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2화
‘세 개나 더? 그렇다면 다음 숫자는……!’
14가 분명해.
시아라는 냅킨 위에 남자가 점지해주는 숫자를 열심히 받아 적기 시작했다. 신통방통하게 번호를 읊어대는 것을 보아하니 점쟁이가 분명했다.
5, 6, 11, 14.
총 여섯 가지 숫자 중, 벌써 네 개를 알아버렸지 않은가.
그녀의 심장이 전에 없이 쿵쿵거렸다. 라튼 레트랑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더 빠르고, 심하게. 펜을 쥔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확천금을 손에 쥘 생각을 하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것도 같았다. 남의 꿈을 엿듣는 게 치사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그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 14개의 드래곤의 알에 황금 같은 노란색 스카프가 각각 두 개씩 묶여있었지요.”
28을 적으려던 찰나, 그가 단호히 외쳤다.
“28일 줄 아셨죠? 아닙니다! 하나 더 더해야 합니다.”
“왜?”
“제 옆에 있던 커다란 나무에도 스카프가 매여 있었거든요.”
29. 메모.
“아무튼, 그 알들이 하나둘 깨지려고 했지요. 그러자 하늘에 있던 드래곤들 뿐만 아니라 온 동네방네에 있던 드래곤들이 전부 몰려들었어요. 그래서 총……!”
총……?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총……!”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
“가자.”
응?
시아라의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가긴 어딜 가? 저 답답한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예?”
중저음의 남자가 혀를 끌끌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이 이야기는 안 끝났습니다만? 올망졸망한 아기 드래곤들의 탄생을 위해 몇 마리나 축하하러 왔는지 궁금하시지도 않으세요?”
“시끄러워.”
그 말에 쾌활했던 남자가 입을 꿰매기라도 한 듯 침묵했다.
‘뭐라는 거야! 당신이 더 시끄럽다고!’
오직 옆방에 홀로 있는 시아라만이 절규했다. 방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릴 즈음에는, 절규를 넘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의 인생을 환히 밝혀줄 숫자가……! 아니, 희망이 점점 멀어지고 있지 않던가.
가지 마! 가더라도 끝까지 다 말하고 가야지!
시아라는 정말 벽이라도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 열고 나가서 마지막 번호가 뭐냐고 물어봐?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말해달라고 해? 돈을 주고 그 꿈을 사겠다고 할까?
그녀가 한달음에 문 앞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이 그녀를 뜯어말렸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문고리를 잡고 있던 시아라가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아니야,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 수는 없지.’
남자친구한테 바람맞고 혼자 밥 먹다 말고 이게 웬 청승이람.
시아라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와인이 반쯤 남아있던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시고, 차분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마음을 비웠다. 어차피 신빙성 하나 없는 타인의 꿈일 뿐이야. 그래, 꿈이야. 꿈…….
찰나의 정적이 흐르고, 시아라가 퉁겨지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발 기다려요, 점쟁이 님!”
그녀가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
“공작 각하.”
“왜.”
“그러다 제가 진짜로 복권에 당첨이라도 되면 어떡하실 거예요?”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됐나보다 하지.”
답답한 중저음의 남자, 그러니까 그 공작이란 남자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어? 자꾸 저한테 관심도 없으시면, 저 당첨금 들고 아델트에서 떠나버릴 겁니다?”
“그래, 제발 좀 가.”
단칼 같은 그 공작의 말에 복권 번호를 부르던 남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콧잔등 아래로 내려온 금색 단안경을 쓱 밀어 올린 그가 짐짓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새 마력의 흐름이 꽤 좋아졌거든요. 제 촉이 장난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괜히 그런 거 사지 마.”
“왜요?”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법사가 마력으로 번호를 알아내? 그건 반칙이지. 그리고 네 방에 이미 금 잔뜩 쌓아놨잖아.”
“아니…… 반칙일 것까지야……. 게다가 금은 금이고 돈은 돈 인걸요.”
비서가 툴툴거리자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큼, 큼! 뭐, 그렇긴 하죠. 반칙 맞습니다! 아무튼, 아기 드래곤들의 부화를 위해 몇 마리나 축하를 왔는지 아세요?”
“몇 마리.”
“총 32마리가 모였더군요. 그러니까 5, 6, 11, 14, 29, 32. 이번엔 이겁니다.”
“그래.”
공작은 여전히 무관심한 얼굴로 답했다.
“어라? 못 믿으시네. 내기라도 하실래요?”
“무슨 내기.”
“저 각하의 이마를 딱-, 한 대만 때려보고 싶습니다만?”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고 눈망울을 반짝거리는 비서를 보며, 공작이 픽 웃어 보이고는 마차에 올랐다.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예?”
*
시아라가 레스토랑을 나왔을 땐, 이미 두 남자는 떠난 뒤였다. 남자들이 탄 것으로 추정되는 마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 망설이지 말고 그냥 뛰어나올걸.”
하나 모자란 숫자가 적힌 냅킨을 손에 꾹 쥐고 터덜터덜 걸었다.
한여름에는 밤 열 시가 되도록 쨍쨍했던 태양이 이제 더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이미 어스레한 어둠이 깔린 길목 위로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벌써 가을이 성큼 다가온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라튼 레트랑이 오늘 저질렀던 일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그의 존재를 잊은 지 이미 오래였다. 머릿속에는 당첨 번호에 대한 아쉬움만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좋은 묘책 한 가지가 떠올랐다.
“앞에 번호 다섯 개는 다 아는 거니까! 나머지 번호로 한 장씩 다 사면 되겠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녀는 의지를 불태우며 가방 속 돈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조금 전 레스토랑에서 너무 많은 돈을 쓰고 나왔던 탓이었다. 10드랑과 100 드랑짜리 동전이 하나씩 사이좋게 나뒹굴고 있었다. 동전이 맞부딪히며 짤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메아리쳤다.
복권 한 장이 100 드랑 이니까…… 이걸로는 딱 한 장밖에 살 수 없었다. 집에 가서 남은 돈을 탈탈 털어 몇 장 더 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미 예상치도 못했던 지출이 너무 컸던데다가, 불확실한 희망에 그녀와 엄마의 식비를 전부 걸 수는 없었다. 일단 그 점쟁이의 말이 백 퍼센트 맞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으니.
그녀는 조금 뾰로통한 표정을 짓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기운을 차렸다.
“아, 몰라! 언제는 뭐, 번호 알고 골랐나. 그냥 딱 한 장만 사!”
시아라는 근처에 있는 복권 판매점에 들어갔다. 늦은 시간 임에도 아직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 섞여 종이 한 장을 받아들고 판매점 구석으로 향했다.
5, 6, 11, 14, 29…….
아는 숫자들을 전부 표시한 뒤 신중하게 고심했다.
‘얼마나 많은 드래곤들이 축하를 하러 왔을까?’
아무리 그래도 아기 드래곤이 태어나는데. 제일 큰 숫자이지 않을까?
아니지, 집채만큼 크다고 했으니까…… 정원에 들어올 자리가 없을 수도 있잖아.
하, 어떻게 한담!
1부터 49까지. 5개의 숫자를 제외하더라도 너무 많았다. 시아라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곱씹을수록 점쟁이의 말을 막았던 남자가 떠올라 주먹이 절로 움켜쥐어졌다. 차라리 몰랐다면 아무 미련도 없었을 텐데.
거의 죽상이 된 얼굴을 테이블 위에 파묻으며 고뇌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아 체념한 채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복권 판매점의 통유리창 너머로 맞은편 가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베스트 로번슨 33.’
우연이었을까?
노란 달빛에 비친 ‘33’이라는 숫자가 유독 또렷하고, 크게 보인 것은.
세상이 전부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는데 저 숫자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저거다. 저거야……!”
시아라는 홀린 듯 마지막 번호를 적어냄으로써 복권 구매를 마쳤다.
나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붙어 있던 광고지를 한 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제국 최고의 아이스크림 카페, 베스트 로번슨 33.
새로운 맛 출시.
아빠는 고블린! –
신의 계시가 분명했다.
드래곤과 고블린이라니……! 뭔가 그럴듯한 한 쌍이잖아!
시아라는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잭팟이었다.
*
카시안은 시아라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고블린이랑 드래곤이 왜 그럴듯한 한 쌍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을 떠올리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에게 굳이 가타부타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 덕에 번호를 잘 골랐으니까.
“그 점쟁이는…… 그 중저음의 남자한테 벗어났겠죠?”
당첨자가 시아라 하나였으니 그 남자는 복권을 사지도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 성격 더러웠던 상사의 압박 때문에……!
“뭐, 알아서 잘살고 있겠지.”
“그래야 할 텐데. 얼굴이라도 봤으면 제가 보답이라도 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러자 카시안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보답은 무슨. 그 사람이 다 알려준 것도 아닌걸.”
“그래도 그분이 아니었다면…….”
“아, 그러고 보니.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알버트 꿈에도 이것저것 날아다니고 다 깨부수고 난리가 났던 적이 있었거든.”
“정말요?”
“응. 뭐였더라, 지렁이였던가?”
“그걸 기억도 못 해요?”
“관심도 없었어. 시끄러워서.”
카시안 다운 대답에 시아라가 키득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알버트 촉은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자꾸만 내기하자고 대들다가, 결국 된통 맞았지 뭐.”
숫자 하나를 보란 듯 비껴간 알버트. 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
그는 번호가 발표되던 날, 수도에 있던 카시안에게 소환당해 이마 한 대를 맞고 아델트로 쫓겨났다. ‘흐윽, 하나 정도야 틀릴 수도 있죠!’ 억울한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돌아서던 비서의 어깨가 어찌나 궁상맞아 보이던지.
카시안은 발갛게 부어올랐던 알버트의 이마를 떠올리며 픽 웃었다.
“너무해요, 정말.”
“다 자기 업보지. 그건 됐고, 그 점쟁이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아이스크림 가게는 네 ‘빛’이니까. 하나 먹고 갈까?”
유독 ‘빛’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 같아, 시아라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저에게 있어 빛은 남편 하나뿐이랍니다.”
“이미 늦었거든?”
장난스레 토라진 척해봐야 카시안은 이내 웃고야 말았다. 시아라의 말을 듣는 내내 그 날의 그 공작과 그 남자가 본인과 알버트의 이야기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어디서부터일까?’
자신을 보며 활짝 웃는 남편을 따라 웃던 시아라가 그의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더욱 바짝 가까워졌다.
“아빠는 고블린인지 뭔지나 먹으러 가.”
“네, 오빠!”
시아라는 남편의 팔에 기대어 한쪽 뺨을 비볐다. 카시안은 그런 아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준 뒤 카페 입구에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