 붙어 섰다. 그 후 청호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청호가 손을 잡아 왔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바닥에 공포로 바짝 솟아 있던 어깨가 한결 느슨해졌다.
색색, 청호의 냄새를 들이마시던 시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불에 타 죽은 사체가 영 징그럽겠지만, 그래도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보고 싶었다. 일종의 알량한 복수랄까.
근데 어째서일까. 사그라지는 불 사이로 남자의 붉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안타깝게도, 남자는 멀쩡했다.
“와, 일찍 빠져나왔네.”
남자가 살짝 그을린 옷을 툭툭 털었다. 짜증이 날 정도로 해맑은 미소는 여전했다. 그가 과장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르륵거리며 움직이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꽝꽝 얼어 있었다. 뒤늦게 시윤의 상황을 알아챈 청호가 주변을 통째로 얼려 버린 탓이었다. 그 덕에 병사들은 물론, 풀과 나무까지 죄 성에가 껴 있었다.
남자의 눈썹이 팔(八)자로 내려앉았다.
“세상에. 널 위해 싸워 주던 병사들을 다 얼려 버린 거야? 무서워라. 대장이면서 이래도 돼?”
이죽거림이 가득한 문장이었다. 그러나 청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특유의 서늘한 시선으로 남자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다 눈가가 꿈틀 경련했다.
“너.”
“응?”
“인간 아니구나?”
질문이나 질문이 아닌 청호의 말에 남자의 만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꼭 가면 같은 얼굴이었다. 인간을 연기하던 로봇에 전원 선이 뽑히면 저렇지 않을까, 싶었다. 일시적으로 사위가 고요해졌다.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도, 나뭇잎이 부대끼는 소리도, 풀벌레가 우는 소리도 없었다.
그런 적막은 태어나 처음 겪었다. 꼭 사방이 막힌 진공 상태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빨간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뜩였다. 그러나 곧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닌데. 나 인간인데.”
한 박자 늦게 나온 대답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시인하는 꼴이었다.
청호의 뒤에 숨어 고개만 내민 시윤이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인간이 아니면 뭔데. 클롭스라는 거야? 하지만 외적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인간인데. 그러고 보니 송곳니가 자라긴 했지. 근데 외형을 바꿀 수 있는 클롭스도 있었나? 그럼 큰일인데. 인간인 척 포스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거니까.
아아, 탐난다. 연구해 보고 싶다. 머리카락 하나만이라도 포스로 가져갈 수 있다면 좋으랴만.
시윤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 무서워했으면서, 청호가 앞에 있으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남자는 그런 시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마치 시윤의 머릿속을 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
시윤이 불그스름하게 발광하는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봤다. 설마 진짜 생각이라도 읽은 건가. 시윤이 그가 내민 머리카락을 잡지도, 그렇다고 단호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청호가 텁, 남자의 손목을 쥐었다. 그 후 꾸우욱 힘을 줬다. 손등 위로 울룩불룩한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센 힘이었다.
가늠하기로서니, 손목을 분지른다거나, 얼려서 깨 버린다거나, 아예 통째로 불태워 버린다거나 등을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 청호와 맞닿은 손목 주위로 희뿌연 연기가 올라옴에도 그랬다.
청호의 눈가에 당혹이 스쳐 갔다. 불이 통하지 않는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럼 염력이나 힘으로 누르면 됐다. 반대의 상황에선 불을 이용하면 됐고. 허나 모든 능력이 통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기계부터 능력까지 모든 게 불능이던 사화산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가. 너는 날 못 이겨.”
남자는 가볍게 손목을 터는 것만으로 청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청호의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 전투 중에 모골이 송연한 건 매우 오랜만이었다. 강한 적이다. 제힘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적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그럼 어쩌지. 어떻게 시윤을 살리지. 어떻게 그를 온전히 포스로 돌려보낼 수 있지.
바쁘게 머리를 굴렸으나 이렇다 할 혜안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시윤을 등 뒤로 보다 꼼꼼히 숨기는 거였다.
시윤 역시 당황했다. 청호의 힘을 ‘털어 내는’ 존재라니. 그럴 수 있나. 그 어느 에스퍼도, 클롭스도 청호를 이리 대할 순 없었다.
신이라면 또 모를까.
시윤이 청호의 등에 바짝 붙어섰다. 참수된 채 땅에 묻혀 있던 병사의 머리들. 숨통이 끊어졌음에도 살아 움직이는 정체 모를 것들. 그 모든 것의 창조자이니 어쩌면 정말 신일지도 몰랐다.
어째서, 갑자기 왜 이런 존재가 우리 앞에 나타났을까.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서.
정수리 위로 컴컴한 먹구름이 드리운 두 사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뻔뻔하게 머리카락을 내밀었다.
“안 받아? 가지고 싶다며.”
“…….”
“흐음……. 여기 둘게. 가져가서 연구해 봐.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남자가 빛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튕겼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허공에 곧추섰다. 꼭 보이지 않는 실로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묘한 능력이었다. 얼핏 보면 청호의 사이코키네시스와 비슷하나 시윤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청호는 사물 자체를 띄운다. 그러나 남자는 환경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중력이나 공기의 흐름을 조절해 머리카락이 허공에 떠 있게 만드는 것 같단 말이다.
말이 되나, 싶은데 실로 그래 보였다.
머리카락과 남자를 번갈아 보던 시윤이 문득 눈썹을 추켜세웠다.
“가, 가져가서 연구하라는 말은 우리를 보내 주겠단 말이야?”
“물론. 나는 너희들을 해칠 생각이 없단다.”
“근데 내 손목은 왜 물어뜯었어?”
“걱정하지 말렴. 금방 나을 거야.”
질문에 맞지 않는 답이었다. 언제 낫냐는 물음이 아니었거늘. 시윤이 무어라 반박하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남자가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러더니 빽빽하게 우거진 숲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는데, 뭐가 있는 것처럼 뚫어지라 바라봤다.
“네 부하들이 오고 있어.”
그 말에 청호가 헛숨을 삼켰다. 안 돼. 오면 안 돼. 이 남자가 쿤 부대에게 또 아돌프 C에게 했듯, 그들 역시 몰살할지도 몰랐다. 목이 잘린 폴과 알렌, 그리고 딜런의 모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청호가 꽉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의 손을 타고 불이 일렁였다. 그러자 남자가 괜한 짓 하지 말라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내저었다.
“쉬……. 그들을 죽이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
“그리고 쟤들도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돌려줄게.”
남자가 청호가 얼린 병사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자 병사들의 목에 실금이 생기더니 곧 머리가 퍼걱퍼걱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몸 안 가득 있던 기생충 역시 일사불란하게 기어 나왔다.
비로소 온전한 죽음이었다. 청호가 씁쓸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제가 지키지 못한 이들을 제 손으로 몇 번이나 죽였는지 모르겠다.
“그들을 죽여서 미안해. 하지만 시윤이와 둘이 있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 아무래도 청호 넌 조금…… 걸리적거리거든.”
남자가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듯 울상을 해 보였다. 마치 청호가 모든 문제의 원흉인 듯 떠넘기기까지 했다. 거기다 친근한 척 부르는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 건지. 혼란이 곱절에 곱절이 됐다.
그때, 멀리서 부산스러운 소음이 흘러왔다.
“대장님!”
“대장님, 여기 계십니까?”
에로아스 부대가 어느새 투명 바리케이드를 넘어 쿤 부대의 베이스캠프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근데 이상했다. 분명 몇몇이 청호와 시윤을 봤는데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우렁차게 청호의 행방을 찾았다.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데, 그들은 청호와 시윤이 보이지 않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또한, 여기저기 흩뿌려진 사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에 걸려 넘어지거나, 그대로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벌떡 일어나 가던 길을 갔다.
“이게 무슨…….”
시윤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남자 짓이다. 안개를 내뿜던 붉은 꽃처럼, 병사들에게 또 다른 수작을 부린 것이다.
시윤이 뾰족한 눈초리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남자는 기척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존재하는 거라곤 허공에 잡힌 머리칼 한 올뿐이었다.
“…….”
시윤이 그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형광 물질이라도 발라 놓은 듯 반짝이는 것이 매우 얇은 네온사인 같았다.
태어나 그런 존재는 처음 봤다. 환영과 닮은 남자였다. 붉은 악몽 같기도 하고, 솜씨 좋은 마술사 같기도 했으며, 기이한 괴담 같기도 했다.
서정적인 감정과는 썩 친하지 않은데, 몽롱하니 꿈꾼 것 같았다. 술에 취한 것과는 전혀 다른 환상적인 기분이었다. 좋은 의미의 환상이 아니라, 질 낮은 마약을 잔뜩 들이켜고 마주한 환각 같은 거 말이다.
“대장님, 어디 계십니까?”
“채 준위님. 채 준위님 여기 안 계십니까?”
남자가 사라졌음에도 병사들은 여전히 시윤과 청호를 찾지 못했다. 청호가 그들에게 다가가려 발을 뗐다. 그때, 시윤이 그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대장님. 방금 만났던 남자, 상부에 보고하지 마십시오. 병사들에게도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왜?”
“대장님 힘이 통하지 않는 존재가 나타난 걸 알면 포스 전체가 혼란에 물들 겁니다.”
“…….”
“혼란은 잘못된 판단을 야기하고, 어쩌면 대장님 어, 어머님에게 있었던 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발발할지도 몰라요.”
주제넘은 걱정이었다. 어머니라는 세 음절을 입에 담는 것도 송구스러웠다. 그러나 정말 혹시, 혹시 모르니까. 포스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누구 하나는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자신들의 두려움을 방어하기 위해 청호를 낭떠러지로 떠밀지도 모르니까.
“…….”
청호는 아무 말 없이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믿어 달라는 일종의 부탁이었다.
“제가 모건 대령님과 조사해 볼게요.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청호가 느리게 고개를 주억였다. 시윤이 감사의 뜻으로 연하게 미소 지었다. 크든 작든 청호가 제 제안을 받아 준 게 기뻤다. 보잘것없는 저를 믿어 주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청호가 자신의 손목을 쥔 시윤의 손을 채 갔다. 그리고 남자의 송곳니가 박혔던 곳을 노려봤다. 하얀 피부가 움푹 파인 게 영 보기 미웠다.
“아파?”
“아니요. 그냥 따끔한 정도입니다.”
“그게 아프다는 거지.”
“푸흐……. 괜찮습니다. 피가 멎은 걸 보니 깊은 상처도 아니고, 손가락도 잘 움직이니 독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시윤이 또박또박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비록 인체에 관련한 학위는 따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윤의 설명에도 청호는 그 상처가 영 마뜩잖았다. 그가 다시 걱정을 내 놓기 위해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그래도…….”
“……대장님?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주위를 어슬렁거리던 딜런이 청호와 시윤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방금까지 없던 이들이 뿅, 하고 나타난 게 놀라웠다. 뭐, 어찌 됐든 둘 다 사지 멀쩡하게 서 있으니 반가워 그들을 향해 다가가는데, 발에 무언가가 툭 하고 걸렸다.
수십 구의 사체였다.
“악, 씨발! 이게 다 뭐야!”
딜런이 괴성을 내지르며 철퍼덕 뒤로 주저앉았다. 그의 고함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비명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청호가 그들을 추스르며 사체 수습을 명령했다. 알렌이 후다닥 뛰어와 산 정상의 꽃밭에 심긴 머리들은 모두 동물과 클롭스의 것이었고 인간의 것은 없었노라 보고했다.
청호가 그럴 일이 있었다며 대충 둘러댔다. 알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으나 청호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혼자가 된 시윤이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말아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은은하게 발광하는 붉은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다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 봐야 머리카락 한 올일 뿐인데,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