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편지 봉투를 찢으려던 레트랑 백작이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페토의 글씨체가 이렇게나 유려했던가?’
레트랑 백작은 자신의 주소가 쓰인 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완벽에 가까운 필체는 아무리 살펴도 제페토가 썼다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 인간은 돈만 밝힐 줄 알았지 제대로 된 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으니. 하지만 제페토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비밀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 그래. 괜한 걱정은 하지 말자. 누군가에게 시켰겠지. 정체를 숨기려고! 밑바닥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봉투를 찢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봉투는 텅 비어있었다. 뒤집어 탈탈 털어보았으나 정체 모를 하얀 가루가 나풀거리며 떨어질 뿐. 어떠한 편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졸지에 흰 먼지를 뒤집어쓰게 된 백작이 몸을 탈탈 털어내며 성을 냈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나를 놀리는 거야?’
백작은 종이를 박박 찢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치미는 분노를 삭이며 다시 침대에 누우려 했다. 그때였다.
키득.
이상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떠돌기 시작한 것은.
“……?”
레트랑 백작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방에 혼자 있었으니까.
‘신경이 예민해져 별 헛소리를 다 듣는군.’
재빠르게 누워 이불을 끌어 올리려는데,
키득.
또 한 번 소리가 났다. 조롱에 가까운 비웃음이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송연함에 백작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냐!”
불러본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것도 사방에서 들려왔다. 공포에 사로잡힌 레트랑 백작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달달 떨었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
백작은 기함했다.
눈을 감았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귀를 막았으니 아무 말도 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듯 이상한 영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레트랑 백작이 그리도 애타게 찾던 제페토였다.
환상일까? 아니면 실제일까?
혼란한 와중, 영상 속의 제페토가 돈 가방을 끌어안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가 탄 마차 뒤로 두 사람이 계약했던 보육원이 보였다.
‘저 새끼가 설마 자기 혼자 돈을 돌려받은 거야?’
백작은 이불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영상은 계속해서 제페토를 비추었다. 한참을 내달리던 마차는 이상한 숲 한가운데에 정지했다. 제페토는 그 와중에도 돈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탄 마차가 내리막길에서 구르기 시작하더니, 곧 커다란 화염에 휩싸였다. 살려 달라 울부짖는 그의 아우성이 레트랑 백작의 귓가에 선연했다.
‘…… 제, 제페토가……. 죽은 거야? 누군가 저자를 죽인 거야?’
백작은 활활 타들어 가는 마차를 보며 질겁했다. 꾹 감았던 눈을 떠도 소용없었다. 불붙은 마차와 비명이 잔상처럼 남아 백작을 괴롭혔다. 아랫도리가 축축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너무 놀라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사, 상상이겠지? 상상일 거야!’
저게 진짜일 리 없잖아!
하나 모든 장면이 너무 생생해서, 머리는 실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백작은 퉁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누, 누가 이딴 걸 보낸 거지? 범인이 누구냔 말이야!’
트리탄? 그가 왜? 나를 놀려 먹던 것도 모자라 이렇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게다가 그는 이런 마법을 쓸 줄 아는 마법사도 아닌걸! 가만, 마법사라면 아델트 공작일까? 하지만 공작이 이 일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설마……. 에벨 가문의 여식이라던 그 계집애가……?
백작의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셋 중 하나가 분명한데, 아무런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저에게 왜 이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와 이 편지의 주인을 찾은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제페토의 죽음을 보인 것 외에 다른 언급은 전혀 없었지만, 발신인이 말하고 있었다. 다음은 너라고. 곧,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레트랑 백작은 곧장 드레스 룸으로 달려갔다. 커다란 짐가방 하나를 꺼내어 옷과 보석, 현금을 닥치는 대로 쑤셔 넣었다. 그 황망한 광경을 지켜보던 가신들이 조용히 수군거렸다. 집사는 참담함을 감출 겨를이 없었다. 주인 부부 모두가 미쳐가고 있었으니.
“백작님. 지금 대체 어디를 가시려는…….”
“당장 마차를 대기 시키거라.”
“…… 이미 해가 지고 있습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이게 왜 아까부터 말끝마다 토를 달아!”
백작이 집사의 뺨을 내려쳤다. 집사는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비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 죄송합니다. 목적지는 어디로 할까요?”
“알게 뭐야! 어디든 좋으니 빨리 말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가방을 품에 안고 쿵쿵거리는 발걸음으로 저택을 빠져나가려는데, 틸다 레트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정말……!”
“비켜.”
“이제는 하다 하다 집을 나가는 거예요?”
“비키라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내가 이 가문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어떻게 나를 두고 혼자 떠나시나요!”
“그게 지금 나를 도망치게 만드는 거란 말이오!”
백작은 아내를 홱 밀쳤다. 그 탓에 바닥으로 고꾸라진 틸다의 눈에 분노로 점쳐진 눈물이 차올랐다. 남편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라도 말해주면 좋으련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비참했다. 남편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틸다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 부인이 할 법한 행동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생이 텅 빈 것처럼 외로운데. 이 넓은 저택에 거하는 많은 이들 중에, 틸다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남편도, 아들도, 아리안도. 모두가 그녀를 떠났다. 망설임도, 미련도 하나 없이 떠났다. 언제라도 그 순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틸다는 멀어지는 남편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백작은 기어코 마차에 올라탔다. 울부짖는 아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
마차가 점차 저택에서 멀어졌다. 이제는 목적지를 정해야만 했다.
‘어디로 가야 안전하지?’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판단이 들어섰다.
“알몬트 항구로 가지.”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어두운 숲길에 진입했다. 인구가 밀집한 지역을 벗어나자 레트랑 백작은 그제야 안도했다. 이런 곳이면 누구도 찾아내지 못할 테지. 게다가 이렇게 달빛도 어스레한 밤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숲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마차가 정지했다. 레트랑 백작이 마부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게……. 저 앞에 마차 사고가 있던 모양입니다.”
“뭐야?”
“이 좁은 길을 꽉 막고 있어서, 당장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백작은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 다른 길로 돌아가! 서둘러서.”
“예. 알겠습니다.”
얼른 도망치기도 바빠 죽겠는데 사고까지 나다니……!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마차는 한참이 지나도록 출발할 기미가 없었다. 다시 마부를 호출해 성을 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마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등장한 인영에 백작이 놀라자빠질 뻔했다. 그 정체가 웬 가냘픈 금발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순식간에 표정을 구겼다.
“뭐야, 넌?”
“저 좀…….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파란 눈에 금발 머리 여자가 겁먹은 눈으로 물었다.
이 여자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저를 왜 태워줘?
백작은 얼토당토않은 여자의 부탁에 짜증스레 일갈했다.
“어디서 거지같은 게 튀어나와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나는 갈 길이 멀어 서둘러 가야 한다. 당장 마차에서 떨어져!”
“아, 아저씨. 제발요. 제가 타고 온 마차가 갑자기 고장 나버렸어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 이 캄캄한 숲속에서 저 혼자 어떻게 있으라고…….”
“그게 내 알 바야? 비켜! 무능한 네 마부를 탓하라고! 돈이 없으면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던가. 왜 이 시간에 밖에 나와서 사람 앞길을 가로막아?”
“…… 그럼 혹시 돈을 드리면 태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가 그깟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이리 나와!”
척 보기에도 그다지 돈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백작은 더욱 성을 냈다. 이 모든 것이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여자는 끈질겼다.
“물론 제가 아저씨보다 돈은 없겠지만, 저를 숲 바깥까지 태워주신다면 보답은 할 수 있어요.”
여자는 침울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천만 드랑짜리 수표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왔다. 레트랑 백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이걸로는 부족할까요?”
백작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여자가 수표 한 장을 더 꺼냈다.
“이천 드랑으로는 부족한가요? 더 있는데…….”
레트랑 백작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계집애지? 무슨 돈이 그렇게…….’
백작이 여자를 아래위로 살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였다.
“생각해보니 저 앞까지 태워다 주는 거야 가능하겠군. 그런데 그 돈이 위조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거지?”
“아……. 이게 진짜라는 것을 지금 여기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제가 운이 좀 좋은 사람이라서요. 이 돈도 다 어쩌다 보니 가지게 된 거라. 원하시면 다 드릴게요.”
“크흠……!”
“싫으시면 마세요. 더 있긴 하지만……. 못 믿으신다니.”
저건 혹시 마법 주머니가 아닐까? 끊임없이 나오는 수표에 백작은 없던 흥미까지 생겨버렸다.
“타거라.”
“정말요? 감사해요!”
여자는 배알도 없는지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이 숲을 빠져나가면 바로 제 목적지가 있거든요. 거기서 세워주세요. 부탁드려요.”
“그 돈을 다 준다면 생각해보지.”
“네. 숲을 나서면 바로 드릴게요.”
백작은 맞은편에 앉은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만 보니 예쁘장한 게 제법 쓸 만해 보였다. 달빛에 반짝이는 눈은 보석처럼 새파랬고, 머리카락은 노란 달빛보다도 밝았다. 황금을 쏟아 부은 것처럼, 여자는 아름다웠다. 아까는 거지라고 생각해서 몰랐는데. 옷도 꽤 비싼 명품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순간 이 여자를 원하는 목적지에 내려주는 것이 제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도, 나도 즐거울 수 있을 테니!
백작이 넋을 놓고 여자를 관찰하던 그때, 마차는 캄캄한 숲을 빠져나왔다. 그의 시야가 조금 더 밝아졌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여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 여, 여기는……!”
레트랑 백작이 계약했던 보육원이 보였다.
“네가 왜 여기를…….”
여자의 태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앉아 백작에게 명령했다.
“내리세요.”