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새파랗던 하늘엔 주황빛 노을이 내려앉았고, 종일 들떠 있던 내 마음은 말츠강에 도착함과 동시에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찾아왔었을 때가 반년 전쯤이었던가. 그동안 너무 많은 사건이 벌어졌었던 탓에, 벌써 몇 년은 더 지난 일처럼 까마득했다.
다시 돌아올 때는 진짜 멋진 사람이 되어있겠다고 엄마에게 약속했었는데. 과연 나는 그런 사람이 된 걸까? ……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사실 어떤 인생이 멋진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주 먼 훗날에야 알 수 있을지도.
조금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내 손을 카시안이 힘 있게 움켜쥐었다. 갑자기 느껴진 자극에, 이끌리듯 그를 마주했다. 청량한 향기를 담아 멀리서 불어온 강바람이 카시안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허공으로 붕 뜬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을 나도 모르게 가지런히 정돈했다. 카시안은 그 강바람처럼 맑게 웃었다.
나는 카시안의 웃음을 보며 확신했다.
지금 내 인생이 멋지다고는 할 수 없어도, 행복하다고. 이 남자가 내 곁에 있어서.
카시안은 강기슭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나를 이끌었다. 입고 있던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잔디 위에 깔고, 그 위에 내가 앉게 했다. 카시안 역시 내 옆에 자리했다. 울긋불긋 물든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춤추듯 우리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노을 진 강물은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카시안이었다.
“틸다 레트랑을 그냥 풀어줬던 거……. 후회 안 해?”
낮은 목소리로 묻는 카시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밤 호수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떠올렸다.
틸다 레트랑이 지하감옥으로 끌려가기 직전, 그녀는 내 눈을 전혀 마주치지 못했다. 여태껏 내가 알던 오만한 귀족 부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양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채로 나를 지나칠 뿐이었다.
엄마를 죽게 만든 틸다를 처리하면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할 줄 알았다. 물론…… 시원하긴 했다. 조금도 후련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테지. 그러나 엄마의 죽음은 틸다가 초라해진다고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쓸쓸히 끌려가던 틸다 레트랑의 뒷모습이 이따금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 나는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틸다를 찾아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틸다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아주 빽빽하게 쓰인 장문의 편지였다. 그녀가 엄마에게 저질렀었던 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그런 내용의.
나는 그녀의 앞에서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그녀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다.
그 편지를 황실에 제출하면 틸다 역시 단두대에 올릴 수 있었다. 나는 한참을 갈등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며칠을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은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직접 고발하여 그녀를 벌하지 않아도, 이미 틸다 그녀는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기에.
감옥을 나간 뒤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궁금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 지독한 악연이 완전히 잊히길 바랐다. 마치 내 삶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카시안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답했다.
“네. 안 해요.”
카시안의 입술이 내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 후회 같은 거, 하지 마. 하긴, 이제부터는 그럴만한 일도 없겠지만.”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 같이 멋진 남자를 만나는데 후회할 일이 뭐가 있겠어?”
맞는 말이긴 하지만……. 너무 자신감과 여유가 넘쳐흘러서, 괜히 이 남자를 놀려주고 싶었다.
“에이, 그건 모르는 거죠.”
“뭐?”
“아니- 당장 내일 일도 모르는데. 혹시 알아요? 먼 미래에, ‘어휴 이 남자랑 괜히 같이 살았어!’ 이럴지.”
“허…….”
카시안의 두 눈은 휘둥그레 커지고, 입은 떡 벌어졌다.
“너…… 너……. 이리와. 혼나야겠다.”
“아, 장난. 장난이에요!”
나는 양손을 좌우로 흔들며 항변했으나 카시안은 나를 품에 바싹 끌어안고 여기저기 간지럽혔다. 한참을 크크 웃던 내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카시안의 얼굴은 아래에서 올려다보아도 여전히 조각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깊은 눈을 어루만졌다. 그다음은 높은 콧대를, 두툼한 입술을, 날렵한 턱을. 이렇게 완벽한 사람을 옆에 두고, 내가 어떻게 후회하겠어.
살포시 눈을 감았다. 쪼르르 강물이 흐르고 낙엽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선연했다. 선선한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카시안은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세상에, 딱 우리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았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문득 고백하고 싶어졌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내 마음을.
“카시안.”
“응.”
“여기서…… 내가 죽으려고 했던 걸 봤다고 했잖아요.”
“…… 응.”
“그때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아무도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고.”
카시안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었다. 대신 조용히 내 말을 경청했다.
“강기슭에 서서 이 강물을 바라봤는데, 어찌나 반짝거리고 아름답던지……. 내 인생이랑은 너무 달라 보여서…… 부러웠어요. 내 인생이 저렇게 빛날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불현듯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요.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대로 사라지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욱하는 마음으로 물속에 들어간 거예요.”
“…….”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차라리 이 강물이 더 따뜻하던 거 있죠? 그동안 나를 할퀴고 갔던 상처들보다.”
“…….”
“그게…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정말 무서웠어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라 최대한 무심하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울컥 감정이 북받쳐서, 참으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나는 두 눈에 힘을 주며 애써 눈물을 참아냈다. 그러자 커다란 카시안의 손바닥이 내 눈두덩이 위에 닿았다. 카시안은 그대로 내 눈을 감겼다. 또르르, 참았던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어도 괜찮아.”
나는 그 손바닥 아래서 한참이나 흐느꼈다. 내 어깨의 들썩임이 멈춰갈 즈음 피부에 닿았던 온기가 멀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카시안의 얼굴 위로 붉은 석양빛이 흩뿌려졌다. 나와 눈이 마주하자 굳게 다물렸던 그의 입술이 작게 호선을 그렸다.
“너는…… 그때도 혼자가 아니었어.”
“…….”
“여기 이 자리. 여기서 내가 너를 구하려고 했었으니까.”
“…… 정말요?”
“응. 네가 라튼 레트랑과 싸우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아델트로 돌아가는 대신 이 강으로 왔어.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 바람이 쐬고 싶었거든.”
“아…….”
“그런데 갑자기 저 반대편에서 네가 보이는 거야. 난데없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네가.”
“…….”
“네 이름을 애타게 불렀는데, 아무리 소리쳐도 안 들리는지 계속 물속으로 들어가더라.”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몰랐어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도 그냥 뛰어들었어.”
“네?”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마법이라도 써서 구하려고 했는데…….”
“저, 전혀 몰랐는데……!”
“네가 갑자기 나가버렸어.”
“…… 네?”
“…… 몰라. 진짜 그냥 갑자기…… 강기슭으로 올라가더라.”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나…… 로또 결과 확인하러 나간 거잖아. 뒤늦게 밀려드는 창피함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리고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게 황궁에 돈 찾으러 가는 거였더라. 설마 너 그날 저기서 걸어 나간 게…….”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얼굴 가리지 말고 손 치워봐.”
“아흑……, 싫어요……!”
카시안은 내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려고 했고, 나는 끝까지 사수하려 애썼다.
“해명해줘야지.”
“아, 몰라요. 갑자기 살고 싶었어요.”
“물속으로 아예 가라앉았다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내 손을 잡아당기던 움직임이 멈추고, 그의 손바닥이 손등 위로 포개졌다.
“다행이야.”
“…… 네?”
“아무 이유 없이 살고 싶어졌던 덕분에 다시 너를 만났잖아.”
“…… 미안해요. 괜히 고생만 했었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살짝 내려 카시안을 마주했다. 그가 맑게 웃었다.
“네가 스스로 안 나왔다면, 내가 너를 구했을 거야. 그리고 그 핑계로 몇 번이고 너를 찾아갔겠지. 말했잖아, 나는 그 전부터 너에게 반했었다고. 네가 어떤 선택을 했든 변하는 건 없었을 거야. 우린 어떻게든 만나서, 이렇게 사랑할 운명이었으니.”
“카시안…….”
나는 이제 얼굴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내 카시안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자석처럼,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그다음은 조금 더 오래, 입술이 맞물렸다.
“사랑해요. 그리고…….”
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인생도 당신 때문에 빛나요.”
저 붉은 노을처럼, 찬란하게.
*
말츠강에서 일어나 기차역으로 돌아갈 때는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었다.
“배고픈데 밥 먹고 갈까?”
“음……. 저 수도 오면 같이 밥 먹기로 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
“있어요. 제가 여기 올 때마다 기다리겠다고 했거든요.”
“아아, 소피아 엘링턴?”
“아니요.”
그 말에 카시안의 눈이 날렵해졌다.
“그럼 누구?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 친구야?”
“글쎄요. 그런 사이를 친구라고 하나. 단둘이 밥도 먹고 그랬으니까…… 그 정도면 친구 아닌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시안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뭔가 잔뜩 묻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단둘이 밥을 먹었어?”
“네.”
“…… 설마 남자야?”
“남자긴 남잔데…….”
나는 카시안의 손을 잡고 기차역으로 이끌었다.
“보면 알아요. 오빠한테도 소개해줄게요.”
곧장 아델트로 향하는 기차가 들어오는 선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소년의 앞에서 멈췄다. 조금 더 듬직하게 자란 소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미카엘.”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 미카엘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나!”
“미안. 너랑 밥 먹으러 꼭 다시 오겠다고 해놓고 너무 늦게 왔지. 그래도 괜찮으면…… 우리 밥 먹으러 갈까?”
미카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옆에서, 카시안이 안도인지 탄식인지 모를 작은 날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