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내가 무슨 말을 기대했더라.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자. 영원히 내 곁에 있어 줘. 알겠지?’
이렇듯 길고 뜨거운 청혼을 기대했던가?
아니, 절대 아니었다.
아무런 미사여구 하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마음을 전하는 카시안이 좋다.
‘결혼하자.’ 이 한마디에도 무수한 사랑이 느껴지는 이 남자가, 너무 좋다.
‘시아라.’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그가 좋아서,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다.
카시안의 청혼과 함께 강 너머의 하늘 위로 주황 풍등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염원을 가득 담은 그 불빛에, 카시안의 잘생긴 얼굴이 더욱 반짝거렸다.
나는 황홀해진 기분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로.
“그 결혼, 해요. 나랑.”
담담할 줄 알았던 나 또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잠시 후, 그가 제 품에서 소중하게 작은 상자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찬란한 빛을 품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들은 카시안은, 잠시 내 표정을 보고 동의를 구하듯 하다가 나의 미소를 보고는 안심하듯 내 네 번째 손가락을 소중하게 받쳐 들고 반지를 끼어주었다.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듯 꼭 들어맞는 반지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성미 급한 숨결이 나를 덮쳐왔다. 기우뚱, 기울어진 몸에 나룻배도 살짝궁 흔들렸다. 그의 입술이 길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그의 목을 그대로 끌어내렸다.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카시안이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시아라.”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숨 쉬어야지.”
낮게 웃은 카시안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 밤의 달빛은 불꽃보다도 뜨거웠고, 어둠은 길었다. 녹색의 반딧불이가 자신들의 고요한 한밤을 방해하는 우리 머리 위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그 날갯짓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어스레한 새벽 동이 터 오를 즈음이었다.
*
시아라가 결혼을 승낙한 뒤로, 카시안은 참을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 층에 자리한 그녀의 방이라던가, 그녀가 출근한 뒷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공허함이라던가. 이따금 시아라가 너무 바빠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잠드는 밤이면, 온종일 그녀를 고생시켰을 보육원 아이들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내가 이토록 형편없는 놈이었나.
같이 있을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하다니. 그러나 문득, 카시안은 후회했다. 시아라에게 청혼했던 그 밤, 풍등에 날려 보냈던 소원에 그녀를 닮은 딸아이 하나, 저를 닮은 아들 하나를 낳게 해 달라 적어 내렸던 것을.
지금도 이렇게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한데. 아이까지 생겨버리면 시아라가 온전히 그를 바라볼 시간이 더욱 줄어든다는 소리 아닌가. 그 생각에 카시안은 섬뜩해졌다.
안 되지.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녀를 닮은 딸아이가 없다 하더라도, 사실 괜찮았다. 카시안에게 중요한 것은 시아라, 그녀였다. 그녀를 닮은 누군가가 아니라.
가문의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상관없었다. 가문이 망해버리는 일은 시아라를 잃었었던 오래전, 그가 부단히도 꿈꿔왔던 것이었으니. 아델트의 조상들이 알면 놀라 펄쩍 뛸 일이었지만.
물론 공작부인이라는 그 허울이 시아라를 지키는 울타리가 될 수 있다면, 그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가문을 지킬 것이 분명했다.
집무실에 홀로 앉은 카시안이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빛 한줄기 겨우 들어오는 밤이었지만, 시아라는 아직도 보육원에 있었다. 새초롬한 그의 신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제 방으로 쏙 사라질 것이 뻔했다.
이게 다 알버트 때문이었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 합방을 할 수는 없다는 알버트의 의견을, 카시안이 곧바로 묵살했다.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란 말인가. 어차피 그런 일에 가신들의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었지만, 알버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손뼉을 치며 어서 방을 합치라 응원했다.
그러나, 제 신부만큼은 알버트의 말에 동의했다. 그 헛소리를!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요?”]
[“그렇긴 뭐가 그래?”]
[“괜한 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피하는 게 좋잖아요.”]
조곤조곤 말하는 어여쁜 그의 신부 덕분에, 카시안은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이미 한집에 살고 있는데, 도대체 그게 뭐 어떻다고? 알버트랑 떨어뜨려 놓든가 해야지. 꽉 막힌 걸 점점 닮아가는 거야 뭐야?
하나 카시안은 곧 아내로 맞이할 그녀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리고 결국, 꽃 피는 봄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두 사람의 결혼식이 석 달이나 앞당겨졌다. 온전히 그가 참을 수 없었기에. 카시안 스스로도 알았다. 그는 이제, 제 아내에 관련된 일에 인내심이 동한 남자라는 것을.
그렇게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12월의 겨울,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가문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조촐한 결혼식이었으나, 두 사람이 꼭 원하는 대로였다.
아델트의 가족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들이 빠짐없이 자리한 그 자리에서, 신랑, 신부가 사랑을 맹세했다.
“어린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저는 줄곧, 이날만을 꿈꿔왔습니다.”
카시안의 중저음이 당당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잉크 뚜껑을 열지 못해 제 옷에 잉크를 쏟고 마는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깨달았습니다. 팔에 힘 하나 없는 이 연약한 여자를 지키는 사명이 내게 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가 나무막대기를 그렇게 잘 휘두르는지는 몰랐지요.”
그가 시아라를 마주하며 맑은 미소를 짓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신랑, 신부의 풋풋한 미소에 하객들도 뿌듯하게 입꼬리를 그러 올렸다.
“제 사명과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가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던 저를 구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삶이 재밌고, 행복하고, 아침에 눈 뜨는 게 기다려집니다.”
올곧은 시선이, 그의 신부를 향했다.
“그 찬란한 빛을 나눠준 시아라, 네 덕분에.”
카시안은 허리를 살짝 굽혀 신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윽한 눈동자가 흔들림 하나 없이 단단했다. 그 진실함이, 시아라의 마음 깊은 곳을 단숨에 점령했다.
“너를 다시 만난 뒤로, 단 하루도 기쁘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앞으로도 그런 날만 가득하도록 노력할게. 모자란 남편이 되지 않도록, 평생 너를 아끼며 살게. 고마워.”
그가 잠시 숨을 골랐다.
“내 아름답고, 고귀한 신부야.”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바닥으로 쿵, 떨어진 심장이 그곳에서부터 한없이 요동쳤다. 온몸이 아찔하게 떨리는 것도 모자라 목소리마저 떨려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것으로 시아라는 대답을 대신했다.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리며, 카시안이 하객들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시아라를 나의 아내로 맞이하여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걸어가겠습니다.”
이제 시아라의 차례였다.
“당신은 늘 내가 빛난다고 말하지만.”
조금 진정된 목소리가 나긋하게 흘러나왔다.
“그 빛을 온전히 되찾아 준건. 카시안, 당신이에요. 사실 나는, 하나도 강인하지 않아. 당신이 늘 내 뒤에 있어 주었고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어요. 당신은 단단한 어깨를 내어주었습니다.”
바람결에 흩날린 머리카락 한 올을, 카시안이 조심스레 넘겼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여전히 제 신부를 응시하면서.
“나도 노력할게요.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 고마워요.”
시아라가 싱그럽게 웃었다.
“내 다정하고, 용맹한 신랑아.”
드디어, 그녀 역시 하객들을 향해 선언했다.
“저도 맹세합니다. 카시안을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여 어떤 길도 두려움 없이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유난하게 늦은 그 겨울의 첫눈은 그날 내렸다. 분홍색 벚꽃잎 대신 꽃비 같은 흰 눈이 흩날렸고, 마르쿠스가 정성껏 가꾸어 두었던 뒤뜰에는 한겨울임에도 꽃들이 만개했다. 신랑, 신부의 코끝이 벌게질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가웠으나 아무렴 어때, 곧 있으면 두 사람이 함께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갈 텐데.
조금의 모자람도 없는 그 완벽한 행복 속에서,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가 되었다.
눈이 그친 하늘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태양이 깜짝 등장했다. 얼어붙어 있던 그들의 겨울을 전부 녹여줄, 뜨겁고 찬란한 그 태양이.
축복을 가득 담은 박수갈채 속으로 두 주인공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운데에 선 두 사람의 입맞춤에, 모두가 환호했다. 카시안과 시아라, 두 사람이 맑게 웃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
카시안은 집무실 안에 문 하나를 더 만들었다.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알버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 방은 ‘공작부인의 집무실’이었다.
집에도 내 사무실이 생긴 덕분에 조금 더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나 몇 주간 지켜본 결과. 이곳에서 일할 수 없음이 명확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집무실을 찾아오는 카시안은,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이 공간이 침실과 이어지지 않은 것이 어찌나 다행스럽던지.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는 온종일 침대 위에서 서로를 탐할 것이 분명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한 침대에서 같이 일어났는데도 꼭 내 손을 잡고 아침을 먹으러 갔고, 각자 집무실로 들어가기 전에는 당연하다는 듯 짧게 입을 맞췄다. 그 후로 삼십 분 뒷면 어김없이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뽀뽀라니. 그건 애들 장난 같잖아, 그치?”
“…… 네?”
그러면 조금 더 깊어진 입맞춤이 불쑥 찾아오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아예 서류를 두둑이 챙겨 들고 내 방으로 왔다.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빤히 응시했다. 애써 챙겨 온 서류가 아니라, 나를.
그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일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내 눈동자가 허공을 배회했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뇌하다가 카시안에게 선언했다.
“나, 다시 보육원으로 갈 거예요. 찾지 말아요!”
강아지 같은 동그란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꼬리가 있다면 아래로 축 처져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카시안은 굴하지 않았다. 시무룩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는 목소리. 그러니까, 쿨한 척 작은 허세를 부리는 나른한 목소리가 내 방을 가득 메웠다.
“알겠어. 네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벌떡 일어선 카시안이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딱, 오 분만. 아니, 좋다. 일 분.”
“…… 뭐를요?”
“일 분만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실컷 힘줘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런 사소한 것이라, 잔뜩 힘주고 있던 내 눈도 마법에 걸린 듯 스르륵 접혔다. 풀어진 내 얼굴을 보며 카시안도 함께 미소 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길게 뻗은 나뭇가지 위로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한때 이 겨울이 끔찍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카시안을 잃어버렸던 그 날도, 엄마를 떠나보냈던 바로 그 날도, 지독히도 추웠던 겨울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를 되찾은 날도, 겨울이었다.
어떻게 그 겨울을 미워하겠어.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계절이 되어버렸는데.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가 푸드덕 날갯짓했다.
그 바람에 두툼하게 쌓여있던 눈덩이가 눈보라처럼 흩어졌다. 우리의 결혼식에 흩날리던, 그 꽃비처럼.
내 인생에 빛 한 줄기 없음을 노여워하던 때가 있었다. 딱 하루만이라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그 시절을 보상받듯, 운 좋게 얻어낸 일확천금으로 하루아침에 내 삶이 변했다. 로또, 돈,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
막상 내 행복이 거기서 왔냐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휘저을 게 뻔했다. 누군가 내게 돈이 있으니 그런 거라고. 배불러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진정 내 행복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어쩌다 마주한 행운이 아니라, 사랑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마주하는 이 남자. 그로 인해서, 그가 있어서. 매일매일 눈을 뜨는 것이 행복하다.
나는 내 인생을 걸기로 했다.
이번에는 로또가 아니라, 나의 집착남 카시안 폰 아델트. 이 남자에게.
-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