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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16화 (116/135)

116.

예카틸리나는 절규했다.

연거푸 얼굴을 매만지며 끊임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나는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매끈했던 얼굴 거죽은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더욱더 흉측하게 타들어 갔다. 수술 전의 얼굴로 되돌아가는 데는 채 삼분도 걸리지 않았다.

예카틸리나의 두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 뵈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주변에 있던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죄다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아까 그녀의 머리를 맞고 깨진 도자기 조각처럼 날카로운 것을 포함하여.

그녀의 발악에 흠칫 놀란 틸다 레트랑이 내 등 뒤로 와 숨었다. 그동안 세상 가장 나를 미워했던 사람이, 저가 위급하니 나를 방패막이 삼는 꼴이란. 긴박한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야단법석을 치던 예카틸리나는 기어코 바닥에 떨어진 단도 근처까지 기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잡아채려던 순간,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손을 밟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예카틸리나의 흰자위에 새빨간 핏발이 서 있었다.

“미안. 이건 내가 필요해서.”

나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바닥의 단도를 주워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아까 저 칼은 좀 무거웠잖아?”

“…….”

“이건 휘두르기가 참 쉽다. 그치?”

예카틸리나가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 모습을 비웃으며, 내가 이어 말했다.

“오늘 네가, 나를 정말 화나게 했어.”

나는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계에 다다랐는지 밭은 숨을 헐떡이고,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들을 저렇게 괴롭혔잖아.”

낮게 가라앉은 내 목소리 뒤로 새된 음성이 악을 질렀다.

“그, 그게 왜? 나를 먼저 괴롭힌 건 너희잖아!”

“내가? 우리가?”

“그래, 너! 다 너 때문이야. 내 인생은 네가 나타나서 망한 거야.”

“…… 하아.”

“너만 없었어도 나는 여기서 행복했을 거라고. 나를 예뻐해 주는 사람들이랑!”

예카틸리나가 엉엉 울부짖었다.

“너는 정말…… 끝까지 반성이라는 걸 모르는 애구나?”

나는 예카틸리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쓰는 그녀의 목 바로 뒤편의 벽에, 있는 힘껏 칼을 꽂았다. 그 칼이 단숨에 저를 찌를 것으로 예측한 예카틸리나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뭐해?”

그녀는 파들거리는 눈을 흘끗 들어 올렸다.

“나 너 안 죽여.”

“…… 뭐?”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거든.”

“…….”

“내 손에 피를 묻힐 이유가 있을까?”

“…… 너…….”

“겨우 너를 죽이는 일에?”

그 말에 모멸감이 들었는지, 예카틸리나의 주먹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는 또 얼굴이 망가졌고, 나는 앞으로 행복할 일만 남은 공작부인이 될 텐데 말이야.”

“…… 죽여. 차라리 죽여. 그냥 나를 죽이라고!”

“싫어.”

나는 그대로 일어섰다.

“아, 마침 동화 속 왕자님이 깨어나셨네?”

“…… 그건 또 무슨…….”

목걸이의 푸른 보석이 빛을 내뿜으며 춤추듯 일렁거렸다. 그 빛과 함께,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찻잔에서 풍겨오던 역한 냄새와는 달리, 따뜻하고 포근한 향이었다. 황홀함에 취한 내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동시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미안해.”

오 분 후에 오겠다던 이 저택의 주인이, 드디어 내게 돌아왔다.

“내가 너무 늦었지.”

“…… 괜찮은 거…… 맞죠?”

나는 한달음에 카시안에게 달려갔다.

“응. …… 정말 미안.”

카시안이 나를 힘껏 안았다. 펠릭스는 그가 등장하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 저렇게 늦게 와……. 씨이……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그리고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

시간을 잠시 과거로 되돌려, 펠릭스가 집무실에 도착하기 직전.

그러니까 낸시로부터 소식을 듣고 본채로 다급히 향하던 그때, 알버트와 마르쿠스는 저택의 뒤뜰로 향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마르쿠스가 연구 중인 씨앗의 차도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뒤뜰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마르쿠스였다.

“꽃이 왜……. 죄다 시들었을까요?”

그에 질세라 알버트도 코를 킁킁거렸다.

“응? 이건 무슨 냄새지?”

알버트가 코를 콱 틀어막았다.

“마르쿠스. 넌 지금 이 냄새 안 나? 이상한 쓰레기 냄새가 나잖아!”

“냄새요? 갑자기 웬 냄새 타령이람. 그보다 여기 꽃이 다 상했다니까요? 꽃뿐만 아니라, 이 길목에 있는 잡초며 나무며 전부요!”

마르쿠스의 다급한 외침에 알버트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이 걸어왔던 길을 포함해 주방으로 이어지는 뒷문까지. 생명의 파릇함을 빼앗겨 말라버린 식물들이 바싹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왜…….”

바쁘게 허공을 구르던 두 남자의 눈동자가 맞닿았다. 그들은 서둘러 주방의 뒷문을 열었다. 매캐한 연기가 밖으로 나가기만을 기다렸었다는 듯 우렁차게 뿜어져 나왔다. 알버트는 벌써 눈이 따끔거렸다.

“뭐야. 지금 이거 수면초야?”

“네. 마비초랑 같이 태웠나 봅니다. 조심하세요.”

“너는 이게 아무렇지도 않아?”

“저는 워낙에 독초연구를 많이 해서 면역이 됐으니까요.”

한참을 콜록콜록하며 손 부채질하던 알버트의 머릿속에,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연신 히죽거리던 틸다 레트랑의 모습이 꽉 들어찼다.

“…… 제기랄, 그 여자가……! 각하가 위험해. 아가씨도!”

“지, 지금 당장 정화를 시작하겠습니다!”

마르쿠스는 품 안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주방으로 이어지는 통로 이곳저곳을 지팡이로 두드리길 한참. 자욱했던 연기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에는 의식을 잃은 요리사들이 투명한 방어막 안에 갇힌 채로 쓰러져있었다. 방어막은 곧 깨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다행히 각하가 다녀가셨던 모양이야. 그래도 서둘러야겠어.”

“네! 일 분. 일 분이면 됩니다!”

마르쿠스가 정화를 시작하는 사이, 알버트는 요리사들의 방어막 위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투명한 장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요리사를 한 명씩 안아 들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바깥으로 옮겼다.

그러다 문득 멈칫했다.

“…… 마르쿠스.”

“네?”

“각하의 마력이…… 안 느껴져.”

“……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알버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여긴 내가 처리할 테니 집무실로 올라가 봐. 큰일이 생긴 게 분명해.”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알버트의 직감대로 아델트 공작은 3층 복도에 쓰러져있었다. 그 뒤를 이어 펠릭스가 뛰어 올라왔다. 펠릭스는 카시안과 마르쿠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작님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카시안의 상태를 확인하던 마르쿠스가 주인의 혀에서 녹색 잔흔을 발견했다. 몸이 이리 뻣뻣하게 경직된 것으로 보아 마비초를 과하게 섞은 수면제가 분명했다. 제국에서 금지된 약물이건만, 도대체 누가 이런 못된 짓을……!

“뭐야, 설마 죽은 거예요?”

펠릭스가 다급히 물었다.

“아닙니다. 의식을 잃으신 것일 뿐.”

그때, 집무실 안에서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펠릭스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럼…… 누나가 지금 저 안에 혼자……!”

“공작님은 제가 당장 치료하겠습니다! 금방 깨어나실 테니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마르쿠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펠릭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르쿠스는 카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침통하고 속상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떠올릴 새가 없었다. 정화 작업을 서둘러야 했으니.

그는 온 마음을 집중해 생명의 기운을 모았다. 초록빛들이 새싹을 틔우듯 그의 손바닥 안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 커다란 꽃을 피웠다. 그 영검한 초록의 기운이 살랑 불어와 카시안의 온몸을 감쌌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던 주인의 얼굴에 다시금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카시안이 눈을 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고, 공작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시아라는?”

“아직 집무실에…….”

‘젠장.’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디어, 그토록 갈망했던 그녀가 눈앞에 보였다. 홀로 사투를 벌여온 듯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미안해.”

저를 향해 달려오는 시아라에게, 카시안은 그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시아라는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아니지? 좀 봐봐.”

“정말 괜찮아요. 저보다 펠릭스가…….”

너무 늦었다며 구시렁구시렁하던 펠릭스는 이미 기절한 뒤였다. 펠릭스의 등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카시안은 다시 한번 시아라를 살폈다. 이제 와 보니 무릎이며 팔이며, 온몸에 울긋불긋한 생채기가 한가득하였다. 집무실은 난장판이었고, 구석에 처박혀 씩씩대는 예카틸리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카시안의 입이 무겁게 다물렸다. 그가 쓰러져 있을 때 발생했던 사건이 한눈에 펼쳐졌다. 자리를 비운 사이 시아라가 다쳤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무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주변으로 푸른 불꽃이 일렁거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그는 온 힘을 손끝에 실었다. 집안에 가득했던 온갖 빛이 경배하듯 카시안을 향해 몰려갔다. 주변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오직 카시안만이 그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카시안이 검지를 둥글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예카틸리나와 틸다 레트랑을 제외한 저택의 모든 것에 투명한 장막이 씌워졌다. 시아라와 펠릭스에게도. 철옹성과도 같은 방어막이 둥글게 그들을 감싸 안았다. 붕 떠오른 장막 속에서, 시아라는 서둘러 펠릭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정말로 희한하게, 그의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느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카시안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었지만, 제국을 둘러싼 결계 주변으로 식물이 잘 자라났던 이유는 아델트 가문의 숨겨진 힘 때문이었다. 그들은 방어와 동시에, 생명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온전한 힘을 되찾은 카시안이 만들어낸 견고한 장막 안에서, 저택의 모든 이들은 세상 누구보다 안전했다. 그러니까…… 딱 두 사람만 빼고.

소파 뒤에 숨어있던 틸다 레트랑이 무심결에 고개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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