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6)

무력한 특별함

“뭐가 좋을까. 아, 그래. 포옹이 좋겠다.”

모건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포, 포옹은 어떻게……. 이, 이렇게? 아니면, 이……렇게?”

시윤이 포옹이라는 명사를 단어로만 입력한 로봇처럼 좌우로 팔을 삐걱거렸다. 그 꼴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청호가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자 시윤이 무언가에 밀린 것처럼 앞으로 끌려갔다. 너무 순식간이라 뒤꿈치에 힘을 주지도 못했다.

“…….”

청호의 단단한 가슴팍이 코앞에 있었다. 기겁한 시윤이 뒷걸음질을 치려 하자 청호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딱 달라붙었다.

“아…….”

시윤이 뻣뻣하게 굳었다. 시윤의 귓바퀴에 청호의 턱이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누군가가 말했다.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는 청호는 가까이 가기만 해도 코가 아플 정도로 진한 피 냄새가 난다고. 헌데 그에게선 몹시 보드라운 냄새가 났다. 그날, 모건의 연구실 앞에서 맡았던 바람 냄새와 전혀 달랐다.

“하아…….”

문득, 청호가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시윤의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릴 정도로 큰 한숨이었다.

청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시윤에게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청량함이 흘러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없이 몸을 섞었던 A급 가이드에게서 받았던 느낌과는 질이 달랐다.

부글부글 끓던 피가 미적지근하게 식었다. 저릿저릿하던 핏줄이 한결 편안해졌다. 가래가 낀 것처럼 끈적하게 치받던 호흡도 잔잔하게 늘어졌다.

그런데도 모자랐다. 아직 속이 뜨겁다. 수십 년 동안 뒤틀려 있던 오장육부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면 한참 멀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청호가 자신도 모르게 시윤을 세게 껴안았다. 양손으로 마른 등을 가두듯 결박하고,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미약하게나마 시윤의 기운이 강해졌다.

청호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스몄다. 하루 스물네 시간, 쉼 없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고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하면 거짓이나, 이만하면, 정말 이만하면 퍽 안온한 삶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였다. 시윤의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청호가 받치고 있던 허리는 무게 중심을 잃고 축 늘어졌다. 청호가 얼떨결에 시윤을 안아 들었다.

순간, 청호는 자신이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시윤이 반절로 뚝 분질러진 줄 알았다.

“흐으…….”

시윤은 떨고 있었다. 추위나 공포를 이유로 떠는 게 아니라, 경련에 가까웠다. 풍성한 속눈썹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바쁘게 팔랑거렸다. 어깨는 안으로 말렸고, 허리가 바깥으로 꺾였다가 수축하길 반복했다.

그러잖아도 하얬던 피부가 창백해졌다. 전신의 피가 전부 바깥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백색이었다. 그 와중에도 입술은 악물고 있는 게,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듯했다.

“얘 왜 이래?”

청호가 모건을 보며 물었다. 모건이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시윤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채 준위. 채 준위, 괜찮아?”

“아윽…… 예. 괜찮, 괜찮습니다.”

시윤이 바들바들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을 짜냈다.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줄 쏟아졌다. 눈앞은 가물가물했고, 추웠다가 더웠다. 그저 겨울과 여름 같은 온도가 아니라, 핏줄을 타고 얼음이 흐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춥다가, 뇌가 녹으면 어쩌나 무서워질 정도로 더웠다.

사실 청호와 처음 손을 잡을 때부터 이러했다. 속이 꽉 차는 느낌. 힘이 얹히는 느낌. 핏줄이 뚱뚱하게 부푸는 느낌. 나약한 몸뚱이라 숱한 감기와 몸살, 잔병을 달고 살았지만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참아 냈다. 청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제가 짝이든, 아니든. 좋은 인상을 남겨 두고 싶었다.

끝내는 실패했지만.

질끈 눈을 감은 시윤이 몸을 옹송그렸다. 청호가 그를 안아 진찰 베드에 올려놨다. 모건이 바쁜 손놀림으로 홀로그램 차트를 두드렸다.

그가 화면 가득 떠오른 활자들을 빠르게 훑었다. 모건이 원인을 분석할 동안, 청호는 연구실 구석에 놓여 있던 담요를 띄워 시윤의 몸을 덮었다. 시윤이 본능적으로 담요를 여몄다.

곧 모건이 이유를 알아냈다. 사실 뻔한 이유였다.

“두 사람 힘 차이가 너무 커서 그래.”

“뭐?”

“가이드는 에스퍼의 힘을 대신 삼켜서 바깥으로 흘려보내는 매개체야. 일종의 배수구 같은 거라고.”

“…….”

“C급인 채 준위 배수구는 요만한데, SS급인 네가 힘을 불도저처럼 쏟아부으니까 과부하가 걸린 거야. 힘이 얹힌 거지.”

모건이 검지와 엄지를 붙여 아주 작은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청호가 하, 짧게 헛웃음을 끊어냈다.

“그렇게 따지면 이제껏 나랑 몸을 섞었던 가이드들도 이런 반응이었어야지. 걔들은 괜찮았어.”

“그러니까.”

“뭐가 ‘그러니까’야.”

청호가 가감 없이 얼굴을 구겼다. 모건의 말은 항상 단번에 이해가 어렵다.

“그러니까, 그 가이드들은 네 힘을 그만큼 못 받아들인 거고, 채 준위는 그 이상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야.”

“…….”

청호가 모호한 눈동자로 시윤을 쳐다봤다.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는 시윤은 이미 정신이 이곳에 없는 듯했다.

모건이 그런 청호의 앞으로 홀로그램을 밀었다. 아까까지 따로 놀던 어빌리티 파장이 완전히 겹쳐져 있었다. 청호가 떨떠름한 낯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매칭됐어.”

“……뭐?”

“너희들 가이아가 짝지어 준 반려 맞아.”

모건이 땅땅 판결을 내렸다. 청호가 다시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 역시 흐릿한 눈동자로 청호를 응시했다. 그렇게 두 개의 시선이 부딪치려는 순간, 시윤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가이드, 에스퍼, 청호, SS급과 C급. 그리고 배수구. 아주 많은 것들이 스쳐 갔으나 남은 건 고통 하나뿐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시윤의 시야에 낯선 풍경이 비쳤다. 사실 시윤에게 익숙한 풍경은 몇 없었다. 개인 연구실 아니면 집. 그것도 아니면 강의실이나 모건의 연구실, 자주 가지 않는 식당 정도가 다였다.

그중에, 이다지도 삭막한 풍경은 없었다. 공기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로 넓은 공간. 멀찌감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소파 하나. 그리고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 하나. 언뜻 보면 집 같은데, 또 집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저 멀리 복도도 보였다. 그 끝엔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으나, 아마 욕실이나 부엌 따위가 있겠지. 이 공간이 집으로 쓰이는 게 아니라면, 없을 수도 있고.

시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찌릿찌릿한 통각이 사지 끝에서부터 올라왔다. 그가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꼭 감전된 것 같다. 쥐도 새도 모르게 벼락이라도 맞았던가.

시윤이 마지막 기억을 되살려 보려 눈썹을 찌푸리는데,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홈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였다. 괜히 긴장한 시윤이 이불을 틀어쥐었다.

곧 슬리퍼의 주인이 나타났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어…….”

시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갸우뚱, 고개를 흘렸다. 검은 머리칼에, 더 검은 눈동자.

청호였다.

그가 왜 여기에…….

시윤이 바쁘게 기억의 편린을 덧붙였다. 가이드 발현, 연구센터, 모건, 청호, 포옹, 매칭, 정신을 잃었던 자신. 거기까지 반추한 그가 눈을 부릅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니, 굴러떨어졌다. 그러더니 청호가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엉거주춤하게 경례했다.

“주, 준위 채시윤!”

쓸데없이 우렁찬 인사에 청호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일어나면 안 되는데.”

그 말과 동시에 침대가 슬쩍 앞으로 움직였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침대 모서리가 시윤의 무릎 뒤를 쳤다. 시윤이 경례한 자세로 풀썩 침대에 앉았다. 놀란 그가 다시 일어서려는데, 어깨 한쪽이 묵직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어깨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일어나면 안 된다니까.”

청호가 시윤의 앞에 앉았다. 멀찌감치 있던 소파 한쪽이 어느새 그의 엉덩이 아래에 와 있었다. 시윤이 귀신에 홀린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자.”

청호가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밀었다. 시윤이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보며 머그잔을 받았다. 잔이 따뜻했다. 향기로운 냄새도 났다. 흔한 허브티였다. 아니, 청호가 준 것이니 흔한 건 아니겠다. 세상에 그가 타 주는 차를 마신 이가 몇이나 될까.

시윤이 비싯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따끈한 것이 목구멍을 넘어가니 어깨가 저절로 사르르 풀렸다.

청호는 그런 시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느다란 머리칼이나, 차를 홀짝일 때마다 아래로 내리깔리는 속눈썹, 새빨간 입술, 차를 음미하는 듯 우물거리는 볼 같은 것 말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제 가이드가 몹시 신기한지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윤이 그의 시선을 눈치챈 건 차가 반쯤 사라졌을 때였다. 혹 눈이 마주칠까, 부러 아래만 보고 있었던 탓에 전혀 몰랐다.

“어…… 그…… 청호…… 대장님.”

시윤이 더듬더듬 그를 불렀다. 그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혀 위를 나도는 음절이 뭐라고 그렇게 멋있는지. 청호 대장은 어떻게 이름도 청호일까. 시윤이 아무도 모르게 찬탄했다.

“응.”

청호가 입술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시윤이 별안간 푹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청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가?”

“제가…… 너무 무능력해서…….”

“…….”

“청호 대장님 가이드면 적어도 A급은 되어야 하는데, 제가 C급이라……. 그래서 아까도 그렇게 기절해 버리고…….”

시윤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떨어졌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머그잔 안으로 얼굴을 쑤셔 넣을 기세였다.

청호가 느린 몸짓으로 시윤의 손에서 머그잔을 빼냈다. 그러곤 대충 뒤로 던져 버렸다. 물과 잔이 분리됐다. 먼저 바닥에 떨어진 건 머그잔이었다. 아니, 바닥에 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그 머그잔 위로 물이 천천히 추락했다. 마치 주전자가 물을 따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청호가 살짝 허리를 굽혔다. 시선이 직선으로 부딪치는 위치였다. 고개를 돌리지도, 눈을 피하지도 못한 시윤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전투에 나가 봤나?”

청호가 물었다.

“……아니요. 며칠 전까지 퓨어였어서.”

시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히 민망했다. 매번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 앞에서, 나는 참으로 편하고 방탕하게 살아왔노라 고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청호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했다.

“다들 전투에 나갈 땐, 죽을 각오로 싸운다고 하지.”

“…….”

“나도 죽을 각오로 전투에 나가. 이유는 다르지만.”

“…….”

“대부분 클롭스에 뜯어 먹혀 죽을까 봐 걱정하는데, 나는 내 힘에 휩쓸려 죽을까, 걱정하거든. 사실 굳이 전투 때가 아니더라도 하루 스물네 시간 하는 걱정이지.”

시윤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청호에게 가이드가 없다, 시한부인 목숨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새로웠다.

청호가 조금 더 허리를 숙였다. 훌쩍 가까워진 거리에 그가 내쉬는 숨 자락이 볼을 간질였다. 그의 검은 동공에 시윤의 얼굴이 가득 찼다.

“근데 아까 널 안았을 때. 처음으로 그 걱정에서 해방됐어.”

“…….”

“그래서 나는 고마운데. 지금이라도 나타나 줘서.”

낮은 목소리가 감미로이 속삭였다. 시윤은 그 목소리가 뱀처럼 자신의 심장을 칭칭 감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기이하게도, 그 옥죄임이 불편하지 않았다.

고맙단다. 내가 나타나서. 스물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발현해 고작 C급에 불과한데도, 고맙단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대단한 청호가.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준 것이다.

평생 쓸모없던 내가. 드디어 필요한 존재가 됐다.

시윤은 하마터면 주책맞게 눈물이라도 떨굴 뻔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굳이 거짓을 말해야 할 이유가 있나?”

청호가 비스듬히 턱을 들고 시윤을 바라봤다. 시윤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냥…… 당연히 실망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물우물 말을 녹여 먹는 듯한 시윤에 청호가 피식 웃었다.

“늘 최악만 생각하고 살면 아주 작은 것에도 기뻐할 수 있어.”

“…….”

“아, 네가 작다는 뜻은 아니야.”

청호가 친히 말을 덧붙였다. 시윤이 처음으로 해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윤은 청호가 막연히 차갑고 딱딱한 사람일 거라 예상했다. 근데 잘못 생각한 듯싶다. 물론, 고작 몇 마디 나눈 것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순 없겠으나, 그래도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청호가 시윤을 따라 미소 지었다. 그의 도독한 입술이 시원하게 갈라졌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굳혔다. 화가 났거나, 심기가 뒤틀린 건 아니었고, 망설임에 가까웠다.

“손잡으면…… 아파할 건가.”

몇 번이나 의미 없이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물었다. 제힘을 이기지 못해 방금까지 쓰러져 있던 가이드에게 하기엔 몹시 남세스러운 요구였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전신의 세포가 울부짖고 있었다. 아까 맛보았던 그 달콤한 청량함을 다시 내놓으라고. 고통 속에서 살아왔던 평생을 보상받겠다는 듯, 탐욕스럽게 울었다. 통제를 벗어난 눈알은 멋대로 시윤의 하얀 목덜미와 손을 핥아 댔다.

모건이 시윤의 한계를 정확히 알기 전까지 스킨십을 삼가라 일렀는데. 나라를 지키는 것보다 그 말을 지키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보라. 결국 참지 못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날름 내뱉고야 말았잖는가.

청호가 긴장 어린 눈으로 시윤을 주시했다. 긴장이라니. 클롭스 수백이 떼로 쏟아져도 별생각 없던 저인데. 혹 시윤의 입에서 거절이 나올까 긴장하다니. 우습지만 실로 그랬다.

물론, 청호는 시윤이 싫다면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떻게 찾은 가이드인데. 잘해 주고 싶었다.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욕심만 앞세우다 죽어 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그래도, 그런데도 염치없이 그가 거절하지 않길 바랐다.

그런 청호의 마음을 꿰뚫어 본 걸까. 시윤이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깨끗한 손이 청호에게 영광을 내렸다.

“참을 수 있습니다.”

“아플 텐데.”

“아까도 손잡는 건 괜찮았어요.”

시윤이 능청맞게 거짓을 내놓았다. 잠깐 시윤의 안색을 살피던 청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곧 두 개의 손바닥이 마주 닿고, 어색하게 손가락이 얽혔다.

청호의 속눈썹이 느슨하게 늘어졌다. 숨소리도 한층 편안해졌다. 굳건히 닫혀 있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으며, 딱딱하게 굳어 있던 눈동자 역시 말랑말랑해졌다.

시윤은 그런 청호의 변화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목도하고 있었다.

내가 진짜 가이드가 됐구나. 그 대단한 청호의 가이드가 됐어. 가이아가 그렇게 짝지어 줬다. 그 말은, 아무리 애를 쓰고 발버둥 쳐도 청호와 떨어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묘한 우월감과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이 솟구쳤다. 지켜야 할 이가 생겼다. 아니, 지킬 수 있는 이가 생겼다. 그건 시윤을 또 다른 의미로 발현시켰다.

시윤이 조금 더 세게 청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의 힘에 휩쓸린 손바닥이 타는 듯하고, 손목은 뒤틀리는 것 같고, 팔뚝은 찌릿찌릿했으나 하등 고통스럽지 않았다.

“청호 대장님.”

“응.”

청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윤이 올곧게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다짐하듯,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언젠가는, 아마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

“제가 그 귀걸이 빼 드릴게요.”

청호가 반대 손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돌덩이가 만져졌다. 족쇄임과 동시에 목숨을 부지하는 귀걸이였다. 반평생을 함께해서 이제는 제 몸과 같은 것인데. 이것이 없었을 때 얼마나 자유로웠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하늘에서 똑 떨어진 나의 가이드가 그것을 떼어 주겠단다. 고작 포옹으로 까무러치는 주제에 참으로 귀여운 다짐이었다.

청호가 엄지로 시윤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저와 달리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손에 절로 미소가 퍼졌다.

“이제껏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낭만적인 말이네.”

“…….”

“기대할게.”

청호는 태어나 처음으로, 미래를 기대하게 됐다.

* * *

수백 개의 진득한 시선이 시윤을 졸졸 따라왔다. 어찌나 불같은 시선인지 살갗이 다 따끔거렸다. 평생 타인에게 이런 관심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게 다 노란색 테두리의 명찰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녹색 테두리였던 시윤의 명찰이 오늘은 노란색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행정반에 가 받아 온 것이다.

그저 두꺼운 천에 불과한 그것이 어찌나 감동적인지. 노란색 자수가 금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그리고 행정반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모건에게 듣기론, 어젯밤부터 소문이 돌았단다. 스물여섯 살에 발현한 가이드가 있다는 소문. 그리고 청호에게 드디어 반려 가이드가 생겼다는 소문.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윤의 어빌리티 등급까지 알려지진 않았다. 사람들은 막연히 시윤 역시 청호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겠거니 생각하는 듯했다.

그 때문일까. 시윤은 그 시선이 몹시 불편했다. 분에 맞지 않는 관심인 것 같아서. 실은 고작 손잡는 것으로도 버거워서 헐떡이는데. 영원히 숨길 수 있는 사실도 아니고, 추후 진실이 밝혀지면 관심이 경멸로 바뀔 게 뻔했다.

그래도 시윤은 아무렇지 않게 일과를 해 나갔다. 도어 검사와 반려 매칭 때문에 밀린 업무를 처리했고, 강의도 나갔다. 틈틈이 가이드 능력을 키우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검색도 해 봤다.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런데도 힘든 줄 몰랐다. 과거였으면 해가 질 무렵부터 골골거리며 좀비처럼 있었을 텐데.

지금은 나름 가이드가 됐다고 체력이 는 건지, 아니면 그저 기분 탓인지 구분은 안 되지만, 어쨌든 힘이 넘치니 좋기만 했다.

마지막 일정은 강의였다. 이제 제법 시선과 수군거림에 익숙해진 시윤은 병사들이 무어라 속삭이든, 꼿꼿하게 수업을 이어 갔다. 어차피 내용만 다를 뿐이지. 그 전에도 퓨어니 낙하산이니 나도는 뒷말이 많았었다.

“트롤은 지능이 매우 낮습니다. 고블린과 크게 차이가 없죠. 대신 크기가 약 다섯 배 정도 됩니다. 인간과 비교하면 열 배가 훌쩍 넘는 겁니다.”

시윤이 병사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며 설명을 이었다. 특유의 잔잔한 목소리가 적막한 강의실을 유순하게 나돌았다.

“트롤은 쉽게 생각해서 큰 고블린이라 보면 됩니다. 물론, 고블린처럼 죽이기 쉬운 클롭스는 아닙니다. 덩치만큼 힘과 방어력 역시 높거든요. 가죽이 두꺼워서 칼이나 총이 통하지 않죠. 그래서 중급 클롭스에 속합니다.”

시윤이 홀로그램을 터치했다. 움직임 없이 서 있던 트롤이 으르렁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붕붕, 휘두르는 방망이가 몹시 위협적이었다.

“C급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트롤을 만나면, 피하세요. 도망가십시오. C급의 어빌리티로는 트롤의 가죽을 뚫을 수 없습니다.”

시윤이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도망. 전투에서는 몹시 예민한 단어였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데구루루 눈을 굴리며 입을 삐죽였다. 도망이라는 건 군인에게 매우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당연했다.

“준위님. 질문 있습니다.”

그때, 오른쪽 창가에 앉아있던 남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시윤이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병 호프만입니다. 물리적 공격이 아닌 다른 공격도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제 에스퍼 어빌리티는 신경 조작입니다. 트롤의 뇌나 인지 능력을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또 물이나 얼음, 염력 능력이 있는 에스퍼라면, 트롤의 내장을 뒤틀 수 있으니 C급도 공격이 가능한 거 아닙니까?”

호프만은 시윤이 굳이 ‘C급’이라는 전제를 붙인 게 마뜩잖은 듯했다. 아마 이곳에 있는 C급 모두가 그러리라.

연하게 미소 지은 시윤이 느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바닥과 마찰하는 군화가 뚜벅뚜벅 경쾌한 소리를 냈다.

“방금 호프만이 말한 방법은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트롤은 물리적 공격으론 상대하기 힘든 클롭스이나, 호프만이 말했듯이 부드러운 부분, 그러니까 내장이나 뇌, 눈을 노리는 건 아주 좋은 공격법이죠.”

시윤의 말에 호프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시윤의 눈썹이 침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호프만. 트롤의 가죽은 아주, 아주 두꺼워요. 물론 뼈도 두껍죠. 그 가죽과 뼈 너머에 있는 내장까지 힘이 닿지 않을 겁니다. C급 정도의 어빌리티라면 더더욱이요.”

호프만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아…… 거기까진 생각 못 했습니다.”

“그러니 괜한 시도 하지 마세요. 만약 트롤에게 밟히면, 호프만 옆에 있는 이병들이 호프만의 시체를 바닥에서 긁어내야 할 겁니다.”

시윤이 각진 음성으로 호프만의 가슴팍에다 비수를 콱콱 내리꽂았다.

“그러니 그냥 도망치세요.”

“그래도 그렇지, 전투에서 도망치라는 말씀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하십니까?”

듣다 못한 호프만이 눈을 부라렸다. 희번덕거리는 눈알에 분노와 모멸감이 가득했다. 시윤이 그런 호프만을 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살아야 하니까요. 클롭스 하나가 죽는 것보다, 호프만이 사는 게 더 중요합니다. 가망 없는 싸움에 목숨을 낭비하지 마세요.”

“하지만…….”

호프만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흩트렸다. 시윤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병사들을 쳐다봤다.

“C급이든, A급이든 가이아는 다 각자의 쓰임새가 있도록 여러분을 창조했습니다. 예를 들면, 호프만이 가진 신경 조작 능력은 중급 클롭스인 트롤에겐 먹히지 않겠지만, 바실리스크 같은 상급 클롭스에겐 먹힐 겁니다. 왜냐하면…….”

“바실리스크는 머리 쪽 가죽이 얇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시윤 대신 말했다. 첫 강의 때부터 인상 깊었던 종우였다.

“그렇죠.”

시윤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살핀 호프만의 얼굴이 한층 갰다.

한시름 놓은 시윤이 눈두덩을 짓눌렀다. 뒤늦게 피로가 올라왔다. 홀로그램 귀퉁이에 뜬 시계가 마침 마칠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윤이 홀로그램을 밀어 껐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경례는 받은 거로 할게요.”

그의 말에 병사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제각각 기지개를 켜거나, 두셋씩 모여 수다를 떨었다. 배가 고프다며 뛰쳐나가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 시간이었다. 대충 알약 몇 개를 주워 먹고, 밀린 일을 해야 했다. 분석할 보디캠이 연구실 귀퉁이에 잔뜩 쌓여 있었다.

태블릿과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챙긴 시윤이 막 강의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끝났어?”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태산만 한 덩치. 묵직한 목소리. 검은 눈동자.

청호였다.

시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직 강의실에 남아 있던 병사들 역시 바위처럼 굳었다. 난데없이 나라의 영웅이 행차하셨으니 당연했다.

시끄럽던 강의실이 단숨에 고요해졌다. 청호는 그 정적 위를 아무렇지 않게 가로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던 시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 여기는 왜, 아니, 어떻게, 어쩐 일로 오셨, 오셨어요?”

시윤이 방금 말을 배운 갓난쟁이처럼 더듬었다. 청호가 빙긋 멋들어지게 웃었다.

“너 만나러 왔지.”

“저를요? 왜요?”

살풋 미간을 구긴 시윤이 지나치게 뾰족이 대꾸했다. 그에 청호가 당황한 듯 목울대를 꿀렁였다.

“약속을 하고…… 왔어야 했나?”

“예? 아니, 그건 아닌데…….”

“미안. 내가 그런 거에 서툴러서.”

청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부하나 적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에 서툴렀다. 삶의 반 이상을 전쟁터에서 보낸 터라.

그래, 시윤은 제 부하가 아닌 반려인데. 약속을 잡고 오는 게 맞았다. 근데 약속은 어떻게 잡지. 전화로? 아니면 메시지로? 그것도 아니면 부하를 시켜 물어보고 오라 해야 하나.

청호가 열심히 해답을 찾고 있는데, 시윤이 팩팩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요, 아니요. 사과하지 마세요. 제가 말실수한 겁니다. 여기요.”

그가 냅다 손을 내밀었다. 청호가 모호하게 뒤틀린 얼굴로 희멀건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스킨십을 바라고 온 건…… 차마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주목적이 이건 아니었는데.”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애써 아닌 척, 모른 척하고 있던 추악한 속내를 단번에 간파당한 것 같아 부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졸렬한 몸뚱이는 이미 시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래도 주니까 잡을게.”

순식간에 화창해지는 기분에 청호가 주책맞게 입꼬리를 들썩였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청호를 구경하기 위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병사들이 옆으로 갈라졌다. 그러고는 더할 나위 없이 바른 자세로 경례했다. 청호는 그 수많은 인사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시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청호의 그림자에 숨어 걸었다.

“보통 저녁은 어디서 먹지?”

“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시윤이 데구르르 눈을 굴렸다.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는데, 괜히 말하기가 민망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미주알고주알 제 이야길 털어놓는 성격이 아니라서.

“혹시 약속이 있는 건가?”

청호는 시윤의 묵음을 난처로 해석했다. 시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대부분 연구실에서 알약으로 때워요.”

“그렇게 바빠?”

“적당히 바쁩니다. 일하는 걸 좋아해서요.”

참으로 독특한 대답에 청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 일하는 게 좋다니 신기해서. 모건은 맨날 도망가고 싶다고 징징거리거든.”

그 말에 시윤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그 예쁜 녹색 눈동자를 한껏 구긴 채, 콧구멍으론 거센 콧김을 내뿜고, 광대는 푸르르 경련하며 툴툴거리는 모건이 떠올랐다.

시윤의 웃는 낯을 물끄러미 보던 청호가 손을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한 시간 정도 나랑 있어 줄 수 있나?”

“어…….”

시윤은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와 보내는 한 시간이라. 시간을 내는 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클롭스 분석이 주된 업무였으나, 가이드가 된 이상, 이제는 청호의 안정을 도모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업무였다.

다만, 제 능력이 의심되는 것이다. 한 시간은커녕 5분은 버틸 수 있을는지. 손잡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어깻죽지까지 감각이 없었다. 등줄기에 식은땀도 뱄다.

시윤이 우물우물 입술만 달싹이자 청호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시간만. 그 이후론 방해하지 않을게.”

그 말에 시윤이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뭐라고 감히, 청호의 말을 거역하겠는가.

“……네, 좋아요.”

손이든, 팔이든 아프라면 아프라지. 그러다 똑 떨어져 버린다 한들, 상관없었다. 그깟 팔 뭐 그리 대수라고.

청호는, 청호에게는, 청호를 위해서라면 시윤은 못 할 게 없었다.

먼 옛날. 열여섯 무렵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그러기로 다짐했었다.

“나와 있을 때랑은 전혀 다르던데.”

청호가 이끈 곳은 며칠 전 와 봤던 그의 방이었다. 아니, 집이라 해야 하나 숙소라 해야 하나. 아무튼, A급 이상의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는 숙소 건물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 널찍한 이동식 트레이가 들어왔다. 촉촉하게 구운 치킨, 조금 딱딱한 빵, 육즙을 가득 머금은 소고기가 맛깔스러웠다. 포스 안에서, 더욱이 부대 안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음식들이다. 아무래도 청호의 식사이니 나라에서도 신경을 쓰는 거겠지.

그래도 몹시 부유한 측에 속하는 시윤에겐 익숙한 음식이었다. 능숙하게 칼질하던 시윤이 청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예?”

“또박또박 말도 잘하고. 시선도 안 돌리고.”

청호가 어딘가 장난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시윤이 실눈을 떴다가 턱을 안으로 당겼다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다 간신히 그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깨달았다.

“제 강의 보셨습니까?”

“조금.”

시윤이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혹 무슨 실수를 했을까, 머리가 팽글팽글 분주하게 돌아갔다. 신병이야 전투 경험이 거의 없으니 제가 실수해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청호는 대번에 눈치챘을 터였다. 얼마나 우스울까. 전장에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는 애송이가 클롭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으니.

시윤이 강의 내용을 검토하는데, 청호가 테이블 위로 비스듬히 턱을 괬다.

“가망 없는 싸움에 목숨을 낭비하지 말라. 인상 깊은 말이었어.”

시윤의 귓바퀴가 순식간에 화르륵 붉어졌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다. 혹 호프만이 쓸데없는 아집과 자존심 때문에 죽어 버릴까 봐.

청호에겐 같잖은 말이겠지. 고작 트롤을 마주쳤다고 도망가라니. 매일 수십, 수백 개의 죽음을 목도하며 살아온 그에겐 참으로 가소로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윤에겐 아니었다. 그들이 C급이든, B급이든 중요치 않았다. 모두 귀한 생명이었다.

“……신병들이 B급만 돼도 그런 말은 안 했을 겁니다.”

시윤이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간 얼굴을 응시하던 청호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알아. 가볍게 한 말은 아닌 것 같았어.”

“…….”

“틀린 말도 아니지.”

목숨을 귀중히 여기는 게 잘못은 아니다. 물론, 전투 중에 병사들이 죄다 도망가 버리면 문제겠으나, 질 게 뻔한 싸움에 달려드는 것도 미련한 짓이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하루살이들과 무어가 다르겠는가.

그 말을 끝으로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시윤은 접시에 코 박고 음식을 녹여 먹다시피 했고, 청호는 그런 시윤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턱을 움직였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공유할 흥밋거리나 취미도 없었다. 둘 다 사회성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라 더했다.

“거기는 어쩌다 다쳤지?”

먼저 적막을 깬 건 청호였다.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팔다리를 살폈다. 저도 모르게 다친 곳이 있나 싶어서. 허나 멀쩡했다. 뒤늦게 청호의 시선이 자신의 귓불에 박혀 있는 걸 알아차렸다.

시윤이 황급히 갈라진 귓불을 잡아 숨겼다. 심장이 쿵, 아래로 추락했다.

“그냥, 그냥 어릴 때, 어쩌다가…… 다쳤습니다.”

시윤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청호의 눈이 설핏 가늘어졌다. 언뜻 보기에도 ‘그냥’ 또는 ‘어쩌다가’ 다친 상처가 아니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큰 사건이 얽혀 있는 것 같은데. 청호는 그 사실을 쉽게 눈치챘으나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아직 그와 저는 그만큼 깊은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나중에 물어봐도 될 일이다. 혹, 대답해 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윤이 제 곁에 있는 한, 그의 몸에 저런 상처가 날 일은 다시 없을 테니 말이다.

청호는 약속을 칼같이 지켰다. 그들이 만난 지 딱 한 시간이 되었을 때, 시윤은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도 청호는 잡고 있던 손을 놔주지 않았다. 아직 30초 남았다. 이렇게 헤어지면 적어도 내일까지는 그를 만지지 못할 테니 1초가 아쉽고, 아까웠다.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한 청호가 작은 손을 조물거리고 있자, 시윤이 넌지시 물었다.

“안아…… 드릴까요?”

일순, 청호의 눈이 번뜩였다. 검은 동공이 푸르스름하게 바랬다. 꼭 맹수 같은 안광이었다.

그도 그럴 게, 포옹은 손을 잡는 가벼운 스킨십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안정을 제공했다. 청호는 며칠 전, 시윤을 안았을 때의 그 기분, 감각, 쾌락, 시윤의 온도, 촉감, 하물며 부유하던 공기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지를 떨며 쓰러졌던 시윤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청호가 아쉽게 손을 놓았다. 그러지 않고는 그대로 끌어당겨 품에 가둬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시윤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저도 괜찮아요. 안아 드릴게요.”

“하지만 네가 아프잖아.”

“…….”

시윤이 볼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참 아래인 저를 걱정하는 청호가 이상했다. 그는 원래 이렇게 다정한 성격일까. 소문에는 아주아주 무섭고, 차가운 사람이랬는데. 피도 눈물도 없다고 했는데. 사실 인간이 아니라, 포스가 만들어 낸 비밀 로봇이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소문도 들어 봤거늘.

냉기가 철철 흐르는 그의 얼굴과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시윤이 청호의 단단한 손바닥을 매만지며 말했다.

“1분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저도 계속 아프고 적응해야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나중에는 2분이 되고, 3분이 되어도 멀쩡할 겁니다.”

청호가 혀를 내어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시윤의 음성은 강의할 때와 비슷했다. 제 앞에선 말을 더듬고, 시선도 못 마주치더니. 수십 명의 병사 앞에선 그렇게 똑 부러졌었지.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또 좋기도 하고.

청호가 본 시윤은 몹시 신기한 사람이었다. 선물처럼 제 앞에 나타난 가이드라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묘하게 거슬리고 신경 쓰였다.

지금도 보라. 몇 번 본 적도 없는 저를 위해 기꺼이 아프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도 저리 굳건한 목소리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예?”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그야…… 저는 청호 대장님의 가이드니까요.”

시윤이 어찌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청호의 눈살이 살풋 구겨졌다. 득과 실을 계산하지 못하는 시윤이 답답했다. 분명 멍청한 건 아닌데. 모건이 시윤은 아주 어린 나이에 석박을 동시에 땄을 만큼 똑똑하댔는데. 왜 이다지도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호가 부러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나한테 너는 없어선 안 될 존재야. 하지만, 너한테 나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텐데.”

“그럴 리가요.”

시윤의 눈꼬리가 처량한 내리막길을 그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얼굴이었다. 청호가 답답한 마음에 후우, 앞머리를 불어 올렸다.

“나는 너를 아프게 해. 아마 앞으로도 아프게 할 거고.”

“제가 모자라서 그런 건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청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윤은 참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청호의 한쪽 눈썹이 비죽, 높은 산을 만들었다.

“……신경 쓰지 말라?”

“네. 그건 제 사정이니까요. 대장님은 언제든, 그냥 필요하실 때 저를 쓰시면 됩니다. 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요. 그러니까 새벽에도 상관없어요.”

종알종알 달싹이는 시윤의 입술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청호가 한 발자국 시윤에게 다가갔다. 그의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단숨에 시윤을 잡아먹었다.

순간 놀란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차, 했으나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청호의 입매가 삐뚜름히 뒤틀렸다.

“이렇게 겁먹으면서.”

“바, 방금은 조금 놀라서…….”

시윤은 곧장 반박하려 했으나, 싸늘한 청호의 얼굴에 꾹 입을 다물어야 했다. 청호가 친히 허리를 굽히고 시윤과 눈을 맞췄다.

“필요할 때 언제든 쓰라고? 나는 널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여태 아프셨잖습니까. 제가 조금만 더 일찍 발현했어도…….”

“나 시간 많아. 원래 없었는데, 네가 나타나서 많아졌어. 그러니까 천천히, 하나씩 해 가자.”

청호의 검은 눈동자에 시윤이 맺혔다. 그 까만 동그라미를 멍하니 보던 시윤이 다시 입술을 떼려 했다.

“그래도…….”

“명령이야.”

“……네.”

시윤의 입이 딱 다물렸다. 명령이라니 어쩔 수 없었다. 저절로 어깨가 바짝 곤두섰다. 꼭 잘 길든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청호가 무심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칫했다. 혹 닿으면 또 아플까 봐. 청호의 손이 천천히 물러나는데, 시윤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그래도, 오늘은 안아 주세요.”

“…….”

“저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에요.”

시윤이 사르르 곱게 눈을 접었다. 청호의 입매가 한일자로 굳었다. 시윤은 참으로 가늠이 어렵다. 숫기라곤 전혀 없는 듯하다가도, 이따금 이렇게 사랑을 담뿍 받으며 자란 티를 내곤 했다.

결국 청호가 참지 못하고 시윤을 껴안았다. 작은 몸이 무너지듯 품 안으로 들어왔다. 시윤과 닿은 부분이 삽시간에 화창해졌다. 어두컴컴한 동굴이 무너지고 쨍한 빛이 드리우는 듯했다.

두 번째로 경험하는 거지만, 감동은 곱절이었다. 청호가 시윤의 뒤통수와 허리를 감싸 세게 결박했다. 시윤의 이마가 가슴팍에 짓눌릴 정도였다.

깊은 포옹에 시윤의 등허리가 움찔 경련했다. 그런데도 청호는 도무지 시윤을 놓아줄 수가 없었다. 하물며 옷이 가로막고 있어 짜증까지 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뚱이로 오롯이 그를 느끼고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 욕구에 나약한 인간일 줄이야. 새삼 놀라웠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시윤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청호의 너른 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어찌나 간지럽고 곰살맞은지. 청호는 하마터면 시윤을 그대로 반으로 뚝 부러트릴 뻔했다. 허나 간신히 참아 냈다.

어떻게 찾은 가이드인데. 사력을 다해 소중히 대해 줄 생각이었다. 열심히 보듬고, 사랑해 주며 그의 청량함에 기대어 살고 싶었다. 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건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괴롭고 외로운지라.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헤아리던 청호가 아쉽게 시윤을 떼어 냈다. 더 안고 있었다간 시윤이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제 몸이 개운해진 만큼, 시윤이 아플 테니까.

청호가 시윤을 놓자마자 그의 마른 몸뚱이가 거칠게 휘청거렸다. 놀란 청호가 잡아 주려 했으나, 시윤이 퍼뜩 곧추섰다.

“괜찮아?”

청호가 걱정 어린 눈으로 시윤을 살폈다. 역시, 안는 건 무리였는데. 제가 안정에 눈이 뒤집혀서 또 시윤을 갉아먹고야 말았다.

“그럼요. 그래도 두 번째라고 저번보다 나은 것 같아요.”

시윤이 바스러질 듯 얇게 웃었다. 그가 비척거리는 몸짓으로 연구실 문에 손바닥을 댔다. 띠릭,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저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시윤이 급할 정도로 빠르게 연구실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답답할 정도로 꼬박꼬박하던 경례도 하지 않았다. 청호가 무심코 그를 따라 발을 옮겼으나, 코앞에서 문이 닫혔다.

“…….”

청호가 닫힌 문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까짓 문.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 수 있었다. 시윤보다 계급이 훨씬 높았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눈짓 한 번으로 일그러트릴 수도 있었다.

시윤이 떨고 있었는데. 얼굴은 창백했고, 눈두덩도 퀭했는데. ‘두 번째라고 저번보다 나은’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시윤이 들키기 싫어하는 듯해서.

희멀건 문을 노려보던 청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폈다.

시윤의 손이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손바닥이 휑했다.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뚜벅뚜벅. 멀어지는 청호의 발소리를 듣던 시윤이 문에 기댔다. 그리고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눈앞이 크게 흔들리더니 곧 까맣게 죽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정신이 고장 난 형광등처럼 깜빡깜빡 점멸을 반복했다. 전신의 근육은 파들파들 경련했다. 시윤은 자신의 몸에 이렇게나 많은 근육이 존재한다는 걸 생전 처음 알았다. 핏줄을 세세히 느끼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흡수되지도, 방출되지도 못한 청호의 힘이 내장을 발기발기 찢는 듯했다. 몸속에 압정이 돌아다니는 것 같은 고통이다.

이래서야 어떻게 그의 가이드라 할 수 있나. 고작 포옹으로 이러면 후에 다른 스킨십은 어찌한단 말인가.

시윤이 눈을 짓이기듯 감았다. 가이아가 원망스러웠다. 열여섯 도어 검사 때, 퓨어라는 결과를 받았을 때만큼이나 원망스러웠다. 이게 뭔가. 제 주제와 맞는 에스퍼와 짝지어 줬어야지. 그것도 아니면 제 역량을 그만큼 키워 주든가.

시윤이 헐거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괜한 화풀이였다. 마음 같아선 물건이라도 던지고 싶었는데, 나약한 몸뚱이는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했다.

눈앞이 점점 더 흐려졌다. 딱딱하고 찬 바닥에서 자는 버릇은 없었는데. 지금부터 들여야 할 듯싶다. 청호와 만날 때마다 이 꼴일 테니 말이다.

픽, 조소한 시윤이 까무러치듯 눈을 감았다.

“채 준위.”

“…….”

“채 준위!”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하늘도, 땅도 없는 어둠 속을 걷던 시윤이 그 손길에 잡혀 수면 밖으로 나왔다. 어슴푸레한 안개 사이에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모건이었다.

“정신 들어?”

“……대령님?”

“너 왜 이래?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야?”

모건이 시계에서 홀로그램을 뽑아 시윤의 몸을 스캔했다. 시윤이 손을 휘적거려 그 홀로그램을 아래로 내려 버렸다.

“별거, 별거 아니에요.”

“……청호구나.”

그러나 모건은 대번에 범인을 찾아냈다. 그가 한껏 미간을 구기며 시윤을 부축해 일으켰다. 시윤이 종잇장처럼 힘없이 딸려 올라왔다.

“이 새끼가……. 내가 당분간 너랑 접촉하지 말라고 했는데.”

시윤에게서 후끈한 열기를 느낀 모건이 아득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안아 달라고 했어요.”

시윤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그를 말렸다.

“왜?”

“그게 제 일이니까요.”

“…….”

모건의 눈가가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시윤이 이 나라에 얼마나 헌신하고 싶어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퓨어로 살아 특별한 직책을 꿈꿔 온 것도 알고 있었고. 과하게 잘난 가족들의 위엄에 짓눌려 살아온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근데 이건 아니다. 지금의 시윤은 청호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지 못해 안달 난 사람 같았다. 사이비 교주에게 미친 독실한 신자 같단 말이다.

“채 준위. 네가 아무리 청호의 열렬한 팬이라도, 지금 건 도를 넘는데.”

“잠깐 아픈 건데요, 뭐.”

시윤이 아무렇지 않은 척 의자에 앉아 태블릿을 켰다. 만들다 말아 대가리만 동동 뜬 클롭스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시윤이 기이할 정도로 평온히 그것을 바라봤다.

“그 잠깐으로 네가 죽을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야.”

삐딱하게 선 모건이 불퉁한 음성으로 말했다.

“…….”

시윤이 볼 안쪽을 잘근거렸다. 죽어도 괜찮아요. 그렇게 의미 있게 죽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혀끝에서 맴도는 말은 많았으나, 차마 뱉지 못했다.

시윤이 두 손으로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게 큰 움직임도 아니었는데 손목이 찌릿찌릿했다. 허공에다 손을 탈탈 턴 시윤이 정갈하게 꽂혀 있던 홀로그램용 만년필을 빼 들었다. 금으로 장식된 고급 만년필은 입대하는 날, 아버지가 주신 거였다. 시윤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모건을 바라봤다.

“형들한텐 비밀로 해 주세요.”

“뭘? 네가 청호 반려라는 거? 지금쯤이면 전 국민이 알걸?”

모건이 입술을 씰기죽거리며 비아냥댔다. 시윤이 도리도리 머리를 흔들었다.

“아뇨. 제가 청호 대장님과 접촉하면 아프다는 거요.”

“…….”

“가족들이 알면 걱정할 거예요.”

모건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두 번쯤 눈꺼풀을 깜박이던 그가 콧잔등을 구겼다. 시윤의 말인즉슨, 앞으로도 이렇게 고통을 불사하겠단 뜻이었다.

잠깐의 접촉으로도 식은땀에 푹 젖을 만큼 아프면서. 손과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아프면서. 그러잖아도 희멀건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을 만큼 아프면서. 그 짓을 계속하겠다고.

그러잖아도 가이아가 청호와 시윤을 이어 준 게 이상하거늘. 시윤의 행동은 그보다 더 이상했다.

모건이 시윤이 끄적이고 있는 홀로그램을 휙 옆으로 넘겼다. 울룩불룩 징그럽게 생긴 클롭스의 대가리가 손톱만큼 작아졌다. 모건이 책상을 짚고, 허리를 숙였다.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시윤을 사납게 추궁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

“예?”

“왜 그렇게까지 희생하지 못해서 안달이냐고.”

“…….”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갈라진 귓불을 잡아당기듯 매만졌다. 모건이 그 귓불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갈라진 귓불. 길게 찢어져서 피를 줄줄 흘렸을 귓불. 그리고 다시 붙이지 않은 귓불. 시윤의 가족들이 저 상처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도 없고. 분명 치료하려 했을 텐데 저리 뒀다는 건 시윤이 치료받지 않겠다며 강력히 주장했을 확률이 높았다.

시윤의 몸 중 가장 이질적인 곳을 고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저 귓불이다. 귀하게 자라 자그마한 상처 하나 없으면서, 부러 치료도 받지 않았다.

저 상처에 어떠한 의미가 있을 듯한데. 모건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자신의 잘난 머리로도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모건이 희번덕하게 눈을 부라리자, 시윤이 푹 고개를 숙였다. 그 채로 눈두덩이 벌겋게 올라올 때까지 벅벅 눈을 문질렀다. 한참 침묵을 이어 가던 그가 웅얼웅얼 말을 먹었다.

“제가…… 빚진 게 많거든요.”

“빚? 누구한테? 국가한테? 아니면 청호한테?”

모건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포스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부자인 시윤네 가문이다. 근데 빚이 있다고? 그것도 청호에게? 모건이 알기론 시윤과 청호는 여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냥…… 그냥…… 많아요.”

시윤이 알맹이 없이 텅 빈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

모건은 더 캐묻지 못했다. 시윤의 웃음에서 빛 한 줌 없는 완전한 어둠을 봤기 때문이다.

* * *

시윤이 바쁘게 다리를 움직였다. 탁탁, 탁탁탁! 끊임없이 이어지는 발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숨이 어찌나 찬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발을 멈출 순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저 멀리 격납고가 보였다. 막 군용기에 오르는 병사들의 붉은색 견장도 보였다. 청호가 대장으로 있는 에로아스 부대였다.

“잠깐, 하아…… 잠깐만…….”

시윤이 밭은 숨소리 사이로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튀어 오르는 고함과 전투기의 엔진 소리, 바람 소리 따위에 휩쓸려 그 누구의 귓구멍에도 안착하지 못했다.

치받는 숨에 시윤이 콱콱 가슴팍을 두드렸다. 운동 좀 할걸. 매일 최소한의 영양 섭취만 하고, 연구실에만 처박혀 있으니 체력이 엉망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숨을 고르던 시윤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달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허리가 크게 휘청였다. 힘이 빠져서 그런 건 아니었고, 센 바람이 등과 허리를 앞으로 떠밀어서였다.

“어어…….”

놀란 시윤이 무심코 뒤꿈치로 바닥을 긁었으나 어느새 다리도 붕 떠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몇 번 사지를 휘젓던 시윤이 뒤늦게 힘의 출처를 깨달았다. 사이코키네시스 능력이다. 몇 번 본 적, 아니, 당한 적 있는 에스퍼 어빌리티였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청호 앞에서 몸이 딱 멈췄다. 시윤이 사뿐하게 바닥으로 착지했다. 그러나 운동 신경이라곤 없는 몸이 기우뚱거리며 흔들렸다. 청호가 그런 시윤의 손목을 잡아 대신 중심을 잡아 줬다.

청호는 이제껏 봤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복도, 일상복도 아닌 전투복 차림. 아니, 그보다는 조금 편한 차림이다. 가벼운 셔츠에 전투 바지, 그리고 두껍고 무거운 군화가 다였다. 전투모와 보디캠 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른 아침 모건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오늘 10시, 청호가 B 구역으로 출전한다는 연락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나름 그의 반려 가이드인데. 그가 출전하는 걸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래서 냅다 뛰쳐나왔다.

“너 왜 여기 있어?”

살풋 미간을 찌푸린 청호가 물었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뱉으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나가면, 나간다고…… 말씀을…… 해 주셔야죠.”

시윤은 청호와 달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투복 차림이었다. 등이나 어깨, 또는 허벅지 그 어디에도 무기는 없었으나 아무튼 전투복이긴 했다. 그것도 몹시 새것인 전투복.

“뭐 하러?”

“제가 대장님 가이드니까요. 방금도 모건 대령님께 듣고 왔다고요. 아니었으면 대장님이 전투에 나가셨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시윤이 커서 자꾸만 아래로 내려오는 전투모를 위로 추켜올렸다. 청호가 그 독특한 꼴을 지그시 바라봤다.

“말하면? 설마 같이 가려고?”

“당연하죠. 저도 같이 가요.”

“왜?”

“걱정되니까요.”

시윤이 평이하게 대꾸했다. 그 와중에도 눈을 가리는 전투모를 짜증스레 쳐올렸다. 분명 제 머리둘레에 맞는 사이즈인데 왜 자꾸 흘러내리는지 모르겠다. 시간만 더 있었어도 형들에게든 모건에게든,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에게든 착용 방법을 물어봤을 텐데. 혹 청호가 떠나 버릴까 허겁지겁 나오느라 제대로 차려입지도 못했다.

“…….”

청호의 입술 끝에 꾹 힘이 들어갔다. 걱정된다, 라. 걱정이 된다, 라.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나라에서 제일 강한 저를 걱정한다, 라.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청호는 대부분의 삶을 전장에서 보냈다. 그 말인즉슨 1년에 수십, 수백 번씩 출전한다는 뜻이다. 가끔은 1년, 혹은 그 이상을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작전이 끝나지 않아서, 아니면 적이 줄지 않아서, 또는 피치 못할 상황 때문에.

그러나 그 누구도 청호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얼마나 많은 클롭스를 죽이고 돌아올지 기대만 했다. 청호의 자가 치유 능력은 포스에서 가장 뛰어났고, 웬만한 상처는 복귀하는 중에 회복되곤 했으니까. 그래서 청호를 걱정하는 이가 없었다.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근데 눈앞의 이 가이드가 저를 걱정한단다. 저의 반려가 된 지 이제 사흘 됐으면서. 전투 한번 안 나가 본 C급 주제에. 바닥이 피로 축축하게 젖고, 살점이 날아다니는 그 잔혹함을 가늠도 못 하면서. 감히 저를 걱정한다고.

청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목이 탔다. 목젖이 바짝 오그라들고, 식도가 버석하게 말랐다. 숱하게 경험했던 폭주의 고통과는 달랐다.

훨씬 간지럽고 곰살맞은 느낌이었다. 손바닥과 발바닥, 그리고 척추가 간질간질 찌릿찌릿해서 몸을 마구 뒤틀고 싶었다.

“위험한데.”

애써 무표정을 유지한 청호가 시윤의 전투모를 꾹 눌렀다. 그 후, 줄을 당겨 시윤의 자그마한 머리통에 맞게 고정했다. 매우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전장이 당연히 위험하죠.”

가족 덕에 타인의 손길에 익숙한 시윤이 가만히 청호의 시중을 받으며 대꾸했다. 청호가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그 위험을 왜 감수하려고 하지.”

“대장님이 거기 계시니까요.”

“…….”

“거기서 폭주라도 하시면 어떡합니까.”

“괜찮아. 네가 어제 손잡아 줬잖아.”

전투모를 고정한 청호가 손끝으로 톡, 시윤의 손등을 두드렸다. 마음 같아선 눈앞의 이 하얀 손을 멋대로 움켜쥐고, 조물거리고 싶은데. 연한 분홍빛인 손가락을 쪽쪽 빨고 싶은데. 그럼 시윤이 아플 테니 애써 참고 있었다.

시윤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그걸로…….”

“고작 아니야.”

청호가 음산한 목소리로 시윤의 문장을 갈랐다.

청호는 여태 A급 가이드와 잠자리를 해도 그 효과가 미미했다. 찰나, 혹은 정사 후 두어 시간만 편했을 뿐이다. 근데 시윤과는 가벼운 포옹만 했음에도 하루가 평온했다.

그저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가이아가 이어 준 반려라는 말에 혹해서 플라세보 효과처럼 그 능력을 곱절로 더 크게 느끼는 걸지도.

허나 그게 뭐 어때서. 지금 청호는 근 10년 중 가장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다. ‘고작’이라는 단어로 폄하될 게 아니란 뜻이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흘끔흘끔 청호의 눈치를 보던 시윤이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괜찮다니까.”

“대장님.”

“싫어. 네가 가는 거.”

청호가 이만 대화를 끝내겠다는 듯, 뒤를 돌려 했다. 순간, 시윤의 낯빛이 붉어졌다가 창백하게 질렸다. 그가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청호의 앞을 막아섰다.

“제가 가 봐야 도움이 안 될 테니까요?”

청호의 만면이 알루미늄 캔처럼 구겨졌다.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게 아니고서야 제가 가는 게 왜 싫으십니까. 병력은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좋은 거 아닌가요? 물론 제 주제에 에로아스 부대에 들어가는 건 턱도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시윤이 손짓까지 이리저리해 가며 반박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들을 줄줄이 이었다. 그러다 자신이 너무 비참해 말끝을 흐렸다. 청호가 손수 고정해 준 전투모가 지나치게 빡빡했다. 그 무게와 질감이 어색해서 턱이 부서질 것 같았다.

시윤이 아니라고, 실언이라고, 됐다며 포기하려 할 때였다. 청호가 느지막이 입을 뗐다.

“그…….”

그가 답지 않게 망설였다. 입술은 꿈틀거리는데, 정작 나오는 단어는 없었다. 시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왠지 청호가 제 기대에 부응하는 답을 줄 듯해서.

청호가 자신의 눈썹뼈를 더듬었다. 그러더니 연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네가 가면 신경 쓰여서 제대로 못 싸울 것 같아.”

“…….”

“네가 죽는 게 싫어. 이제야 만났는데.”

시윤이 없으면, 청호는 또 아파야 한다. 다시 그 고통의 구렁텅이로 굴러 들어가야 한단 말이다. 이번엔 버티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이 싱그러움과 달콤함을 모르고 살았지만, 지금은 알지 않는가. 돌아갈 수 없었다.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윤은 청호의 말에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러다 꾹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청호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얼마나 불안할까. 강가에 애를 내놓은 것도 기함할 판에, 전장에 갓난쟁이를 풀어놓은 기분이겠지.

그래도 가고 싶었다. 설마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만큼 등신이려고. 가이아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청호의 반려로 짝지어 준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

청호가 시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 부정을 읽은 시윤이 재차 입을 뗐을 때였다. 쉬익, 무언가가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시윤에게로 날아왔다. 총이었다. 시윤의 상체만큼이나 커다란 총. 시윤이 얼떨결에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헉!”

아니, 받긴 받았는데, 온전히 들진 못했다. 무게가 엄청났다. 대충 어림잡아도 60킬로그램이 훌쩍 넘을 듯했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결국엔 총 주둥이가 바닥을 찍었다. 단단한 격납고 바닥과 총구가 부딪치며 쾅!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총 무게에 휩쓸려 중심을 잃은 시윤이 거칠게 휘청거렸다.

“이것도 못 들면서 네 몸을 지키겠다고?”

청호가 시윤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한 손으로 아주, 가볍게. 그리곤 고철 덩어리 같은 그것을 뒤로 붕 던져 버렸다. 마침 지나가던 폴 대령이 가뿐히 총을 낚아챘다. 그러더니 산더미처럼 쌓인 무기들 사이에 대충 세워 놨다.

시윤이 멍청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믿을 수가 없다. 저한테는 태산 같은 바윗덩이였는데, 그들에게는 숟가락 하나보다 가볍다. 저는 몸뚱이 전체가 휘청였는데, 그들은 꼿꼿하고 단단하게 서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이 미워졌다. 엄청난 소외감과 박탈감이 갈비뼈 안쪽을 꽉 채웠다. 마치 열여섯, 도어 검사의 결과를 받았던 그 날처럼.

“돌아가. 너한텐 위험해.”

청호는 비아냥대지 않았다. 그저 명확한 진실과 현실을 말했을 뿐이다. 허나 때로는, 진실 그 자체가 더 아픈 법이다.

“…….”

시윤의 동공이 텅 비었다. 꼭 총알에 난사당해 죽은 시체 같은 표정이었다. 허망하고, 아프고, 쓸쓸했다.

청호 뒤로 둘씩 짝지어 전투기에 오르는 병사들이 보였다. 아마 반려 에스퍼와 가이드들이겠지.

그들은 강해 보였다. 서로 친한 듯했고, 몹시 깊은 유대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전투에 익숙해 보였다. 어깨에 짊어진 칼이나 총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옹골차게 말려 있던 시윤의 손이 느슨히 풀어졌다.

저들과 달리 저는 총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다. 열여섯 도어 검사 이후로는 체력 단련도 하지 않았다. 단련은커녕, 가벼운 산책도 안 했다. 그저 연구실에 박혀 머리만 굴렸다.

근데 무슨 생각으로 청호와 함께 가겠다고 자처했을까.

제가 주제도 모르고 신이 난 건 아닐까. 사실 청호가 걱정되어서 온 게 아니라, 그의 명성에 묻어 전장에 나가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 등신 같은 욕심이 청호에게 다 까발려진 것 같아 부끄러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잠깐 욕심부렸습니다.”

시윤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바닥에 처박힐 듯 내려앉은 그의 정수리가 몹시 볼품없었다. 수치에 달아오른 귓바퀴는 터질 듯 붉었다.

청호가 시윤의 어깨를 잡아 올렸다. 그러고는 제법 다정하게 눈을 맞췄다.

“이틀쯤 걸릴 거야. 길어 봐야 나흘.”

그가 슥슥 시윤의 전투모를 쓰다듬었다. 단단하고 두꺼운 전투모 아래로 시윤의 보드라운 머리칼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아, 이대로 끌어안을 수 있다면 좋으랴만.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아쉬웠다.

시윤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게 아쉽다. 흘러가는 시간도. 한 걸음 떨어져 있는 거리도. 사실 마음 같아선 그를 전장에 데려가고 싶었다. 옆에 앉혀 두고 같잖은 꾀병으로 그의 손가락에 얽혀 있고 싶었다.

허나 그랬다간 제 병사들이 죽을 것이다. 포스가 많고 많은 부대 중에 에로아스를 보낸다는 건, 그만큼 센 적이 기다리고 있음을 뜻했으니까. 청호는 에로아스의 대장으로서 맡은 임무가 있었다.

“금방 올게.”

“……예.”

다짐인지 약속인지 모를 청호의 말에 시윤이 흐릿하게 웃었다. 청호가 시윤의 입가를 쓸어내리려는데, 폴이 다가와 경례했다.

“대장님. 출정 준비 완료했습니다.”

“알았어.”

청호가 방해하지 말고 꺼지라는 듯, 휘휘 손을 내저었다. 폴에게는 시선 한 줌 던지지 않았다. 그런 청호에 익숙한 폴이 정갈한 몸짓으로 뒤돌아 사라졌다.

시윤이 잘 다녀오라며 경례를 하려 할 때였다. 청호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시윤이 특유의 동그란 눈매로 청호를 올려다봤다.

그 시선을 마주한 청호가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꾹꾹 짓눌렀다. 늘 잔잔하게 가라앉아있던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였다.

“어…….”

청호가 아무 의미 없는 음절 하나를 허공에 던졌다. 시윤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할 말에 집중했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두 사람을 크게 한 바퀴 감고 흩어졌다. 청호가 흐트러진 자신의 앞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렸다.

“나는 늘 그랬듯, 사지 멀쩡히 돌아오겠지만…….”

“…….”

“그래도 걱정하는 걸 관둘 필요는 없어.”

“……예?”

단번에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문장이 묘하게 이상했다. 꼭 말을 배우다 만 사람이 조잡하게 이어 붙인 것 같았다. 시윤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숨은 뜻을 찾는 순간, 눈가가 해사하게 폈다.

“예, 돌아오실 때까지 계속 걱정하고 있겠습니다.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시윤이 빙긋 웃으며 경례했다. 가끔, 정말 가끔 느끼는 거지만 청호가 아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정과 사랑, 보살핌이 고픈 아이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데. 제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위대하고, 거대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청호가 만족스럽다는 듯, 설핏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진득한 눈빛으로 시윤을 쳐다보던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곧 청호와 그의 부대가 군용기에 올랐다. 땅이 우르릉 진동하더니 군용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날개가 하늘 전체를 까맣게 뒤덮었다.

시윤은 군용기가 멀어지고, 작아지고, 끝내는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꼴이 그렇게 구질구질할 수 없었다.

* * *

“하아, 하아, 하아…….”

러닝 머신에 기대선 시윤이 가쁜 숨을 토해 냈다. 고작 15분 전속력으로 달렸을 뿐인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해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는데, 옆 러닝 머신에서 느긋하게 걷던 모건이 쯧쯧 혀를 찼다.

“채 준위. 일주일 전까지 퓨어였으니까 이해는 하거든? 근데 그거 가늠하더라도 체력 진짜 쓰레기다.”

그가 가감 없이 시윤의 상태를 비난했다. 러닝 머신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 그래프가 처참했다. 체력, 근력, 지구력, 코어 뭐 하나 평균에 미치는 게 없다.

시윤이 북받치는 호흡에 차마 반기를 들지 못하고 손만 휘저었다. 진짜 딱 죽기 직전이었다. 쿵쾅쿵쾅 거세게 발광하는 심장에 두통이 다 일었다.

한참 숨을 고르던 시윤이 간신히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허공에다 손짓하며 무언가를 묘사했다.

“그 하아…… 왜 총 있잖습니까. 되게, 하아, 무거운 거.”

“총이 한두 개야?”

“에로아스 부대가 쓰는 총이었는데. 후우, 보디는 검은색에 총구는 붉은색이고 대충 어림잡아 60킬로그램쯤 됐습니다. 흔히 쓰는 AR이나, SR 계열의 총이 아니었는데……. 뭔지 아십니까?”

“아아, 에로아스 부대가 쓰는 거면 특수 제작 한 거라 모를 만도 해. 산탄총인데 경기관총처럼 연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든 거거든. 그건 왜?”

“그거 막 한 손으로 던지고 받고 그러려면 얼마나 운동해야 합니까?”

시윤답지 않게 멍청한 질문이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모건이 두어 번 그의 말을 되뇌었다. 난데없이 체력을 키우겠다는 시윤. 일말의 관심도 없던 총기에 관해 묻는 시윤. 싸움을 잘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신체 능력을 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총을 한 손으로 던지고 받고 싶어라 하는 시윤. 답은 뻔했다.

“청호 따라서 전투 나가겠다고 고집부리다가 까였구나?”

모건이 낄낄거리며 방정맞게 웃었다.

시윤의 눈이 대번에 뾰족하게 째졌다. 고집부리다 까였다니. 말하는 것 좀 봐. 저렇게 얄미울 수가 있나. 단숨에 속을 간파당한 것도 짜증이 났다. 똑똑하지라도 말든가. 계급도 저보다 높고, 하물며 청호와의 관계도 저보다 깊었다.

밉다, 미워.

“……고집부리진 않았습니다.”

“까이긴 했고?”

모건이 한쪽 어깨를 비스듬히 내리며 깐족거렸다. 시윤의 미간에 진한 주름이 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스포츠 타월로 아무렇게나 닦아 낸 시윤이 짜증스레 말을 쐈다.

“대령님은 대체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설마 지금 그걸 운동이라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나? 보면 몰라? 채 준위 놀리고 있잖아. 오늘 일과 중에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워.”

러닝 머신에 삐딱하게 기댄 모건이 빙글빙글 웃었다. 시윤이 볼 안쪽 살을 지그시 씹었다. 모건의 높은 콧잔등을 한 방 제대로 갈길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안 바쁘신 모양입니다?”

“뭐. 일은 많지만 내가 좀 똑똑해야 말이지. 무슨 일이든 한두 시간이면 끝나.”

모건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한껏 잘난 체를 해 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그 특유의 잘난 체였다. 실제로 잘난 사람이기도 하고, 밉지 않은 장난이라 한 번도 거슬린다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오늘은 관자놀이가 따끔거릴 정도로 신경질이 올라왔다.

“아. 한두, 시간, 말입니까? 그 말, 아버지께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시윤이 부러 단어를 조각내 말했다. 그에 모건의 낯이 새까맣게 탔다.

“……채 준위. 이럴 거야?”

“예. 이럴 겁니다.”

시윤이 더 이상의 대화를 허용치 않겠다는 듯, 러닝 머신 속도를 높였다. 운동화 밑창과 트레밀이 마찰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건이 얼굴을 들이밀며 알짱거렸다.

채 준위. 거짓말이지? 채 준위. 진짜야? 채 준위. 사실 나 어제도 일한다고 두 시간밖에 못 잤어. 채 준위. 나 좀 봐. 채 준위.

몹시 거슬리는 소음이었으나 시윤은 꼿꼿이 앞만 주시했다.

‘전투 나가겠다고 고집부리다가 까였구나?’

모건의 문장이 웽웽 모기처럼 귓구멍을 나돌았다.

그래. ‘고집’을 부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청호에게 고집을 부렸다. 다섯 살짜리 애처럼 앞뒤 없이. 행여 청호가 조금 더 부드러웠다면, 발까지 동동 구르며 떼를 썼을지도 몰랐다.

시윤이 질끈 눈을 감았다. 러닝 머신에 머리를 찧고 죽고 싶었다.

* * *

시윤은 청호가 전장에 나가 있는 나흘 내내 아침저녁으로 체육관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이제 30분 정도는 쉬지 않고도 너끈히 뛸 수 있었다.

제가 정말 가이드가 되긴 한 모양이다. 고작 일주일 만에 두 배나 뛸 수 있게 되다니.

막 샤워하고 나온 시윤이 뿌듯한 얼굴로 머리칼을 말렸다. 앞으로 1년 정도 열심히 하다 보면, 훈련실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부대 안에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위한 훈련 시설이 따로 있었다. 허나 신체 능력이고 어빌리티고 그냥 C도 아니고 C-인 시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곳이었다. 멋모르고 발을 들였다간 훈련하다 죽을지도 몰랐다.

강해져야 한다. 언젠가 청호가 함께 전장에 나가자고 해 줄 만큼 강해지고 싶었다. 등신 같은 반려 가이드가 아니라, 한 명의 유능한 병사로서 그의 옆에 서고 싶었다.

강건한 표정의 시윤이 제복 셔츠에 팔을 꿰었다.

오늘은 청호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 * *

시윤은 구태여 청호를 마중 나가지 않았다. 격납고 한 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는 꼴이 우스울 것 같아서.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릴 게 분명했다.

뭐야, 청호 가이드라면서 같이 안 갔네? 왜 안 갔대?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하긴, 늦게 발현한 것도 이상하긴 하지? 등등.

에스퍼와 가이드가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시윤이 청호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는 게 알려지면 분명 의심을 살 것이다. 그럼 제 무능력함이 떠벌려지는 건 순식간이겠지. 그건 정말…… 끔찍하리만큼 싫었다. 강의실에 있을 때야 그 역시 제가 맡은 소임이니 당당할 수 있었지만, 격납고에선 그러지 못할 터였다.

사실 시윤은 청호가 정확히 몇 시에 돌아오는지도 몰랐다. 메시지 한 통이면 그에게 연락이 가겠지만, 주제넘은 짓인 것 같아 말았다. 청호 역시 메시지나 전화가 없는 걸 보니 묻지 않길 잘한 듯했다.

하지만 시윤은 강의 내내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선을 막지 못했다. 언제쯤 오려나. 늘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그이니, 이번에도 헤어졌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겠지?

……아니면 어쩐다. 팔이나 다리 하나 없이 돌아오면 어쩌냔 말이다. 혹 갑작스레 폭주라도 했으면? 하필 전투 중에 그랬으면? 역시 따라갔어야 했나. 이제 그가 다치면, 제 책임과 다름없는데.

시윤이 쓸데없이 맑은 하늘에 시선을 허비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준위님.”

“…….”

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맞겠다. 그가 부르는 ‘준위’가 자신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초점 없는 동공으로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준위님!”

또 다른 이가 시윤을 불렀다. 고함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시윤이 퍼드득, 어깨를 떨며 정신을 차렸다. 꿈뻑, 꿈뻑. 눈꺼풀을 몇 번 움직이고서야 자신이 강의 중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허공에 띄워 둔 클롭스 홀로그램 너머로 황당한 표정의 신병들이 보였다. 시윤의 광대에 화르륵 열이 채였다.

“아, 아아……. 미, 미안합니다.”

시윤이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벅벅 자신의 얼굴을 문댔다. 젠장. 강의 중에 넋을 놓은 적은 없었는데. 대체 무슨 정신으로 서 있는 건지. 저도 절 모르겠다.

간신히 이성을 다잡은 시윤이 아무렇지 않은 척, 강의를 이어갔다.

“미노타우르스는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클롭스입니다. 클롭스가 인간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죠. 그만큼 매우 높은 지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기를 잘 다루고, 떼를 지어 다닙니다. 약점은…….”

시윤은 아슬아슬하게 강의를 끝마쳤다. 신병들이 우르르 일어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시윤이 느릿하게 홀로그램을 끄고, 뒷정리했다. 와중에도 신경은 온통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하늘을 찢는 듯한 소음이 들리는지, 땅이 진동하는지, 태양을 가릴 만큼 커다란 군용기가 상공에 나타났는지. 그러나 하늘은 여전히 고요했다.

연한 한숨을 내쉰 시윤이 막 강의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덩치 좋은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채 준위님.”

종우였다. 종우는 시윤이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몇 안 되는 신병이었다. 똑똑하고, 말도 잘하고, 수업 태도도 좋다. 최근 나간 전투에서 자그마한 공을 세워 일병으로 진급도 했댔다. 시윤이 싱긋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 박종우 이병. 아니, 이제 일병인가.”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오늘 강의 내내 창밖만 보시던데,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아프긴요. 내가 아플 일이 뭐 있습니까.”

시윤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이라 읊조린 종우가 자신의 태블릿을 내밀었다. 아마 궁금한 것이 있으리라. 교수로서 질문은 언제든 환영이었다.

시윤이 그를 기특하게 쳐다봤다. 대부분 시윤의 강의를 따분하게 여긴다.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인재들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흥미롭게 듣기만 해 줘도 감사하거늘, 질문까지 하다니.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저 질문 있습니다.”

종우의 말에 시윤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태블릿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였다. 천둥이라도 치는 것처럼 우르릉하고 하늘이 울었다. 시윤이 휙, 창밖을 바라봤다. 좀 전과 달리 새까만 어둠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 에로아스 부대일 것이다. 심장이 급작스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이가 모범생이든, 상관이든, 하물며 클롭스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그…… 어……. 지금은 내가 조금 바쁜데. 다음에 들어도 될까요? 아니면 메일 주세요. 답 드리겠습니다.”

“……바쁘시다고요? 갑자기 말입니까?”

종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까지 뭐든 대답해 줄 것처럼 굴어 놓고. 벼락 맞은 듯 바빠지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윤이 어…… 음절을 질질 끌며 대답을 회피했다. 부러 그런 건 아니었고, 온 신경이 하늘에 잡혀가서 그랬다.

시윤과 창밖을 번갈아 보던 종우가 아, 짧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청호 대장님이 복귀하셨나 봅니다.”

“네. 그래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러셔야죠. 내일 뵙겠습니다.”

두 걸음 뒤로 물러선 종우가 반듯한 자세로 경례했다. 시윤은 경례를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아닌 몸짓으로 어영부영 손을 올렸다가 내린 후,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시윤의 뒤통수로 종우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강의실을 나온 시윤이 앞을 향했다가, 뒤를 향했다가, 다시 앞을 향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서였다. 격납고로 갈 순 없고, 청호의 숙소로 가야 하나. 아니면 혹, 이번에도 모건을 먼저 만나러 가려나. 그럼 그의 호출이 있을 때까지 연구실에서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

긴장한 정신이 중구난방 널을 뛰었다. 수 초간 복도를 배회하던 시윤이 입을 앙다물고 개인 연구실로 향했다.

괜히 먼저 청호를 만나러 갔다가 그가 당황하면 어쩌나. 일주일 전, 전투복을 입고 격납고에서 그를 맞닥트렸던 그 순간, 청호의 표정을 아직 잊지 못했다.

대체 네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 무얼 하러 왔냐는 표정.

당시를 떠올린 시윤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가 먼저 저를 찾기 전에는 섣불리 나대지 말아야지.

아무도 몰래 다짐했다.

연구실 복도에 들어선 시윤이 갸웃 옆으로 고개를 흘렸다. 제 연구실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청호일 리는 없었다. 이제 막 내려 윗선에 결과를 보고하러 갔을 테니까. 어렴풋이 드러난 인영이 태산만 한 청호에 비해 작은 편이기도 했고. 아아, 두툼하니 살집이 있는 게 옆으로는 컸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형들은 전장에 나갔고, 모건 역시 연구로 바쁠 때였다. 그럼 누구지.

시윤이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혹 이름 모를 손님이 저보다 계급이 높을 수 있으니까.

연구실 앞에 다다른 시윤이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낯선 이였다. 육안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단발머리에 저보단 키가 큰 남자. 나이는 시윤의 또래. 아니면 두어 살 더 많거나. 가슴팍에 달린 붉은색 명찰에서 말미암아 에스퍼고. 이름은 사이먼 톰슨. 계급은 시윤보다 2계급 높은 중위였다. 이 정도 계급이면 적어도 B+나 A급 에스퍼다.

“준위, 채시윤.”

시윤이 각 잡힌 동작으로 경례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머리와 사지를 보아 인간이고, 자신보다 높은 계급이다. 그러니 경례가 먼저였다.

“…….”

사이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집요하고 질척하게 시윤을 응시하기만 했다. 시윤이 경례도 풀지 못하고,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기이한 적막이 사위에 내려앉았다.

시윤이 예의에 어긋나긴 하나, 먼저 용건을 물어볼까, 고민하던 차였다. 남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채시윤. 청호 가이드 맞지?”

“…….”

그다지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가이드가 된 이후, 마주치는 사람마다 물었던 질문이라 익숙하기까지 했다.

시윤은 그럴 때마다 적당히 긍정을 내놓곤 했다. 틀린 정보도 아니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조금…… 이 감정을 뭐라 해야 하나. 조금…… 찝찝하다고 해야 하나. 께름칙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랬다.

“예. 맞습니다.”

시윤이 간결히 긍정했다. 혹, 청호가 보낸 자일 수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시윤이 눈을 크게 뜨고 사이먼을 닦달했다.

“청호 대장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직접 오시지 못할 만큼?”

나쁜 상상이 현실이 됐나. 심장이 발바닥을 뚫고 지하로 추락했다. 삽시간에 하얗게 질린 시윤을 쳐다보던 사이먼이 난데없이 비죽 입술을 가로로 길게 쨌다.

“청호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고? 그 새끼는 괴물이야. 지구가 반 토막 나도 그 새끼만 멀쩡할걸?”

사이먼이 희한하게 눈썹을 구기며 이죽거렸다.

“……예?”

시윤이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그 새끼’라니. 사이먼은 청호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청호에게 악의라……. 이상할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그가 있으므로 이 나라가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늘. 감사는 못 할망정 미워하다니.

허나 사이먼은 시윤의 반응이 어떠하든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가 성큼성큼 시윤을 뒤로 몰아붙였다.

뒷걸음질을 거듭하던 시윤의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힘껏 밀면 밀쳐질까. 덩치가 보통이 아닌데. 더군다나 에스퍼고. 아니면 정중하게 조금만 뒤로 가 달라고 말해 볼까.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사이먼이 괴상할 정도로 목을 옆으로 뒤틀며 시윤과 시선을 맞췄다.

“나랑 그놈이랑 유일하게 같던 게 가이드가 없는 거였는데.”

“…….”

“갑자기 네가 생겨 버렸어.”

사이먼에게선 냄새가 났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냄새였다. 피비린내. 사이먼이 입술을 벙긋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그의 치아와 혀가 기이할 정도로 붉었다. 아마 잦은 폭주로 오장육부가 삭으며 올라오는 각혈이리라.

아아,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구나. 근데 왜 저번 매칭 때 보질 못했지. 관리하지 않아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칼, 커다란 덩치. 무엇 하나 뇌리에 박히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거늘.

시윤이 바쁘게 기억을 반추해 가는데, 사이먼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자자.”

“……예?”

“청호랑은 벌써 잤어? 잤겠지?”

“그게 무슨…….”

“어땠어? 청호 좆 존나 크지? 아니야? 작나?”

“중위님. 지금 하시는 말씀은 성희롱에 해당, 큭!”

사이먼의 두툼한 팔뚝이 시윤의 목젖을 콱 내리찍었다. 시윤의 뒤통수가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머리통 전체가 찡하게 진동했다. 삐이이, 날카로운 이명도 울렸다. 이렇게 원색적인 폭력에 노출되는 건 생전 처음이었다.

시윤이 사이먼에게서 벗어나려 다리를 버둥거리자 그가 더 억세게 목을 죄어 왔다. 보기엔 물렁물렁한 지방 같았거늘. 바위처럼 단단했다. 에스퍼는 에스퍼였다.

숨통이 턱 끊겼다. 시윤의 얼굴이 대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이먼이 그런 시윤의 코앞에서 단어 하나하나를 씹듯 말했다.

“너 가이드잖아. 근데 이렇게 죽어 가는 에스퍼를 모르는 척할 거야?”

“이거, 이거 좀…….”

“그거 직무 유기야. 영창 가고 싶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이드의 능력은 반려인 에스퍼에게 가장 잘 듣지만, 그렇다고 다른 에스퍼에게 통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허나 시윤은 C급 가이드다. A급인 에스퍼에게 제 능력이 통할 리 없었다. 하필 저를 찾아와서는……. 혹 청호의 반려라고 엄청난 능력이 있으리라, 기대라도 한 걸까.

시윤의 얼굴이 점점 더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사이먼이 그런 시윤의 볼을 추잡스레 핥아 댔다. 피에 뒤덮여 뜨끈하고 끈적한 혀가 그렇게 역겨울 수 없었다.

“하아, 혀, 혀 내밀어 봐. 어?”

사이먼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종용했다. 시윤이 고개를 뒤틀며 어떻게든 그에게서 헤어 나오려 노력했다. 물론, 그다지 효과가 있진 않았다. 나약하고, 연약하고, 가녀린 C급 몸뚱이라.

“이 씨발…….”

텁텁한 음성으로 욕을 읊조린 사이먼이 반대 손으로 시윤의 턱을 잡아챘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뼈가 과자처럼 ‘와삭’ 하고 부서질 것 같았다.

시윤의 얼굴이 속절없이 앞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와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사이먼의 묵직한 몸이 부웅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그대로 퍽! 천장에 달라붙었다.

시윤이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콜록, 콜록. 바닥에 이마를 묻은 그가 거세게 기침을 토해 냈다. 그런 시윤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음산한 낯의 청호였다.

청호는 출전하던 날과 달리 느슨한 니트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마 보고를 마치고, 샤워까지 하고 온 것이리라.

시뻘건 눈알을 한 시윤이 그를 올려다보며 가슴팍을 두드렸다. 꽉 눌려 있던 기도가 트이며 숨이 얹혔다. 덜거덕거리는 호흡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청호가 그런 시윤을 잡아 일으켰다. 행여나 세게 잡으면 제힘에 짓눌려 아파할까 봐 꽉 쥐지도 못했다.

“괜찮아?”

“콜록, 예. 콜록, 콜록, 괜……찮습니다.”

시윤이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청호가 그의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그 송구한 손길에 시윤이 정말 괜찮다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라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시윤의 숨이 한층 편안해지자, 청호가 매서운 눈으로 천장에 붙은 사이먼을 노려봤다. 사이먼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청호의 서늘한 눈빛에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히죽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대장. 오랜만입니다.”

“…….”

“잘 지내셨습니까?”

사이먼은 청호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청호의 미간이 좁게 구겨졌다. 그의 알은체가 영 마뜩잖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시선을 거뒀다. 그리곤 시윤의 상태를 재차 살폈다.

“물론 잘 지내셨겠지요? 그렇게 애타게 찾으시던 가이드가 생겼는데. 당연히 잘 지내셔야지요. 아아, 아쉽습니다. 이제 저만 가이드가 없지 말입니다.”

사이먼은 천장에 달라붙은 채로도 잘만 나불거렸다. 거듭 이어지는 가이드 타령에 시윤이 사이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자 청호가 슬쩍 그의 시야를 가리고 섰다.

“여긴 왜 왔어.”

“대장님 가이드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청호 대장의 가이드일까, 싶어서요. 그 정도 능력이라면 저를 이 고통에서 구해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막힘없이 술술 이어지는 비약에 청호가 자신의 눈썹뼈를 쓰다듬었다. 불쾌한 티가 역력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대장님 안 계실 때 잠깐 빌리려고 했지 말입니다.”

“…….”

“기분 나쁘신 건 아니죠? 대장이라면 부하 병사를 위해 가이드쯤은 흔쾌히 빌려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방관자 태도를 고수하던 시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빌려줘? 나를? 왜? 가이딩을 위해서? 아니면 그것을 명목 삼아 그의 하룻밤 노리개로? 아까처럼 그 역겨운 혀를 받아 내야 한단 말이야?

그럴 수도 있나? 원래 가이드란 존재가 이렇게 빌려주고, 돌려받는 것인가?

막연히 가이드가 여러 에스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만 알고 있었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접촉하는 방법은 살과 살을 맞대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니, 위급 상황이면 반려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그런…… 그런 스킨십을 나누어야 했다.

그걸 깨닫자 해일 같은 혼란이 몰려왔다. 동시에 기분 나쁜 불안함이 전신을 뒤덮었다. 시윤이 듣기론, 청호는 부하 병사들에게 몹시 친절하댔다.

시답잖은 장난을 치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형식의 관계가 아니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죽는 걸 방관하지는 않는단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사체도 꼭 가지고 와 가족의 품에 안겨 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죽어 가는 병사에게 저를 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 대충 넘겨짚어도 저보다 훨씬 오래 알아 온 사이 같은데.

시윤의 손가락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청호가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사이먼의 제안을 고민하고 있으면, 혹은 이미 저를 빌려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어쩐단 말인가. 그 현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천장에 붙은 사이먼이 희멀건 시윤의 얼굴을 보며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아아……. 10분. 10분만 늦게 오시지. 대장 가이드 정도면 잠깐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혼잣말이나, 듣는 이는 여럿인 말이었다. 중얼중얼 입술을 움직이던 사이먼이 고개를 크게 쳐들고 청호를 응시했다.

“사실 입술 좀 비볐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별로였지 말입니다. 가이드 능력을 떠나서, 그쪽으론 영 끼가 없는 것 같습니, 커헉!”

쾅!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사이먼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엄청난 소리에 시윤이 퍼드득 등허리를 떨며 고개를 내밀었다. 방금까지 천장에 붙어 있던 사이먼이 지금은 바닥에 붙어 있었다. 주변에는 부서진 바닥 파편들이 난잡하게 뒹굴었다.

사이먼의 등이 거칠게 움찔거렸다. 죽었나. 아니면 까무러쳤나. 시윤이 바쁘게 눈을 굴리는데, 사이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우……. 대장 난폭한 건 알아주지 말입니다.”

그의 이마에 붙은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잖아도 덥수룩하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좀 전의 추락으로 입술이 터진 건지, 언뜻언뜻 드러나는 이가 온통 새빨갰다. 몹시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이건 저놈을 안 빌려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제가 잘 훈련해서 추후 대장 밤 시중에…….”

사이먼의 텅 빈 동공이 시윤에게 닿았다. 순간, 청호의 얼굴이 콰직 구겨졌다. 사이먼의 커다란 몸이 위로 붕 뜨더니 다시 쾅! 천장으로 솟구쳤다. 이번엔 천장에서 우수수 흙먼지가 떨어졌다.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기겁한 시윤이 벽을 짚고 섰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은 채, 눈만 데굴데굴 바쁘게 굴렸다.

청호가 한 발 옆으로 이동해 다시 시윤의 시야를 차단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입을 뗐다. 그가 단어를 끊어 낼 때마다 사이먼은 바쁘게 천장과 바닥을 오고 갔다.

“넌…….”

“헉!”

“항상…….”

“큭!”

“그 입이 문제야.”

“허억…….”

쾅! 쾅! 쾅! 사이먼이 네 번쯤 하늘과 땅을 왕복했을 땐 사지의 뼈가 조각나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왔다. 촤악!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시윤이 목을 자라처럼 오그렸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청호가 시야를 가리고 있음에도, 바닥에 눌어붙은 사이먼의 살덩이와 부서진 뼈는 보였다.

이렇게 징그러운 광경은 처음이다. 지금 이게 현실인지 몽중인지도 구분이 어려웠다. 조용히 손톱으로 손바닥을 쑤셔 봤다. 아릿한 통각이 올라오는 게, 분명 현실이 맞았다.

사이먼은 그 어마어마한 폭력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신음도 내비치지도 않았다. 마치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것처럼.

청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지금까지는 눈빛으로 사이먼을 뭉갰는데, 손을 들었다는 건 아예 인간의 형상 자체를 없애겠다는 뜻이었다.

시윤이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문득 사이먼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이미 코며 이마며, 하물며 한쪽 안구도 터져서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으나, 비죽비죽 웃고 있던 때와는 달랐다. 언뜻 보이는 눈동자가 눅눅했다.

그는 슬퍼 보였다. 억울한 것 같기도 했고, 절망한 것 같기도 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도어 검사 결과를 받아 든 열여섯의 시윤과 똑같은 얼굴인지라.

“대장.”

“…….”

“대장님.”

사이먼이 피와 가래, 그리고 슬픔으로 지글지글 끓는 목소리로 청호를 불렀다. 청호는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봇 같은 얼굴에 사이먼이 끅끅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눈을 부릅뜨고 청호를 노려봤다.

“불행하십시오. 행복하지 마십시오.”

“…….”

“대장의 가이드가 꼭, 대장보다 먼저 죽길 바라겠습니다.”

견고히 굳어 있던 청호의 낯에 실금이 갔다. 오른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고, 입술 끝이 삐뚜름히 뒤틀렸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사이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친히 무릎을 굽히고, 낮게 속삭였다.

“지금 생각하니까, 네 입이 아니라 혀가 문제인 것 같아.”

그 말에 사이먼이 벙긋 입술을 뗐다. 반박이든 농락이든, 혹은 비아냥이든 뱉기 위해서였다. 헌데 어째서인지 턱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물리지도, 그렇다고 열리지도 않았다. 개구기라도 낀 것처럼 말이다.

청호가 사이먼의 당황한 눈동자를 즐겁게 구경했다. 그리고 허공으로 쳐든 손끝에 바짝 힘을 줬다.

“컥……!”

사이먼이 짧은 탁음을 내뱉었다. 벙긋 벌어진 그의 입속에서 붉은 혀가 빼꼼 나왔다. 처음엔 빼꼼이었는데, 점점 길어졌다. 시윤은 인간의 혀가 그렇게 길게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우우, 아우, 우!”

사이먼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렸다. 그러나 혀는 점점 더 길게 빠졌고, 사이먼의 눈알에 거미줄 같은 핏발이 섰다. 부러진 사지는 갓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사이먼의 혀가 한 뼘쯤 나왔을 때, 시윤은 ‘입이 아니라, 혀가 문제’라는 말을 이해했다.

그러고 나니 뒤를 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광경일 듯해서. 길게 늘어선 연구실 문들 역시 일제히 닫혔다. 조용히 구경하던 연구원들이 시윤과 같은 생각으로 시야를 닫은 것이리라.

시윤이 질끈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질척하고 찐득한 소리가 났다. 촤아악, 바닥에 액체로 추정되는 것이 흩뿌려지는 소리도 났다.

쓸데없이 명확하고 상세한 장면이 상상됐다. 머리털이 다 쭈뼛 섰다. 청호가 아주, 아주 먼 사람으로 느껴졌다. 원래도 먼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예 다른 세계 사람 같았다.

사이먼이 나쁜 놈이긴 했다. 아무렇지 않게 성희롱하고, 동의하지 않는 스킨십을 요구하고. 그것만 봐도 그의 평소 행실이 뻔히 보였다.

근데 이렇게 죽을 만큼 나쁜 사람인가. 몇 번이고 벽에 처박히다가, 혀가 뽑혀 죽을 만큼 못된 사람이냔 말이다.

시윤은 혼란스러운데, 청호는 그를 벌하고, 죽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시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세게 비볐다.

피와 살이 튀는 전장은 평화로운 포스와는 전혀 다른 법과 규범이 지배할 것이다. 찰나의 행동과 결정이 수많은 목숨의 생사를 결정지을 테니까. 그리고 아마 그 법의 심판자는 청호겠지. 그는 병사를 벌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전장이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포스 안이고, 당장에 사형시켜야 할 만큼 그가 중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시윤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청호가 죽은 사이먼을 무감히 내려다봤다. 그러다 이내 흥미가 떨어진 듯, 뒤를 돌아 시윤에게로 다가왔다. 시윤이 초점이 엇나간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오랜만이야.”

청호가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방금 타인의 혀를 뽑은 것치고는 몹시 평온한 목소리였다.

“…….”

시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청호의 볼에 튀어 있는 핏방울들이 너무 낯설어서. 아니, 실은 무서웠다. 청호가 아니라 또 다른 존재 같았다. 뒷걸음질을 치지 않기 위해 발바닥에 힘을 줘야 했다.

그때였다. 청호가 손을 올렸다. 시윤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짓이기듯 감았다. 폭력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본능적인 방어였다.

“…….”

청호가 그런 시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자그마한 얼굴 가득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공포가 영 반갑지 않았다. 저를 보는 대부분의 인간이, 또 클롭스가 비슷한 표정을 하는데 유독 그랬다.

볼 안쪽을 씹었다가 놓은 청호가 소매로 시윤의 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피에 젖은 사이먼의 혀가 닿았다가 떨어진 흔적이 여실히 붙어 있는지라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씻어야겠다.”

그 말에 시윤이 번쩍 눈을 떴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이 청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 깨달았다. 벽에다 머리를 콱 처박고 싶었다. 미쳤지. 그의 가이드면서 그를 무서워했다.

“그…… 어…….”

시윤이 무슨 말이라도 짜내 보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자 청호가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손을 거뒀다.

“내일 다시 올게.”

그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놀란 시윤이 멀어지는 청호의 손목을 잡아챘다. 유리 파편이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찌릿함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

“저, 저녁 같이 드실래요?”

“…….”

“제가 얼른 씻고 대장님 숙소로 갈게요.”

“…….”

청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시윤은 이유 모를 죄악감에 축축이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혀를 뽑을 수 있냐며 비난한 것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야차라며 모욕을 퍼부은 것도 아니고. 그저 잠깐 저를 무서워한 것치고는 지나친 죄의식이었다.

그래서 그게 뭐. 그 죄의식으로 그가 자신과 저녁을 함께해 준다면. 그동안 손을 잡아 준다면. 또 포옹해 준다면. 청호는 그 죄의식을 남용할 생각이 차고 넘쳤다.

“그래. 기다릴게.”

청호가 흔쾌히 긍정을 내놓았다. 그리고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시윤의 머리 위로 드리웠던 안개가 한층 옅어졌다. 시윤은 멀어지는 청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를 상기했다. 그가 빠르게 달려 청호의 소맷자락을 낚아챘다.

청호가 무슨 일이냐는 눈으로 물었다. 시윤이 손끝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고깃덩이가 된 사이먼이 바닥에 껌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저, 저분은 어찌합니까?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중위 에스퍼던데. 대장님께 징계가 내려지면 어쩌죠? 그땐 제가 증인으로…….”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청호가 무심하게 시윤의 걱정을 일갈했다.

“…….”

시윤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거’라니. 중위 에스퍼를 죽였는데, ‘그런 거’라니. 위에서 어떠한 징계가 내려올지 모르는데 ‘그런 거’라니. 청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윤의 표정에 청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가이드는 꽤 귀엽다. 특유의 연약함이라든가. 겁에 질려 있으면서도 위계와 규칙을 고민한다든가. 또, 주제에 저를 걱정한다든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손바닥과 갈비뼈에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청호가 살짝 허리를 굽히고 걱정 가득한 시윤과 눈을 맞췄다.

“아무도 감히, 나한테 뭐라고 못 해.”

“…….”

“그리고 앞으로는 너한테도 뭐라고 못 하게 만들 거야.”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요. 무심코 반문하려던 시윤이 꾹 입을 다물었다.

청호라면, 손가락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인간의 혀를 뽑아내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청호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 * *

시윤은 머리칼이 채 다 마르기도 전에 청호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그가 편한 옷차림이길래 저도 품이 넉넉한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었는데. 너무 편하게 입은 게 아닌가 싶었다.

어쩐다. 다시 돌아가자니 저녁때가 한참 지날 성싶고. 이대로 들어가자니 제가 용납이 안 됐다. 시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문 앞을 서성거리는데, 낯선 그림자가 다가왔다.

기겁한 시윤이 철썩 벽에 달라붙었다. 오늘 ‘낯선’이라는 형용사에 부합하는 순간이 너무 많았다. 더는 싫었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싫었다.

“채 준위?”

다행히 안면이 있는 자였다. 대령. 에로아스 부대의 최고참. 청호의 오른팔. A급 에스퍼. 폴 터너였다.

“준위, 채시윤.”

시윤이 가슴을 펴고 턱을 당긴 채 경례했다. 폴이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경례를 받았다.

“대장님 만나러 온 거야?”

폴이 물었다.

“예.”

시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러자 폴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그 꼴로?”

그 말에 시윤이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그런다고 제 옷차림이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맨투맨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폴이 그런 시윤을 마뜩잖게 아래위로 훑었다.

“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꾸지람이나 비판에 약한 시윤이 얼른 뒤를 돌았다. 그러자 폴이 쯧, 혀를 차며 시윤의 목덜미를 잡아 다시 돌려세웠다.

“됐어. 아까부터 기다리셨으니까 일단 들어가.”

“예.”

재차 경례한 시윤이 문 앞에 섰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했다.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청호인데 그래도 긴장이 됐다. 흉곽이 빵빵하게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마신 시윤이 문을 열려 손을 뻗었다.

“…….”

그러나 허공에서 손이 멈췄다. 잠깐 고민하던 시윤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짐을 진 폴이 시윤을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대령님.”

“왜?”

폴이 한쪽 눈썹을 비죽 위로 올렸다. 또 뭐. 뭔데. 왜 안 들어가는데? 의심과 짜증이 반반 섞인 낯이었다. 시윤이 반걸음 그를 향해 다가섰다.

“오늘 있었던 일 아십니까?”

“일? 무슨 일?”

폴이 턱을 살짝 옆으로 뒤틀었다. 시윤이 눈알을 한 바퀴 크게 돌렸다. 아직 모르는구나. 그럼 사이먼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추후 청호가 받을 징계가 없는지 물어도 명확한 답을 듣지 못할 듯했다.

시윤이 연구동 샤워실에서 씻고 나왔을 땐, 능력 좋은 로봇 청소기들이 움푹 꺼진 바닥에다 시멘트를 쏟아붓고 있었다. 사이먼의 시체는 물론, 핏방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막연히 청호가 지시한 일이리라 생각했는데. 폴이 모르는 걸 보니 아닌 모양이다. 시윤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으려는데, 폴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틀어졌다.

“아, 그 돼지 새끼 뒤진 거?”

“…….”

순간, 시윤의 동공이 빳빳하게 얼었다. 그가 말하는 ‘돼지 새끼’의 뭉개진 얼굴이 머릿속을 꽉 채웠기 때문이다. 시윤이 무어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폴이 침을 뱉듯 말했다.

“뒤져도 될 새끼였어.”

“주제넘습니다만, 이유를 여쭤 봐도 됩니까?”

시윤이 참지 못하고 뾰족하게 캐물었다. 말랑말랑하고 하얀 시윤의 세상엔, 뒤져도 될 새끼는 없다. 더군다나 에스퍼인데. 가이아가 그 능력을 준 이유가 있을 텐데. 해야 할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사람인데.

폴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팔짱을 꼈다. 두툼한 팔 근육이 꿈틀거렸다.

“죽여 달라고 간 거잖아.”

“예?”

“사이먼 그 새끼. 죽으려고 너 찾아갔다고. 정확히 말하면 대장님을 찾아간 거지.”

시윤의 눈꺼풀이 바쁘게 깜빡거렸다. 죽으려고 왔다, 라. 그게 무슨 말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시윤이 눈을 홉떴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청호는 일주일 내내 부대에 없었다. 근데 왜 하필 청호가 복귀하는 날인 오늘 왔을까. 그가 떠나자마자 왔으면 멋대로 저를 주무르고 농락할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얼마든지 저를 취하고 사라질 수 있었단 말이다.

더군다나 A급이면서 반항 한 번, 공격 한 번 하지 않았다. 사이먼이 어떤 에스퍼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진 모르나, 적어도 청호 뒤에 숨어 있는 저를 노려 볼 만도 했다. 근데 천박한 말만 반복했지. 어떻게든 청호의 속을 뒤집으려는 것처럼.

맞아. 그는 꼭 죽으러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청호는 그 사실을 아는 듯했다.

시윤은 똑똑한 머리로 금세 결론을 도출해 냈다. 헌데 이유가 없었다. 사이먼은 왜 죽으려 했나. 왜 죽음의 집행자가 청호여야 했나.

혼란이 겹겹이 쌓이는 시윤의 얼굴에 폴이 자신의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대장님이 사이먼에 대해 아무런 말도 안 해 주시던?”

“예. 그냥 그렇게 주, 죽이셨습니다.”

폴의 시선이 시윤의 말간 얼굴 위를 마구 나돌아 다녔다. 죽음이라는 단어와 친하지 않은 유약함이 느껴졌다. 피도 익숙하지 않겠지. 더군다나 혀가 뽑히는 걸 봤으니 오죽하랴.

폴은 청호가 왜 시윤에게 구구절절한 서사를 설명해 주지 않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직접 들어.”

폴이 손수 문을 열어 줬다. 놀란 시윤이 그의 팔을 막아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폴이 시윤을 툭, 가볍게 안으로 밀었다. 시윤이 짐짝 던져지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청호와 마주하게 됐다.

기다란 소파에 눕듯 기댄 청호는 유리를 만지고 있었다. ‘유리를 만진다’라.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상했으나, 실로 그랬다. 물론 두 손으로 조물거리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앞에 주먹만 한 유리가 둥둥 떠 있었다. 투명하고 맑은 유리는 청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물방울처럼 말랑거리며 녹았다. 동그란 원이 됐다가, 네모가 됐다가, 세모가 됐다가 제멋대로 모양을 바꿨다.

한참 꿈틀거리던 유리가 가느다란 막대기처럼 길게 늘어졌다. 새끼손가락보다 얇은 굵기였다. 그쯤, 청호가 상체를 일으키고 유리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섬세한 작업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대체 저것으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시윤이 덩달아 턱을 삐죽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였다. 묵직한 저음이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들어왔으면 이름을 밝혀야지.”

시윤이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그가 뒤늦게 손을 올려 경례했다.

“준위 채시윤입니다.”

그 순간, 청호의 검은 눈동자가 시윤의 미간으로 정확히 박혀 왔다. 어찌나 직선으로 뻗어 오는지 시윤은 자신의 이마가 뚫린 줄 알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청호가 연한 미소를 띤 채 시윤을 꾸짖었다. 시윤이 애매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청호가 툭툭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시윤이 쭈뼛쭈뼛 그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분명 푹신한 소파인데, 딱딱하게 느껴졌다.

“저녁은 너 오면 가져다 달라고 했어. 식으면 맛없으니까. 10분 정도 걸릴 거야.”

그 말에 시윤이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10분 후든, 한 시간 후든 상관없었다. 그다지 입맛이 없었다. 원래 먹는 걸 썩 즐기지 않기도 하고, 워낙 엄청난 걸 봤더니 여태 속이 울렁거렸다.

함께 저녁을 먹자 제안한 게 자신이긴 하다만, 당시엔 그 말 말고 다른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잠시간 시윤을 바라보던 청호가 유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멈췄던 유리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대기가 뚝뚝 끊기며 수십, 수백 개로 조각났다. 그 조각들은 서로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처음엔 어떠한 조형물을 만드는 줄 알았다. 왜 있잖은가. 눈 결정이라거나, 건물이라거나, 나무라거나. 그런 흔한 예술. 근데 아무리 보고 있어도 정체를 모르겠다. 굳이 묘사하자면 삼각형 같은데, 아무튼 괴이한 생김새였다.

청호의 손장난을 구경하던 시윤이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자꾸 그렇게 에스퍼 어빌리티를 쓰시면 안 됩니다.”

“왜?”

“그럼 폭주가 잦다고 배웠습니다.”

“괜찮아. 너 있잖아.”

청호가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움직이는 유리들은 멈추지 않았다. 시윤이 서글픈 얼굴로 자신의 갈라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저는 있으나 마나 한걸요.”

아주 작은 음성이긴 했으나, 들리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유리가 언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청호가 가만히 시윤을 쳐다봤다. 전과 달리 싸늘한 눈빛이었다.

“누가 그래?”

청호가 물었다. 말투에 가시가 가득한 게,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 당장 이름을 토해 내지 않으면 누구처럼 혀가 뽑힐 것 같았다.

하지만 고해바칠 이름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다름 아닌 시윤 자신이었으니까. 시윤이 꾹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청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어쩌면 시윤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본 걸지도 몰랐다.

두터운 정적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소리를 내는 건 쨍그랑거리며 붙었다가 떨어지는 유리 파편뿐이었다. 꼭 유리 모빌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지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낭만적인 소리였다.

시윤이 슬쩍, 청호의 곁으로 조금 더 붙어 앉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궁금하던 질문을 던졌다.

“뭘 만드시는 겁니까?”

“에펠 탑.”

“……예?”

시윤의 얼굴이 희한하게 뒤틀렸다. 에펠 탑. 에, 펠, 탑.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다. 에펠 탑이라니. 그렇게 우습고 괴상한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다니.

시윤이 알파벳 A 모양의 유리 덩어리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사방으로 A 네 개가 겹쳐져 있고, 그사이에는 얇은 유리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져 있었다. 허나 아무리 보아도 ‘에펠 탑’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시윤이 골똘히 고민하고 있으니 청호가 친절히 말을 덧붙였다.

“에펠 탑이라고, 탑.”

“아, 탑! 탑……. 근데 포스에 그런 탑도 있습니까?”

잠깐 밝게 갰던 시윤의 낯이 다시 컴컴해졌다. 제 평생 포스 안에 저런 생김새의 탑이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제가 모를 리 없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형을 따라 포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단 말이다.

잠깐 고민하던 청호가 물었다.

“포스 밖으론 한 번도 나가 본 적 없나?”

“어……. 예. 없습니다.”

“바깥에 있는 거야. H 구역에.”

아아, 시윤이 고저 없는 감탄을 내놓았다. 바깥에 있는 거구나. 그러니 알 리가 있나. 시윤이 아는 ‘포스 바깥의 것’은 병사들의 보디캠에 녹화된 클롭스뿐이었다.

모호한 시윤의 낯에 청호가 묘사인지 감상인지 모를 말을 더했다.

“되게…… 징그럽게 생겼는데, 또 보다 보면 괜찮은, 그런 탑이 있어.”

“…….”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

순간, 시윤의 만면에 경외가 차올랐다. 그가 ‘에펠 탑’이라는 것을 같이 보러 가잔다. 그 말인즉슨, 언젠가는 그와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가자는 뜻이었다.

시윤이 서커스를 보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청호가 만드는 ‘에펠 탑’을 응시했다. 에펠 탑이란 유리로 만들어진 걸까. 크기는 얼마쯤 하려나. 그래도 탑이라고 부르는 것이면 제 키만 하려나? 아니면 청호의 키? 그것도 아니면 연구동 건물 크기 정도?

모건에게 물어보면 알 텐데. 아니, 물어보지 말자. 꾹 참았다가 먼 훗날 청호와 함께 제 눈으로 직접 봐야지.

시윤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치미는 설렘에 손과 발을 부들부들 떨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손바닥 반만 한 에펠 탑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비죽비죽 날이 섰던 모서리들이 뭉그러졌다. 그러다 금세 얼어붙었다. 다시 녹고, 얼었다가, 녹고 얼었다. 그걸 반복했더니 꼭 솜씨 좋은 대가가 공들여 만든 것처럼 변했다. 단단하고 반짝거렸으며, 아주 멋졌다.

“와…….”

시윤이 가감 없이 감탄을 내놓았다. 반짝이는 에펠 탑이 천천히 아래로 하강했다. 그러다 시윤의 코앞에서 멈췄다.

“너 줄게.”

청호가 말했다.

“저 주신다고요? 정말요?”

시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믿을 수 없었으나, 믿고 싶은 말이었다. 이건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애당초 에펠 탑의 존재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청호가 만들어 준 에펠 탑이라니. 분명 귀한 거였다.

“응. 대신 손 잡아 줘.”

청호가 익살맞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시윤이 그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제는 청호의 얼굴보다 익숙한 손바닥이었다. 닿을 때마다 척추가 뒤틀리는 듯 아팠지만, 제가 쓰임새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싶어 뿌듯하기만 했다.

“제가 이득인 거래 같습니다.”

시윤이 장난스레 말했다.

“으음, 내가 이득일걸.”

청호의 두툼한 목울대가 아래위로 움직이며 탁한 신음을 냈다. 진심이 담뿍 담긴 대답이었다. 시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통통한 입술이 꽃이 움트는 것처럼 방긋 피어났다. 청호의 입가에도 연한 미소가 퍼졌다.

공중에 뜬 에펠 탑이 살랑살랑 유혹하듯 움직였다. 시윤이 아래턱을 뻐끔 벌린 채 그것을 응시했다.

“정말 받아도 됩니까?”

“그래.”

“하지만 열심히 만드셨잖아요.”

“이까짓 거 매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청호가 한껏 으스댔다. 장난으로 점철된 몸짓이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하물며 동시에 수십 개씩 만들 수도 있었다. 청호는 기지에서든, 전장에서든 시시한 시간을 이렇게 갈무리하곤 했다. 재료는 나무가 될 때도 있고, 돌이 될 때도 있고, 가끔 클롭스의 이빨이나 손톱이 될 때도 있었다. 시윤이 과분하다는 듯 몸을 옹송그릴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러지 마세요.”

시윤이 고개를 내저었다.

“왜? 싫어?”

청호의 콧잔등이 살풋 구겨졌다. 그에 시윤이 두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싫긴요. 종일 그것만 보고 있을 것 같으니 하는 말입니다.”

“……이 에펠 탑에 그런 마법은 안 걸려 있는데.”

청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어딘가 독특한 발상에 시윤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아니라?”

“종일 보고 싶을 만큼 예쁘단 뜻입니다.”

“…….”

청호의 새까만 눈동자가 시윤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어찌나 집요한 시선인지, 그의 눈동자에 갇히는 기분이 들었다.

적막이 이어졌다. 불편하진 않으나, 갑갑한 적막이었다. 참다못한 시윤이 에펠 탑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리고 반대 손을 청호에게 넘겨줬다.

“거래했으니, 이제 이건 제 겁니다.”

시윤이 부러 입꼬리를 한껏 추켜올렸다.

“그래. 네 거야.”

청호가 힘주어 시윤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얽히고, 손바닥이 틈 없이 맞물렸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목젖이 크게 들썩였다. 이유는 늘 그렇듯, 정반대였다.

청호는 근육이 사르르 녹는 듯한 안온으로, 시윤은 근육이 죄다 타는 듯한 고통으로.

청호가 나른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댔다. 에펠 탑을 조심히 테이블에 내려놓은 시윤이 그를 따라 소파에 기댔다. 시윤은 이제 제법 아프지 않은 척, 무감한 표정을 연기할 줄 알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눈만 마주하고 있었다. 공기가 은은히 부유했다.

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아서, 시윤은 사이먼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덮어 두기로 했다. 시간은 많으니까. 구태여 캐물어서 이 평화를 헤집고 싶지 않았다.

사실, 들어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정말 별일 아니면 어쩌나. 청호가 한 게 ‘처벌’이 아니고, ‘살해’면 지금의 이 분위기를 이어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많이 아파?”

시윤의 얼굴에 잠깐 드리웠던 어둠을 놓치지 않은 청호가 물었다. 시윤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호가 께름칙한 낯으로 시윤의 손등을 슥슥 문질렀다. 소매가 긴 맨투맨이 손끝에 걸려 왔다. 보드랍고, 폭신하고. 시윤과 참 잘 어울리는 옷감이었다.

“편하게 입고 있으니 보기 좋네.”

“폴 대령님은 싫어하시던데요.”

시윤이 코를 찡긋거리며 이르듯 말했다. 청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시해. 내가 좋으니까.”

“근데 저도 고민했어요. 이걸 입고 가도 되나. 그래도 대장님은…… 대장님이시잖아요. 저보다 한참이나 높으신데…….”

“대장이기 전에 네 에스퍼지.”

청호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말했다. 시윤의 속눈썹이 바짝 곧추섰다. ‘네 에스퍼’라니. 나의 에스퍼라니. 대장이라는 그 위대한 계급보다 나의 에스퍼가 우선이라니.

그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시윤이 청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이대로 그의 힘에 몸 반쪽이 타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청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윤과 닿아 있는 손바닥을 통해 사납게 날뛰던 고통이 빠져나갔다. 날카로이 곤두서 있던 신경은 뭉근하게 녹아내렸고, 눈앞이 멀끔하게 갰다. 때로는 주제도 모르고 천국에 온 듯, 황홀하기도 했다.

고작 손잡는 것으로도 이런데, 조금 더 진한 스킨십은 어떠하려나. 분에 겨운 욕심이 솟구쳤다. 당장이라도 시윤을 밀어 눕히고, 온갖 패악을 다 저지르고 싶었다. 저 하얀 살결을 씹고, 아무도 보지 못했을 그곳을 핥고, 제 것을 비비고 싶었다.

그리고, 끝내 완전히 합쳐지면.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축복이 쏟아짐과 동시에 가이아가 내린 저주가 증발하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혀가 바짝바짝 말랐다. 눈알이 시큰거릴 정도로 거대한 육욕이 치밀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그러다 이 소중한 가이드가 제힘에 압사당해 죽어 버리면 큰일이니까.

청호는 아랫입술을 한 번 핥는 것으로 모든 욕구를 뒤통수 저 너머로 날려 버렸다. 참는 것. 인내하는 것. 견디는 것. 평생 해 온 것이라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가 늦는다며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으려 할 때였다. 웬일로 시윤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대장님.”

“응.”

“아까 그분 있잖아요.”

“그분?”

“그…… 어…….”

시윤이 우물쭈물 말을 먹었다. 할 말이 있는데, 망설이는 듯했다.

청호는 그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구태여 시윤의 곤란을 덜어 주는 배려를 보이지 않았다. 시윤은 그런 것에 무뎌질 필요가 있었다. 제 곁에 머물려면 더더욱 그래야 했다.

크게 심호흡한 시윤이 간신히 이름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 사이먼……이라는 분이요.”

“사이먼이 왜?”

“저 그분이랑 입술 안 비볐어요.”

그 말에 청호는 하마터면 채신머리없이 박장대소할 뻔했다.

‘사실 입술 좀 비볐습니다. 근데 생각보다 별로였지 말입니다.’

그래, 사이먼이 그런 말을 했었지. 시윤은 자신이 그것을 담아 두고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어렵사리 사이먼의 이름을 꺼냈다니. 시윤다우면서도, 시윤답지 않았다.

“알아.”

청호가 가볍게 대꾸했다. 시윤의 만면이 한층 밝아졌다.

“호, 혹시 오해하셨을까 봐 말씀드린 겁니다.”

“내가 그런 오해하는 게 싫어?”

“오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우문현답이네. 내가 바랐던 답은 아니지만.”

청호가 킥킥, 장난스레 웃었다. 그의 웃음을 멍하니 보던 시윤이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이 내포할 수 있는 의미를 깨달았다. 꼭 그가 오해했을까 봐 전전긍긍한 것 같지 않은가. 타인과 입을 맞춘 줄 알고 실망했을까 봐. 그리고…… 자신과 입을 맞추는 게 별로라 생각할까 봐.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시윤의 광대에 불그스름히 열이 채였다. 청호와 멀어지기 위해 무심코 손을 뗐다.

탁.

삽시간에 얼굴을 굳힌 청호가 다시금 손을 낚아챘다. 그 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시윤이 속절없이 그의 앞으로 끌려갔다.

“1분만. 1분만 더 잡아 줘.”

“…….”

“전장에 있는 내내 네 손만 생각했단 말이야.”

청호는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이었다. 덕분에 시윤은 귓바퀴까지 터질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나흘 내내 저만 생각했다니. 그런 말은 태어나 처음 들어 봤다. 하물며 아우 사랑이 넘치는 형들도 보고 싶다는 말만 했지, 내내 생각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1분이 아니라, 5분도 괜찮습니다.”

시윤이 나지막이 말했다. 청호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 후로는 정적이었다. 그러나 고요하진 않았다. 가까운 거리라 서로의 숨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생생히 느껴졌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이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네 입술. 신기할 정도로 빨개. 처음 봤을 때도 신기하다 생각했었는데.”

청호가 시윤의 입술을 쳐다보며 읊조렸다. 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구센터에서 말입니까?”

“아니. 모건 연구실 앞에서 봤을 때.”

“……그걸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지.”

“…….”

시윤의 눈썹이 동그란 아치를 그렸다. 설마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당시의 저는 그에게 바람 한 점보다 하찮은 존재였을 텐데. 너무 뜻밖이라 감동보다 놀라움이 먼저 밀려왔다.

청호가 과거의 시윤을 떠올렸다. 벽에 납작하게 붙어서는, 큼지막한 눈을 더 크게 뜨고, 어깨는 귓불까지 올리고 있었지. 하얗게 질렸다가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하얗게 질리는 모습이 당황한 다람쥐 같았다.

“그때도 만져 보고 싶었는데. 네가 그대로 까무러쳐 버릴 것 같아 말았어.”

“……그때 그러셨다면, 정말 까무러쳤을지도 모릅니다. 엄청 긴장한 상태였거든요. 등신같이 컵까지 깨서는…….”

자책 가득한 시윤의 말에 청호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지금도 까무러칠 건가?”

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시윤은 그의 침범을 방관했다.

이제는 코끝이 닿기 직전이었다. 귓구멍으로 들리던 숨 자락이 윗입술에서 느껴졌다. 눈꺼풀이 팔랑거리는 소리와 맥이 펄떡거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번엔 시윤이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내 코끝이 닿았다. 청호의 시선이 한층 짙어졌다. 빛 한 줌 허용하지 않는 검은 눈동자엔 온통 시윤뿐이었다.

청호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윤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포옹으로도 전신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데. 키스는 어떠려나. 지금도 뒷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거늘. 키스는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겠지. 아니면, 염산을 들이켜는 고통이려나.

그래도 버티겠다 했으니, 버텨 봐야지.

시윤이 신발 안에 숨어 있는 발가락을 안으로 한껏 말았다.

그렇게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였다.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가 두 사람을 가로질렀다.

“대장님. 식사 도착했습니다.”

불청객, 폴이었다. 화들짝 놀란 시윤이 고개를 뒤로 물렸다. 청호의 눈가가 마뜩잖게 뒤틀렸다. 그러나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곧 폴이 음식이 담뿍 올라간 트레이를 밀며 들어왔다.

어딘가 침체된 낯의 청호, 시윤과 달리 얄미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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