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20화 (120/135)

120.

“하아…… 만날 사람이 이런 작은 아이인 줄 알았다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른세수하던 카시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혹시나 다른 남자일까 싶어 긴장했던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얘야.”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미카엘이 바짝 긴장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똘망똘망한 눈으로 카시안을 슬쩍 쳐다보고 나서,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섰다. 소년은 까치발을 들고 속삭이듯 내게 물었다.

“저 형은 누구야? 누나 친구야?”

“응. 누나 친구.”

“무섭게 생겼는데.”

“그치? 근데 하나도 안 무섭다?”

“진짜로?”

“응. 누나는 거짓말 안 해.”

그제야 카시안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넌 이름이 뭐야?”

“…… 미카엘이요.”

“그래 미카엘. 너 뭐 좋아해?”

“네?”

“시아라랑 밥 먹기로 했다며. 네가 좋아하는 거.”

“…… 어…… 저는 아무거나 다 좋은데.”

미카엘은 이번에도 역시나 ‘아무거나’라고 답했다. 그런 소년에게 카시안이 망설임 없이 제안했다.

“그럼 고기 먹어, 고기. 내 여자친구가 고기 많이 먹고 튼튼해져야 하거든.”

“고기……!”

“네가 보기에도 너무 말랐지. 그치?”

미카엘은 나를 한 번 쓱 올려다보고,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안은 그런 소년의 머리카락을 잔뜩 헤집어 놓으며 앞장섰다.

“너도 더 커야 하고.”

“…… 아.”

“가자, 수도에 잘 아는 레스토랑이 있거든.”

우리가 도착한 곳은 황궁 근처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카시안을 알아본 지배인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는 우리를 곧장 방으로 안내했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이 어색한지, 미카엘은 눈을 한곳에 고정하지 못하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미카엘의 바로 옆에 앉아 괜찮다고 손등을 토닥거렸다.

잠시 후, 테이블 위가 듣도 보도 못한 산해진미로 가득 찼다. 더 이상 음식을 둘 자리도 없는데, 아직도 나올 것이 남았는지 끝도 없는 행진이 이어졌다. 드디어 마지막 음식이 나오고, 네다섯쯤 되는 종업원들이 우리 각자의 접시에 음식을 나누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때였다.

“됐습니다. 제가 할 테니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카시안의 한 마디에 종업원 모두가 방을 나갔다. 미카엘을 힐끔거리던 시선들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제야 긴장을 푼 미카엘의 목울대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먹자. 이거 다 네 거야.”

“전부 다요?”

“응. 접시 이리 줘.”

카시안은 미카엘의 접시에 먹음직스러운 생선요리와 가니쉬를 올려주고, 따로 나온 스테이크를 적당하게 썰어 소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미카엘은 한참이 지나도록 포크도 들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어서 먹으라고 해도 살짝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카시안이 의아하게 물었다.

“생선을 안 좋아하나?”

미카엘은 세차게 도리질했다.

“그럼 스테이크를 못 먹나?”

“아니에요. 저번에 저랑 잘 먹었던 걸요.”

옆에서 내가 거들자 카시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왜 한 입도 못 먹고 있지. 이 집 음식이 수도에서 제일 맛있는데.”

나 역시 걱정스러워져서, 아직도 난처하게 앉아만 있는 미카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카엘, 무슨 일 있어?”

미카엘이 고민 끝에 천천히 입을 뗐다.

“그게…….”

“괜찮으니까, 말해줄래?”

“누나, 나…… 이 음식들 집에 싸가면 안 돼?”

“아, 내일도 먹고 싶을까 봐 그랬구나? 이따 더 시켜줄게. 그러니까 지금은 마음껏 먹자, 응?”

“…… 엘리안이 아무것도 못 먹고 있어서…….”

“엘리안? 그게 누군데?”

내 물음에 미카엘이 얼굴을 푹 숙였다.

“내…… 동생.”

“동생이 있었어?”

“응. 어쩌다가 생겼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동생?”

“아니, 길 동생.”

“…… 그게 뭐야?”

“사람들이 그러던데. 길에서 만나서 길 동생이라고.”

미카엘은 나와 카시안에게 어떻게 엘리안을 만나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누나랑 저번에 밥 먹고 나서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갔는데.”

“응.”

“엘리안이 내 자리를 뺏었더라고.”

“…… 응?”

“그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였거든. 내가 거기를 어떻게 차지했는데! 근데…… 처음 보는 애가 갑자기 그 자리에 앉아있으니까, 화가 나잖아. 그래서 가라고 했어.”

“…….”

“그랬더니 또 가더라? 딱, 한 발자국 옆으로.”

나는 잠자코 미카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막 화를 냈더니. 그 조그만 게 구석으로 가더라고.”

“응.”

“한참이 지나도 안 보였어. 계속 옆에서 얼쩡거리던 애가 또 안 보이니까……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서 봤더니.”

“…….”

“구석에 가서 형들한테 맞고 있는 거야!”

“뭐? 맞고 있었다고?”

“너무 조그만 애였는데. 나보다도 훨씬 키도 작고 몸도 작고……! 진짜 작은 강아지 같았단 말이야!”

미카엘이 씩씩거렸다. 나는 이게 여덟 살 난 아이가 겪은 일이 맞나 싶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도와줬어. 다행히 아는 형들이었거든. 하지 말라고 소리 지르니까 그제야 그만두더라.”

“…… 용감했네, 미카엘.”

“그때부터 엘리안이 자꾸만 나를 쫓아왔어. 집에 가라 해도 안 가고, 계속 나만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이쯤 되었을 땐,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여 상처가 될까 싶어 묻지 못했던 것들을.

“…… 너는 어디에 사는데?”

“아무 데서나 살아.”

“뭐?”

“그냥 비어있는 집이면, 아무 데서나 잤어.”

나와 카시안이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는 침음을 삼켰다.

수년 전 부모님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뒤, 미카엘은 할머니 댁에 맡겨졌다고 했다.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뒤에는 이모 집으로. 부양할 가족이 너무 많다며 버려진 뒤에는 더 먼 친척 집으로. 그렇게 계속 사돈의 팔촌까지.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미카엘은 결국 수도로 왔다. 기차역에서 구걸하며 번 돈으로 하루 한 끼를 겨우 해결하고, 지붕이 있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하룻밤을 보냈다고 했다. 나와 처음 만나 밥을 먹었던 날 엘리안을 만났으며, 그 이후로 두 아이는 벌써 몇 달째 함께 지내고 있다고.

“걔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어. 근데…… 얘가 어제부터 자꾸만 아파서. 사실 되게 무서워.”

“미카엘…….”

“누나, 나 다시 혼자가 되면 어떻게 하지?”

토끼 눈처럼 붉어진 소년의 눈이 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나는 미카엘의 고사리 같은 손을 움켜잡았다.

“그럴 일 없어. 걱정하지 마.”

“엘리안을 만나고 겨울이 하나도 안 추웠는데. 그 애랑 같이 있으면 너무 따뜻해서, 매일매일 여름인 것 같았단 말이야.”

“…….”

“이제 또 겨울인데.”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카시안이 밖에 있던 지배인을 불렀다.

“여기 있는 음식 다 포장해줘. 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케이크나 초콜렛, 사탕 같은 것들도 같이 넣어주고.”

“네, 공작님.”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테이블 위로 카시안의 목소리가 구슬처럼 굴러갔다.

“미카엘.”

“…….”

“네 동생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걱정 마.

“그렇지만…… 열도 많이 나고 아픈걸요.”

“형이 다 낫게 해줄게.”

미카엘이 주먹 쥔 손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형은 의사예요?”

“아니.”

“그럼요?”

“마법사.”

눈물을 뚝 멈춘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카시안이 씩 웃었다.

“그것도 엄청 유능한.”

“…….”

“앞장서. 동생 치료하러 가자.”

*

미카엘을 따라 도착한 곳은 폐공장이었다. 수도 시장 뒤로 두 블록 떨어진 구역에 자리한 이 공장은 꽤 오랜 시간 사용 흔적이 없어 보였다. 녹슨 철문 앞으로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쓰레기처럼 쌓여있었고, 주변에 아무도 살지 않는지 동네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 공장에 살아?”

“응. 지금은.”

미카엘은 예의 그 어린아이답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하며 커다란 철문을 열었다.

끼익, 요란한 쇳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우리 세 사람은 천천히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 내부는 따뜻했다. 아니, 오히려 이상할 만큼 더웠다. 장작이라도 때운 건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마땅히 불을 피운 흔적은 없었다.

‘뭐지?’

그래도 추운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의구심을 가지며 공장의 구석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드디어 엘리안을 발견했다. 미카엘이 말했던 것처럼 체격이 아주 작고, 척 보기에도 너무 어린아이였다. 레아나 레오보다도 훨씬 더. 아이는 버려진 소파 위에 웅크린 채 잠들어있었다.

미카엘이 달려갔다.

“엘리안!”

“…… 형아.”

엘리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밭은 숨을 색색거렸다.

“아직도 많이 아파? 왜 아까보다도 더 아파 보여, 응?”

동생의 곁에 무릎을 굽혀 앉은 미카엘이 엘리안의 작은 손가락을 꼭 쥐었다. 미카엘은 제 이마를 동생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어떻게 해……. 너무 뜨겁잖아.”

미카엘이 글썽거렸다.

나 역시 손바닥으로 엘리안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말 그대로, 불덩이였다.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카시안이 조용히 마법식을 외웠고, 곧, 엘리안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창백했던 얼굴에 조금씩 혈기가 돌며 엘리안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에, 엘리안?”

미카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참이나 카시안과 엘리안을 번갈아 가며 응시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마법사예요, 형은?”

“응. 어때, 멋지지?”

“네……! 너무…… 너무 멋져요! 가, 감사합니다.”

연신 꾸벅거리며 인사하는 미카엘을 향해 카시안이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소년 역시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으며 제 동생을 끌어안았다.

두 아이가 조금 진정되었을 무렵, 포장해왔던 음식을 풀고 먹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아까는 전혀 먹지 못했던 미카엘도 이번에는 허겁지겁 입에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시린 눈으로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려 공장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도무지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다.

카시안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먹먹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카시안이 내게 조용히 귀엣말했다.

“이 애들……. 아델트로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

사실 이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이었기에, 그를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아이들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