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26)

프롤로그

2088년. 3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인간들은 과거 1, 2차 대전과 달리 칼과 총을 들고 싸우지 않았다. 총을 쏠 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수많은 핵보유국 중 한 나라가 핵을 터트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핵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다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

상황은 매분 매초 악화를 거듭했다. 재가 비처럼 내렸고, 피가 바다처럼 넘실거렸다. 전쟁 사흘 만에 UN이 해체됐다. 나라가 사라지고 국경이 모호해졌다. 멸종을 코앞에 둔 인간에게는 소중히 여기던 것을 지킬 의무도, 정신도 없었다.

인간은 증발하듯 죽음을 맞이했다. 그 죽음은 인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운이 나쁜 인간들은 핵의 사정거리 안에 들지 못했다. 그들은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다. 전신에 암이 퍼졌고, 수포와 고름이 올라왔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불가능했다. 근육과 신경이 망가져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그저 재와 시체가 뒤덮인 거리를 기며 완전한 종말을 기다렸다.

신이 인간을 버린 것이다.

이제 지구의 주인은 방사능이다.

* * *

100년이 흘렀다. 핵의 잔재, 즉 방사능은 인간의 빈자리를 부지런히 집어삼켰다.

탐욕스러운 방사능은 무형물의 학살자로 만족하지 않았다. 방사능에서 태어난 ‘그것’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의 시초는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질병이었다. 암이었고, 세균이었고, 고름이자 인간 그 자체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종(種)으로 발아했다.

‘그것’은 먼 과거의 인간이 그랬듯, 태초엔 하루살이처럼 연약하고 지능도 없었다. 그러나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진화했다.

그렇게 인간의 지능을 가진 괴물 클롭스(klōps)가 등장한다.

클롭스가 죽음과 진화를 거듭할 동안, 인간 역시 조금의 변화를 겪었다.

지구가 인간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지구, 즉 가이아(Gaea, 대지의 여신)는 수십억 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다 끝내는 죽은 행성으로 만들어 버린 인간이 미웠으나, 너그럽게도 작은 선물을 내렸다.

클롭스와 대적할 힘을 지닌 에스퍼와, 그 에스퍼의 안정을 도모하는 가이드의 탄생이었다.

* * *

다시 100년이 흘렀다. 부지런한 지구는 필사적으로 자생했고, 방사능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땅속에 숨어 살던 인간들이 바깥으로 나왔다. 방사선을 피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벽을 올렸다. 군대를 만들고, 계급을 나누고, 체제와 역사를 쌓아 갔다.

똑똑한 인간은 금세 과거의 명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과거만큼 평화롭지는 않았다. 한낱 짐승으로 폄하하기 힘든 클롭스가 호시탐탐 인간의 자리를 노렸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번식 속도가 인간의 수배에 달하는 클롭스는 죽이면 죽일수록 그 숫자가 곱절로 부풀었다. 그것들은 날이 갈수록 영악해지고 치밀해졌으며, 강해졌다.

인간은 지쳐 갔다. 방사능을 이겨 냈더니, 방사능에서 태어난 클롭스가 그들의 멱을 따겠다고 으르렁거렸다.

현재 2320년. 피와 살로 점철된 전쟁은 여전히 성황 중이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시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전신의 핏줄이 어젯밤 받아 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찌릿하며 뒤틀렸다.

몸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 내 것이 아닌 이의 피가 나도는 이질감.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뼈를 갉아 먹는 듯한 괴로움. 잠깐 방심하면 발기발기 살을 찢고 밖으로 튀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으…….”

겪을 만큼 겪은 통각인데도 낯설다. 이만하면 적응할 만도 하거늘.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는 몸뚱이는 고통에 예민하고 나약했다.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밤을 함께 보냈던 이는 아침 일찍 나갔나. 아니면, 저와 한 공간을 공유하는 게 싫어 볼일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나. 까무러치듯 잠들어 기억의 반추가 어려웠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던 시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득 이를 깨물며 침대 아래로 발을 던졌다. 높다란 침대가 꼭 낭떠러지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시윤은 몹시 천천히 땅에 발을 디뎠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전신의 체온이 증발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일어섰다. 씻기 위해서였다. 땀과 눈물, 그리고 말로 뱉기 엄한 체액들로 잔뜩 젖은 몸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 발목이 너무 쓰라리다. 시윤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발목에 시뻘건 손자국이 나 있었다.

“…….”

아니, 이걸 손자국이라 표현해도 되나. 분명 커다란 손 모양이긴 하나, 상처는 화상에 가까웠다. 살이 죄다 일어나 언뜻언뜻 피도 비쳤다. 꼭 악마가 시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다 실패한 상처 같기도 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시윤이 무감한 표정으로 욕실로 향했다. 절뚝이는 걸음걸이가 참으로 처량했다.

요즘. 매일 아침이 이렇게 처량하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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