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안면이 따끔거리는 불쾌한 고통에 레트랑 백작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칠흑 같은 어둠이었거니와. 똑, 똑,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박쥐라도 나타날 것처럼 으스스한 분위기에 백작이 몸서리쳤다.
어찌 된 일인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느낌에 백작이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옹송그렸다. 그제야 아델트 공작이 마법으로 자신의 온몸을 옥죄였던 일이 떠올랐다. 시아라 그 계집애가 지하 감옥에서 보자는 둥 헛소리를 나불거렸던 것까지.
그러나 그게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단단한 철문이었으니. 번쩍 정신이 든 백작이 철문을 잡고 세차게 흔들었다. 쾅쾅, 쇳소리가 지하 감옥 가득 울려 퍼졌다.
“문 열어! 당장 문 열라고! 거기 아무도 없어? 이거 당장 열어!”
당연하게도, 감옥은 고요하기만 했다. 레트랑 백작은 그대로 벽에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떵떵거리며 살던 제 신세가 하루아침에 수감자 신세로 전락해버리다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다. 시아라와 아델트 공작이 크게 오해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에벨 가문을 몰락시키고 백작의 죽음에 일조했던 것이 죄라고 치더라도.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 아니던가. 자신조차 잊고 살았던 과거를 캐고 또 캐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말이다. 심지어 직접 죽인 것도 아닌데! 그런 사소한 일에도 죄를 묻는다면, 이 세상에 죄짓지 않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깨끗한 사람은 없을 게 분명했다.
‘억울하다고 싹싹 빌면서 읍소해야 하나?’
참, 그 계집애가 원하는 것은 진심 어린 사과, 딱 하나라 했으니까. 이제라도 눈 질끈 감고 용서를 구해볼까? 어차피 하루아침에 저 세상 갈지도 모르는 몸. 죄를 고백하는 서류에 억지로 사인까지 했는데 더 무너질 자존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레트랑 백작은 시아라를 만나면 꼭 무릎을 꿇겠노라 마음먹었다.
‘가만……. 그 애가 말했던 건 또 뭐지? 내 아내가 제 어미를 죽였다니?’
그것은 레트랑 백작도 정말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러나 독사같이 표독한 제 아내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쯤은 얼마든지 저지를 것만 같았다. 백작은 틸다 레트랑이 정말로 끔찍해졌다. 물론 이전에도 그랬지만, 더욱더.
‘진작 이혼이나 해야 했어!’
아무튼, 마음에 드는 점이 하나도 없다니까! 그녀가 정말 안네마리 에벨을 죽였다면……. 이거 혹시 그 계집애 앞에 무릎 꿇고 빌어 보아야 아무 소용없는 거 아니야?
울컥 짜증이 솟구쳤다. 그 여편네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자기가 알게 뭐라고! 악독한 여자 같으니라고. 적어도 가문에 피해를 주는 일은 만들지 말았어야 할 거 아니야!
한참이나 아내 욕을 중얼거리며 씩씩거리고 있을 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레트랑 백작은 자연히 공손해졌다. 제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자들과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약삭빠르고, 야비했으므로.
내친김에 아예 무릎까지 꿇고 앉았다. 스스로 뉘우치고 있음을 호소하며, 코앞에 멈춘 발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 아, 아델트 공.”
“…….”
공작은 과묵했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백작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만큼 무자비하기도 했다.
“내가 다 잘못했네. 시아라 양에게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어.”
“…….”
“부디 허락해 주겠나?”
처연한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대꾸도 들려오지 않자 백작이 한쪽 눈을 힐끗 들어 올렸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제 아비뻘 되는 어른이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데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레트랑 백작을 한참이나 가만히 응시하던 아델트 공작이 어제 서명했던 그 서류를 내밀었다.
“나, 나를 용서하는 건가?”
“아니.”
“그럼 이 서류는 왜…….”
“뒷장에 아직 사인해야 할 게 남아서.”
“…… 뭐?”
“무슨 죄가 그리도 많은지 종이 한 장에 다 담을 수가 없더군. 쯧.”
사인하는 일은 저번보다도 쉬웠다. 어차피 아델트 공작의 마법에 강제로 손가락이 움직였으니. 백작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아델트 공! 이런 식으로 내게 모욕을 줄 거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나를 죽여주시오!”
공작이 하찮다는 듯 비웃었다.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해서.”
“…… 그러면 나를 어쩔 셈이지!”
“제국법의 심판에 맡길 테니 얌전히 기다리도록.”
‘…… 결국에는 단두대에 올려서 내 목을 내리치겠다는 말이잖아!’
백작의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정말이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 분명했다.
*
머리 위로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이 점점 멀어져갔다. 푸릇했던 나뭇잎은 붉게 변모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낙엽은 바닥에서 다 바스러지고, 선선했던 바람에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곧 겨울이었다. 겨울을 맞이하기까지 흘려보냈던 지난 석 달은 무척이나 뜻 깊었다. 내 인생에 둘도 없을 시간이었으므로.
펠릭스는 검술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는 쌍둥이를 데리고 또 한 번 피크닉을 떠났다. 훌쩍 자란 레아와 레오는 여전히 천진하고 해맑았다. 이모의 차별에 책 읽기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었던 레아는 기특하게도 외국 서적을 읽을 줄 알았고, 레오는 펠릭스를 상대로 꽤 진지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래 봐야 몽땅한 장난감 목검이었지만. 어린 기사님은 한 뼘 더 성장해서, 더욱 늠름하게 레아를 지켰다.
그 사이 유모가 퇴원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회복해서!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그녀의 병은 이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희귀했었으니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카시안과 함께 유모의 집을 찾았다. 유모는 그때마다 더욱 기력이 넘쳐흘렀다. 제발 가만히 앉아 쉬라고 수도 없이 말해도, 공작님 앞에서 어찌 그러겠냐며 쉼 없이 과일을 깎고, 날마다 고기요리를 대접했다.
[“자꾸 이러면 나 이제 안 올 거야!”]
으름장을 놓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서랍장에서 오래된 스케치북 한 권을 꺼내왔다.
[“병원에서 공작님을 처음 뵈었을 때, 이상하게 낯이 익더라고요.”]
유모가 천천히 스케치북을 넘겼다.
처음에 그림 속 소녀는 혼자서 울고 있었다. 그러나 뒤로 넘길수록 활짝 웃는 얼굴이었다. 한 손에 검은 머리 소년의 손을 꾹 잡은 채로.
[“저택에 오신 지 반년쯤 지난 무렵부터, 그림을 그릴 때 마다 꼭 그 소년을 함께 그리시더라고요?”]
[“…… 이게 진짜 내가 그린 거라고?”]
[“네. 이게 누구냐 물으면 아무 소리 없이 배시시 웃기만 하시길래. 우리 꼬맹이 아가씨가 벌써 사랑에 빠지신 건가 했지요.”]
보육원을 탈출한 이후로 소년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림 속 소녀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제 전부였던 그 소년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냐고.
그림 속 소녀가 소년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지금 네 옆에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잖아. 뭐 하고 있어? 얼른 그 사람을 안아줘야지.
소년은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그 속삭임에 답이라도 하듯.
가을 하늘이 아주 높았던 어느 날, 벽난로 앞에 앉아 유모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유모는 어릴 적처럼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등허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면서. 나긋한 유모의 목소리가 가랑비처럼 귓가를 적셨다. 점점 몽롱해져 갈 즈음, 유모가 내게 물었다.
[“제가 감히 아가씨의 엄마가 되어드려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세차게.
그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 그 단어를 나지막이 불러보면서.
펠릭스를 향했던 소피아의 열렬한 짝사랑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인 듯싶었으니. 물론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였다. 소피아는 여전히 펠릭스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언제 그런 사이가 된 거냐 물으면, 소피아는 답지 않게 새빨개진 얼굴로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간혹 그가 아카데미에서 상처를 입고 돌아오는 날이면, 눈이 홱 뒤집혔다. 소피아는 씩씩거리며 당장 아카데미에 찾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그 머저리의 두 다리를 분질러버리겠다며 난리를 쳤다. ‘진짜 조심할게. 응?’ 펠릭스의 입에서 그 소리가 오십 번쯤 나오고 나서야 그녀의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렇듯 나의 평온한 일상은 카시안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카틸리나의 출입 이후로 저택은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경비병 또한 그 수를 늘려 배치했다.
나는 밖에 나갈 때 항상 카시안과 함께였고, 행여 그가 바쁜 날이면 알버트나 렌이 내 옆을 든든하게 지켰다. 사실 위에 언급했던 사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저택에서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고, 성큼 다가온 학생들 맞이에 나 역시 바쁜 한때를 보내고 있었으므로. 머리를 싸매고 매일 도서관에 틀어박혀 밀린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이처럼 평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예카틸리나와 틸다 레트랑. 감쪽같이 사라진 두 여자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두 여자는 마치 한패라도 된 것처럼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기사 하나가 라튼을 찾아가 제 엄마의 행방을 추궁했으나 그는 정말로 알지 못했다. 자기도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고 울부짖었다고 했다. 한순간 엄마와 아빠 모두를 잃어버린 라튼도 어찌 제정신이겠냐 만은.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부모를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소피아의 이름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나는 낸시가 들고 들어온 편지 봉투를 뜯으며 방방 뛰었다.
“편지라니! 너무 신나! 그것도 소피아한테!”
낸시가 나를 따라 반갑게 웃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당연하지. 얼마나 기다린 건데. 소피아, 너도 그렇지?”
나는 내 옆에 앉은 소피아에게 물었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 소피아는 여기에 있는데. 이 편지를 보낸 소피아는 도대체 누구람?”
“나도 진짜 궁금하다! 얼른 읽어보자.”
사칭범이 보낸 편지를 쫙 펼쳤다. 해괴망측한 필체가 내게 ‘안녕-. 잘 지냈니?’ 인사하고 있었다.
‘예카틸리나…….’
네가 나를 아주 띄엄띄엄 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