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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1화 (121/135)

121.

카시안은 시아라의 오후 업무가 끝나길 기다리며 보육원 건물 주변을 산책했다.

건물들 사이로 조금 더 선선해진 바람이 불어 들었다. 아직 춥지는 않았으나 겨울이 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녀를 다시 만났던, 그때가.

그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부 부수고 새로 지은 탓에 옛 모습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아서일까.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이 보육원은 그런 곳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지독했던 악몽을 선사하더니, 사과라도 하듯 선물을 내미는. 그것도 평생을 갈망하고 기다려왔던, 그런 선물인. 시아라 그녀를.

그러니 어찌 이곳을 미워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상처를 이겨낸 그녀가 이제 이 보육원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지 않은가. 카시안은 그것이 제 일처럼 뿌듯하고 벅차올랐다. 아직 원장실에 앉아 일하고 있을 시아라를 떠올리자, 카시안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발길 닿는 대로 걷던 그가 도착한 곳은 보육원 옆의 숲이었다. 눈보라가 쏟아졌던 그 겨울의 어느 날, 그와 시아라가 함께 썰매를 타러 왔던, 바로 그 숲이었다.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려던 카시안이 이끌리듯 숲의 언덕을 올랐다.

정상까지 오르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이제 성인이 된 카시안에게 이 언덕은 참으로 낮았다. 그 오래전에는 곧 구름이 닿을 만큼 높아 보였었는데.

쓴웃음을 짓는 카시안의 시야에 낭떠러지가 들어왔다. 시아라가 추락했던 곳이었다. 물끄러미 그 아래를 바라보던 그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그 절벽의 끝에 서서, 이번에는 그가 올라왔던 길을 응시했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무거운 썰매를 이끌고 달려오는 환영이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졌다. 손을 꼭 맞잡고 언덕을 오르는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카시안은 흐뭇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곧, 소년보다 빠르게 달리던 소녀가 정상에 다다랐다. 소녀는 소년을 향해 뒤돌아 빨리 오라며 손을 흔들었다. 기분이 좋은지 방방 뛰던 소녀가, 잘못 디딘 발에 눈 깜짝할 새 낭떠러지에서 추락했다. 소년은…… 소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내렸다.

두 아이의 목소리가 온 숲을 가득 메웠다. 그 모습을 슬프게 응시하던 카시안이, 함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년과 소녀에게 보호 마법을 걸었다. 비록 환영일 뿐이었지만. 순식간에 같은 보호막 안에 갇힌 두 아이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처음에는 놀라서 기절 직전이던 아이들이, 서로가 무사함을 깨닫고 안도했다. 땅에 발을 내리기 직전 소년이 소녀를 안전하게 안아 올렸다. 두 아이는 마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환영을 만들어낸 주인 또한 함께 미소 지었다.

소년은 소녀를 등에 업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 뒷모습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누구도 상처 입지 않은 두 아이가.

“그래 너희는 절대 헤어지지 말고 살아.”

나처럼 바보같이 잃어버리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환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카시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아……. 이렇게 보니까 또 보고 싶어서 미치겠네.”

어린 시아라의 환영을 보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아주지 않으면 못 배길 것 같았다. 카시안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보자마자 안아줘야지. 꼭 끌어안고,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줘야지.

카시안은 한달음에 보육원으로 달려갔다.

*

그러나…… 분명 있는 힘껏 달려왔건만.

어찌나 일에 몰두하고 있던지, 시아라는 아직도 원장실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심지어 카시안이 이제 그만 끝내고 집으로 가자고 하소연하자. 매몰차게 밖으로 쫓아내는 것이 아니던가.

카시안은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었다.

“…… 나 지금 쫓겨난 거야?”

이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 쉼 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문이 슬쩍 열리고 그 사이로 시아라의 얼굴이 반만 보였다.

“이제 가기로 한 거…….”

“공작님. 시끄러워서 집중을 못 하겠어요. 금방 끝나니까 밖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쾅-. 문이 닫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잠겼다.

“와……. 너 진짜……! 너 이러기야? 시아라! 문 좀 열어봐.”

하나 안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나보다 일을 선택한 거야 지금? 제발 문 좀 열어봐. 너 그거 일 중독이야!”

“…….”

“…… 그냥 네 옆에 조용히 있을게. 응?”

그 옆에서 제 주인의 처량하고 궁상맞은 모습을 지켜보던 알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러다가 정말 철부지 어린애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알버트는 심히 우려스러웠다. 그는 원장실 문과 끊임없이 눈싸움하는 카시안을 돌려세웠다.

“그런다고 안 열릴 거 잘 아시면서. 운동장으로 나가시죠.”

등 떠미는 알버트에 의해 보육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발르테르 보육원 건물 맞은편에는 학교가 있었다. 이제 이주 후면 학교도 문을 열기에, 시아라는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즐겁게 몰두하는 일을 찾은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같이 보낼 시간이 확 줄어들지 않았던가. 그게 못내 아쉬워, 카시안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육원은 학교보다도 훨씬 먼저 문을 열었고, 벌써 많은 아이가 이곳에 들어와 지내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산책을 하고, 수다를 떨고, 놀이터에서 뛰어놀았다.

다수는 운동장에서 공놀이했다. 열심히 공을 걷어차는 무리 속에, 전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키가 부쩍 큰 미카엘과 엘리안도 있었다.

원장실에서 쫓겨나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 카시안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밝은 얼굴로 운동장을 달리는 두 아이에게 닿았다. 뒤따라오던 알버트도 카시안의 눈동자가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것 같아?”

“확실히 마력이 느껴집니다.”

카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다루는 것 같은데……. 저 아이는 전혀 모르고 있죠? 본인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아마도.”

짧게 답한 카시안이 팔짱을 낀 채 엘리안을 응시했다.

두 아이의 딱한 사정만으로도 아델트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카시안이 시아라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것은 조금 다른 이유에서였다. 강한 불의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 그러나 엘리안 스스로는 자신이 마법사임을 모르고 있었다.

미카엘를 따라 수도의 폐공장에 도착했을 때, 카시안은 그 주변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들이 걸어왔던 길목 곳곳에 정체 모를 온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기는 마력의 형태로 남아 허공을 배회했다. 아직 정제되거나 길들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마력.

소파에 잠들어있던 엘리안을 보자마자 카시안은 그 온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이는 마법사였다. 그것도 꽤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러나 본인이 자각하지 못했으니 마력을 다루는 법을 알 리가 있나. 자신의 마력을 주체하지 못한 어린 마법사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대로 아이를 두고 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데려온 두 아이는 걱정과 달리 잘 지내고 있었다. 예전보다 나아진 환경 속에 천천히 적응하면서. 비록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반인과는 다른 힘이 있다는 사실을 섣불리 말했다간 아이가 충격을 받을 수 있기에, 아직 엘리안에게 ‘넌 마법사야’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마 곧 알게 되겠지. 여기서 많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본인 스스로도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연히 깨우칠 테니.

한바탕 뛰어놀던 아이들이 지쳤는지 바닥에 앉아 숨을 골랐다. 엘리안은 제 형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꼭 강아지가 주인을 보며 꼬리를 흔드는 모습 같아서, 카시안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잘 지켜봐.”

카시안이 알버트를 향해 당부했다.

“예, 알겠습니다.”

“좋은 마법사가 될 수도 있잖아.”

“물론이죠.”

“나처럼.”

언제 또 이렇게 뻔뻔해지셨대?

알버트는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시아라의 모습이 보였으니. 어차피 지금은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랴. 제 주인에게 핀잔을 주는 대신 물었다.

“아가씨가 일이 끝나신 모양입니다. 바로 저택으로 가시나요?”

“아니. 상업지구.”

“어라? 거긴 왜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시면 되는데.”

“됐어. 오늘은 꼭 아이스크림을 먹을 거거든.”

“…… 예?”

알버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집에서도 드실 수 있는데요.”

카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혀까지 끌끌 차면서.

“쯧, 그러니까 네가 여자친구가 없는 거야.”

“……?”

“나 좀 보고 배워.”

카시안은 그 한마디를 남겨놓고 시아라를 향해 달려갔다.

“각, 각하! 저…… 저도…… 여……!”

아무 해명도 하지 못한 알버트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만 허공을 갈랐다.

*

나와 카시안. 알버트와 트리탄 후작까지.

우리 네 사람은 퍽 진지한 얼굴로 원장실에 앉았다.

오늘은 학교 선생님을 뽑는 날이었다.

내 손에 두툼한 종이 뭉치가 들려있었다. 전부 우리 학교에 지원한 후보들의 이력서였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이 작은 학교에 이렇게나 관심을 두다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력서를 훑었다.

마법사. 마법사. 다음 후보도 마법사.

서넛을 제외하고 전부 마법사였다.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알버트가 그 옆에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가씨,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저만 믿으면 된다고 했잖습니까?”

일전에 알버트가 말했던 것처럼 대다수 마법사는 구직난에 시달렸다. 새로 문을 여는 학교에서 선생님을 구한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게다가 그동안 음지에 숨어 있던 마법사들은, 카시안이 마법사임을 완전히 드러내자 용기를 얻었다.

그들이 꽁꽁 숨겨왔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좋았으나…… 나는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오늘에서야 물었다.

“다 좋은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비(非) 마법사일 텐데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알버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마법 과목은 없는데, 마법사를 선생님으로 뽑아 놓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알버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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