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카시안은 영 께름칙한 기분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틸다 레트랑이 무릎 꿇고 사과했음에도 어딘가 수상쩍었다. 아무리 그녀가 나락 직전의 상황이라지만, 여태 알던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이상해.’
문 앞에서 주춤거리던 카시안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집무실 문을 돌려 열려던 그 순간, 복도 끝에 서 있던 병사들의 실없는 수다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아까 그 귀부인이랑 같이 온 하녀 말이야. 엄청 예쁘지 않았어?”
“응. 금발에 눈도 파랗고. 예쁘더라.”
“맞아. 꼭 시아라 아가씨처럼 말이야. 이따 말이라도 걸어볼까?”
“아서라. 네가 퍽이나!”
깔깔거리는 병사들의 대화에 카시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귀부인이랑 같이 온 하녀?’
그는 곧장 병사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지?”
“공작 각하! 죄송합니다. 방금 막 정문에서 보초를 서다가 교대하던 참이라 여기에 계신지 모르고…….”
“됐으니까 다시 말해봐.”
“뭐를 말씀입니까?”
“귀부인이 하녀를 데리고 와?”
“아……! 예. 레트랑 백작 부인이 마차를 타고 들어왔을 때, 부인과 하녀 하나가 함께 있었습니다.”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오늘 저택에 출입이 허가된 외부인은 딱 하나였다.”
“죄, 죄송합니다. 귀부인들이 하녀를 대동하는 일이 흔하니, 그저 당연한 일이라 여겨서 그만…….”
병사들이 고개를 숙이자 카시안이 입술을 짓씹었다.
“그 하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 글쎄요. 대기실이나 응접실에…… 있지 않을까요……?”
갈수록 험악해지는 공작의 표정에, 병사들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카시안은 당장이라도 이 얼빠진 놈들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나는 집무실 앞을 지키고, 하나는 그 여자를 찾아. 당장.”
“예, 예! 명령 받들겠습니다.”
“특히 너. 집무실 문 앞에 바짝 귀대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면 그냥 들어가. 기다리지 말고.”
“예!”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카시안은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답답한 날숨을 내쉬었다.
불안한 직감은 왜 늘 비껴가는 법이 없는 건지.
초조한 눈으로 시아라가 있는 집무실을 응시했다.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일 초도 걸리지 않는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러니 예카틸리나가 일을 벌이기 전에, 아주 빠르게 그 여자를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
잠시간 갈등하던 그가 응접실로 텔레포트 했다.
*
경비병들이 아델트 공작에게 전했던 말처럼, 예카틸리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저택에 입장했다.
정문만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아주 쉬웠다. 그녀는 이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였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저택의 가신들만 다니는 비밀통로를 모두 꿰고 있었기에. 틸다 레트랑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예카틸리나가 가벼운 걸음걸이로 저택 뒤뜰을 거닐었다.
울창한 숲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문. 이곳을 통하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는 동안, 주방에서부터 들려온 요리사들의 목소리가 왕왕 메아리쳤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잔뜩 들떠 있었다.
예카틸리나는 벌써부터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 왜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
그녀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요리사들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예카틸리나는 주머니에서 녹색 알약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어제 ‘그곳’에서 구매했던 것 중 하나로, 수면초를 정제해 만든 약이었다. 수면초는 불면증을 치료하는 목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쉬이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이 약은 달랐다. 미량의 환각제를 섞어 판매했으니. 게다가 다른 곳에서 판매하는 상품보다도 훨씬 그 효과가 강해서, 자칫하면 마비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예카틸리나는 문을 살짝 열었다. 그 틈 사이로 불붙인 약을 밀어 넣었다. 곧바로 문을 닫고, 그 통로에서 기다렸다. 충분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가만, 이게 무슨 냄새지?”
“뭐가 타는 것 같은데?”
“여, 연기가 자욱하잖아! 이게 뭐야! 도대체 뭐가 타…….”
요리사들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말소리는 사라지고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예카틸리나는 히죽거리며 마스크를 쓰고 일어났다.
문을 열자 혼탁한 연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옷으로 제 얼굴과 몸을 최대한 가리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었다. 아는 얼굴도 여럿 보였다. 그러나…….
‘그게 뭐 어때서?’
그냥 잠만 재우는 거잖아?
예카틸리나는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 넘어진 사람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길을 지나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이 상황에 한껏 비웃음을 흘리며 이동식 선반 앞에 도착했다. 그 위에는 집무실에 올릴 차와 간식이 올려 있었다.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독약 몇 방울을 흘려 넣었다. 아주 약간의 마력이 포함된 새카만 그 액체가 찻물에 뒤섞였다. 그러나 곧 흔적도 없이 투명해졌다. 누구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도록.
선반을 밀어 혼비백산인 주방을 빠져나왔다.
무사히 식당도 통과하려는데, 낸시를 마주쳤다. 예카틸리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괜히 성가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 그러니 낸시가 난데없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 그거 응접실로 가는 거니?”
“응.”
“너 어디 아파? 마스크는 뭐야?”
“감기…….”
“뭐? 그랬다가 아가씨가 감기라도 옮으시면 어쩌려고! 이리 줘. 내가 갈게.”
낸시가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예카틸리나는 그 손을 탁, 쳐냈다.
“네가 가려고……?”
“됐어. 내 일이야.”
예카틸리나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낸시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녀 중에 저런 애가 있었나? 처음 보는…… 어어……? 꺄… 꺄아아악!”
저 하녀가 누구인지, 그 의문을 해소할 새가 없었다. 주방 바닥에는 쓰러진 사람들이 가득했고, 정체 모를 메케한 연기가 주방 밖으로도 퍼져 나오고 있었으니.
“이, 이게 무, 무슨…….”
낸시는 뒷걸음질 쳤다. 급한 대로 코와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다시 식당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에서 냅다 소리 질렀다.
“도, 도와주세요. 큰일이에요! 누가…… 누가 좀 도와주세요!!”
낸시의 다급한 목소리에 응답한 것은 아델트 공작이었다. 복도 반대편에 놓인 방문 하녀 대기실에서 예카틸리나를 수색하던 카시안이 빠르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고, 공작님. 요, 요리사들이…….”
“침착하고 똑바로 말해.”
“요, 요리사들이 전부 쓰러져있어요. 이, 이상한 여, 연기가 주방에 가득 차서……”
낸시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주저앉으려 했다. 카시안이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낸시. 잘 들어. 밖에 나가서 알버트나 렌을 찾아. 가서 이 상황을 전해. 서둘러.”
“네, 네.”
떨리는 두 주먹을 애써 움켜쥐고, 낸시가 달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 저택이 오늘따라 어찌나 허허벌판 같던지. 아무리 달려도 같은 곳을 맴도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펼쳐졌던 상황이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서, 자꾸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해 아까 그 하녀를 마주쳤던 일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한참을 연무장으로 내달리던 그녀가 한 남자와 크게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아악……!”
“낸시? 괜찮아요?”
“아…… 페, 펠릭스. 네. 괘, 괜찮아요. 호, 혹시 기사단장님은 어디 계세요? 비서님이나.”
“단장님은 연무장에 계시고……. 비서님은…… 잘 모르겠는데.”
펠릭스가 넘어진 낸시의 손을 당겨 일으켰다.
“혹시 저택에 문제라도 있나요?”
“이, 이상한 연기가…….”
그제야 아까 그 수상했던 하녀가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낸시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감기에 걸린 게 아니라…… 자기가 불을 질러서…….’
…… 그 여자가 어디로 간다고…… 했더라?
상황을 찬찬히 되짚어보던 낸시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시아라 아가씨……!
시시각각 변하는 낸시의 표정에, 펠릭스는 직감했다.
“누나한테 무슨 일이 있구나.”
“…… 어떻게 해요!”
“누나는 어디 있어요?”
“지, 집무실. 3층 집무실이요.”
“내가 가볼 테니 단장님께 가 봐요.”
낸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펠릭스 역시 이를 악물고 달렸다. 시아라, 그녀가 있는 곳으로.
*
예카틸리나를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보다, 그녀는 딱 반 박자 더 빨랐다.
그러나 그 반 박자가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던가. 이제 곧 수면초의 연기가 일층 전체에 가득 퍼질 테니. 스치기만 해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약효 탓에, 저를 쫓던 사람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을 것이 뻔했다.
제 마법만 믿고 오만하게 굴던 공작도 이번만큼은 피해갈 수 없으리라.
[“마법 스크롤은 없으나 마법을 무력화시키는 약초는 있답니다.”]
‘그곳’의 주인이 아주 쓸모 있는 물건을 팔았으니.
예카틸리나는 당당하게 저택을 누볐다. 지금 그녀에게 무서울 게 무엇이 있으랴.
찻주전자가 든 트롤리를 끌고 집무실로 향하던 그녀가 2층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저번에 그녀에게 뺨을 맞았던 하급 하녀였다. 예카틸리나가 그 하녀에게 접근했다.
“너. 이름이 뭐였더라?”
“리엔나입니다…….”
“맞다, 리엔나. 지금 이 차를 집무실에 계신 아가씨께 드리고 오렴.”
리엔나는 하급 하녀였기에 공작이나 시아라에게 무언가를 직접 대접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의아하게 물었다.
“네? …… 제가요?”
“응. 원래 내가 할 일이지만. 보다시피 감기에 걸려서.”
“아…….”
“별거 없어. 그냥 아가씨와 손님께 이 잔 가득히 차를 따라드리고 나오면 된단다. 할 수 있지?”
리엔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착하네.”
눈앞의 그녀가 제 따귀를 휘갈겼던 여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제게 주어진 과분한 업무에 설렌 리엔나가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참, 혹시 위층에 경비병들이 보이거든 공작님이 일 층에서 급히 찾으신다고 전해드리렴.”
“네?”
“공작님이 벌써 수상한 여자를 발견했다더라. 그거면 돼.”
“네!”
리엔나가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곧이어 집무실 앞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의 무거운 부츠 소리가 들려왔다.
여유롭게 뒷짐을 진 채, 예카틸리나도 계단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