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맞고 튀었는데 공작님이 집착한다-111화 (111/135)

111.

다시 하녀로 돌아가 내 발이나 닦으라는 말이 그렇게 큰 충격이었던 걸까. 예카틸리나는 바짝 약이 올라 바들바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즐겁게 웃었다.

“어때요, 아나스타샤? 아니, 나스티아였던가?”

“…… 뭐? 그 이름을 당신이 어떻게…….”

“나는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봐?”

예카틸리나의 얼굴에 만연했던 웃음기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가늘게 뜬 눈에 붉은 힘줄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아, 시작됐다.

예카틸리나의 전매특허. 눈물을 쥐어짜 내며 타인을 곤욕스럽게 만드는 연기가.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에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 투명한 물방울들이 여린 뺨을 타고 도르륵 흘러내리려던 그 순간.

“흐으으윽! 나스티아……! 내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

내가 더 빨리 울어 재꼈다.

최대한 가련하고 처량해 보이도록 어깨를 한껏 웅크리며.

“정말 너무해요. 나는 그저…… 그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온몸을 뒤흔들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랑하는 내 친구 나스티아. 딱 그 한 마디 해보려던 것뿐이었는데……. 왜 그렇게 나를 미워하는 거예요? 우린 친구잖아요! 분명 친구라고 했잖아요!”

예카틸리나의 눈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녀는 입만 달싹거렸다.

“…… 저…… 잠…….”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요! 또 저에게 상처를 주려는 거예요? 흐으윽. 제발……. 제발 내 마음도 돌아봐 주면 안 돼요? 이제 나스티아에게 그런 악담을 듣는 것도 너무 지친다고요!”

“그…… 그러니까, 내 말…….”

겨우 한 마디 해보려던 예카틸리나의 입을, 이번에는 펠릭스가 단단히 붙들어 맸다.

“누나, 울지 마! …… 당신이 뭔데 우리 누나를 울려? 이 마음 여린 사람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넌 쓰레기야! 재활용도 못 하는 쓰레기!”

“…… 뭐? 쓰…… 뭐…… 요……?”

“저번에는 우리 누나 뺨을 때린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악담까지 해?”

그 말에 나는 맞은 적도 없는 뺨을 부여잡고 더욱 신명 나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내 기막히고 코 막힌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탄식을 내뱉으며 예카틸리나를 향해 삿대질했다. 예카틸리나는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였다. 귀도 모자라 목덜미까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유리잔에는 이제 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곧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일어났다. 두어 번 휘청거리는 것도 잊지 않고. 그때마다 주변에서 “어어……! 안 돼!” 하는 외침이 들렸다. 펠릭스는 내가 어지러움을 호소할 때마다 낙심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꾹 붙들었다.

정작 이 순간 진심으로 울고 싶을 예카틸리나는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온몸을 떨었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 쥔 그녀의 양손이 보였다.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분노한 그녀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기다란 내 머리카락이 예카틸리나의 뺨을 스치자 그녀가 소스라치게 발작했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거 진짜 재밌다.”

“…… 시, 시아라. 이게 대체……!”

“왜? 네가 맨날 하던 거잖아.”

“……!”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여기서 할 건 아니잖아?”

“…… 무, 무슨…….”

“내일 저녁에 아델트 저택으로 와.”

예카틸리나는 입술만 짓씹었다.

“기다릴게.”

싸구려 염색으로 얼룩덜룩한 예카틸리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쥔 뒤, 허리를 바로 세웠다. 빗자루 같은 머릿결이 손가락에서 스르륵 빠져나갔다.

나는 처량한 눈빛으로 뒤돌아 카페에 있는 관중들을 응시했다. 목이 멘 목소리로 ‘…… 감사합니다.’ 인사를 전하며 눈물을 닦아냈다. 펠릭스는 제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줌으로써 마지막까지 할 일을 다 했다. 관중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카페를 벗어났다.

등 뒤로 예카틸리나를 향해 욕을 퍼붓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쾅, 문이 닫히고 나서도 한참이나.

*

예카틸리나는 카페에서 나와 곧바로 뒷골목으로 향했다.

자신을 향했던 날 선 시선들이 아직도 온몸에 엉겨 붙어있는 듯했다. 거머리처럼.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고, 머리는 분노로 타올랐다. 아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뒷골목에 도착해 허름한 마차에 올라탔다. 그 안에서 검붉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 틸다 레트랑이 예카틸리나를 반겼다.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요?”

예카틸리나의 짜증스러운 대꾸에 틸다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쯧. 자신만만하게 나갈 때는 언제고. 뭘 하고 온 거야, 도대체?”

“당장 여기서 죽여 버릴 것도 아니었는데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거예요?”

“뭐야?”

“제가 멀쩡히 돌아왔다는 거 알았어요. 분명 겁먹었을 거예요.”

예카틸리나는 헛소리를 잘도 했다. 카페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 턱이 없는 틸다가 예카틸리나의 무례한 태도에 정색했다.

“이년이……. 얼굴만 고쳐주면 한 번에 끝낼 수 있을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 네 멋대로 안 되니 답답한가 보지?”

“누가 못한대요?”

예카틸리나가 눈을 홉떴다.

“내일 아델트 저택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 애가 저택으로 너를 초대했어?”

“네. 거기서 끝장을 봐야 해요.”

“제가 저번에 부탁드렸던 것들. 오늘 당장 사러 가는 게 좋겠어요.”

“지금 당장?”

“네. 내일이 마지막 기회거든요.”

“마지막이라…….”

틸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델트를 벗어나 한참이나 내달린 마차가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술집이었다. 겉보기에 아주 평범해 보였다. 많지는 않았으나 손님도 적당히 있었고, 분위기도 시끌벅적 화기애애했다. 특별함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에 정말 네가 말한 물건들이 있다는 거냐?”

“네. 따라오세요.”

예카틸리나는 능숙하게 건물 뒤로 향했다. 뒤편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밖에서 열 수 있는 문고리도 없었다. 한참을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늘도 보석을 몇 개나 팔아치운 건지. 밖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틸다의 얼굴이 티 나게 일그러져갔다.

덜컥. 성미 급한 귀부인의 인내심이 동할 때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문 뒤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덩치가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안 그래도 조그마한 문이 더욱더 작아 보였다. 예카틸리나는 그 남자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남자가 문을 완전히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뒷문으로 들어간 내부는 정문에서 바라보았던 모습과 완연히 달랐다.

어두컴컴했고, 그나마도 자욱한 담배 연기에 가려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예카틸리나는 이곳이 어디라고 설명하지 않았지만, 비밀 무도회에 뻔질나게 놀러 다녔던 틸다는 이 상점의 정체를 쉽게 파악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다는 제국의 유일한 비밀상점이었다. 상점은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곳’이라고 불렸다.

전 세계 술과 마약은 기본이오, 허가받지 않은 마법 스크롤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었다. 물건들이 턱없이 비싼 것이 흠이기는 했으나, 어차피 이 상점을 찾는 주 고객들은 대귀족들이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예카틸리나는 그런 곳을 무척 익숙하다는 듯 걷고 있었다. 틸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예카틸리나를 응시했다.

“네가 여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

“예카틸리나.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제가 예전에 모시던 주인이 자주 애용하던 곳이었어요.”

“그 주인이 누구기에 이곳을 애용해? 그것도 일개 하녀까지 대동해서?”

“…… 엘리나 트리탄. 그 여자가 제 주인이었죠.”

예카틸리나가 낮게 그르렁거리며 양손을 말아 쥐었다.

“그때…… 시아라 그년을 처리했더라면……. 제 얼굴이 녹아내려 고통 받을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때라니?”

“시아라 그 애가 갑자기 나타나 제 주인의 약혼자를 뺏어갔던 때. 그때 저는 엘리나 트리탄과 함께 이곳에 왔어요. 여기서 독약을 사서 제게 건넸죠. 우리가 하려던 일이 실패하면, 이 독을 먹고 죽으라면서.”

“…….”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요? 나는 살고 싶었는데……. 결국, 그 여자가 저를 배신했어요. 제 얼굴에 독을 뿌렸거든요.”

예카틸리나는 과거를 회상하며 괴로워했다. 이제는 멀쩡한 제 얼굴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면서. 작게 흐느끼던 그녀가 한순간 돌변했다.

“엘리나 그 여자는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틸다는 엘리나 트리탄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집에서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했던가. 분명 약에 너무 취해……. 소문의 파편들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예카틸리나의 목소리가 기나긴 계단에 울려 퍼졌다. 아주 소름 끼치게, 즐거운.

“제가 칼로 찔렀어요.”

예카틸리나는 빙그레 웃었다.

“여기.”

틸다의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여기를 제가 콱, 찔렀거든요.”

목에 닿은 예카틸리나의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게다가 그런 끔찍한 이야기를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말하는 탓에, 틸다의 등골에 오싹한 전율이 흘렀다.

“…… 저리 치워!”

“왜요? 부인도 제가 무서우세요?”

“닥쳐라! 천박한 게, 감히 나를 겁주려는 것이냐?”

“제가요? 이 천박한 게. 어떻게 감히.”

자신을 보며 눈꼬리가 휘게 웃는 모습이 어쩐지 섬뜩해서, 틸다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지하 계단의 마지막에 드디어 검은 철문이 보였다. 문을 열자 가면을 쓴 남자가 두 여자를 반겼다.

“어서 오시죠, 레이디. 어떤 물건이 필요하신가요?”

예카틸리나는 망설임이 없었다.

“독약이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혹시…… 공격 마법 스크롤도 있나요?”

“아쉽게도 마법 스크롤은 당장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주문하시면 이틀 뒤에 도착하겠군요.”

“…… 당장 필요해요.”

“흐음……. 그럼 이건 어떠신지요?”

상점 주인이 무언가를 건네자, 예카틸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을 받아든 그녀의 입꼬리가 꿈틀꿈틀 하늘로 치솟았다.

내일이면 기필코, 시아라 그 여자를 제 손으로 망쳐버리고 마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