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9화 (129/135)

129.

잠시나마 서운했던 것들은 카시안의 미소를 보자마자 녹아내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초겨울의 눈처럼.

어느새 그를 따라 웃고 있던 나는, 아직 치장도 채 마치기 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전히 빗을 들고 서 있던 낸시가 수도 광장에서나 보았던 피에로처럼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렇게 좋으세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낯이 뜨거웠다.

“아, 이따가 저녁에 거리축제에도 가실 거죠?”

“거리축제?”

“네. 사실 저는 그게 더 기대되어요. 캄캄한 한밤에 주민들의 소원을 적은 풍등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그게 장관이거든요.”

“거기에 갈 수 있을까? 저렇게 바쁜데.”

“에이, 제 생각에 공작님은 그 순간만 기다리실 것 같은데요?”

낸시가 짓궂게 웃었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녀가 큰 목소리로 덧붙였다.

“참! 잊을 뻔했어요!”

“응?”

“아가씨, 생신 축하드려요.”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갸우뚱했다.

“생일?”

낸시는 아무 말 없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낸시를 시작으로 자꾸만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카시안과 나는 별채의 입구 앞에 나란히 서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별채 안에는 알버트가 엄선하여 골랐던 다양한 공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둘 늘어나던 방문객들은, 정오가 되었을 무렵 커다란 연회장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 많은 손님들을 부지런히 응대하던 카시안에게, 그들은 하나같이 감사를 표했다.

“공작님. 이번에 아델트를 위해 힘 써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저도, 제 농장도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카시안도 묵례로 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나를 마주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벌써 수백 명이 내 생일을 축하했다. 생일이 아닌데!

처음에는 그저 ‘네.’하고 넘기던 나는 진심으로 당황스러워져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쿡, 웃는 것을 보아하니 무언가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조금 한가해졌을 무렵, 그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말해 봐요.”

“뭐를?”

“나 오늘 생일 아닌데?”

“그럼 네 생일은 언젠데?”

“그거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 생일……. 에벨 가문에 입양되었던 날이었으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봄이 오려던 즈음이었나? 한겨울이었나?

케케묵은 기억을 다시 꺼내보는 데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입양된 이후로 딱 두 번의 생일파티를 열었다. 그 이후로는 생일을 축하받을 일이 없었으니까, 기억할 리 만무했다. 어렸지만 철이 빨리 들어야 했던 나는 그게 꼭 서럽지만도 않았다. 내게 일어나는 당연하고도 보통의 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었으니.

아무튼, 나조차도 잊고 살았던 생일이라고는 해도 이런 늦가을일 리는 없었다. 카시안과 헤어졌던 것이 한겨울. 그 뒤로 입양된 것이었으니까.

“정확히는 몰라도……, 봄. 그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카시안이 내 한쪽 볼을 부드럽게 꼬집었다.

“아니, 오늘이야. 십일월의 마지막 날.”

그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겨있었다.

“그걸 카시안이 어떻게 알아요?”

손가락이 떨어진 볼을 내가 살며시 매만졌다.

“오빠니까. 내가, 네 가족이니까.”

나는 천천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정말로……. 오늘이 내 진짜 생일이에요?”

“응.”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축하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오늘 나를 스쳐 지나간 수백 명의 목소리가 귓가에 찌르르 울렸다.

생일 축하해요.

정말로 축하해요.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이상하고, 낯설었다. 생일. 내 세상에는 절대 없을 것만 같던 단어라서.

“왜…… 왜요? 왜 다들 나를 축하해……?”

아침부터 공들여 화장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눈물이 핑 돌았다. 낸시한테 미안한데. 번지면 안 되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손수건으로 촉촉해진 눈 아래를 닦아냈다.

“왜냐면, 네 존재 자체가 축복이고.”

“…….”

“너는 축하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카시안이 자꾸만, 나와 무관할 것만 같았던 말들을 덧붙였다. 축복, 축하. 그런 것들을 받아 마땅한 사람. 희미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그 단어들이 커다란 울림이 되어 밀려왔다. ‘고마워요.’ 그 말을 막 떼려고 했을 때, 레아와 레오가 도착했다.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꼬마 신사가, 내게 노란 프리지아 한 송이를 내밀었다.

“누나! 생일 축하해!”

품에 풀썩 안긴 레오가 내 뺨에 가볍게 뽀뽀했다.

“나는 누나가 레오가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너무 좋아!”

더는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천진하게 웃는 아이의 볼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행복해서, 여기 있는 모두가 나를 축하한다는 사실이 너무 벅차서. 정말이지 이런 생일은 난생처음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울지 마, 누나! 씩씩한 레오가 지켜줄게.”

어느새 든든하게 땅에 발을 디디고 선 레오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울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 바로 전인데. 풋, 아이의 대찬 발언에 이번에는 웃음이 나왔다.

카시안은 그런 내 손을 힘주어 잡았다. 나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천천히, 카시안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사랑받아 마땅한 나의 시아라.”

그의 목소리가 사근사근 내려앉았다.

“이 행복은, 다 네 거야.”

“카시안…….”

“조금 늦었을 뿐이야.”

잔잔한 호수 같은 눈이 또 한 번 진심을 말한다.

“그러니까.”

맞잡은 손가락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마음껏 누려. 당연하게 네가 누려야 했던 것들을.”

나는 달려가 안기듯 그를 와락 껴안았다. 레오가 건넸던 프리지아에서 달콤한 꽃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그보다 더욱 달콤한 목소리로, 카시안이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사랑하는 내 아가씨.”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행복해, 나 정말 행복해.

너무 행복하면 울보가 되는 걸까. 돌이켜 보면 쓸쓸했던 지난날에 오히려 울지 못했다. 그조차 사치라고 생각했었으니. 요즈음 나는 더 많이 울었다. 과거에 견디고 참아냈었던 눈물을, 이제 와 보상으로 받아내려는 것처럼.

카시안 폰 아델트. 이 남자를 만난 이후로 계속 그랬다. 기쁨이, 즐거움이 넘칠 듯이 가득했다. 평범했던 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그가 곁에 있기에.

*

시끌벅적한 저택의 높고 뾰족한 지붕 위로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았다. 방문객들은 좀처럼 줄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늘어만 갔다. 다리는 아팠지만, 싱글벙글 웃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불쑥, 카시안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디를요?”

“산책. 아델트 거리축제는 처음이잖아.”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걸요?”

“집에 가신들은 뒀다 뭐해? 다들 알아서 할 거야.”

나는 이끌리듯 그의 뒤를 따라갔다. 사람이 많은 탓에 마차를 타고 나갈 수가 없어 정문 앞으로 펼쳐진 숲을 걸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언덕을 지나, 곧 아델트 시장이었다.

카시안은 내게 눈만 가리는 나비 가면 하나를 내밀었다. 그도 꼭 같은 가면을 쓰고,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에서부터 상업지구까지 길게 펼쳐진 장터는 저택만큼이나 붐볐다. 사람들도 나비 모양 가면을 하나씩 쓰고, 이곳저곳에서 축제를 즐겼다.

“가면 축제인가 봐요.”

“응.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누가 뺏어갈지도 몰라.”

“가면을요?”

“아니.”

카시안의 대답이 들려오기 무섭게 누군가 내 팔을 휙 낚아챘다. 그 힘에 이끌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과 둥글게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서로의 양손을 붙잡고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발을 콩콩 움직였다. 앞으로 내밀었다가, 뒤로 뻗었다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레이스 원피스 자락이 발의 움직임을 따라 살랑거렸다.

동그랗게 모인 원 위로 즐거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안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잠시 뒤, 내 곁으로 다가온 그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선언했다.

“안 되겠어. 내가 더 조심해야지. 내가 아니라, 너를 뺏기게 생겼네.”

내 이마에 송골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내 손을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일부러 다 같은 모양의 나비 가면을 써. 서로 하나라고 느끼게끔. 오늘만큼은 너도나도 다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마음껏 춤추는 거구나.”

카시안의 얼굴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널 뺏기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나 꽉 잡아. 알겠지?”

왼편에 선 카시안이, 내 오른쪽 어깨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시큼한 레몬 원액이 가득 들어있는 사탕을 입에 넣고 발을 동동 구르고. 오독오독 입안에서 터지는 신기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그렇게 거리를 걸었다. 그 기나긴 축제의 끝이 보일 무렵, 부쩍 아쉬워진 마음에 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소원을 적어서 풍등을 날리기도 한다던데.”

낸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래, 가자. 소원 빌러.”

풍등 상점은 곳곳에 있었다. 불그스레한 종이를 받아 든 나는 카시안이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실, 그가 무어라 적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일기라도 쓰듯 빼곡하게 적어 내려가던 카시안이 제 종이를 황급히 가렸다.

“원래 그렇게 길게 쓰는 거예요?”

“소원 공유, 금지.”

뭉툭한 붓꼬리가 내 이마에 콩 닿았다가 떨어졌다.

“치사해.”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툴툴거리다가, 퍽 간단한 말로 내 소원을 적어 내려갔다.

이 남자와 함께하게 해주소서. 평생을 행복하게.

이것 말고 내가 또 어떤 소원을 빌 수 있을까.

앞으로 바라게 될 것들이 많아진다고 해도, 이 염원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종이를 고이 접어 든 카시안이 맑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 갈까?”

끄덕이는 고개에, 이번에는 그가 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순간 희미해진 시야에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노란 달빛이 고요한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흔들렸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저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개굴개굴, 개구리울음 소리와 풀벌레 지저귀는 소리. 그 두 가지만 남은 이 공간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신비로웠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강가 위 나룻배.

카시안과 나는 그 나룻배 위로 이동해있었다.

“네가 이렇게 텔레포트 쓰는 거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만, 참을 수가 없었어.”

그가 나를 바라본다.

“시아라.”

나른한 중저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수면 위로 부서진 달빛처럼.

“결혼하자, 나랑.”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