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6)

화목한 방

청호와의 저녁 식사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이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시선만 맞추며 식사하는 것에 제법 적응했다. 육식 가득한 식단에도 적응했고.

청호는 식사가 끝나면 꼭 차를 마셨다. 그것은 인스턴트 차일 때도 있고, 잘 마른 진짜 찻잎일 때도 있었다. 늘 미적지근한 커피나 물만 달고 살던 시윤에게는 퍽 새로운 음료였다.

결론만 말하면, 청호가 내려 주는 차는 좋다. 배 속이 따뜻해지고 사지가 편해지는 게 눈 코 입이 저절로 느슨해졌다. 매칭 검사를 하고 쓰러졌던 날에도 차를 줬던 것 같은데. 청호는 어쩌다 이런 취미를 가지게 된 걸까. 아무래도 전쟁 중에 차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상상이 되질 않는지라 신기했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나면 그는 시윤을 꼭 연구실까지 바래다줬다.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채 10분 거리를 걷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날씨도 좋고. 적당히 선선한 밤 기온도 좋고. 낮과 달리 고요한 부대도 좋고. 평평한 바닥 위로 울리는 자박자박한 발소리도 좋았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는데. 그 어색함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연구동 건물이 보일 때였다.

“가족은 어때?”

청호가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네?”

“모건 말로는 아주 대단한 가족이 있다던데.”

“아…… 어…….”

시윤이 혀로 자신의 입천장을 긁었다. 대단한 가족.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표현이 부족할 만큼 엄청난 가족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시윤은 가족에 대해 털어놓는 것을 썩 즐기지 않았다. 열에 다섯은 시윤을 어려워하며 물러섰고, 또 다섯은 혹 떨어질 콩고물이 없을까, 하며 지나치게 살가워했으니까.

청호는 그 둘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아 줬으면 했다. 시윤이 눈알만 굴리며 마땅한 대답을 찾는데, 청호가 말을 더했다.

“비아냥은 아니야. 정말 궁금해서. 폴에게 조사시켜도 되지만, 그건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음…….”

“어렵지 않다면 이야기해 줘. 나는 가족이 없어서.”

그 말에 시윤은 누군가에게 뻑, 세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제겐 당연한 것들이 청호에겐 아닐 텐데. 그가 세상의 영웅으로 군림하는 동안, 저는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유영했으니 서로 갈망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더군다나…… 은근히 도는 소문에 의하면 청호의 가족은 클롭스에게 아주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댔다. 머리가 잘리고, 내장이 쏟아지는 참극이었다고 했는데. 그걸 어린 청호가 낱낱이 목도했다고. 모(母)의 피를 듬뿍 뒤집어쓰고 목청이 찢어지라 울었다고도 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시윤이 청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청호 역시 발을 멈췄다. 그의 표정은 잔잔했다. 가족이 없어서, 라는 비운 가득한 말을 한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연한 밤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은 나른하기까지 했다.

“저는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시윤이 영 독창적이지 못한 문장으로 운을 뗐다.

“화목?”

청호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마지않는 제 가족을 떠올리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스몄다.

“아버지는 포스 개국 공신으로 원수에 S급 에스퍼이시고, 어머니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중장에 A급 가이드시고, 쌍둥이인 형들은 둘 다 A급 에스퍼로 큰형은 대령이고 작은형은 소령이에요.”

말하고 있는 시윤도 민망할 정도로 대단한 집이었다. 수천 년 전처럼 신분이 있다면 필히 귀족이었을, 어쩌면 왕족이었을 수도 있었을 가족이었다. 저는 그 대단한 집안의 못난 돌연변이 막내지만, 아무튼.

가족 정보를 줄줄이 나열한 시윤이 가만히 청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만하면 ‘가족은 어때’라는 질문에 충분한 답이 되지 않았나, 싶어서.

청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가족의 계급이 화목과 직결되는 것은 아닐 텐데.”

“…….”

재차 이어진 질문에 시윤이 헛숨을 삼켰다.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어딘가 모호한 눈동자로 청호를 응시했다. 청호가 덩달아 고개를 슬쩍 옆으로 꺾었다.

“왜 그렇게 보지?”

“다른 사람들은 다 직결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가족들이 힘이 세니까. 계급이 높으니까. 돈이 많으니까. 큰 집에 사니까. 당연히 행복한 줄 알죠.”

“넌 그랬어?”

“솔직히 그것들의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저는 배고픔이 낯설고, 추위에 약하고, 딱딱한 침대를 싫어하고, 같은 옷을 이틀 내내 입는 게 불쾌하고, 밥투정도 많이 하거든요.”

“…….”

“사위가 판자로 둘러싸인 집에서, 삼시 세끼 보급용 알약으로 끼니를 때우고, 찬 바닥에서 거친 모직을 덮고 자는 보통의 국민은 꿈도 못 꿀 것들을 누리며 살아왔……으니까요.”

시윤이 말끝을 흐리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 앞에서 눈치 없이 자랑을 늘어놓는 것 같아 민망했다. 다행히 청호의 낯에는 호기심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이 네가 생각하는 화목은 아니라는 거잖아.”

“아, 네. 음……. 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으세요. 대신 눈빛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신기한 능력을 갖추셨어요. 땀을 흘리면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닦아 주시고, 밥 먹을 때 물을 따라 주시고, 제 나이가 몇인데 방에서 자고 있으면 새벽마다 들러서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하물며 때마다 이발한 것도 아신다니까요.”

“…….”

“어머니는 다정하세요. 꽃 가꾸는 걸 좋아하시고, 잘못하거나 틀려도 혼내시는 법이 없어요. 아주 타당한 이유와 정의로 이해하도록 설명하시죠. 나긋한 목소리가 정말 듣기 좋아요. 아, 어머니한테는 뭐랄까, 섬유 유연제는 아닌데, 데운 우유 같기도 하고 봄에 피는 꽃 같기도 한 냄새가 나요. 정말…… 좋은 냄새예요.”

“…….”

“형들은…… 좀 유난이에요. 제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저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나이 터울이 엄청 큰 것도 아닌데 바람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아주 난리라니까요. 밥 먹었냐, 잠은 잤냐, 집에 언제 오냐, 오늘은 뭐 했냐, 누가 괴롭히진 않았느냐, 하루에도 메시지가 수십 개씩 와요.”

시윤이 왁자지껄한 형들을 떠올리며 킥킥거렸다. 동그랗게 올라온 그의 광대 위로 달빛이 어스름히 스몄다.

청호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목한 가족. 맞는 것 같네. 네가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봐.”

그에 시윤의 귓바퀴가 붉게 익었다. 제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제게나 즐겁지 남에겐 말 그대로 남의 일일 뿐인 가정사를 종알종알 신나게도 읊어 댔다. 말을 섞는 이는 모건뿐이었는데. 하나 늘었다고 들뜨기라도 한 모양이다.

시윤이 얼른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소맷자락을 쥐어뜯었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늘어지는 걸음을 추슬렀다.

시윤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도 무언가를 질문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가족이 보고 싶지는 않은지. 혼자가 외롭지는 않은지. 아니, 이건 너무 나갔다. 아직 그만큼 두터운 관계가 아니다.

팽글팽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좋은 주제가 떠올랐다.

“아, 저희 아버지 아실 수도 있는데. 간부 회의 때 보셨을 거예요. 성함이 채…….”

“안녕하십니까, 대장님.”

기척 없이 등장한 익명의 병사가 시윤의 말을 뚝 잘랐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이병이었다. 청호가 대충 턱짓으로 그의 경례를 넘겼다. 그리고 다시 시윤의 말에 집중하려는데, 이병이 눈치 없이 곁에 다가와 섰다.

“대, 대장님. 실례가 안 된다면 아, 악수 한 번만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제 꿈이 청호 대장님 실제로 뵙는 거였지 말입니다. 근데 이렇게, 진짜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너무 영광입니다.”

이병은 얼굴이 까무잡잡했다. 그런데도 이 밤에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발그레한 열이 올라 있었다. 청호가 미약한 짜증을 담아 이병을 바라봤다. 가끔 이렇게 용기 넘치는 병사들이 다가와 악수나, 사인이나, 하물며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폴이 엄한 말을 대신 해 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가 없으니 직접 해야 할성싶었다.

청호가 꺼져, 라는 말을 일발 장전했을 때였다.

“저도 청호 대장님 실제로 보는 게 꿈이던 때가 있었지 말입니다.”

시윤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벙긋 열렸던 청호의 입이 딱 다물렸다. 흘깃, 시윤을 살핀 그가 이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병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는 듯, 감동에 젖은 낯으로 청호의 손을 맞잡았다.

이병은 꼭 빙의라도 한 것처럼 중얼중얼 온갖 찬탄을 내놓더니 경례를 하고는 삐걱거리는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시윤이 멀어지는 이병을 보며 자신이 입대하기 전에 청호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선망했고, 또 얼마나 존경했는지를 열성적으로 나열했다.

덕분에 청호는 자꾸만 솟구치는 입꼬리를 누르려 이를 악물어야 했다. 질릴 정도로 들어 온 말들인데 시윤이 하니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전장에서 나뒹군 과거가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금세 시윤의 연구실에 다다랐다. 왜 벌써. 청호가 아쉽다는 듯 마른 입맛을 다셨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대장님.”

시윤이 꾸벅 묵례했다. 청호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저녁은? 먹고 싶은 거 있어?”

“아, 내일은 모건 대령님이 연구실에 들르라 하셨습니다.”

“왜? 또 어디가 아파?”

청호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시윤이 쌉싸름한 미소를 띠며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또’. 그 말이 못내 섭섭했다. 실로 자주 아픈 주제에. 별것이 다 섭섭하지.

“아니요. 가이드 어빌리티 검사 때문에요. 변화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검사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데.”

“검사가 끝나면 작은형이 데리러 온다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식사할 것 같아요.”

“아, 그래…….”

청호가 마지못해 긍정했다. 일주일 내내 그의 저녁을 독점했으니 하루는 놔주는 게 맞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어찌 갈무리가 안 됐다. 이제 그런 청호의 마음쯤이야 훤히 꿰뚫어 보는 시윤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비밀을 나누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어?”

“내일 점심은 어떠십니까?”

“점심?”

“네. 내일 점심은 샌드위치가 먹고 싶을 것 같지 말입니다.”

“아, 샌드위치. 그래. 샌드위치 좋지.”

청호가 꼭 기억하겠다는 듯 연거푸 턱을 주억였다. 묘하게 어두웠던 그의 표정이 한층 맑게 갰다.

“그럼 갈게. 내일 점심때 봐.”

단조로이 작별을 전한 청호가 기다란 다리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시윤은 그가 멀어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싯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청호를 다루는 법을 알아가는 듯하다. 이만하면 제법 친해진 거 아닌가. 비록 닿진 못하지만, 에스퍼와 가이드의 유대감이 자신들에게도 생긴 것 같아 뿌듯했다.

“너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시윤의 홀로그램 차트를 살피던 모건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시윤이 숨을 멈췄다. 혈액을 채취하고 남은 주사 자국을 알코올 솜으로 벅벅 문질러 닦던 손 역시 멈췄다.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왜. 뭔데. 이번엔 또 뭔데. 이제는 아예 가이드 능력이 없어지기라도 했나? 퓨어가 되어 버렸나?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모건을 바라봤다. 얼른 결과를 내놓으라는 무언의 종용이었다.

“아니, 사실 전혀 모르겠어.”

그러나 모건은 턱 아래를 쓰다듬으며 혼자만의 심오한 세계로 빠져들었다. 기다리다 못한 시윤이 모건의 앞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끌어왔다. 그러나 제가 전공한 건 클롭스지 인간이 아닌지라 검사 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해석할 수가 없었다.

아. 짜증 나. 박사 학위 하나 더 딸까.

시윤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DNA 모형을 뚫어지라 응시하는데…….

“너 지금은 또 C급이야.”

모건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시윤의 눈과 입이 봄을 만난 꽃봉오리처럼 활짝 만개했다.

“……C요? 다시 C라고요?”

“어. 너도 이상하지? 왜? 어째서 C지? 그것도 C0야 너. 마이너스가 아니고, 제로라고.”

모건이 툭툭, 툭 홀로그램을 터치하더니 가이드 어빌리티 그래프를 띄웠다.

[어빌리티: C0]

[신체 발달: C-]

[자가 치유 능력: C-]

[어빌리티: 無]

[소유 능력: 無]

어빌리티만 미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래프를 보고 또 봤다. C0라니. 남에겐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일 테지만 제게는 하늘과 땅이 바뀌는 수준의 변화였다. 천지개벽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시윤이 치솟는 웃음을 삼키지 못했다. 어떡해. 이러다 A까지 올라가는 거 아냐? 같잖은 걱정까지 됐다. 역시 가이아는 모든 걸 앞서 보고 창조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이거 되게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거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고. 그러니 웃지 말아 줄래?”

한껏 상기된 시윤의 낯에 모건이 부루퉁히 말했다. 그러나 시윤은 그러든 말든 하등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엉망진창이던 세상이 단숨에 화창해졌다.

내일 청호에게 말해야지. C급으로 돌아왔다고. 이제 손잡을 수 있다고. 아프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해야지. 형들한테도 자랑해야지. 잔뜩 신난 시윤이 주먹을 쥐었다가 푸는데, 모건이 그의 앞에 엉덩이를 붙였다.

“너 뭐 했어?”

“예?”

“D급으로 살던 일주일 동안 뭐 했냐고.”

“제가 뭘 하겠습니까. 알고 계시는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내가 말했잖아. 네 세포는 어떠한 자극에 반응한다고. 근데 일주일 만에 D였던 능력이 C0로 올라왔어. 분명 뭔가가 있었을 거야.”

“아…….”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일을 싹 다 읊어. 아니, 무슨 꿈을 꿨는지까지 읊어.”

모건의 눈이 승부욕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다. 자신이 모르는 것. 밝히지 못한 것. 그 이유가 모건의 신경을 살살 긁어 댔다. 이 비밀을 밝히지 못하면, 며칠 눈도 못 붙일 게 분명했다.

시윤이 음…… 탁음을 내며 손가락으로 토독 토독 자신의 무릎을 두드렸다.

“일어나서 러닝 뛰고, 샤워하고, 영양제 세 알 먹고, 탕비실에 있는 커피 마셨고, 오전 강의 나갔고, 형이랑 점심 먹었고, 오후 강의 하고, 그 후 내내 연구실에 있었습니다.”

“그게 다야?”

“그리고 청호 대장님이랑 저녁 먹었습니다.”

“……청호랑?”

“네. 메뉴는 미디엄 레어로 익힌 스테이크에 버터에 구운 아스파라거스와 양파가 있었고, 수프는…….”

“그건 됐고. 너 청호랑 밥 자주 먹어?”

“아, 근 일주일 내내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스킨십은 하지 않았어요. 청호 대장님이 저랑 있기만 해도 편해지신다고 해서…….”

시윤이 말끝을 흐리며 수줍게 웃었다. ‘이제는 너랑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숨쉬기가 편해지는 것 같거든’. 그 문장은 곱씹을 때마다 좋았다.

시윤이 헤벌쭉 푼수처럼 웃고 있는데 모건이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D급으로 떨어진 그날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청호랑 밥을 먹었단 말이지? 같은 공간에서?”

“그럼 저는 연구실에서 먹고 대장님은 숙소에서 드셨겠습니까?”

시윤이 무슨 그런 등신 같은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건은 평소라면 어디 감히 까마득한 대령에게 무안을 주냐, 성을 냈겠으나 지금은 무언가를 고심하듯 살풋 눈살을 찌푸린 채 자신의 턱만 쓰다듬어 댔다.

“너. 가이드로 발현했던 날. 그 전에 청호 만난 적 있어?”

“어…….”

잠시 기억을 되짚던 시윤이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잊겠는가. 청호를 처음 만났던 날인데. 모건의 연구실 앞, 가까이서 마주한 청호가 태산 같아서, 그 서늘한 눈동자에 짓눌려서, 엄청난 위압감과 분위기에 놀라서는 물컵을 떨어트렸던 그날이었다.

“네. 대장님이 3년 만에 복귀하셔서 모건 대령님 연구실에 검사받으러 오셨던 날. 그때 뵀죠.”

“……그다음 날 바로 발현했고?”

“예. 저녁부터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가 울렸습니다.”

“…….”

모건의 시선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중지와 엄지 위에 자리 잡은 홀로그램용 만년필이 팽글팽글 바람개비처럼 돌아갔다.

시윤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왜요? 설마 제 유전자가 반응하는 자극이 청호 대장님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지금으로서는 아니라고 판단하기가 더 힘든데.”

“하지만 스킨십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청호 대장님과 처음 만났던 날에도, 최근 일주일도.”

“자극이 꼭 마주 닿고, 비벼야만 생기는 건 아니거든. 자석처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끌어당기거나 밀 수 있을지도 몰라. 습기가 모여 곰팡이가 생기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고, 네가 돌이고, 청호가 바람이라 풍화 작용 같은 게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지.”

줄줄이 이어지는 모건의 말에 시윤의 정수리 위로 혼란이 쏟아졌다. 청호와 함께 있어 능력이 변화한다니.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변화는 항상 위험을 동반하니까.

“그런, 그런 연구나 사례가 있습니까? 에스퍼와 가이드가 함께 있어서 능력이 변하는 사례 말입니다.”

“있을 리가. 어빌리티가 고무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건 포스에 너 하난데.”

“아…….”

“설사 모든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가 유의미한 자극을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발견될 수 없었겠지. 걔들 능력은 변화가 없었을 테니까.”

시윤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잘게 고개를 주억였다. 자꾸 제가 특이 체질인 걸 잊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표본 만들어야지. 그 표본으로 그래프 만들고, 규칙을 찾아서 미래를 예상해야지. 네 능력이 어떻게 변화할지 말이야.”

“그 표본은 어찌 만드는데요?”

“네가 청호랑 주야장천 같이 있으면 되지, 뭐.”

모건이 무어가 어렵겠냐는 듯, 참으로 무심하게 답을 내놓았다. 시윤이 입술 끝에 꾹 힘을 줬다가 풀었다. 청호와 같이. 묘하게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식사를 계속 같이하라는 말씀입니까?”

“고작 그걸로 되겠냐?”

“그럼…….”

“아예 같이 사는 건 어때?”

“……예?”

시윤의 눈과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청호와 뭐, 뭐, 뭘 하라고? 귀를 의심해야 했다. 찰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척추가 뻣뻣하게 굳었다.

모건이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꿔 꼬았다. 그의 발끝이 살랑살랑 춤을 추듯 흔들렸다.

“아침 같이 먹고, 점심 같이 먹고, 저녁 같이 먹고, 가끔 시간 남으면 같이 멍도 때리고, 체스도 두고, 시답잖은 대화도 나누고 그래. 웬만하면 가까이 붙어서.”

“…….”

“그리고 열두 시간에 한 번씩 혈액 샘플 채취해서 보내. 많이는 필요 없어. 한 방울이면 돼.”

시윤의 눈동자가 좌우로 파르르 경련했다. 피 뽑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그 앞에 붙은 전제들이 참으로 께름칙하고 불편했다.

“시, 싫습니다.”

그가 모기 같은 목소리로 부정을 내놓았다. 그러자 모건의 눈썹이 비죽 마귀처럼 위로 솟구쳤다. 아니꼬움의 표현일 뿐이었으나, 시윤의 눈에는 실로 마귀처럼 보였다.

모건이 으음, 목울대를 일렁거렸다.

“일주일간 하루에 한두 시간 같이 있던 거로 C-, C0 두 단계가 올라갔어. 종일, 24시간, 365일 같이 있으면 얼마나 더 올라갈지 모르는데. 그래도 싫어?”

순간, 시윤의 속눈썹이 바짝 위로 뻗었다. 그래. 만약 모건의 예상이 맞는다면, 능력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고작 키스로 까무러치는 불상사가 더는 없겠지. 그럼 대장님도 보다 편히 저와 스킨십할 수 있을 거고, 그의 고통 역시 줄겠지.

꿀꺽. 욕망과 희망이 동시에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시윤은 수 초 만에 긍정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허나 여전히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대장님이 싫어하시면 어떡합니까?”

“안 싫어해.”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청호가 그랬다며. 너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편하다고.”

“…….”

“그럼 두 팔 벌리고 환영하지, 싫어할 리가.”

모건이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 심드렁히 말했다. 그 말에 시윤의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부끄러울 말이라곤 하등 없었거늘, 이상하게 볼이 뜨끈해졌다.

혹여 눈치 빠른 모건이 눈치챌까 벅벅 얼굴을 문지르는데, 모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열두 살에 입대해서 이제껏 혼자 산 놈이야. 잘 대해 줘. 살인귀처럼 피만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요즘은 가이드 만났다고 애처럼 신난 게 보기 나쁘지 않으니 말이야.”

“……예.”

시윤의 어깨가 책임감으로 묵직해졌다. 그가 멍한 얼굴로 갈라진 귓불을 잡아당겼다. 누가 가위로 싹둑 자른 듯한 귓불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아프고, 적응이 안 됐다.

잘해 드려야지. 더는 고통받지 않게, 그 아픔 내가 다 가져가야지. 저는 죽더라도, 그만은 꼭 살려야지. 언젠가 이 귓불이 힘겹지 않을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지.

시윤이 12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해 온 다짐을 조용히 되뇌었다.

청호의 숙소 문 앞에 선 시윤이 잘근잘근 입술을 씹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은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꼼지락 부산을 떨어 댔다.

모건의 말마따나, 청호는 표본을 만들기 위한 동거를 매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청호의 숙소에는 안 쓰는 방이 남아돌았고, 개인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시윤의 짐은 단출했으며, 연구동과 숙소동은 고작 10분 거리인지라 동거하자, 라는 결론이 나자마자 눈 깜짝할 새에 지금의 상황이 도래했다.

“뭐 해?”

목석처럼 굳은 시윤을 방관하던 폴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질문이었으나, 독촉에 가까운 어투였다. 시윤이 아, 저, 그게, 따위의 말을 내뱉으며 시간을 끌어 보려 했다.

“대장님 아침부터 기다리셨어.”

허나 폴은 가차 없었다. 그가 문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을 따라 파란빛이 돌더니 띠릭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시윤의 등을 안으로 밀어 버렸다. 시윤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짐짝처럼 숙소 안으로 내던져졌다.

“…….”

허리를 굽히고 어정쩡한 자세로 선 시윤이 헙 숨을 멈췄다. 바로 앞에 익숙한 홈 슬리퍼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홈 슬리퍼를 신은 누군가의 발. 아마도 청호의 발이겠지.

“안녕.”

아니나 다를까. 묵직한 저음이 뒤통수 위로 내려앉았다. 벌떡 상체를 올린 시윤이 경례했다.

“준위, 채시윤. 잘 지내셨습니까?”

“응. 나야 뭐. 너는?”

청호가 씨익, 시원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경례를 받았다.

“저도 잘, 잘 지냈습니다.”

팔을 내린 시윤이 다시 캐리어 손잡이를 조물조물 매만지며 대답했다. 청호가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고 있으니 자연히 침이 꿀꺽 넘어갔다. 하얗고, 보드랍고, 가느다란 손을 쥐고 싶은 욕구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모건이 안 된다고 했으니 참아야 했다.

“따라와. 방 알려 줄게.”

애써 눈을 뗀 청호가 빙그르르 뒤를 돌았다. 시윤이 그를 따라가기 위해 캐리어를 끄는데, 어째 캐리어가 더 빨리 움직였다. 날아가듯 미끄러진 그것이 청호의 옆에 바짝 붙었다. 청호가 또 어빌리티를 쓴 모양이다.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데.

그것을 멍하니 보던 시윤이 얼른 발을 움직였다. 캐리어에게 제 자리를 빼앗긴 것 같아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청호의 숙소는 일반 병사의 숙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전장이나 훈련실에서 대부분을 보내는지라 2인 1실에 침대 두 개, 개인 수납장, 책상이 다인 숙소를 썼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층마다 딸린 공용을 이용했고, 식사는 스물네 시간 개방된 식당에서 했다.

그런데 청호의 숙소는 숙소라기보다는 펜트하우스에 가까웠다. 굳이 더 묘사하자면, 아직 분양되지 않아서 가구도, 장식품도 없는 미분양 펜트하우스.

사실 시윤은 방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늘 이곳에서 그와 식사했으나, 소파와 침대가 놓인, 거실인지 다이닝 룸인지 침실인지 모를 그곳에만 머물렀던 터라.

복도는 길었다. 벽도 바닥도 온통 하얀 풍경이 청호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어울렸다.

“문 앞에서 서 계시던데. 저 때문입니까?”

쭈뼛쭈뼛 걷던 시윤이 넌지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응.”

청호가 가볍게 긍정했다.

“설마 또 폭주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기다렸어.”

“아……. 기다리고 계시는 줄 알았으면 일찍 올 걸 그랬습니다.”

“그것도 아니야. 늦지 않았어. 사실 연구실까지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폴이 너무 없어 보인다고 그러지 말래.”

“…….”

시윤이 갸우뚱, 고개를 옆으로 흘렸다. 청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구실까지 데리러 오는 게 왜 없어 보이는 행동인지 모르겠다. 그와 폴은 대체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던 걸까.

뭐, 이렇든 저렇든 그가 아픈 게 아니니 상관없었다. 지금은 ‘스킨십 금지’ 기간인지라. 모건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손끝도 닿아선 안 됐다. 그러니 그동안은 청호가 아프지 않길 빌어야 했다.

시윤이 입술을 옴질거리며 언제쯤 청호의 손을 다시 잡아 줄 수 있을는지 고민하는데, 청호가 하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가 네 방이야.”

그가 직접 열어 보라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시윤이 거리낌 없이 문고리를 쥐었다. 동그란 금색 문고리가 매우 어색했다. 아무래도 기지 안에는 문고리가 달린 문이 없는지라. 그런 시윤의 생각을 알았을까. 청호가 퍽 배려 깊은 문장을 내뱉었다.

“시스템으로 열고 닫히는 문은 네 동의가 없어도 내가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잖아?”

“예. 대장님 계급이 저보다 높으니까요.”

“그래. 근데 여기는 네 개인적인 공간으로 두고 싶어서 일부러 문고리를 달았어.”

그 말에 시윤의 눈이 살풋 가늘어졌다.

“……마음만 먹으시면 이런 문 따위 얼마든지 여실 수 있잖아요?”

어디 열기만 하겠는가. 수 초 만에 흔적도 없이 불태울 수도, 통째로 뜯어다가 종이처럼 구길 수도 있으면서. 청호는 열고자 하는 문에 문고리가 달려 있든, 자물쇠가 달려 있든, 하물며 전기가 흐르고 홍채 인식이 필요한 최첨단 잠금장치가 달려 있대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현실적인 시윤의 말에 청호가 겸연쩍은 듯,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집에서는 계급이 아니라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로 있고 싶다는 뜻이었어.”

“아…….”

시윤이 벙긋 입을 벌렸다.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 그래. 청호와 저는 그런 사이였는데. 가이아가 정해 준 운명의 짝인데. 대개 사랑하고, 애정을 나누고, 가족이 되는, 그런 운명인데. 항상 청호를 아프지 않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그 낭만적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윤의 귓바퀴가 발갛게 익었다. 대꾸할 말을 찾던 그가 끝내 침묵으로 답했다. 이런 쪽으로는 영 젬병이라 머리가 돌처럼 굳었다. 대신 얼른 문고리를 돌렸다.

인공적인 복도 조명과 달리 환한 햇살이 쏟아졌다. 눈가가 어그러질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청호가 준비한 방은 예상외였다. 그가 머무르는 거실처럼 침대와 소파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줄 알았는데. 뽀얀 침대와 폭신해 보이는 러그, 큼지막한 흰색 책상과 금색 조명, 그 밖에 우드 텍스처로 마감된 책장까지. 너무나 괜찮은 방이었다.

사실 시윤의 본가만큼 좋지는 않지만, 상시 머무르는 연구실에 비하면 천국에 가까웠다.

“어때?”

부지런히 시윤의 반응을 살피던 청호가 물었다. 꼭 부모에게 성적표를 검사 맡는 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너무…… 좋습니다.”

시윤이 과장 하나 없이 담백하게 황홀을 내놓았다. 큼지막한 창으로 담뿍 들어오는 햇살이 참으로 멋졌다. 그 뒤로 보이는 전투 부대는 더더욱 멋졌다.

전투 부대 전체를 내려다볼 기회는 흔치 않다. 그도 그럴 게, 시윤의 연구동은 부대와 꽤 멀었다. 전투 부대와 가장 가까운 건 당연히 숙소 건물이다. 전쟁이 발발할 시 바로 나갈 수 있어야 하니까. 그 옆에는 부대 병원이 있었고, 그밖에 보급 창고나 훈련동 등이 있다. 연구실은 부대 부지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사실, 굳이 위치가 아니더라도 헬기나 전투함을 타고 작전에 나가면 볼 수 있겠지만, 시윤은 단 한 번도 전장에 나가 본 적이 없으니 이 광경을 눈에 담을 기회조차 없었다.

시윤이 무언가에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열 맞춰 훈련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한쪽에서는 날거나 불을 쏘는 병사들도 있었다. 가지런히 주차된 전투기들은 꼭 장난감 같았다. 막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도 있었다. 그 전투기 옆구리에 뚜렷이 박혀 있는 포스의 국기가 찬란했다.

“정말, 정말 멋져요. 감사합니다, 대장님. 무척 마음에 들어요.”

시윤이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그 와중에도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호가 느린 걸음으로 시윤의 곁에 와 섰다. 그리고 넌지시 음절 하나를 던졌다.

“그…….”

“예.”

시윤이 빠릿한 몸짓으로 그를 돌아봤다. 큼지막한 담갈색 눈동자가 오후 햇볕을 담뿍 머금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청호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걸 느꼈다. 꼭 폐가 멈춘 듯했다. 그런데 심장은 쿵쾅쿵쾅 거칠게 뛰어 댔다. 누가 세게 움켜쥐고 주먹으로 마구 내려치는 것 같았다. 폭주가 왔나, 싶을 정도로 갑작스러운 충격이었다.

“말씀하세요.”

시윤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흘리며 청호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가느다란 머리칼이 그 움직임을 따라 차르르 흩어졌다. 하얗고 여린 목선이 드러났다. 폭주가 왔을 때 저기에 얼굴을 파묻었었는데. 좋은 냄새가 났었지. 보드랍고, 깨끗한 냄새였다.

당시를 생각하자 폐가 더 쪼그라들었다. 청호가 애써 호흡을 골랐다. 그런데도 꽉 막힌 기도가 뚫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흘깃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는데, 신기하게도 숨통이 트였다.

청호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그…… 화목한 집에 있는 네 방처럼, 여기도 너한테 화목한 방이 됐으면 좋겠어.”

“아…….”

“나는 너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벌써 화목하거든.”

“…….”

시윤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때때로 느끼는 거지만, 청호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참으로 무감하게 말하는 재주를 가졌다. 앞서 머뭇거렸던 걸 봐서는, 어떠한 뉘앙스인지 자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다정한 말을 한번 뱉기 시작하면 줄줄이 폭격처럼 쏟아 내곤 했다.

덕분에 방어벽 하나 없이 그것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시윤은 딱 죽을 맛이었다.

역사에 남을 영웅임과 동시에 괴물인 청호는, 사실 이다지도 감정에 충실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그걸 포스 안에서 시윤만 안다.

별난 형태의 뿌듯함과 우월감이 샘솟았다.

“예. 화목한 방.”

시윤이 빙긋 웃으며 턱을 주억였다. 그런 시윤을 가만히 보던 청호가 큼큼 쓸데없이 목을 가다듬었다.

청호는 짐 정리가 끝나면 함께 점심을 먹자며 방을 나갔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시윤이 바쁘게 캐리어를 풀었다. 가지런히 개켜진 옷을 꺼내는데, 돌돌 말린 수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시윤이 옷을 내려놓고 조심히 수건을 들었다.

말린 수건을 풀자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유리 덩어리가 나왔다. 언젠가 청호가 만들어 준 ‘에펠 탑’ 모형이었다.

시윤이 진귀한 보물 대하듯 애틋한 손길로 그것을 책상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빛이 들어오는 방향과, 자신이 앉는 시야를 대중하며 최적의 위치에 내려놓았다. 사방으로 퍼지는 빛 그림자가 말도 못 하게 아름다웠다.

사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청호와의 동거를 앞에 두고 잠이 오면 그게 더 이상했다.

근데, 지금은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옆에는 청호가, 등 뒤에는 전투 부대가, 눈앞에는 에펠 탑이 있는데 괜찮지 않을 건 또 뭔가, 싶었다.

입꼬리를 한껏 올린 시윤이 본격적으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호와의 동거는 생각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물론, 그와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시윤에게는 영광이었지만, 예상과 너무 달라서 김이 빠질 정도였다.

청호는 이른 아침 느긋하게 차를 한잔하고, 운동하러 나간다. 어떤 운동을 어떻게 하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러닝 머신만 주야장천 뛰다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내려오는 저와는 전혀 다른 운동을 하겠지. 분명 체력 단련 수준의 운동은 아닐 터였다.

운동복 차림의 그가 현관을 열면 폴을 포함한 에로아스 부대의 주축 몇이 그를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정오쯤 돌아온다. 그 후엔 시윤과 점심을 즐기고, 다시 나간다. 간부 회의에 참석할 때도 있고, 부대 작전 회의를 할 때도 있고, 다른 부대가 그에게 조언을 얻길 바라서 잠시 시간을 내어 줄 때도 있다.

그래도 청호는 하늘이 불그스름히 밤을 준비할 때쯤이면 꼭 돌아왔다. 가끔 강의가 길어지거나, 신병의 질문에 답해 주느라 늦는 시윤을 친히 데리러 오기도 했다.

그 후엔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적막하면서도 약간은 불편한 저녁을 먹는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과를 공유하고, 별다르지 않을 내일을 예상한다.

그게 다였다. 전쟁에 나가지 않는 청호의 나날은 큰 일과가 없었다. 시윤 역시 강의 두어 개와 클롭스 분석만 하면 되는지라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과거였다면 있는 일, 없는 일 다 끌어모아 했겠지만 지금은 모건의 말마따나 청호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막 저녁을 먹은 지금, 두 사람은 이렇다 할 행위 없이 각각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침묵을 거듭하고 있었다. 일주일째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시윤이 청호가 손수 타 준 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늘은 붉은 기가 연하게 일렁이는 히비스커스였다. 새큼하면서도 쌉싸래한 게 머금을수록 그 향이 짙어졌다.

“대장님.”

시윤이 나지막이 청호를 불렀다.

“응.”

청호 역시 단조로이 대답했다.

“보통 여가엔 무얼 하십니까?”

“……딱히. 여가 자체가 흔치 않아서.”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모건이 지나가듯 말했다. 원래 청호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많으면 하루에 두어 번씩도 전장에 나가는데, 3년 만에 복귀한 겸, 가이드를 찾은 겸, 진득하게 쉴 필요가 있다고 윗선에 강하게 말했다고 했다.

그에게도 흔치 않은 여유인데. 뭘 하면 좋을까. 뭘 같이 해야, 이 무의미한 시간을 ‘화목’하게 보낼 수 있을까. 시윤이 찻잔 테두리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체스 두실래요?”

“체스?”

“네. 옛날 사람들이 즐기던 보드게임인데, 꽤 재미있습니다.”

“모건이 좋아하는 거 말하는 거야? 흑백판 위에서 말 움직이는, 그거?”

청호가 언젠가 모건이 함께 놀자며 들이밀던 체스판을 떠올렸다. 귀찮아서 딱 한 번만 해 주겠다고 했는데. 킹에 퀸에 구구절절 설명이 어찌나 많은지. 그대로 말을 죄다 태워 버리고 나왔었다. 그랬더니 어디서 병사들이 가지고 노는 걸 기부라는 명목으로 빼앗아 왔었지.

“맞아요, 그거. 얼른 가서 빌려 오겠습니다. 20분이면 될 거예요.”

시윤이 당장 뛰쳐나갈 기세로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에 청호가 으음, 목울대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나한테도 있어, 그거.”

“……예?”

동그랗게 뜨인 시윤의 눈에 청호가 빙긋 웃어 보였다.

“와…….”

청호가 안내한 방에 들어선 시윤이 턱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거실만큼이나 널따란 방에는 온갖 것이 다 있었다. 꼭 만물상에 들어온 듯했다. 그저 그런 고물들을 모아 파는 만물상이 아니라,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취급하는 동화 속의 만물상.

보석, 책, 그림, 조각상, 여러 나라의 지폐와 동전들, 포스에서도 귀하게 취급되는 과거의 명품 시계, 게임기, CD, LP판, 로봇 피규어, 그리고 구석에 쌓인 보드게임까지.

아주 먼 과거의 물건부터 핵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물건들까지 다채롭게 존재했다.

한쪽에는 구리로 만들어진 지구본도 있었다. 시윤의 몸뚱이만큼 커다란 그것에는 나라의 수도마다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틈으로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지구본이자 조명으로 쓰이던 것인 모양이었다.

시윤이 귀신에게 홀린 표정으로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검지를 이용해 지구본을 살짝 밀었다. 그러자 둥그런 몸뚱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North America, South America, Asia, Europe. 영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다 어떻게…….”

“그냥. 이래저래 모으다 보니 이렇게 됐어.”

청호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선 채 말했다. 시윤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그냥, 이래저래 모았다고? 이 귀한 것들을? 언제? 어떻게? 혼란 가득한 그의 낯에 청호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보통 전장이라고 하면 드넓은 황야에서만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거든. 폐허가 된 도시일 때도 있고, 가끔은 유적지이던 곳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평화로운 마을이던 곳도 있어. 여기저기 둘러보는 재미가 있어서 틈틈이 돌아다녀. 몇 개는 모건 가져다주기도 하고.”

시윤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지구본 뒤에 놓인 무언가에 눈을 잔뜩 홉떴다. 마리아와 그녀의 무릎에 누운 그리스도의 조각상이었다.

“이거 설마……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입니까?”

“맞아.”

“이걸, 이걸 방에 두고 계시는…….”

“가짜야. 진짜는 포스 박물관에 있어.”

“아……. 놀랐습니다.”

시윤이 펄떡이는 심장을 추스르려 왼쪽 가슴을 슥슥 문질렀다. 허나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청호가 말을 얹었다.

“그래도 뒤에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진짜야.”

“…….”

피에타와 벽 사이에 놓인 <비너스의 탄생>이 시윤을 새초롬히 올려다봤다. 그림 속의 비너스와 시선이 마주친 시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밖에도 눈에 익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들이 줄줄이 방치되어 있었다. 난데없는 명화 투어에 시윤이 어쩔 줄 모르고 눈알만 굴리는데…….

“우습지?”

청호가 물었다.

“예?”

시윤이 되물었다.

“핵전쟁으로 인간은 다 죽었는데 예술과 역사는 남았어. 그것들을 지키고 있던 박물관의 수장고가 웬만한 벙커보다 단단했거든.”

“…….”

“과거의 인간들은, 핵탄두 한 방에 증발할 거였으면서 예술을 왜 그리 극진히 지켰을까.”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를 청호의 말에 시윤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무도 종말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 그리고 그 종말이 다시 없으리란 보장도 없지.”

“…….”

“그래서 여기 있는 것들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아. 더군다나 널 만나기 전의 나는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삶이었으니까.”

그가 뱉어 낸 문장들이 시윤의 가슴속에 푸욱, 푸욱 깊숙이 박혔다. 그래. 종말이 다시 없으리란 보장이 없지.

클롭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간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똑똑해지고, 강해졌다. 핵전쟁으로 한 번 종말을 경험했던 인간이, 이번엔 또 다른 방식의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몹시 대단해 보이던 대가의 그림들이 무감하게 느껴졌다. 결국엔 무생물인 것들이다. 어찌 됐든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생명보다 귀중할 수 없는 것들.

시윤이 그림에서 애써 시선을 뗐을 때였다.

“근데 신기하네.”

청호가 시윤을 향해 다가왔다.

“네?”

“에펠 탑은 모르면서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는 아는 게 말이야.”

“아, 미술사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부모님이 그림에 관심이 많으셔서요. 집에도 멋진 명화가 많거든요. 다이닝 룸에는 고흐의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가 걸려 있는데, 정말 예쁩니다.”

시윤이 청색과 금빛이 오묘하게 섞인 그림을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에 청호가 널브러지다시피 한 그림들을 대충 가리켰다.

“그래? 여기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줄게. 가져가.”

시윤의 눈이 댕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응.”

“그럼 저는, 어…….”

광대를 볼록하게 올린 시윤이 신중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절호의 기회를 아주 알차게 사용하고 싶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게, 수백 권의 책이 얼기설기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시윤의 눈동자가 단숨에 사랑으로 물들었다. 그가 마구잡이로 쌓인 물건들을 피해 책장 앞에 도착했다.

“책, 책도 됩니까?”

“책 좋아해?”

청호가 물었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음에도, 시윤은 음…… 탁음을 내며 잠시 고민했다.

“좋아하고 말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만져 본 책이라곤 몇 년 전에 형이 전장에서 주워 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책이 다였거든요. 그마저도 고어(古語)인 베트남어로 쓰여 있어서 읽지도 못했습니다. 제목도 간신히 알아냈어요.”

“…….”

“근데 아동용이라 그림이 그려져 있더라고요. 두꺼운 표지에 사그락거리는 종이 질감이 어찌나 좋은지. 수백 번은 본 것 같아요.”

시윤이 여전히 제 본가 침대 맡에 놓여 있는 책을 떠올렸다. 포스에서는 종이가 귀하다.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홀로그램이 있으니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기도 했다.

현대는 과거와 다르다. 취미를 위해 인력과 자본을 낭비하지 않았다. 의식주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도, 작가도, 음악가도 없다. 사장된 직업들이었다. 책 역시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으니 생산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어딘가 쌉싸름한 시윤의 표정에 청호가 듣기 좋은 음성으로 말했다.

“여기 있는 거 언제든 봐도 돼. 영어로 쓰인 것만 골라 왔으니, 다 읽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시윤의 눈 코 입이 한껏 피어났다. 그가 상기된 낯으로 까치발을 들었다가, 허리를 숙였다가, 고개를 기울이며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살폈다. To kill a Mockingbird(앵무새 죽이기), Romeo and Juliet(로미오와 줄리엣), A midsummer night's dream(한여름 밤의 꿈), Wuthering Heights(폭풍의 언덕). 이 엄청난 책들을 모두 봐도 된다니. 앞으로 며칠은 잠을 못 자겠구나, 싶었다.

청호가 어린아이처럼 신난 시윤을 가만히 바라봤다. 보기 좋게 휜 눈매와 동그랗게 말린 속눈썹을 보고 있으니 문장 하나가 미처 잡기도 전에 툭 튀어 나갔다.

“……나중에 같이 포스 바깥으로 나가면, 서점에 데려가 줄게.”

“정말요?”

“응. 4층짜리 건물이 통째로 서점인 곳도 있어.”

“그럼 그 4층 건물 전체가 책으로 가득 차 있단 말입니까?”

“그렇지. 서점이니까.”

시윤이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안 아이처럼 뒤꿈치를 들썩였다. 상상만 해도 황홀한 듯 애교살을 도톰하게 올리며 웃기도 했다.

언제일까. 저는 언제쯤 청호와 전장에 나가 에펠 탑을 보고, 서점에 들를 수 있을까. 언제든 상관없으니, 부디 또 다른 종말이 도래하기 전이었으면 좋겠는데.

시윤이 안개처럼 뿌연 미래를 가늠하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전장에 나갈 기회는 생각보다 이르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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