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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7화 (127/135)

127.

카시안이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생각했다고 고백할 때마다, 나는 말 못 할 죄책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가 나를 추억했던 시간만큼 나도 그를 떠올렸었다면. 그러면 이 남자에게 조금은 덜 미안했을 텐데.

물장구치던 발끝을 멀거니 내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대신. 쓰라린 나의 악몽을 지워준 그에게, 나 역시 좋은 꿈을 선물하고 싶었다.

“우리 이제, 아팠던 과거는 다 잊기로 해요.”

그 말이 카시안이 맑게 웃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했던 시간만큼, 더 사랑할게요. 열렬히, 뜨겁게.”

카시안은 내 양 볼을 그러쥐었다.

“그래, 나도. 널 더 많이 사랑할게.”

마주 닿은 이마가 또다시 뜨겁게 타오를 즈음, 소식 없던 소피아와 펠릭스가 나타났다. 불현듯 들려온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뒤돌자 두 사람이 보였다.

두 사람은 새빨개진 얼굴로 등장했다. 원래도 어색했던 사이는 더욱 데면데면해진 듯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사고라도 난 줄 알고 걱정했네.”

“…… 으응. 사고는 무슨.”

펠릭스는 먼 산을 응시했다. 소피아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피아가 조금 아픈 것 같아서. 우리는 먼저 가볼게.”

“소피아가 아파?”

내가 걱정스레 묻자 소피아가 서둘러 답했다.

“열, 열이 좀 나서. 갑자기 바람을 쐬어서 그런가, 감기에 걸렸나 봐.”

발끝을 배배 꼬는 소피아를 의아하게 응시하던 그때, 두 사람의 등 뒤로 꼭 맞잡고 있는 손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응. 얼른 가서 약 먹고 쉬어.”

두 사람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고 호숫가를 떠났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안도 그들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려보냈다.

“결국 저렇게 될 거였으면서.”

“그러게요. 다행이에요.”

“그럼 우리도 이만 집에 가볼까?”

“벌써요?”

“벌써라니. 나도 머리에서 열이 나는걸. 어서 가서 누워야겠어.”

카시안이 내 손을 잡고 제 이마 위로 올렸다. 열은커녕, 바람결보다 차가운 선선함이 오히려 내 손바닥을 식혔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장난스레 툭, 치고 바위에서 일어섰다.

말에 올라 출발하려는데 카시안이 불편한지 셔츠 소매를 접어 올렸다. 그러자 오른팔 바깥쪽에 길게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로지 잡화점에 만년필을 사러 왔던 카시안과의 첫 만남. 그의 소매에 잉크를 쏟아 버렸던 그 날이 선명히 떠올랐다. 상처에 관해 묻자 대답을 회피하며 내 얼굴에 남아 있던 흉터를 가리켰던 카시안.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이 상처는……. 정말 전쟁에 나갔을 때 생긴 건가요?”

카시안은 아무 말 없이 웃어 보였다.

“설마 보육원에서 나를 구하다가…….”

자꾸만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참지 못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정말 그런 거예요?”

“괜찮아.”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가 답했다.

“우리 이거 없애요. 할 수 있잖아. 얼마든지 가능하면서.”

“싫어. 누군가를 지킨 훈장 같은 거니까, 평생 가지고 있을 거야.”

나는 그 상처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마음이 아픈데, 또 한편으로는 찌르르 울렸다.

카시안은 자꾸만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내 속도 모르고.

*

말 위에서 내달리던 순간에도, 집에 도착한 순간에도. 카시안은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팔위에 난 상처는 그가 참전했을 때 생긴 상처가 맞았다. 그러나 시아라에게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맹세코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괜찮으니 정말 괜찮다고 했고, 그 손으로 전장에 나가 사람을 구했으니 훈장이 맞지 않던가. 물론 그녀가 그녀 자신을 구하다 그리된 것이라고 오해하기는 했으나.

완전하게 털어놓을까 했지만, 시아라가 저 때문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상처 위를 지분거리는 가느다란 손가락들도, 이미 오래되어 사라지지 않는 흉 위로 연고를 발라주는 그 모습도. 보육원과 학교일로 바빴던 그녀의 모든 관심이 저에게 쏠려서, 카시안은 그게 즐거웠다.

두 사람이 도착한 집은 아델트 공작 저택이 아니었다.

카시안이 어느 날 시아라를 만나게 되면 선물하려고 준비했었던. 시아라가 살던 바로 그 집이었다. 우연히 그 집을 사들인 것도 시아라인 탓에 결국에는 선물이 아니라 판매가 되어버렸었지만.

어쨌든, 카시안이 그녀를 갈망하며 손수 짓고 꾸몄던 그 집으로 두 사람이 돌아왔다.

저택에서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당연히 매일은 안 되고, 이렇게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이면 이곳에서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언젠가 그녀가 원했던 여느 평범한 연인들처럼. 함께 요리하고,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고. 벽난로 앞에 어깨를 기대고 앉아 책을 읽다 잠이 드는. 그런 일상을 카시안 또한 꿈꿔왔기에.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카시안은 거실 한 가운데 서서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제 손으로 골랐던 가죽 소파를 매만졌다. 제국에서 제일 비싸다고 소문난 가죽 공장에서 직접 제작해왔던 것이었건만. 호숫가에서 쓰다듬었던 그녀의 뺨처럼 보드랍지는 않았다. 얼룩 없이 칠하려 그렇게도 노력했던 노란 벽은 또 어떠한가. 여기저기 덧칠한 부분이 보였고, 손끝에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질감에 픽, 웃음이 새었다. 불청객의 난동 이후로 조금 더 단단하게 집을 고쳤다고는 해도. 돌아보니 못마땅한 것투성이였다. 그리도 애썼건만.

“카시안.”

봄에 피는 프리지아를 닮은 싱그러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연 노란 앞치마를 둘러메고 주방에서 고개를 쏙 내미는 시아라를 보며 카시안은 확신했다.

그럼에도 이 집은 완벽하다고. 그가 그리워했던 그녀로 인해. 이 집의 주인으로 인해. 이 모자란 집도 밝게 빛난다고.

주방에서 도마 위로 칼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드미컬한 그 소리가 음악처럼 경쾌했다. 카시안은 시아라의 뒤로 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뭐 도와줄까?”

시아라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녀가 밝게 웃었다.

“우리 공작님께서 요리를 해보셨을까요?”

물론 해본 적은 없었지만, 카시안은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네가 가르쳐주면 되지. 난 뭐든지 빨리 배우거든.”

“저번에 빵을 구우실 때 분명…….”

“그건 진- 짜! 실수였다니까?”

시아라는 일전에 그가 만들었던 소금 머랭을 떠올리며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를 골리는 그녀의 허리를 한껏 간지럽히며, 카시안도 함께 웃었다.

호기롭게 도전한 칼질의 결과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으나, 시아라는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칭찬했다. 카시안이 감자를 반으로 잘랐을 뿐인데도 손뼉을 짝짝 치며 좋아했다. 어쩐지 어린 애가 된 기분이었지만, 사랑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아이가 된다 해도 좋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칭찬을 바랐고, 그녀의 관심을 원했다. 이미 충분한대도, 그녀의 모든 것이 온전히 제 것이길 바랐다.

“그래서…… 오늘 요리는 뭐야?”

“으음, 감자채를 볶아서 곁들여 먹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 토막 내서 잘랐으니…… 스튜를 하는 게 좋겠어요.”

그가 곤란해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이 마음마저 사랑스러웠다. 비록 도마 위는 난장판이었지만.

그 뒤로도 카시안은 그녀의 조언에 따라 척척 요리했다. 고기와 감자, 당근, 토마토를 넣어 볶다가 소금을 꼬집어 넣고 후추를 톡톡 털어 넣고. 자작하게 물을 부어 끓이다가 간을 보기 위해 한입 먹었는데…….

“어쩌지?”

“왜요?”

“너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시아라를 응시했다. 그녀가 그게 무슨 소리냐며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진짜야. 원래 사랑하면 배가 부른 건가? 하나도 배가 안 고프네.”

“지금 본인이 요리한 거 먹기 싫어서 그런 거죠?”

그녀가 피식 웃자 카시안이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런 거 아니야. 나보다 네가 더 많이 먹어야겠다. 이렇게 납작해서야.”

“그런다고 봐주는 거 없어요.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해요!”

“아니 근데……. 이거 원래 이런 맛이 맞아? 좀 이상해.”

“아직 덜 끓었으니까 그렇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봐요.”

카시안이 만든 첫 요리를 먹고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예상외로 스튜는 맛있었다. 심지어 푹 끓인 토마토에서 향긋한 향기까지 풍겨와 더욱 군침이 돌았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은 공작 저택의 그것보다도 훨씬 작았고, 그 위에 올려 있는 양초는 화려하기보단 소박했다. 조촐하게 차려진 음식도 일류 요리사들의 솜씨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랐지만, 행복했다. 서로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웃음이 끊이질 않을 만큼.

열어둔 창틈 사이로 가을바람이 불어 들었다. 평범하고 투박한 두 사람의 하루처럼, 별다를 것 없는 그런 바람이.

*

보육원 일을 이미 마쳤을 시간인데도 시아라는 나오지 않았다.

정문 앞에 세워진 마차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카시안이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원장실로 향하는 그 발걸음은 평소와 다름없게도 차분했다.

앞에 앉아있던 마부는 천천히 다녀오시라 인사하려 했다. 그러나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델트 공작의 표정에서, 그가 애써 느릿하게 걷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당장이라도 제 연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초조함이, 너무도 명백했다.

마부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집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이 괜스레 생각나는 밤이었다.

원장실로 들어가자마자 책상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어 있는 시아라가 보였다.

책상 위에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서류 더미들이 가득했다. 아직 따뜻한 커피가 잔속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침대로 옮겨주고 싶었지만,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에 들어 잠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 눈을 비비며 일어난 시아라가 소파에 앉아있는 카시안을 발견했다.

“어…… 언제 왔어요?”

“방금.”

“깨우지.”

노란 달빛을 배경으로 하고 기지개를 켜는 그녀의 모습이 달의 여신처럼 반짝거렸다.

“피곤해 보여서. 아직 안 끝난 거야?”

“음…… 아직 조금 남았는데.”

아직도 잠에 취한 그녀는 일이 남았다며 남아 있던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리고도 잠이 깨지 않는지 손바닥으로 제 뺨을 툭툭 두드렸다.

“내일 합시다, 그건.”

카시안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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