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주방에 들어가 목격한 참담한 광경에 카시안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 수면초?’
카시안은 희뿌연 연기와 특유의 향으로 그 정체를 파악했다. 지난 몇 년간 잠들지 못했을 때, 그 역시 수면초를 사용한 적이 있었으니. 그러나 이것은 보통의 것과 결이 달랐다. 냄새도 훨씬 더 자극적이었고, 그 향이 코끝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직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카시안 본인도 벌써 어지러웠으니. 요리사들을 이대로 저 안에 뒀다가는 모두 중독이나 마비 증상에 빠질 것이 뻔했다.
침착함을 유지하며 정화마법 수식을 외웠다.
자욱했던 연기가 깨끗하게 걷히는가 싶더니 다시 주변을 어지럽혔다. 이미 범위가 너무 커진 탓이었다. 다시 시도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카시안은 손수건으로 제 코와 입을 틀어막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여섯쯤 되는 요리사들의 몸 하나하나에 방어막을 휘둘렀다. 이미 수면초의 향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 일은 특히 고된 것이었다.
게다가 이 보호막은 사람을 상대로 쓴 적이 거의 없었다. 보육원 낭떠러지에서 추락했던 시아라를 구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그는 과거의 고통을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어막이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울부짖던 시아라의 얼굴과 추락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그런 이유로 방어막이 생각처럼 단단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삼십 분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틸 정도였다. 곧 알버트나 렌이 와서 사람들을 구하겠지.
카시안은 이 지옥 같은 공간을 어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본인의 의식이 점차 희미해져 감을 느꼈다. 자꾸만 눈이 감기고 온몸이 마비되듯 무거웠다.
‘안 돼…….’
시아라에게 가야 해. 벌써 약속 시간을 넘겨 버렸는걸.
그 자리에서 텔레포트를 쓰려 해도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듯 어렵게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주방문을 열고 그나마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약간은 괜찮아졌다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카시안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다. 저를 기다리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카시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아리따운 금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시아라…….’ 낮게 중얼거리자 그녀가 미소 지었다. 아주- 흉측하게.
여자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대로, 카시안의 의식이 가라앉았다.
*
예카틸리나는 3층 복도 구석에 있는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아델트 공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때마침 그가 등장했다. 기력이 빠져 다 죽어가는 상태로. 그런 공작을 내려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여기까지 마법을 써서 오는 것도 힘드셨을 텐데. 꽤 노력하셨네요?”
한껏 이기죽거리면서.
아델트 공작은 다리가 다 풀린 와중에도 몸을 일으켜 세우려 애썼다. 자기 몸이 마비되고 있는 순간까지 제 여자를 지키겠다며 저리 노력하는 꼴이란. 그깟 사랑이 뭔데? 그게 다 부질없는 짓인 줄도 모르고. 어차피 공작이 눈 뜨고 나면 이제 시아라 그 애는 세상에 없을 테니.
그 노력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며, 예카틸리나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카시안의 입속에 수면초 한 알을 통째로 집어넣었다. 그나마 움직였던 몸이 점점 뻣뻣하게 굳어감이 보였다.
예카틸리나는 해사한 표정으로 아델트 공작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끝에 스치자 짜릿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편하게 쉬세요, 공작님. 당신이 이대로 눈 뜨지 않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깨어나셔서 보셔야지요. 상실의 고통을.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가 무너졌을 때, 그 좌절감을.”
*
교착 상태.
틸다와 내 상황을 설명하는 완벽한 단어였다.
카시안이 나간 뒤로 어떠한 대화의 진전도 없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무한히도 길게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여유로운 건지, 틸다 레트랑은 꼬아 앉은 다리로 박자를 맞추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본론을 말하라고 아무리 요구해도 차 한 잔 마시고 해도 늦지 않는다며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오 분 후에 돌아오겠다던 카시안은 십 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고, 그럴수록 틸다의 얼굴 위로 묘한 확신과 승리의 빛이 번졌다.
시계의 분침이 자꾸만 달아나는 것에 조바심을 느끼고 있을 찰나,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수줍은 얼굴의 하녀 하나가 들어왔다.
“리엔나?”
“어…… 제 이름을 아세요?”
“응, 당연하지. 오늘은 네가 내게 차를 주러 온 거야?”
“네……. 처, 처음이라 많이 부족하지만!”
“부족하긴, 고마워.”
리엔나는 살짝 붉어진 뺨으로 틸다와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가득 채웠다.
긴장했는지 주전자를 쥔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까지 고개 숙여 인사하는 리엔나를 내보내자 집무실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마시자꾸나.”
틸다의 말에 나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물 한 모금을 입에 적시려던 그 순간.
찻잔에서 풍겨오는 이상한 악취에 그대로 정지했다. 무언가 썩은 듯한,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그런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차를 마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대로 잔을 내려놓았다.
혹시 하녀들이 차를 잘못 내린 것은 아닐까 고민하던 그때, 따로 챙겨왔던 주머니에서 미세한 진동이 왕왕 울렸다. 나는 조용히 그 주머니 속을 확인했다. 일전에 알버트가 선물이라며 건넸던 유리구슬. 그것이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마법이 발동되었던 바람에 아쉽게만 생각했었는데…….
이것 때문에 이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까?
‘아! 이 구슬로 마력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했었던가? 그럼 설마 지금 이 냄새가…….’
문득 알버트가 선물을 건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력의 향은 아주 다양하답니다. 숲의 향처럼 포근하기도, 바다의 향처럼 시원하기도 하죠. 공작 각하의 마력처럼 따뜻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아주 악취를 풍기는 것들이 있어요. 그런 마력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주 질이 안 좋은 마법이거든요.”]
‘이 차에…… 마법이 걸려있는 거야?’
나는 찻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냄새를 제외하면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다.
내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틸다가 물었다.
“왜? 뭐가 이상하니?”
“혹시…… 아무 냄새도 안 나세요?”
“글쎄다. 향이 좋구나. 어서 마시렴.”
정체 모를 악취는 점점 심해져 코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틸다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전히 여유로움이 넘쳤다. 심지어 찻잔에 코를 박고 그 향을 들이마시기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워져서, 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니까……. 이상한 점은 그거였다.
내 차에서만 이런 냄새가 난다면 얼마든지 틸다의 농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 틸다의 잔에서도 나고 있는걸!
자꾸만 내게 차를 마시라 권하는 것을 보면 틸다가 꾸민 일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 차를 마시면, 본인 역시 위험에 빠지리라는 것을.
내가 계속 꾸물거리자 성미 급한 틸다가 자기가 먼저 차를 한 모금 삼키려 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잠시만요! 이거 좀 이상해요!”
반사적으로 그녀가 들고 있는 잔을 탁, 쳐냈다. 바닥을 구르는 찻잔이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났다. 당황한 틸다는 입에 머금고 있던 미량의 찻물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끄…… 끄아아악!”
발작을 일으키며 붉은 피를 토해냈다. 내 옷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경악했다. 저걸 지금…… 하마터면 나도 마실 뻔 한 거야?
틸다는 숨을 헐떡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놀란 내가 그녀의 옆으로 가 상황을 살피던 그때, 문이 열리고 예카틸리나가 등장했다.
“…… 예카틸리나.”
“뭐야. 기대했는데, 한 명만 마신 거야?”
아쉽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바르작거리는 틸다의 옆에 예카틸리나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너, 너……! 네가 지금 나, 나를……!”
틸다는 숨이 곧 멎을 것 같은 와중에도 한 마디 한 마디 쥐어짜 냈다.
“네가 어, 어떻게……!”
“부인께서 저를 치료해주신 건 무척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그런 일로 우리가 한 팀이라는 건 좀 웃기지 않나요?”
“너……, 이 나쁜 년이……!”
빙그레 미소 짓는 예카틸리나를 응시하던 틸다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나는 파국과 멸망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두 여자를 보며 커다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럼 안녕히 가시길.”
예카틸리나는 힘겹게 뜨고 있던 틸다의 눈을 제 손으로 감겨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시선을 옮겼다.
“자, 그럼 너는 어떻게 할까?”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평소와는 다른 기운마저 느껴졌다. 나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예카틸리나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나 역시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이제 내 뒤로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구석으로 몰리자 나도 모르게 팔찌를 꾹 움켜쥐었다.
“소용없어.”
내 행동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듯, 조롱 섞인 나긋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팔찌도, 목걸이도. 전부 너를 지키는 거잖아? 내가 네 몸에 손대면 나는 뻥- 하고 날아갈 거고.”
“…….”
“그러니 어디 그 귀한 몸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있어야지.”
“그래. 네 말대로 너는 나 못 건드려.”
카시안이 곧 올 게 분명했다. 나한테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 그러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아. 너 동화 속 왕자님이라도 기다리는 거야?”
예카틸리나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쩌지?”
“…….”
“그 남자, 안 와.”
“…… 뭐?”
“아니, 못 와.”
그녀가 즐거운 듯 속삭였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지금 네가 가진 무기들. 아무 소용없어.”
예카틸리나의 손가락이, 내 뺨을 훑었다. 나는 온몸이 거미줄에 꽁꽁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마법의 주인이 힘을 잃었거든.”
“!”
뺨 위를 기어 다니던 그 손가락이 머리카락으로 옮겨갔다. 그녀는 내 뒷머리에 손을 걸어 뒤로 확 잡아당겼다.
“네 예쁘장한 얼굴도 망가뜨려 줄게.”
예카틸리나가 새까만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너도 느껴봐. 내가 어떻게 버텼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